"네."
급박한 상황 탓에 날이 선 재민의 말투에, 남자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눈에 띄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자세를 보며 재민은 깊은 심호흡과 함께 표정을 가다듬었다. 여긴 내 직장이다. 직업 정신, 서비스 정신. 정신없는 와중에도 직장이란 한 마디에 입가에는 기계적인 미소가 생겨났다.
"계속 여기에 있을 건 아니죠?"
재민이 내민 손을 덥석 잡은 남자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재민은 손에 힘을 주어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꽤나 키가 커서 듬직했다. 하지만 얼굴엔 분내가 가득해 의지하기보단 챙겨야 할 대상에 더 가까웠다. 재민은 지체하지 않고 뒷문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온갖 소란을 떨며 흩어지면서 '그것'들은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몸을 잔뜩 낮춘 채 버스에서 내린 둘은 아까의 혼란으로 뒤엉킨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움직였다. 굳이 훤히 보이는 도로에서 나 여기 있으니 잡아먹으쇼 광고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하에 나온 행동이었다. 차량에 몸을 바싹 붙이고 주변에 '그것'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 다음 차량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했다. 중간중간 '그것'들이 아마도 사람이었을 고깃덩어리 또는 곧 그렇게 될 사람을 뜯고 있는 등 섬뜩한 장면을 많이도 목격했지만 다행히 그 장면의 주인공은 되지 않았다.
"아, 잠깐 쉬었다 갈까요."
그렇게 한참을 아스팔트 위에서 쥐새끼 신세였던 둘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재민의 속삭임이었다. 차 위로 눈만 빼꼼 내밀어 인도에 있는 저 정류장이 자신이 내리려고 했던 정류장임을 확인한 재민은 이마를 타고 흐르던 땀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저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제집이거든요. 일단 들어가서 상황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
남자의 승낙을 얻어낸 재민은 골목 입구 한복판에 있는 고깃덩어리 옆에서 내장을 우물거리는 '그것'을 노려봤다. 제집으로 향하려면 꼭 저 골목으로 들어가야만 하는데 그렇다고 저길 정면돌파를 하기엔 위험이 너무 컸다. 게다가 저기에 '그것'이 있다는 건 골목 안쪽에도 '그것'들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에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는 재민의 옆에서 잠자코 있던 남자는 재민과 잡지 않은 남은 한 손으로 후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 손에 잡힌 물건을 있는 힘껏 본인들과 한참은 떨어진 마티즈를 향해 던졌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명중했음을 알렸고 연이어 차량 경보음이 울렸다. 그에 골목 입구에 있던 '그것'을 포함한 네댓 마리의 '그것'들이 도로로 튀어나와 소음의 발원지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동시에 남자는 재민의 손을 잡고 골목으로 뛰었다.
남자의 한쪽 어깨에서 달랑이는 백팩에 정신을 차린 재민은 그대로 남자를 끌고 제가 사는 원룸 건물 입구로 향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입구의 자동문은 누군가가 떨어뜨린 가방으로 인해 계속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혹시 몰라 가방을 조심스럽게 뛰어넘어 들어온 로비는 피와 살덩이들로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그 와중에도 재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언가에 쓸린 핏자국이었다. 길게 이어진 그 자국은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쩌면, 집으로 향하는 길에 저 흔적의 주인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거니와 딱히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재민은 계단을 올랐다. 2층에 이르기까지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쥐죽은 듯 고요한 건물에 재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 시간엔 거주민들 대부분이 등교하거나 출근해서 건물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 피해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리는 계단에 저 핏자국의 주인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 생겼다.
하지만 금세 재민의 희망적인 가정은 무참하게 깨졌다. 계단 위에서 목을 긁는듯한 신음이 울려 퍼졌다. 버스 안에서 들었던 육성보다는 가냘팠지만 소리가 주는 공포감은 똑같았다. 재민은 맞잡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상대방 또한 다를 바 없었는지 같은 힘으로 제 손을 꼭 잡았다. 재민은 복도에 누가 버리겠다고 내놓은 스탠드를 들었다. 여차하면 무기로 쓸 생각이었다. 남자 또한 어깨에 걸려있던 백팩의 끈을 꼭 잡았다. 눈을 마주친 채 서로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둘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3층으로 가기까지 계단 3개를 남기고 난간에 몸이 끼어있는 '그것'을 마주했다. 다리는 어디에 갔는지 상반신만 덜렁이는 '그것'은 재민과 남자를 보자마자 그 끔찍한 육성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그에 재민은 손에 들린 스탠드로 '그것'의 머리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 내리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그것'의 몸부림은 잦아들었고 이내 그 계단에 남은 것은 머리가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이 뭉개진 반쪽짜리 시체뿐이었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스탠드를 저 멀리 던져버린 재민은 눈도 못 뜨고 있는 남자를 끌고 3층 맨 끝에 위치한 제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복도는 변한 것 하나 없이 온전했다. 아마 3층까지는 아직 '그것'들이 오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다. 도어락 덮개를 열자 남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는 남자를 보며 작은 웃음이 터진 재민은 바삐 손가락을 움직였다.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문은 열렸고 원룸에 들어가 문이 닫혔다는 알림음을 들은 후에야 재민과 남자는 드디어 몸을 짓누르던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직 저희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저는 나재민이라고 해요. 나이는 28살. 서월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요."
"서월대학교요? 저 거기 기계항공공학부 3학년인데! 아, 저는 박지성이고 24살이에요."
예상보다 서너 살은 많은 나이에 재민은 내심 놀라며 아직도 꼭 잡고 있던 손을 고쳐 잡고 흔들었다. 잘해보자는 미소와 함께 건넨 정식적인 첫 인사였다.
"재민이 형이라고 불러요."
"네, 형."
"말도 놓으면 안 될까?"
"...천천히 놓을게요."
"난 지금부터 놓을게, 지성아?"
끄덕이는 고개를 확인한 재민은 여지껏 자신들이 현관에 서 있었음을 깨닫고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놓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성은 꼼지락거리며 신발을 벗더니 낯섦이 잔뜩 묻은 발걸음으로 재민을 따라 방에 입성했다. 재민은 그 모습을 보면서 혼자 쿡쿡댔다. 이제 와서 보니 제가 지옥에서 꺼내온 사람은 꽤나 귀여웠다. 굳이 깨우고 챙겨서 데려온 보람이 있을 정도로.
워낙 귀여운 것을 좋아하던 터라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재민은 지성의 소맷자락을 잡고 끌어당겨서 바닥에 앉혔다. 화들짝 놀란 얼굴은 뒤에 놓인 침대에 등을 기대면서 사르르 풀어졌다. 재민은 문득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깜짝 놀란 햄스터 짤이 떠올랐다. 아무리 봐도 그 짤은 제 눈앞의 박지성을 찍어놓은 것이 분명하다고 할 만큼 똑 닮았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온통 귀여워서 재민은 살짝 붕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간 아직 저와 낯가리고 있는 사람한테 이상한 인상을 남길듯해 재민은 볼을 꾹 눌러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대신 TV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역시 모든 방송국에서는 긴급속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뭐 딱히 다른 소식은 없네. 다 정체불명 바이러스래."
"바이러스요?"
"아, 지성이는 아직 문자 못 읽어봤겠구나. 아까 재난문자 왔는데 서월시에 바이러스가 퍼졌는데 파악 불가래. 그냥 딱 봐도 좀비인데 파악 불가는 무슨."
재민은 제 말에 핸드폰을 꺼내 재난문자를 읽고 있는 지성을 보며 아까의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쥔 지성이는 해바라기를 두 발로 꼭 잡은 햄스터를 닮았다. 아무래도 저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저 귀여움을 알아챘나 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을 굳이 제 자취방까지 데리고 왔을 리가 없었다. 깨우긴 했어도 중간에 헤어지던가 그랬겠지.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귀여운 사람 한 명 구했다는 만족감에 재민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삐-삐-삐-
잠깐의 평화를 깬 것은 재난 문자 알람음이었다. 재민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팝업창을 눌렀다. 발신지는 서월시청이었다. 물리지 마라, 실내에 있어라 따위의 진부한 주의 사항 끝에 있는 링크를 클릭하자 곧장 시청 홈페이지로 연결되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이 접속해서일까, 접속이 불가하다는 팝업창이 자꾸만 떴다. 슬쩍 지성의 핸드폰을 보니 사정은 똑같아 보였다. 그렇게 새로 고침 버튼만 계속 누른지 10분째, 먼저 연결된 것은 지성의 핸드폰이었다.
"...오, 대박. 사이버펑크 코리아답네."
"그러게요. 완전 대박이다."
CCTV, 각종 SNS 등을 통해 추적한 피해 상황이라고 소개된 게시글에는 동별로 감염자는 몇 명인지, 어느 구역이 완전히 점령되었는지 등등 꽤 유용한 정보들이 담겨있었다. 쭉 훑어보니 재민과 지성이 있는 곳은 위험도가 그리 높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 동네가 원룸촌이라 지금 이 시각에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다만 시청이 있는 곳의 감염자가 가장 많아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시청이 안전해야 정보 제공이든 구조든 원활히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에 당장 시청이 넘어갔는지 안 넘어갔는지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 것만 같아 괜히 불안해졌다. 게시글 끝에 서월시만 통신망을 통제한다는 문장 때문에 더욱 그랬다. 재민은 이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요리가 취미인 간호사인지라 금방 끼니를 때우고 잘 수 있는 인스턴트와 요리에 필요한 각종 식재료가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찬장 안에도 바로 어제 시킨 라면과 햇반이 가득함을 확인하니 아까의 불안감이 금방 흩어졌다. 어찌됬든 이 집안에서 구조대가 오기 전까지 버틸만한 식량은 충분했다.
"지성아, 혹시 배고파?"
"아니요, 딱히..."
"그럼 이따가 1시쯤에 나 깨워. 한숨 좀 자야겠다."
생존에 대한 확신이 들자마자 쏟아지는 잠에 재민은 눈가를 꾹꾹 누르며 침대 위에 엎어졌다. 아니, 엎어지려다가 바로 직전에 몸을 멈췄다. 아까 그 난장판을 헤치고 오느라 옷이 먼지와 핏자국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제야 제 옆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지성의 옷도 만만치 않음이 보였다. 재민은 옷장을 열어 똑같은 검은색 아디다스 츄리닝 두 벌을 꺼냈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중 한 벌을 건네받은 지성은 그제야 제 옷을 내려다보고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며 사과를 전했다. 재민은 자신의 옷을 가리키며 싱긋 웃고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남자끼리 내외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은 하지만 햄스터가 부담스러워 할 것 같은 행동은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재민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땐 지성도 이미 옷을 다 갈아입은 후였다. 지성에게서 옷을 건네받아 제 옷과 함께 세탁기에 넣은 재민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아까부터 감기던 눈꺼풀이 한계임을 외치고 있었다. 아득해지는 의식 속, 어렴풋이 잘 자라는 인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곤히 잠든 재민을 깨운 것은 물소리였다. 혹시 샤워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 제대로 뜨지도 못한 눈으로 발치에 있는 화장실을 보았지만 아무도 없이 문만 활짝 열려있었다. 그제야 방안이 전체적으로 어두워졌음을 인지한 재민은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싱크대에서는 지성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물소리가 끊기면서 지성은 싱크대에서 무언갈 꺼내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재민과 눈이 마주치며 그대로 놀라서는 주저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것은 허공에서 떨어져 바닥에 엎어졌다.
"이게 무슨..."
"혹시 단수될까 봐 미리 물 받아놓는다는 게..."
아까부터 묘하게 현실감각이 뛰어난 지성에 재민은 놀란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제야 물이 가득 찬 냄비나 플라스틱 물병 등으로 복잡한 부엌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귀엽기만 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 상황에 알맞은 사람을 데려온 것 같았다. 재민은 자신이 한 선택에 감탄하며 바닥에 흥건한 물을 닦느라 바쁜 지성을 도왔다. 두 사람이 매달리니 금방 바닥은 약간의 물기만이 남았다. 휴지를 넣으니 가득 찬 쓰레기봉투를 묶어 대충 쓰레기통 옆에 던져두고 뒤를 도니 안절부절못하며 울상을 짓고 있는 지성이 있었다.
"죄송해요. 흘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괜찮아. 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놀란 거잖아."
"그래도..."
"나는 오히려 고마운걸? 단수는 생각도 못 했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네."
생글생글 웃는 낯에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풀린 지성은 그대로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재민이 깜짝 놀라 지성의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자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 너무 놀랐어서 그랬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 대답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던 재민은 말랑한 두 볼을 잡고 얼굴을 딱 저와 마주 보게 고정했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눈동자는 결국 정면을 향해 한참을 그에게만 향하던 제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니...그게...제가 귀찮게 하면 혹시 내쫓으실까 봐..."
"...넌 내가 그런 쓰레기처럼 보였어?"
"아니, 형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그냥 좀비 영화나 드라마 보면 막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째민이는 똑땅해...지똥이는 횽을 그런 사람으로 보는 고야?"
재민의 뜬금없는 혀 짧은소리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지성은 풉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한참을 눈물까지 흘리며 깔깔대는 지성을, 재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켜보았다. 저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은 또 초면인데, 그것마저 마음에 쏙 들어와 안착했다. 정말 사랑스러운 햄스터였다, 박지성은. 재민은 지성에게 자신을 오해했으니 말을 놓으라고 요구했고 지성은 울며 겨자 먹기로 승낙했다. 하지만 아직 어색한 탓에 묘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화법을 구사했다.
"형, 저녁은 어떻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재료 있으면 해줄게."
"음...볶음밥이..."
은근 말끝을 얼버무리는 것을 진작에 눈치챘지만 재민은 그것도 그것 나름 귀여워서 그냥 넘어갔다. 매사에 조심스러운 것치고는 자잘한 사고를 많이 치고 묘하게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를 하면서도 현실 판단력은 저를 앞지를 때가 있어 당최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맑고 귀여웠다. 볶음밥을 먹으며 왕 큰 엄지를 치켜세우는걸 보면서 재민은 이젠 숨기지도 않고 귀엽다, 햄스터가 오물오물하는 것 같다 따위의 주접이나 떨었다. 달아오른 지성의 두 귀가 그의 흥을 더 돋웠다.
삐-삐-삐-
화목한 시간을 깨부수기라도 하듯, 재난문자 알림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순식간에 방안에는 적막이 찾아왔고 둘은 조용히 각자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월시청이 있는 구역이 완전히 감염자들 천지가 되었음을 확인했다. 어쩌면 구조대가 온다는 것도 단순한 희망 고문일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보균자들이 서월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거짓말, 단지 그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재민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한 상황에서도 그다지 눈물이 나진 않았다. 다만 제 눈앞의 귀여운 박지성이 울상인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지성아, 너가 아까 버스에서 지옥이냐고 물어봤을 때, 내가 맞다고 했잖아. 그 말 취소할게. 거기든, 여기든 지옥 아니야."
"왜요?"
"너랑 있는데 어떻게 지옥이겠어. 너처럼 귀여운 사람이랑 같이 있는데."
제 말에 그게 뭐냐며 타박을 하는 지성의 얼굴에는 슬며시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제야 재민은 마음이 다시 조금 높은 곳에서 통통 튀었다. 재민은 계속 생각의 길에 밝은 빛만 쏟아주는 지성을 보며 그 맑게 웃는 얼굴을 따라 해 보았다. 지성은 저를 따라 웃는 재민을 보며 흘리듯 말했다. 형은 웃는 얼굴이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그 얼굴은 참으로 맑고 눈이 부셨다. 재민은 그걸 굳이 꼭 집어 말하며 오늘 처음 봤는데도 날 이렇게 좋아해 주다니 감동이라며 난리부르스를 췄다. 아까의 적막은 어디 가고 둘이 투닥이며 쌓는 온기만 가득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선고를 받은 사람들인데도 둘은 그런 공포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재민은 제 앞에서 깔깔대며 넘어가는 지성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제가 버스에서 구한 것은 저의 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 시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