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요, 나도."
"…..."
"일단 내려-"
아아악-! 재민의 말을 끊고 다시 한번 허공을 찢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생생한 육성 사이로 살갗을 파고드는 징그러운 소리가 더해져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둘의 고개가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피가 난잡하게 튀어있는 버스 맨 앞좌석. 버스 기사가 물렸다. 고통으로 가득차 한껏 일그러진 기사의 얼굴에 핏줄이 섰다. 창밖으로 기사의 팔을 씹어 뜯고 있는 괴상한 얼굴을 제대로 본 재민이 격한 메스꺼움에 입을 틀어막았다.
"저게 뭐에요?"
재민의 옷소매가 당겨지며 겁에 질린 목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아니 지금, 제가, 상황파악이 잘. 더듬더듬 내뱉는 어귀에서 공포심이 잔뜩 묻어났다. 재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머리가 다시 깨질 듯이 아팠다. 지금 나가, 나가야.
쿵-
바닥이 둔탁하게 울리면서 버스 기사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물린 팔의 뜯긴 살점들 사이사이로 피가 고인 뼈가 드러났다. 비릿하게 풍기는 피냄새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재민은 얼굴을 쓸어내린 손을 턱에 걸치고 눈을 굴렸다. 미동없는 기사의 몸뚱아리를 한 번, 제 팔을 꼭 붙잡고 하얗게 질려있는 얼굴을 한 번, 그리고 창 밖을 한 번. 버스 밖 도로 위에 여기저기 남겨진 선명한 혈흔들이 눈길을 끌었다. 분무기로 뿌린 듯 난잡하게 튄 모양의 핏자국들이 사람들에게 밟혀 신발 밑창 모양으로 다시 도로 위에 찍혀나갔다.
그리고 다음으로 눈에 띈 건 정신없이 뛰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쫓는 괴이한 형체의 사람들. 후자의 경우에는 대부분 사람의 생김새에서 많이 변형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부 상태나, 관절이 꺾인 정도, 그리고 내는 소리까지도. 재민은 웅웅 울리는 머리에 힘을 주고 눈을 좁게 떴다. 생각, 생각을 하자. 지금 뭘 해야하지?
"...어."
"......"
"움직였어요."
생략된 문장의 주어는 남자의 손끝이 가리키는 그것이었다. 기사의 쓰러진 몸. 재민이 눈을 깜빡였다. 무의식 상에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꿈틀.
꿈틀.
삐걱.
몇번 들썩이던 몸에서 점점 나뭇가지 꺾는 소리 같은 게 났다. 엎어진 몸이 다시 뒤집히고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소리 비슷한 걸걸한 신음이 뱉어졌다. 어느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가 재민의 옷소매를 더 급하게 당겼다. 저기요. 우리, 우리 얼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내려요."
크아악-! 충혈된 눈이 시퍼렇게 떠지더니 기사가 크게 발작하기 시작했다. 목에 뭐가 걸린 듯 컥컥대는 이상한 소리로 울부짖더니 이윽고 피가 진득하게 흐르는 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세운 기사가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재민은 바로 남자의 팔을 붙잡고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땅을 밟은 둘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하자 등 뒤에서 묵직한 무언가 도로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재민과 남자의 뜀박질에 더욱 속도가 붙었다. 주변 상황은 아까 남자의 말 그대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버스 기사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 여럿이 살아있는 사람 하나 아래 깔고 목덜미며 허벅지까지 살갗이란 살갗을 다 뜯어물고 있었다. 과도하게 많은 피가 터져나왔다. 울렁이는 속에 재민이 숨을 참았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 섞여든 재민과 남자는 당장 보이는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1층부터 혼란스러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태를 접하고 즉시 집으로 가기 위해 빌딩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재민과 남자는 사람들에게 지금 나가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던져줄 여유가 없었다. 눈 앞에 있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두고 재민이 비상구 문을 열었다. 저 위 층에서 사람들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재민과 남자는 그 반대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층계를 내려가는 사람들이 어깨에 치였다. 난간을 두 손으로 붙잡고 계속 발걸음을 대촉했다. 더 이상 내려오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때 쯤 계단이 끝났다.
-
악! 비상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둘에 놀란 사람들 몇이 소리를 질렀다. 도착함과 동시에 쾅 소리나게 문을 닫은 재민은 눈동자를 굴렸다. 아까 떼로 몰려나간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남은 사람의 수가 적었다. 밖에서 본 괴상한 사람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아랫층과 달리 조금은 진정된 공기를 마주하고 재민은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렸다. 거의 넘어지다시피 엉덩이를 바닥에 붙인 재민이 불규칙하게 숨을 몰아쉬며 함께 온 남자를 돌아봤다. 그 와중에 챙겨온 백팩을 꼭 붙들어 안은 손이 파르르 떨리더니 새파랗게 질린 남자도 이윽고 풀썩 주저 앉았다. 남자 역시 바로 재민을 돌아봤다. 잠깐 초점이 가셨던 눈에 다시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허."
그리고 마주친 눈에서 주륵 물줄기가 흘렀다.
"...괜찮아요?"
재민이 남자에게 한 말이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인 남자가 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옷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았다. 아, 죄송해요. 아마도 저에게 하는 사과인 것 같은데 죄송할게 뭐가 있나 재민은 생각했다. 그냥 놀랐을테지. 자기 가슴부터 진정이 안 된 채로 재민은 남자의 등을 두어번 토닥였다. 울지마요. 남자가 훌쩍임을 감추려 애써 숨을 골랐다. 깊게 숨을 내쉰 재민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어디 물리거나 다쳐서 들어온 건 아니죠?"
"네?"
"감염된 거 아니냐구요."
"...감염이요?"
재민은 아까 버스에서 봤던 긴급 재난 알림 문자를 떠올렸다. 서월시. 파악 불가의 바이러스 발생. 지금 바이러스 때문에 이 지경이 된거라고? 아, 그래서. 머리 몇 번 굴린 재민이 상황 파악을 마쳤다는 의미의 탄식을 한 번 내질렀다. 감염 안 됐어요? 같은 사람이 언성을 좀 더 높여 다시 물었다. 재민은 자신을 향한 경계심 가득한 시선들을 이해한다는 듯 침착하게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전 멀쩡해요."
"…..."
"...아, 이 분도."
옆에 남자가 할 대답까지 재민이 대신 해줬다. 방금 울어서 살짝 붉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일어난 남자는 제쪽으로 쏠린 시선에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 둘 다 감염은 안 됐어요. 그건 확실해요. 옷소매를 걷어붙여 상처 하나 없는 팔뚝을 내보이며 말하는 재민에 둘을 향한 경계심이 살짝 풀어졌는지 바짝 선 눈초리들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남자는 큰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들릴까 말까하는 데시벨로 심호흡을 했다.
어느새 둘에게서 눈을 돌린 사람들이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재민과 남자 역시 자연스럽게 같은 곳을 응시했다. 복도에 걸린 텔레비전 화면으로 '긴급 속보' 라는 문구를 띄운 뉴스 방송이 송출되고 있었다.
[...현재 서월시 내 감염자들의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불가한 상태입니다. 또한 감염 시 나타나는 증상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된 상태가 아니지만-.]
뭐가 그렇게 다 파악이 안 된대. 연달아 들려오는 부정적인 소식에 재민이 미간을 찡그렸다. 곧이어 창살 사이로 팔을 내민 괴기한 감염자들의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띄워졌다. 감염자들은 언어를 구사하지 않고, 사람을 향한 공격성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미 직접 보고 겪은 내용이 흘러나왔다. 지금 당장 도움될 만한 정보는 없었다. 재민은 뉴스에 온 신경이 쏠린 사람들 틈에서 나와 벽에 붙은 벤치에나 가 앉았다. 바깥의 소란이 웅웅 들리는 듯 했다.
[...정부는 본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려하고 있으며 서월시 주민들을 포함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외출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뉴스 속보가 끝나고 좌절하는 사람들의 신음과 한숨 소리가 푹푹 퍼졌다. 그마저도 나중에는 침묵으로 이어졌다. 저 아랫층에서 계속 듣기 싫은 소리들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우리 일단 조용히 구조대부터 기다려요. 여기서 나갔다가는 다 죽을 거예요. 정적을 깨는 목소리에 재민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 같이 온 남자와 재민에게 감염 여부를 물었던 사람이 한 말이었다. 대충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사람들이 동의를 표했다. 재민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구조대. 구조대가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을 할 수 있을 지부터 걱정이 됐다. 잠깐 안 아프던 머리가 또 울렸다.
아픈 골을 부여잡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재민은 제 쪽을 바라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재민과 같이 도망친 그 남자였다. 백팩을 꼭 붙들어 안은 모습은 여전했다. 재민은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집에 갈 수가 있을까?
재민X지성
좀비 아포칼립스
재민이 갇힌 건물은 총 5층짜리였다. 여기서 '갇혔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이유는, 이 건물에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재민이 모르는 남자와 이 건물로 피신한 날, 건물은 바로 봉쇄됐다. 건물 출입구며 에스컬레이터까지 탈 수 없도록 건물에 있는 모든 셔터가 다 내려갔다. 우습게도 그가 무색하게 출입구의 셔터를 부수고 들어온 감염자들이 1층을 창궐했다. 1층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지금 쯤 썩은 내를 풍기며 피바다가 된 로비를 절뚝쩔뚝 걸어다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갇혔다는 건 여기서 나갈 수도, 밖에서 이 곳으로 들어올 수도 없음을 뜻했다. 건물 안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하러 들어왔다가 제 모습으로 나가지 못한 구조대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달았고, 현재 바이러스의 확산세가 강하여 구조대원들을 출동시킬 수 없다는 뉴스 방송으로 확인사살당했다. 건물 안에 남은 사람들 중 어떻게든 집에 가겠다며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수도 상당했다. 재민은 그들이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머지 않은 곳에 훼손된 시신의 형상을 한 그들이 존재할 거라 믿었다.
건물에 갇힌 지 삼주가 조금 넘은 지금, 건물 안에 남은 생존자는 총 30명도 채 안됐다-더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생존자들은 감염자들에게 1층을 빼앗긴 이후 2층을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했다. 1층이 뚫린 날 2층 셔터까지 감염자들이 올라와 쿵쿵대는 바람에 2층까지 점령당할 뻔했다. 생존자들은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 2층부터 시작되는 비상구 계단에 건물 내에 있던 온갖 가구들을 다 쌓아 막아두었다.
갇힌 이후로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전기는 끊기지 않았다. 덕분에 뉴스 방송까지는 들을 수 있었다. 방송국까지 일이 생겼는지 처음에는 어느 채널을 돌려도 감염 사태 이야기만 퍼붓던 여러 방송사들이 하나 둘 뉴스 송출을 중단해버렸고, 아직까지 뉴스 방송을 내보내는 방송사는 몇 되지 않았다. 사실 뉴스 방송의 의의는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얻은 정보라고는 처음 사태가 벌어진 지 약 이주만에 전국적으로 확산된 바이러스에 정부도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며 정전과 수도 끊김 현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거기에 식량 부족까지 더해질 수 있어 단단히 대비해두어야한다는 것이었다. 뉴스방송은 그런 기초적 정보 전달보다는 일종의 생존자들의 표식같은 역할을 했다. 방송이 송출될 수 있다는 건 아직 자신들 이외의 생존자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거였다. 매일 같은 내용만 나오는 지긋지긋한 뉴스방송이 고립된 생존자들에게 위안이자 꽤 큰 희망같은 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생존자의 존재 여부에 상당히 목을 맸다. 그런 점에서 이 건물에 고립된 사람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나재민도 똑같았다. 아직은 눈을 뜨면 바로 옆에 살아있는 사람이 존재함에 그거라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재민과 다른 생존자들의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재민은 제 옆의 생존자들 중 딱 한 명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되겠다.
그 '딱 한 명' 이라는 사람이 바로 박지성이였다. 지성은 처음 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난 날 재민에게 손목 붙잡혀 같이 들어온 그 남자였다. 재민은 아직도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에게 살려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지성을 기억한다. 체구가 작지 않은 것에 비해 어리숙한 외모와 성격을 가진 지성은 건물이 봉쇄된 이후로 재민 곁에 아이처럼 꼭 붙어있었다. 자발적으로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재민의 관계 장벽은 지성에게 꽤 쉽게 뚫렸다. 지성의 성숙하고도 순수한 모습이 그에 한 몫했다.
재민은 지성을 귀여워했다. 남에게 건조하지 않은 감정을 가지기가 낯선 재민 본인에게는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 지성이 자신보다 다섯살이나 어린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기분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지성은 제 감정에 솔직한 편이었고 그걸 잘 못 숨겼다. 지성은 가끔 재민이 그걸 콕 집어 말할 때마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 오바. 형 왜 이렇게 잘 알아요? 재민이 거기서 안 그치고 놀려먹기를 더하면 볼에 바람을 넣는 버릇이 항상 나왔다. 지성은 재민이 한 번 귀엽다고 하면 그 행동은 이후로 잘 안 하려들었다. 덕분에 재민은 지성의 볼에 바람이 들어갈 때마다 하고픈 말을 하지 못해 속을 꽤 앓았다.
그게 결국은 호감 비스무리한 것으로 이어졌다. 재민은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에도, 퍼진 후에도 보여주지 않았던 웃음을 지성에게만 보여줬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든 밤에 혼자서 본인 이야기를 조곤조곤 늘어놓는 모습이며 뭔가 먹고 있을 때 햄스터 닮았다며 볼에 손가락을 찌르면 숙쓰러워 하는 모습같은 게 기억 속에 쌓이다보니 마냥 귀엽기만 하다고 여겼던 감정이 방향을 살짝 틀었다. 재민은 유독 자신에게 믿음을 주고 자기 감정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지성의 모습을 좋아했다. 인정하기에는 부끄러웠지만 느낌이 그랬다.
"재민이 형."
"…..."
"무슨 생각해요?"
생수가 반 컵 정도 채워진 종이컵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멍을 때리던 재민이 눈높이를 맞추며 제 옆에 쭈그려 앉는 지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릎을 감싸안은 두 팔에 하관을 묻고 눈만 빼꼼 내밀어 자길 보는 지성에 재민이 바람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냥 있었는데? 마시다 만 물을 마저 목구멍으로 넘긴 재민이 종이컵을 바닥에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지성은 재민의 손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다시 재민의 얼굴에 시선을 박았다. 그럼 말구요. 오른팔에 막힌 입술로 웅얼웅얼 대답하는 지성에 재민이 이번엔 소리 나지 않게끔 미소를 지어보였다. 박지성은 또 그걸 봤다. 헤헤. 지성 특유의 해사한 웃음이 얼굴에 떴다.
"형."
"응?"
"좀 이따 사람들 4층에서 모이겠대요."
어제 일 때문인가봐요. 지성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 재민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말이 어제 일이지 바로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었다.
건물이 봉쇄된 이후로 갇힌 사람들은 나름의 규칙을 몇가지 만들었다. 재난 발생 시에 생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이 건물 내에서는 법이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첫째, 1층과 2층은 사용을 금지한다. 둘째, 절대로 소음을 발생시킬 행위는 하지 않는다. 셋째, 식량은 3층과 4층의 식당에서 구한다. 단, 정해진 시간 외의 출입, 정량 이상의 식량을 가져가는 행위는 금지한다. 외에 자잘한 것들이 더 있지만 이 세가지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규칙을 어길 경우 가차없이 그 사람은 2층으로 내쫓기게 되어있었다. 2층에서는 1층과 연결된 에스컬레이터 입구에 쳐진 셔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감염자들과 대면이 가능했다. 1층에서 풍겨오는 썩은 내와 걸걸한 신음소리, 언제 감염자들에게 발각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2층으로 내몰리면 아마 제 정신 잘 붙들고 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립에 식량 부족, 에너지 부족. 기본적인 생활마저 자연스럽게 누릴 수 없는 재난 사태에서 모든 사람이 이성을 놓지 않는 건 사실 상 거의 불가능했다. 모두 잠결에 취해있을 야심한 새벽에 허기를 견디지 못한 한 남자가 몰래 4층 식당에서 음식을 빼먹은 것이 그 예시가 됐다. 그 남자는 바로 발각되었고 덕분에 꽤 큰 소란이 있었다. 규칙을 어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 남자는 공포심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쳤다. 1층의 감염자들이 위층에서 나는 소리에 2층 셔터까지 올라와 기괴한 소리로 울부짖어댔다. 소란은 결국 그 남자의 후두부를 내리쳐 기절시키고 나서야 끝났다. 남자의 손을 묶고 테이프로 입까지 막은 후 격리까지시켰다. 그리고 새벽이 지나 해가 뜰 때까지,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한 숨도 잠을 청하지 못했다.
조금 뒤 4층에 모인 생존자들 중에는 어제 난동을 부린 그 남자만 없었다. 대충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지성은 재민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재민 역시 침만 꼴깍 삼킬 뿐이었다. 정적이 몇 분간 더 이어지고, 누군가 먼저 입을 뗐다.
"...어차피 2층가면 죽게 돼있어요. 물리진 않더라도 굶어죽을테니까."
"……"
"불쌍하긴 해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괘씸한 게 더 커요."
규칙은 규칙이니까 무를 생각 말자고요. 그 말을 끝으로 또 다시 침묵이 시작됐다. 사람 목숨 하나 내치는 것에 대해서 생존자들에게 남은 마지막 죄책감과 양심의 표시가 침묵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 남은 죄책감과 양심이라는 건 생존본능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치 않은 요소였다. 생존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그걸 없애야 살 수 있는 게 섭리였다. 그 남자가 딱 그랬다. 무거운 이야기가 몇 마디 더 오고 갔다. 길지 않게 끝난 회의에서 남자는 당장 내일 아침에 2층으로 내몰릴 것이 결정됐다.
다시 5층으로 돌아오자마자 재민은 잠자리에 누웠다. 잠을 청하기 위함이 아니라 복잡해진 마음을 추스리려는 차원이었다. 팔을 이마 위에 얹은 재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몇번 깜빡인 재민이 깊게 눈을 감았다. 뭔가 크지 않은 상실감이 가슴 한군데에 쿡 박힌 기분이였다.
"형, 자요?"
지성이 자연스레 재민의 옆으로 가 팔을 베고 누웠다. 지성 역시 그닥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아냐, 자는 거. 그럼 이번엔 무슨 생각해요? 응? 또 그냥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꺼낼 말거리가 없어서 괜히 또 아까와 같은 질문을 뱉는 지성이었다. 어차피 지금 사람들 하고 있는 생각 다 똑같을텐데. 재민은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반억지로 웃음을 한번 지어보였다. 지성도 별 말 안 꺼냈다. 분위기 좀 살려보겠다고 아무말이나 꺼내기에는 상황이 상황이었다.
"그 아저씨가 잘못했으니까 이게 맞아요."
"….."
"근데 기분은 좀 별로인 것 같아요."
지성이 재민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지성의 움직임에 기척을 느낀 재민이 고개를 돌렸다. 팔베개를 하고 돌아누운 지성과 눈이 마주쳤다. 지성의 눈이 미묘하게 슬픈 빛을 냈다. 형 있잖아요,
"솔직히 저는 점점 무서워져요."
"…..."
"또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
"형이나 저한테 무슨 일 생긴다고 생각하면 더 겁나요."
"지성아, 왜 그렇게 생각,"
"형, 저는 진짜로 형이 없었다면 죽었을 거에요. 그날 버스에서도 그렇고, 지금도요."
근데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목소리가 흔들릴까봐 목에 힘을 주고 말하는 게 느껴졌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지성이 시선을 내렸다. 저는 이제 형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요. 지성이 재민의 손을 끌어왔다. 맞닿은 곳에서 잔떨림이 전해져왔다. 다시 재민에게 시선을 둔 지성을 재민이 똑같이 쳐다봤다. 형은 어디가지마요. 나랑 계속 있어요. 형 때문에 살았잖아요 저. 지성이 하는 말들이 다 귓가를 웅웅 맴돌다 목울대를 데웠다. 재민이 엉성하게 맞잡힌 손을 고쳐 잡았다. 엄지손가락으로 지성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지성아, 형도 부탁할게."
"…..."
"어디가지 말고 나랑 있어."
나도 너 없이 혼자 못 살아. 어쩌다 삶의 이유가 서로가 됐다고 자신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재민이 지성의 손을 꼭 쥐어잡았다. 지성이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요 형. 재민은 아무래도 좋았다. 건물 안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다 지성이었음을 재민은 부정하지 않았다. 지성에게 가졌던 감정의 농도가 더 짙어짐을 느꼈다.
지성이 눈을 감았다. 형 약속 지켜요. 그럴게. 꼭이야. 응 진짜로.
/ 템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