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지은 죄가 좀 있어서."
아님 말구요.
긴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와 얼굴이었다. 지옥에 온 거냐 물으면서도 지옥이 두렵지 않아 보이는 그런 눈빛. 재민은 그 감정에 동요라도 된 듯 서두르려던 것도 잊고 말을 잃었다. 귀에 이명이 울리며 페이드 인. 그 순간 끔찍한 소음들도, 버스 안의 풍경도 멀어져 시야에서 흐려지고 말간 남자의 모습만 선명하게 남았다. 아. 잠을 좀 잤어야 됐는데. 그렇다고 어제 출근해서부터 방금 전까지 잘 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여유롭고 의미 없는 후회였다. 때아닌 감상은 멀리서 길게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끊어졌다. 다시, 페이드 아웃. 어떤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본 적이 있는 듯한, 정신을 잃은 누군가가 클락션 위에 엎어져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멈춰 놓았던 시간이 탁 하고 흐르듯 재민의 입이 열렸다.
"지금 장난 칠 상황으로 보여요?"
쥐고 있던 의자 손잡이를 저도 모르게 더 꽉 잡으면서 가까스로 뱉은 말은 좀 신경질적으로 나갔다. 말을 한 재민조차 의식 될 정도로. 그러나 오히려 개의치 않는 듯한 남자는 태평하게 제가 안고 있던 백팩을 들며 일어섰다. 이어폰은 성의 없이 잡아당겨 빼서 후드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아니요."
"……."
"빨리 가요. 전 멋있게 죽을 거란 말이에요."
백팩을 둘러 등에 메더니 탁탁. 몸을 두어번 가다듬는다. 하, 하고 재민은 헛웃는 소리를 냈다. 남자의 말 또는 행동을 비웃은 건 아니었고 어이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황당했다. 안 가요? 길을 막고 선 재민에게 건네는 물음표에 재민은 첨언하지 않고 뒤를 돌았다. 익숙한 도로 풍경 위에 핏자국들과 누군가들의 신체 부위가 이질적으로 흩뿌려져 있었다. 꿈 같은 일이긴 하네. 제가 지옥에 온 거냐고 묻던 남자의 말을 곱씹으며 남들은 한참 전에 밟고 지난 계단을 뒤늦게 밟았다. 남자는 잠시 재민을 빤히 바라보다 따라 내린다.
찻길로 깔린 아스팔트에 두 발을 내려 놓으면 틀어진 영상물에 얹어진 다른 장르의 텍스처처럼 겉도는 기분이었다. 짐승 같은 소릴 내며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그들을 피하며 뛰는 사람들.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핸들을 쥐고 벌벌 떨다가 앞 유리를 깨고 얼굴을 들이미는 괴물에게 물리는 사람, 누군가가 떨어트린 가방에 발이 걸려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우는 사람, 저를 쫓는 괴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달리다가 차체 위로 올라간 사람 등등. 그 꼴을 보고 있으면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어도 본능적으로 소리를 죽이게 됐다. 정신없이 문이 열린 차들 뒤로 몸을 숨기며 천천히 걸었다.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울리는 머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하필 오늘 약을 안 챙겨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은 없어서 두통을 참으며 청각을 곤두세웠다.
.... 저벅,
두 걸음쯤 뒤에서 똑같이 소리 죽인 발걸음이 들려왔다. 싸늘한 기분에 반사적으로 돌아보면 명백히 사람인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 사람. 날 따라오는 건가?
버스에서 내린 뒤로 알아서 갈 길을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가정에 고개를 뒤로 돌린 채 발을 멈추면 따라서 멈췄다. 말을 먼저 꺼내는 쪽은 재민이 아니었다.
"근데요."
"…네."
"형은 어디로 갈 건데요?"
언제 봤다고 형이야. 재민은 눈앞의 남자가 좀 웃겼다. 나이는 무슨,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 눈 마주친 지 십 분도 안 돼서 멋대로 제법 친근한 호칭을 쓰는 게.
"알려주면요?"
"따라가게요."
"어딜 줄 알고."
"몰라요. 근데 어차피 이제 저는 갈 수 있는 데가 하나도 없어요."
남자의 말에 재민의 눈썹이 작게 들썩였다. 가출 청소년이라도 되나. 행색이나 어린 얼굴을 보면 그럴 법도 했다. 고분고분 답해주지 않는 재민에 입을 삐죽대는 남자는 힐끗 어딘가를 눈짓하더니 목소리를 줄였다. 쉿쉿. 앉아요. 후다닥 차체에 등을 기대고 앉더니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던 재민을 당겼다. 재민은 순순히 그 옆에 앉았다. 그르륵, 인간이 낼 법하지 않은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면 그제야 처한 현실이 다시금 자각이 됐다. 언제 웃었는지 모르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이 차 건너편에 있어요. 재민에게로 몸을 기울인 남자가 귀에 속삭였다. 고개를 한 번 까딱인 재민이 입을 다물면 슥 눈치를 살핀 남자는 다시 귓가에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요."
그륵, 끄으으…
"이걸 지금 묻는다고."
쿵!
캬아아악!
"그럼 언제 물어요?"
답답하다는 듯, 그러면서도 조용하기 위해 애쓰며 가슴팍을 툭툭 치는 남자를 보며 재민은 또 슬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용히좀 해요. 저 사람 듣겠다. 저게 어딜 봐서 사람이에요. 대답이나 해요. 좀 전에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자연스레 투닥댔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재민에게서 시선을 돌린 남자가 주섬주섬 백팩을 앞으로 맸다. 아, 등이 배겨서. 다시 재민을 쳐다보며 굳이 안 해줘도 될 말을 덧붙인다.
저쪽에서는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브레이크를 늦게 밟은 차가 어딘가를 처박는 소리가 났다. 클락션 소리, 모르는 이의 고함, 살려달라는 외침,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이 정신 없이 섞여 들렸다. 등을 기댄 이 차 뒤에는 괴물이 있고, 갈 곳이 없는 건 재민도 마찬가지이고. 집으로 가려면 아까 내린 버스로 삼십 분은 더 가야 했으며 여긴 매일 버스로만 지나치던 모르는 곳이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불필요한 일행은 달지 않는 게 좋았다. 그렇지만.
"어디로 갈 건지 안 정했으면."
문득 알아챈 게 있었다. 왜인지 약이 없으면 가시지 않을 것 같던 통증이 사라져 있었다는 것. 약을 먹지 않았는데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재민은 남자의 가방에 달린 작은 별 모양 인형을 바라보았다.
"나 안 따라오려구요?"
느긋한 어조로 말하면 남자의 대답 대신 어디선가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목소리가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재민이 남자와 기대 있던 차의 헤드라이트 쪽에서 튀어나와 반대로 달렸다. 잠깐 스친 얼굴이 공포감에 가득 잠겨 있었다. 곧바로 두 사람이 의식하고 있던, 차 뒤에 있던 그 괴물인 듯한 것이 그 소리를 쫓아 달려가는 게 보였다. 동시에 딸려나간 시선은 한 사람의 것만 돌아왔다. 재민은 이미 사라진 괴물의 뒷모습을 눈으로 되새겼고 남자는 재민을 바라보았다.
"아니요."
"내가 어딜 갈 줄 알고."
"몰라요."
모른다면서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은 없었다. 재민의 시선도 남자에게로 돌아왔다. 피곤한 눈의 시야에 우물대는 입술이 들어왔다. 어디든요. 재민이 무언가 말하기 이전에 먼저 따라붙는 목소리가 가벼웠다.
"지옥은 아닐 거 아니에요."
생에 의욕이 없어 보이는 무감한 목소리로 죽음을, 지옥을 피하고 싶어 하는 문장을 발음하는 것에 재민이 웃었다.
"천국도 아닐 텐데."
"괜찮아요."
지옥은 아닐 거 아니에요.
금방 했던 말을 똑같이 뱉어내는 남자에 재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똥히 눈을 뜨고 쳐다보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잡고 일어난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진 장소는 없었지만 기준은 있었다. 괴물이 없는 곳. 이왕이면 사람도 없는 곳으로. 머뭇거리는 것 없이 비교적 깨끗한 길바닥으로 발을 움직이는 재민은 뜬금없이 뒤에다가 말했다. 가방 다시 뒤로 매는 게 어때요.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이대로 갈래요. 영화에서 보면 맨날 뒤 잡혀서 도망 못 가더라. 그래요 그럼. 쓸데없이 타당한 이유에 건넨 권유만큼 싱겁게 끄덕였다.
"우리 목표는 멋있게 죽는 걸로 해요."
"네."
"저렇게 괴물한테 뜯어먹혀서 죽는 거 말고."
"네."
아까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한 재민의 말에 남자는 착실하게 답을 남겼다. 아무래도 재민이 설정한 목표가 본인의 마음에도 쏙 드는 모양이었다. 두 걸음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이면, 아. 하는 짧은 탄식 같은 게 들렸다. 괴물이 뒤따라오기라도 하는 걸까 봐 재민이 돌아보기 전에 남자는 조곤조곤 할 말을 했다.
"괴물이 되는 것도 말고요."
나는 사람으로 죽을 거야.
똑부러지는 한 마디에 재민이 또 한 번 끄덕이며 웃었다. 그 말을 끝으로 만족스럽게 할 말을 마친 건지 남자는 조용히 재민을 뒤따라 걷기만 했다. 귀엽네.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어린 티가 나는 게 이유 없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인지 재민은 쉴 새 없이 주위를 살피면서도 한켠에서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하나 둘 셋 하면 인도로 올라가구요."
"……."
"인도로 올라가면 저 골목으로 뛰어요."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는 이 남자와 무사히 안전한 곳에 도착을 한다면 꼭 나이와 이름을 물어야겠다고. 무표정인 주제에 얼굴 옆에 두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그려내는 남자를 짧게 응시했다. 하나, 둘, 셋.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계속 보고 있게 될 것 같아서 빠르게 숫자를 센 재민은 뒤돌지 않고 뛰었다.
뒤따라오는 소리 중에 가장 선명한 건 두 걸음 쯤 뒤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는 그 소리였다.
. . .
크아아악-
철컹.
"……."
"……."
소리 죽여 숨을 고르는 재민의 뒤를 따라 들어온 남자가 침착하게 무거운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워졌고 그 어둠 속에 잠시 멈춰 서 있으면 문 앞으로 그륵대는 소리가 스쳐 지나갈 뿐 부술 듯 두들기지는 않았다. 그나마 안심이 됐다. 무작정 달린 대로변에서부터 끌고 온 괴물의 숫자가 꽤 되었는데 따돌리는 것에 성공한 듯했다. 문 하나 사이에 둔 것이라 아예 마음을 놓기는 일렀지만.
문에서 조용히 물러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마저 호흡을 가다듬었다.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 먼저 회복한 재민은 손으로 머리 위를 휘저었다. 그럼에도 오래돼 보이던 외관이 역시나 디자인인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비상구 천장에 달린 조명들은 센서가 작동하지 않는 듯 어둠을 밝혀주지 않았다. 층계참 벽마다 작게 나 있는 창으로는 들어오는 빛이 너무 적어서, 재민은 결국 핸드폰을 꺼내 가장 약하게 라이트를 켰다. 비상구는 여전히 고요했고 바닥을 비추면 그 빛이 반사되어 남자의 표정을 보여주었다. 약간 찌푸렸을 뿐 아까와 다를 건 없었다. 말끔하고 뽀얀 얼굴.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작은 숨소리들이 묻혔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세운 무릎에 팔을 괴며 재민이 입을 벙긋대면 남자는 아까 차에 기대 있을 때처럼 몸을 기울여 귀에다가 속삭였다. 미처 정리되지 못한 숨결이 목덜미와 귓가를 스쳤다.
"우리 여기 갈래요?"
말과 함께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정확한 목적지를 내포한 말에 의아함을 품은 얼굴로 재민이 그 손가락의 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계단 챌판에 붙은 표찰이 눈에 들어왔다.
[베드로 교회 3F]
교회? 대답을 고르는 사이 뻗어졌던 손이 내려와 자연스레 재민의 허벅지를 짚었다. 재민은 여전히 교회의 이름에다 시선을 꽂고 있었다. 동공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근처를 훑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표찰은 여러 개였다. 피아노 학원, 미용실, 독서실… 건물이 오 층까지 있는지 옆에 적힌 숫자도 일 부터 오 까지 다양했다. 그런데 왜 하필 삼 층에 있는 저 교회인지. 가시지 않는 의문에 잠시 생각해봤지만, 남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의견이니 답도 거기에 있을 것 같아 재민은 다시 남자를 돌아봤다. 남자는 재민의 허벅지를 짚었던 손을 뒤로 가져가며 상체를 약간 젖혔다. 가까웠던 거리가 그만큼 벌어졌다.
"어차피 다시 나가지는 못 하고."
"……."
"혹시 모르잖아요. 죽기 직전에라도 회개하면 천국 갈 수도 있으니까."
가만가만 눈을 깜빡이던 재민은 두 번 끄덕이고 말았다. 딱히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남자의 말대로 겨우 닫은 저 문을 열면 건물 밖으로 나가기는 무슨 그 전에 다 물어 뜯기고 말 게 확실했다. 아직은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죽더라도 그런 식으로 죽고 싶지 않은 건 이 사람도 나도 마찬가지. 이 건물에 잘 아는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니 어딜 가든지 미개척지에 발을 들인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첫 대면 첫 마디부터 지옥 타령을 하던 남자이니 회개와 천국 그런 거에 관심이 있어서 이렇게 결정한 것 같고… 그걸 가지고 시비를 걸 이유는 없었다. 일어날까요. 재민이 간단하게 제 의사를 표현하면 남자는 어, 이렇게 당장이요? 그러면서 손을 꼬물댔다.
둘이 그 어두운 계단을 뜬 건 약간의 휴식을 더 취한 뒤였다. 그래도요. 혹시 모르잖아요 이 건물에도 저런… 괴물. 괴물들이 막 많을 지도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계단 난간을 잡았던 손을 다시 놓은 재민은 확실했던 태도와 달리 뒤죽박죽 덧붙는 남자의 말에 그렇죠 싱겁게 수긍했다. 어찌 됐든 일어나긴 했다. 만약 뭐가 튀어나오면 어디가 약점인진 몰라도 넘어뜨리기 위해 다리를 걸기로 했고 둘 중 누가 물린다면 오늘 처음 만난 사이답게 버리고 도망치기로 짧은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그렇지만 삼 층 비상구 문 앞에 선 남자는 재민의 옷자락을 잡았다. 재민은 그걸 뿌리치지 않았다.
문 여는 건 재민이 했다. 남자의 나이를 몰랐지만 저보다 어릴 거라고 머릿속으론 못을 박아둔 상태였고 재민은 이런 일에서 뒤로 숨는 타입이 아니었다. 서서히 열리는 문은 연식 때문인지 끼익 하는 소리를 좀 크게 냈다. 여차하면 다시 닫아버릴 생각으로 재민은 잠시 행동을 멈췄지만, 너머에서 따라오는 어떤 반응도 없기에 침착하게 마저 열어젖혔다. 고요한 복도로 발을 내디디면 남자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철컥. 그 소리에도 삼 층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무도… 없나? 남자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대며 고개를 이리저리 빼꼼댔다. 재민은 공포 영화 사망 플래그 같은 그 말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것에 작게 웃었다.
의외로 삼 층에 있는 건 교회 뿐이었다. 가게의 영역들이 하나로 터져있는 건 아니었지만, 복도를 기준으로 문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게 모두 교회의 일부였다. 다른 층에 가면 여기는 피아노 학원, 여기는 태권도 학원이었을 게 교회 예배당이고 식당이고 그랬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잠겨있지 않았다. 불도 여기저기 켜져 있었다. 그런 걸 포함해서 사람이 있던 흔적은 있었으나 사람은 없었다. 예배당 문에 붙은 예배 시간표를 보니 예배 없이 자율적인 기도 시간만 있는 요일이었다. 소수의 사람만 있었겠고 있던 사람들도 난데없이 괴물이 쏟아지자 집으로 어디로 황급히 떠났겠지. 각자 지킬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 생각을 하자 눈길이 힐끔 저쪽으로 갔다.
"……."
강단 위 단상 뒤 벽에 크게 걸린, 예수가 박힌 십자가 모형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는 뒤통수. 뭐가 그리 신기한 건지 고개가 갸웃댔다. 나는 어쩌다 저 사람이랑 여기에 오게 된 걸까.
"이름이 뭐예요?"
재민이 불쑥 묻자 남자는 휙 뒤를 돌았다. 까만 동공이 데구르르 구르다가 말았다.
"어, 갑자기요?"
"갑자기라뇨. 나는 너무 늦게 묻는다고 생각했는데."
"음…"
뒤돌아 단상에 팔을 올리고 선 남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조절되지 않은 작은 스탠드 마이크가 이상한 모양으로 휘어 남자의 입 앞으로 놓여 있었다.
"박지성이에요."
마이크가 켜져 있던 것도 아닌데. 남자의 이름은 재민에게 그 어떤 발음보다 또렷하게 들어왔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내 나이도 모르면서 형이래."
"저 열아홉 살이거든요. 근데 형은 출근하던 중인 것 같아서."
"아저씨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나 퇴근하던 중이었어요."
"아니, 형 겉으로 보면 나보다 열 살 많아도 형이에요."
"그래요?"
"네. 아니! 그래서 형 이름이 뭐예요."
신상을 숨길 생각은 없지만 이상하게 자꾸 장난을 치고 싶었다. 말이 능글능글 다른 데로 넘어가자 지성은 단상을 작게 콩콩대며 눈썹을 찌푸렸다.
"나재민."
"오…"
"왜요?"
"아니에요. 그래서 형이에요 아저씨예요?"
"나 스물여덟 살인데."
"오…"
"그러면 아저씨죠?"
"어… 원래는 그런데."
이름에 나이가 뭐 별거라고 반응이 생생했다. 원래는 그런데? 지성의 말을 빌려 속으로 되물으며 여태 서 있던 재민이 교회 특유의 기다란 원목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진지한 얼굴의 지성도 강단에서 내려오더니, 의자 부분만 있는 가장 앞줄에 거꾸로 앉아 재민을 바라봤다.
"형은 그냥 형 해요."
"오."
"솔직히 교복 입고 교실에 앉아 있으면 모를 것 같아요."
근데 얘는, 열아홉이라면서 왜 그 시간에 사복 입고 거기에 있었지? 교복과 교실을 언급하는 지성의 말에 묻어뒀던 의문이 솟은 재민은 그러나 묻지 않았다.
"고마워요."
제가 직장인임에도 그 시간에 출근이 아닌 퇴근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은 있기 마련이다.
"어, 나 칭찬이었나?"
"뭐야. 아니었어요?"
"저도 몰라요."
지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러더니 슬쩍 웃었다. 나름의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뒤돈 채로 등받이에 팔을 걸쳐 편히 기대며 지성이 입을 열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저보다 아홉 살이 많은데, 형은 말 편하게,"
콰앙!
으아악!
그러나 말을 끝마칠 수는 없었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난 재민이 상황 파악을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소리가 난 것은 비상구 쪽이었다. 소리가 가깝지 않았던 걸로 봐서 다른 층인 것 같긴 했지만 비상구를 타고 울리는 발소리와 겁에 질린 듯 크고 작은 비명을 지르는 사람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렸다. 그 뒤를 잇는 괴물들 소리까지. 반갑지 않은 소리는 멀어지지 않는다. 재민은 굳은 얼굴로 예배당 문을 나섰다. 얼떨결에 따라 일어선 지성도 뒤따랐다. 비상구 문으로 향하는 재민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형, 형! 잠시만요."
문의 손잡이를 내려다보며 재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동그란 손잡이 가운데에 튀어나온 부분을 잡고 돌리면 잠금이 되는 구식이었다. 이걸, 열어야 할까. 망설임의 기저가 사명감 또는 정의감은 아니었다. 스물 여덟 나재민은 건조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다만 재민은 알았다. 이걸 제가 열지 않는다면 살기 위해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을 저 사람들은 죽는다는 걸. 설령 죽지 않더라도 당장 크게 절망할 게 분명하다. 그걸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문을 열지 않는다면 꽤 오래 죄책감에 시달릴 걸 재민은 확신했다. 제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아직은.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린 재민이 느릿하게 손잡이를 쥐었다. 손잡이를 쥔 손은 돌아가는 대신 힘이 들어간다. 망설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빠른 걸음으로 지성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다. 불안한 얼굴이었다.
"형."
침착한 목소리로 재민을 부른다.
시끄러운 비상구 소음 사이로 파고든 건, 말보다 속삭임 같은 단 한 글자였지만 그 한 글자에 재민은 멈췄다. 행동도, 망설임도. 조용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을 내리깐 지성의 얼굴은 복잡한 머릿속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불안함 사이에 흐르는, 확고한 감정. 재민은 멍하니 지성을 응시했다. 지성이 차분하게 손을 뻗었다.
찰칵.
"안 돼요."
"……."
타다닥, 쾅!
철컥. 철컥철컥.
타이밍을 잰 듯 문이 몇 번 거세게 진동했다. 문 손잡이가 반쯤 돌아갔다가 반대로 돌기를 빠르게 반복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물러섰다. 잠시 그 문을 응시했던 재민은 어느새 다시 지성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여전히 지성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 문에다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이씨. 잠겼어!
씨발, 위로 올라가! 빨리!
캬악! 그르륵, 끄아악…
씨발, 아, 씨발!
심장이 세차게 뛰어댔다.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다 어느 순간부터 조용했다. 다른 층으로 빠져나간 건지 옥상으로 나간 건지 알 길은 없었지만 끔찍하게 지르는 비명이 없으니 죽은 건 아닐 거라고 재민은 합리화를 했다. …조용하고 빠르게 뒤이어 계단을 밟는 소리들이 소름 끼쳤다.
계속해서 정적이 흘러도 지성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가만히 예배당으로 향할 뿐이었다. 휘몰아치고 지나간 상황과 왠지 착잡해 보이는 지성.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재민은 지성의 모습이 사라진 뒤로도 조금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지성은 아까 앉았던 그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도를 하는 듯한 자세에 재민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바라보다가 발을 옮겼다. 지성의 옆에 앉았다. 형. 재민이 다가오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눈을 감은 채 짧게 부르면 재민은 대답했다. 네. 재민의 대답에 곧바로 다른 말이 뒤따랐다. 호흡이 불안정했다.
"저한테 정 떨어졌어요?"
"……."
"아니,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도 같이 있어요. 나랑, ……"
제게 하는 말인지 기도를 하는 건지 모르게 지성은 이상할 만큼 간절한 목소리를 냈다. 그 문 앞에서 망설였다는 사실이 있으니 재민도 다를 게 없었는데. 단지 차이라면 그 문을 잠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재민은 지성이 저보다 더 나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재민뿐인지 지성은 재민이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을 열면 귀신같이 알고 말을 막았다.
"나는 어차피 지옥 갈 거예요. 죄지은 거 있다고 했잖아요. 사실 그건 몇 번을 회개해도 못 지워요. 저는 지옥 갈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아까 같은 나쁜 짓 더 해도 되니까. 그런 건 형 대신에 저가 다 할 테니까,"
"……."
"……."
"……."
"그냥, 이제 더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금방이라도 울 듯한 목소리에 재민은 등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열아홉. 열아홉이 그 시간에 교복 아닌 사복을 입고, 학교가 아닌 버스에 있던 이유. 짧게 스치는 생각에 집중할 새도 없이 점점 가빠지는 지성의 숨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고개를 돌려 지성을 바라보면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손을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재민은 앞서 떠올린 생각에 대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해보며 천천히 지성을 끌어안았다.
"다쳐."
깨물리고 있던 손을 잡아 내리면 얌전히 잡혀 있어 주었다. 필사적으로 저를 안은 재민의 품을 파고드는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재민은 지성의 눈물을 못 본 척 눈을 감았다. 지성아. 이름을 처음 부르는 목소리는 어색하게 다정했다.
"난 너한테 실망 안 했어."
고르고 고르다가 드디어 뱉은 한 문장이었다. 서툰 위로처럼 더 세게 안으며 하는 말에 지성이 젖은 숨을 삼켰다.
"나도 혼자 있었으면 고민 안 하고 잠갔을 거야. 너만 그런 게 아니라는 소리야."
"…진짜요?"
거짓 아닌 말에 가만히 숨을 고르던 지성이 고개를 드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재민은 다시 눈을 떴다.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하마터면 재민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웃는 소리를 낼 뻔했다. 나, 이 애를 보면 자꾸 웃게 되네.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이 이상했다. 다른 날과 별 다를 게 없는 일상이었는데 괴물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 애를 만난 것도, 같이 머물게 된 것도. 그보다 가장 이상한 건 본인이었다. 왜 이런 마음이 들까. 이름이랑 나이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제가 고작 아는 것들조차 지어낸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응.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데, 이 애는 나를 웃고 싶게 만들잖아.
그런 지성을 달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지옥에 가더라도 같이 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충동적으로 쏟은 말에 후회는 없었다. 재민은 제 말에 놀란 눈으로 눈물을 툭툭 떨궈내는 지성을 보았다. 지성은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은 표정을 하고 재민에게 말했다. 형은 왜 그런 말을 해요? 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내가, 내가…
"사람이라도 죽였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 말을 하며 지성은 재민의 눈을 피했다.
재민은 말을 아꼈다. 지성의 말처럼 저도 스스로가 왜 이러는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었다. 단지 같이 있으면 즐겁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성에게 거부감이 일지 않는 것은 기묘했다.
매사에 신중했고 제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 능숙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어느 정도의 공감은 했지만 동요하지는 않았다. 그건 사회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게 아니었으니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성질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왜 얘 앞에서는 그게 잘 안 되는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자꾸 다 걸고 싶어지는 건 재민이 생각하기에 사소하지만은 않은 문제였다. 단순하게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이 무언가 변하는 것처럼, 그런 걸까. 명쾌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재민이 한동안 말이 없자, 지성은 두서없는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나도 형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요. 그래서 형이 왜 이렇게 말해주는지 몰라요, 근데 나는 진짜로 기대한단 말이에요."
"기대하면 안 되는 거야?"
"기대를 하면 꼭 실망을 하게 되잖아요…"
사람은 은연중에 자신이 겪어온 삶을 문장에 섞어 발화한다.
지성은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눈에 재민이 알지 못하는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구체적인 기반이 있는 참담한 우울에 젖은 어린 얼굴. 재민은 뿌리칠 생각도 하지 않고 동요했다. 또다시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멋대로 치고 나왔다. 내가 지금 느끼는 건 연민인가?
"사람을 죽인 건 이제 나도 다르지 않아. 잠긴 문을 열 수 있었는데 다시 열지 않았으니까."
확실한 건 하나였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
"이제는 혼자이지 않게 내가 같이 있을게. 그게 어디든."
실망이 뒤따르지 않는 기대가 돼주고 싶었다.
호흡이 흔들리지 않는 재민의 확신에 지성의 입술이 몇 번 우물댔다.
"형은 왜, 자꾸 그렇게 말해줘요…"
한 풀 꺾인 목소리가 머뭇대며 재민의 말을 수긍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네. 그에 맞춰 분위기를 풀려는 듯 일부러 가볍게 말하면 지성이 재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간간히 훌쩍대는 소리가 들려 재민이 등을 안았다. 방금 건넨 말들이 진심이었대도 상대의 모든 것을, 다가오지 않은 미래까지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믿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는 건 또 다른 재앙일 테니까.
형 우리, 살아요. 그래도 지옥보다는 여기가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자신은 지옥에 갈 거라며, 지옥에 가는 걸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티를 내곤 했던 지성은 태도가 자꾸 바뀌었다. 그렇지만 재민은 그 모순을 지적하는 대신 가만히 끄덕였다. 혼자가 아닐 때 겁쟁이가 되는 사람이 있다. 지켜야 할 게 있을 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처럼. 혼자인 게 더 익숙한 사람이 종종 그랬다. 재민도 그런 부류였다. 항상 단점으로 뒤를 따라다니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지성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게 증거였다.
우리 같이, 살자.
천천히 흘러나오는 가볍지 않은 그 말에 지성은 단어나 문장 대신 숨을 한 움큼 들이마셨다.
어떤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 . .
재민과 지성은 교회 놀이방에서 잠을 잔다.
예배당에는 긴 의자가 있었고, 예배당 바깥의 방 중에는 휴게실도 있었지만 바닥에 푹신한 아기 매트가 깔려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놀이방에서 자기로 했다. 식당 안쪽에 딸려 있다는 점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식당 출입문이 구석진 곳에 있으니 혹여나 누군가가, 무언가가 침입해도 기민하게 행동하면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그 덕에 그나마 마음을 놓고 잠들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식당과 바로 이어져 있으니 먹을 걸 챙기기에도 좋았다. 지성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재민은 가끔가다 아기들 장난감으로 놓인 인형이나 블럭을 만지작대는 지성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휴게실 옆에 있는 작은 기도실에서 가져온 담요들을 베개와 이불 삼았다. 보일러가 고장 난 교회의 곳곳에는 냉난방 기구가 있었지만 놀이방에 있는 것은 에어컨 기능만 됐다. 물론 아직 오 월이니 밤은 춥지 않다. 리모컨을 삑삑 눌러보며 히터 버튼이 없다는 걸 깨달은 지성은 그걸 두고 겨울에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재민은 그러게, 끄덕이면서 지성과 끌어안고 자는 추운 날을 그려보았다. 지성이가 들으면 추운 거 싫다고 말하겠지만. 아무튼 그런 게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치이익-
"……."
치익- 칙-
"오늘은 아무 것도 없네."
"응. 아무 것도 없어요."
첫날이 지나고 며칠 되지 않아 핸드폰은 신호가 잡히지 않다가 먹통이 되었다. 어차피 둘에게 연락이란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없으니 필요하지 않은 것이긴 했다만. 핸드폰은 이젠 라이트의 기능만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었다. 교회를 아무리 뒤져도 손전등은 비슷한 것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전기는 끊기지 않았지만 되도록 낮에도 불은 켜놓고 있지 않으려고 했으니 밤에 삼 층을 돌아다닐 때 꼭 필요했다. 그리고 상황이 그러니 식당의 주방에서 발견한 라디오는 송출이 될 때는 유용했다.
핸드폰 신호가 끊기기 전에 얻은 정보에 라디오에서 얻은 정보를 합치면 나름 상황 정리가 됐다. 미지의 집단에서 만들어낸 미지의 바이러스가 통제할 틈도 없이 서월시를 기점으로 퍼져나갔다. 바이러스를 만든 목적 불명, 바이러스를 퍼트린 목적 불명. 일의 발단 부분부터 구멍이 많았다. 불명. 두 글자를 갈겨 쓰던 재민은 참 여러모로 운이 나빴다고 여겼다. 하필 왜 이 나라의 이 도시에, 그 시간에 내가. 하지만 그렇게 따져보면 결국 그 운 나쁜 순간이 지성과 만날 수 있던 계기였다. 그래서 재민은 그걸 한탄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 사태에 혼자 남았을 이 애. 버스에서 혼자 눈을 떴을 박지성. 그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면 확실히 그게 더 끔찍했다. 우린 둘이라서 살았고, 둘이라서 살고 싶은 거야.
둘과 다르게 정말 운이 나빴던 바람에 바이러스에 감염된 개체들. 두 사람이 정의 할 정성도 없이 성의 없게 괴물이라고 부르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좀비'라고 불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그것과 다를 점이 없다는 이유였다. 뇌는 기능을 잃고 몸 전체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지배당한 듯 행동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보면 물어 뜯어 신선한 살덩이를 취한다. 그렇게 물리면 그들과 똑같게 변한다. 살점은 악취와 함께 썩어들어가고 시력이 점점 퇴화하여 청력에 모든 걸 의지하게 되는 그것. 어쩌면 애초에 그걸 모방했을 수도 있겠다. 재민도 지성도 그렇게 생각했다.
얻은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핸드폰은 진작 끊겼고 라디오는 아주 가끔씩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냈다. 둘은 교회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고 좀비를 직접 마주치지도 않으니 알고 있는 정보를 활용할 시간도, 새로운 정보를 알아낼 시간도 없었다.
"재민이 형."
"응?"
교회에는 예배당에만 창이 있었다. 아주 작은 창이 약간씩의 간격을 두고 벽에 나 있었다. 둘은 주로 놀이방에 있다가 라디오가 들을 만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예배당으로 자리를 옮겨 종종 그 창을 통해 밖을 살폈다. 망한 게 나라지 우주는 아니니 낮엔 태양으로 환했고, 밤에는 그래도 달이 비춰서 꽤 멀리까지 잘 보였다. 지금처럼.
재민은 보통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지성은 심오하게 두리번대다가 이렇게 한 번씩 재민을 불러왔다.
"물려서 좀비가 되는 게 나을까요, 다 먹혀서 사라지는 게 나을까요."
"……."
밤에 잠을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건물 앞 거리의 좀비들의 수는 매일 달랐다. 달빛과 가로등 빛에 의지해 조용히 그 수를 대략적으로 헤아려보고 있던 재민은 그 질문에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지성을 향해 돌아가는 눈동자에는 불안감이 일렁였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재민으로부터 대답이 없자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린 지성은 그걸 곧바로 알아채고 덧붙인다.
"아이, 잠시만요. 아니에요."
"지성아."
"약속 했잖아요. 우리 멋있게 죽기로. 그냥, 그냥 한 번 물어본 건데…"
쩔쩔매던 지성이 말을 흐리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 재민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창밖을 돌아봤다.
"…그래도 저런 거한테 먹혀서 없어지는 것 보다는 다른 게 낫지 않을까."
재민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에 대한 답을 남겼다. 좀 전까지 원하던 맥락의 대답이었음에도, 지성은 말을 마치고도 다물리지 않고 잘근대는 입술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말실수를 했다. 재민이 저를 잃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 우리 같이 살기로 했는데.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혼자인데… 나는 왜 바보같이 그런 걸 물었지.
형, 아니야. 나 죽는 거 싫어요. 그런 게 아니라 밖에 보다가 궁금해져서, 나,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요, 나 봐주라…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거리를 반걸음으로 줄이며 지성이 옷 소매를 붙잡는다. 절절하게 닿는 목소리에는 자책이 가득했다. 짧게 이는 두통에 재민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걸 바라는 게 아닌데 나는 자꾸 왜 이러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지성에게 예민함을 티 내고 마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치미는 죄악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천천히 몸을 돌려 눈앞에 둔 저를 찾는 지성을 안았다. 그러니 지성은 섧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재민은 지성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미안해. 물어볼 수도 있는 건데."
입술을 깨물어가며 재민이 말하면 횡설수설 이어지던 변명들이 뚝 멎었다. 바깥의 작은 소음들이 둘 사이를 채웠다. 이내 떨리기 시작하는 등에 흑, 하는 흐느낌이 딸려왔다. 안타깝게도 흐느낌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점점 길어진다. 결국 지성은 고개를 떨구고 재민의 목에 뺨을 댄 채 훌쩍였다. 기어코 울렸구나. 이제는 재민이 자책을 했다. 지성의 등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울지마, 응? 형이 예민하게 굴었어."
"나는, 형 밖에 없는데 왜, 왜 나한테, 그런 표정 지어요…."
불규칙적으로 떨리는 호흡에 말이 한 번씩 끊겼다. 말은 놓고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지성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재민이 모를 수가 없었다. 재민은 크지 않은 탄식과 함께 좌절했다. 지성이는 날 웃게 하는데 내가 뭐라고 얘를 울리는지. 가슴 속 어딘가가 문드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재민은 지성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읊조렸다.
"형이 잘못 했어. 우리 지성이 그런 뜻으로 물은 거 아닌 거 다 아는데."
재민의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 그에 지성이 젖은 숨을 억지로 눌렀다. 지성은 억울하고 서러운 반면 재민을 이해했다. 그러니 크게 탓하거나 실망할 수 없었다. 저였어도 재민이 그런 말을 했다면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였을 테니까. 명백히 자신의 실언이었다. 잘게 떨리는 손이 재민의 등을 끌어안는다.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참느라 힘이 들어간 손 끝이 세워져 재민의 등을 아프게 눌렀지만 재민은 내색하지 않는다. 그저 지성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형, 형 나한테, 폭발하는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애쓰며 지성이 말한다.
"…화내지 마요."
"응. 지성이한테 화 안 낼게."
"나한테, 나한테,"
화내지 마아….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재민의 이성이 무너진다. 이 와중에도 재민이 저에게 질려 할까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형이 나 두고 갈까 봐 무서워. 역시나 자그맣게 흐르는 그 말에 재민에게서 무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지성아, 형은 너 없으면. …….
재민은 지성에게 네가 아니면 살 이유가 없다는 말을, 죽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제가 방금 겪은 그 비참한 한 순간의 망상을 지성은 더 아프게 겪을 테니까. 그래도, 그 말 없이도 지성은 알아 듣는다. 안전한 이 교회에 자리를 잡고 버티는 것부터 지금 재민이 하고 있는 모든 것. 그것들로부터 지성은 재민이 곁에 자신이 있어서 이 말 같지도 않은 생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걸 안다. 불규칙했던 호흡이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창문을 닫았다. 제 품에서 울다가 제 품에서 울음이 잦아든 지성을 재민은 다시 놀이방으로 데려와 재운다. 지성은 재민의 손을 꼭 잡고 마치 제가 눈을 감으면 재민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감정을 소모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듯 그런 일엔 금세 지쳐하곤 해서, 역시나 오래 지나지 않아 까무룩 잠에 들었다. 그러면 재민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주고, 부은 눈을 마음 아리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재민은 결심한다. 다시는 나 때문에 울게 하지 않겠다고.
. . .
좀비에 대해서 아는 건 아직까지도 많지가 않다. 통신이 끊기기 전 알아낸 기본적인 것들에 창문을 통한 관찰로 알아낸 소소한 몇 가지를 덧붙이면 끝이었다. 그래도 나름 필요한 정보이긴 했다. 거의 퇴화된 시각보다는 후각, 후각보다는 청각에 의지하고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거. 몸이 부패할수록 더 느려진다. 그리고 몸이 부패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아마 여름이 가까워지는 탓일까, 지성은 생각했다. 여름엔 뭐든 잘 상하니까. 근데 왠지 그걸 대입하면 좀 역한 기분이 들었다.
좀비들이 썩어갈수록 거리의 악취는 심해진다. 악취가 심하다는 건 썩은 좀비들이 죽고 있다는 뜻이 되니 좋은 일이었다. 물론 이건 좁은 창을 가진 이 교회가 삼 층에 위치해 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좀비가 '죽는다'는 말은 아이러니했지만 재민과 지성의 입장에서는 그 말밖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힘겹게 몸체와 팔다리를 잇던 근육들이 툭툭 끊어지면 좀비들은 팔다리를 하나씩 떨구다가 몸뚱이만 남았다. 그 상태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점점 행동은 느려지다 정지했다. 그럼 저걸 굶어 죽었다고 해야 되나. 재민은 떫은 얼굴로 생각했다. 좀비를 정의하는 데에는 늘 난감한 일 뿐이다. 어쨌든 유월의 초입이니 아직은 그런 개체가 몇 없었지만 그걸 알아낸 건 희망이 되었다. 여름이 오면 좀 더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겠다 싶다.
가끔은 좀비 소리와 더불어 바깥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땐 창문을 꼭꼭 닫고 놀이방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 소리라고 해봤자 대개 비명 소리이거나 좀비로 변하는 소리가 주였고 가까운 곳에서 크게 들릴수록 재민은 지성의 귀를 막았다. 정신 건강에 안 좋아. 진지한 얼굴로 짐짓 그렇게 말하면 지성은 어이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나 그렇게 막, 순수하지 않다니까요."
비장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원래 그런 말 하는 애들이 제일 순수하더라. 재민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참아내면 지성은 가뜩이나 조용했던 목소리를 더 낮게 깔며 몸을 밀착했다.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
"말해봐."
"들어도 계속 나랑 있어야 되는데, 괜찮겠어요?"
"…뭔데 그래?"
덩달아 몸을 숙인 재민이 우물대는 지성의 입술에 귀를 기울였다. 금방이라도 말할 듯 분위기를 잡았던 지성은 잠깐의 망설임 끝에 털어놓듯이 말했다.
"나."
"……."
"살인자예요."
집중하지 않았다면 되물어야 했을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그래놓고 재민보다 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말을 하고는 곧바로 재민의 눈치를 봤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이번엔 재민이 피식 웃었다. 그래. 나도. 지성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빤히 보이게 불만 가득한 볼을 부풀렸다.
"나는 진짜거든요!"
"알았다니까? 나도 진짜야."
"아앙, 좀비 말고요! 사람! 사람을 죽였다니까!"
"우와 진짜? 나도 그렇다니까. 지성이 너도 그때 옆에 있었잖아."
"씨이… 그게 아니라구요…"
태연하게 지성의 말을 넘기며 재민이 장난을 치면 지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숙였다. 더 따지기에는 사람을 죽인 걸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 꼴이 될 것 같아서. 사실 여부를 따로 놓고 봐도 그건 이상했다.
재민은 조용히 웃었다. 상황에 적응한 뒤로는 대체로 의연한 태도만을 보여줬던 지성이지만 종종 이렇게 아직 어린 티를 내곤 했다. 속이 훤히 다 보이는 게 귀여워 보일 뿐이다. 지성이 사람을 죽였든, 좀비를 죽였든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렇대도 용기를 낸 지성에게 장난은 여기까지 해야 되겠지만.
단단히 삐졌는지 꾸물꾸물 재민에게서 멀어지는 몸을 답싹 끌어안았다. 그러면 또 쉽게 딸려왔다. 지성아. ……. 지성아. 왜요. 미약하게 바둥대는 어깨에 고개를 묻고 바라보면 부리처럼 툭 나온 불퉁한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지성이 진지한데 장난 쳐서 미안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건 어려워도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생각으로 대하는지 알아낼 수는 얼마든지 있었다. 지성이 생각하기에 말과 행동은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봐야 할 것은 그 사람의 눈, 그리고 목소리. 지성은 멍하니 재민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언제부터 형이, 나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말했을까? 지성은 그 변화의 시작점을 놓친 게 문득 아쉬웠다.
"난 지성이가 그런 걸로 나한테 거짓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장난일 거라고도 생각 안 하고."
"……."
"그렇더라도 괜찮은 거야. 네가 사람을 죽였다지만, 난 네가."
재민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아닌 척 기대감이 서린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지성에게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 눈을 피했다. 머뭇거리다 다시 열린 입술은 다른 말을 했다.
"…지성이가 그 일에 대해서 나한테 말해주고 싶다면 들을게."
"……."
그걸 알아챌 겨를도 없이 지성은 머리를 굴렸다. 기회였다. 재민에게 제가 지은 죄를 털어놓을 기회. 언제부턴가 지성은 더이상 십자가 앞에서 기도로 회개하지 않았다. 지성에게 구원이란 재민의 용서 뿐이었다. 이야기를 꺼낸 김에 지금 다 털어놓는 게 좋을까. 재민이 제 말을 추상적으로만 인지하고 있는 지금이라 괜찮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재민이 저와 있기 싫다고 하면, 그러다 떠나 버리면… 불안함이 가득 흐르는 생각만 하다 보면 풀렸던 긴장이 다시 숨통을 옥죄어왔다.
흡.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재민이 지성을 고쳐 안고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지금 말 안 해도 돼."
"나는, 으…,"
"숨 쉬고. 그렇지. 형이 약속 했지, 지성이랑 어디든 같이 있겠다고. 응?"
바짝 붙어 안으면 뺨과 뺨이 닿았다. 지성이 재민의 어깨를 쥐며 호흡을 정리하는 걸 여과 없이 느끼면서 재민은 고요하게 후회했다. 좋아한다고, 말해야 됐을까.
하지만 해끔한 지성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그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 . .
두 사람이 아무리 무난한 상황에 놓여 있었어도 심적으로 지칠 때는 많았다. 절망만 가득한 건 아니었지만 딱히 큰 희망도 없었다. 그게 유난히 버겁게 와닿을 때면 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요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가만 끌어안고 있곤 했다. 재민은 지치는 순간이 찾아올 때 지성을 보며 웃음 지었고 지성은 언제나 스스럼없이 저를 안고 달래주는 재민이 좋았다. 종종 그렇게 서로를 챙겼다.
그런 것 외에는 라디오를 켜보고 비상구 문단속을 하고 창문으로 바깥을 살피는 일 정도가 두 사람이 할 일의 전부였다. 씻고 식사를 챙겨도 남아도는 대부분의 시간을 놀이방에서 쉬며 보냈지만 심심해도 불평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안전하고 적당히 풍요로운 안식처를 가져놓고 그러는 건 배부른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두 사람 다 알았다.
구조는 오지 않는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군대는 마주친 적이 없었고 헬리콥터 한 번 뜬 적도 없다. 그러니 애초에 구조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는 말이 맞을 지도 몰랐다. 재난 상황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기적을 바라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으니까. 나라가 아예 망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고위험지역이라고 몇몇 도시 이름을 읊는 라디오 방송이 송출 되는 걸 듣고 재민이 중얼거리면 지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요 다 망했는데 또 일부는 엄청 망해서, 엄청 망한 일부를 버리려는 거 아닐까요?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정말 이대로 끝이라면, 정말 우리가 버려진 거라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암묵적으로 생각해보게 되는 시기였다.
"형, 나는 있잖아요."
눈을 감고 있는 재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재민이 지성을 끌어안고 누워있었으니 지성은 보고 있지 않아도 그 고갯짓을 느꼈다.
"제가 그날 어딜 가려고 했었냐면요."
"…응."
"바다에 가보려고 했어요."
지성은 이따금씩 이렇게 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예고 없던 대화 주제에 슬슬 잠에 빠져들려던 재민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날이라 함은 재민과 지성이 처음 만났던 날을 얘기하는 게 분명했다. 이 사태가 벌어진 날이기도 한 그날. 열아홉 살인 지성이 왜 그 시간에 사복을 입고 거기에 있었는지, 언젠가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그보단 지성이 제 얘기를 해주는 것을 듣고 싶은 마음이었다. 우리는 의도치는 않았지만 서로 모르는 게 더 많은 사이니까. 그만큼 더 알게 되고 싶은.
어둠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시야에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지성의 말랑한 뺨이 가장 가까이 들어왔다. 바다. 지성의 입에서 나오니 유난히 순수하게 들리는 단어였다. 재민의 머릿속에는 파도가 쳤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살았거든요. 바다에 데려가줄 사람도 없어서…"
"……."
"그래서, …그 김에, 마지막으로 한번 가보려고. 아."
마지막, 이라는 단어에 재민이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지성은 이어서 말했다.
"바다에 빠져서 죽으려고 했어요. 지난 얘기니까 뭐라고 하면 안 돼요."
"…뭐라고 안 해. 나 지성이한테 화 안 내기로 약속했는데."
말대로 재민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이 어린 애가 왜 그런 계획이 있었는지 가늠도 가지 않아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던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해 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날 우리가 만난 것만은 다행이다 생각했다.
"응, 그 약속 꼭 지켜주세요."
반쯤 졸음에 잠긴 제 목소리와는 다르게 지성의 목소리는 또랑했다. 그날 그리고 그날과 이어진 생각들에 잠이 오지 않는 듯했다. 그러니 재민도 잠을 쫓기 위해 노력했다. 지성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런 재민으로부터는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성이는, 아직도 바다에 가고 싶어?"
"네."
이미 혼자서는 많은 결론을 내려본 것만 같은 즉답이었다. 재민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럼 나랑 갈까?"
"…진심이에요?"
꿈에 잠겨 무책임하게 던진 꿈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여기에 계속 있을 수도 없고,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우리 지성이가 가고 싶었던 곳으로 가면 나도 좋을 거라고. 지성의 얼떨떨한 말에 재민은 느리고 잠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성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판단을 위한 상황 정리를 했다. 식당에 남아있던 먹을 게 점점 떨어져 가는 것도, 종종 고민해보는 다음 목적지가 공란인 것도 사실이다. 살아야 하니까, 둘은 살아야 됐으니까 어디로든 식량이 있고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야 했다. 만약 그게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은 지성이었지만 속으로는 벌써부터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실은 정말로 몇 번 혼자 상상해본 적도 있는 일이었는데 그 발화자와 동행자가 모두 나재민이어서 특별하게 다가왔다.
"대신에."
단호한 목소리로 붙는 조건에 지성이 재민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주한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하는 건 안 돼."
"당연하죠…"
진지하게 하는 말에 지성이 웃었다. 형이 같이 있는데 내가 그럴 리가요. 말로 하지 않더라도 지성이 이제 와서 그럴 리는 당연히 없는데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어 말을 돌려 하는 재민이 좋았다. 일순간에 경직됐던 분위기가 지성의 간단한 대답으로 풀어진다. 그러면 바다로 가자. 안정된 목소리로 재민이 둘의 미래를 정했다. 지성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민이 여전히 지성을 끌어안고 있었으니 재민도 그걸 느꼈다.
심장이 비슷한 빠르기로 두근댔다.
"지성인 바다가 진짜 좋은가 봐."
"……."
지성은, 그보다 재민이 좋았다.
바다야 아무렴. 이제까지 못 가본 거 앞으로도 못 간다고 문제 될 게 아니었다. 그보다, 지성은 재민이 좋아서 이러는 거다. 서로의 생을 잡은 사이. 그걸 놓고 싶지 않은 우리. 지성은 그걸 떠올릴 때마다 온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재민이 좋다. 어찌할 줄을 몰라서 품고만 있었는데 방금 전의 순간으로 크기를 주체할 수 없이 키운 마음이 본능을 따라 기울었다.
그러면 우리 바다 가서 뭐 할까. 정말 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묻는 재민을 향해 대답 대신 천 스치는 소리와 함께 돌아누우면 재민의 숨이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분명하게 눈이 마주쳤다. 숨이 겹치는 묘한 정적. 갈망하는 지성의 눈빛이 무언가를 암시했고, 재민은 피하지 않는다. 그에 자신감을 얻은 지성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움직여 재민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 쪽, 하는 소리가 작은 방을 울렸다. 재민이 픽 웃었다.
"너는 표현도 귀엽게 하네."
충동적이었지만 돌발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나름 큰마음 먹고 입을 맞춘 지성은 그 말이 무슨 뜻인가 긴가민가했다. 너무 애같아서 별로라는 걸까? 아니면 말 그대로 귀엽다는 걸까?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티를 폴폴 내며 미간까지 찌푸리면 웃음을 지우지 않은 재민이 틈 없이 안으며 한 손을 지성의 뒷머리에 가져다 댔다. 지성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는 줄 알았다.
"대답이 되면 좋겠다."
약하게 당기며 입술이 맞붙었다.
좀 전보다 조금 길고 진득하게 붙어있다 떨어지면 지성은 담요를 머리 끝까지 덮어썼다. 입술에 남은 말랑한 느낌에 온 몸이 간지러운 감각이 돌았다. 지성아 부끄러워? 큭큭 웃는 소리와 함께 재민이 지성을 둘둘 말린 채로 다시 안았다. 지성은 절대로 덮어쓴 담요를 치우지 않았다. 어차피 어두워서 보이지 않겠지만, 키스도 아니고 그냥 제가 한 것보다 길었을 뿐인 뽀뽀지만, …'그냥' 그거에 잔뜩 빨개진 뺨이 부끄러워서. 그러면 재민은 그 채로 지성을 안고 웃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잘 자. 아침에 보자. 늘 하던 일상적인 인사조차 설렘으로 다가왔다.
. . .
웬일로 이르게 일어나 예배당에 멍하니 앉아있는 지성을 기어코 찾아온 재민이 볼에 입을 맞추고 떨어지면 지성의 얼굴은 또 빨개졌다. 새벽에 숨긴 게 의미가 없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재민을 힐끔대며 괜히 입술을 삐죽댔다. 그러자 재민은 입술에도 입을 맞췄다. 씻고 온 건지 입술이 닿는 자리마다 물기가 남아서 지성은 눈을 흘기곤 손등으로 슥슥 닦아냈다. 벌떡 일어나선 기도실로 향했다. 한참을 아무 일 없이 지내놓고 재민은 지성이 먼저 행동하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한술 더 떴다.
두 사람은 그 뒤로 바다로 갈 계획을 세우느라 바빴다. 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고민할 것 없이 서월시에서 서쪽으로 가면 가깝게 있을 바다가 목적지가 되었다. 어떻게 가야 할 지가 좀 막막해서 걱정이긴 했지만. 정확한 지도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대로 책장 어딘가에서 찾아낸 십 몇 년 전 지도를 보며 골몰하는 재민을 바라보다가 지성은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형! 나 있어요! 단지 그렇게만 말하는 바람에 재민이 궁금한 얼굴로 돌아봤다. 대체 뭐가? 지성은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꺼뒀던 제 핸드폰을 가져왔다.
"내가 바다로 가고 있던 중이라고 했잖아요."
기분 탓인지 성능이 좋지 않아진 듯한 핸드폰을 켜서 갤러리에 들어가면 여러 구도로 지도를 캡처해놓은 게 있었다. 그때 형 만났던 버스에서 조금 더 가다가 이 버스로 갈아타면 마지막 정류장이 그 바다였어요. 이게 그 버스 노선도고… 빨간 버스긴 한데, 그래도 예상 시간 오십 분이었으니까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미리 다 준비가 되어있던 사람처럼 꼼꼼하게 짚는 지성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고속도로 타는 버스로 오십 분 거리인걸, 그냥도 힘들 텐데 좀비가 득실대는 이런 상황에 도보로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가더라도 타지였다. 가서 무슨 일이 생길지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거기도 상황이 그닥 좋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재민은 걱정하는 말을 하기보단 웃어주었다.
"한 번씩 쉬어가면 되지. 하루만에 가라는 법도 없고. 혹시 뭐 타고 가고 싶은 거 있어? 내가 다 운전해줄게."
"형 면허 있어요?!"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럼 그때 왜 버스 타고 있었어요?"
면허가 있다고 다 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건 아니라는 걸 이 고등학생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재민은 진심으로 궁금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지성에 당황한 듯 뒷목을 매만지다가 그랬다.
"글쎄."
"……."
"지성이가 거기에 있어서 그랬나?"
"헐…"
반은 장난으로 한 말에 지성이 크게 감동을 받아서 재민은 더 당황했다.
혹시 몰라 종이에 간략하게 베껴놓은 지도를 계속해서 확인하며 정확한 방향을 잡은 두 사람은 챙겨갈 식량을 나누고 남은 식량을 다 먹으면 곧장 떠나기로 했다. 결심한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다음으로는 '어떻게'에 대해 고민을 좀 했다. 진지한 말은 아니었어도 운전을 해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도로 상황도 알 수가 없었고, 창문을 통해 주위를 둘러봐도 탈 만한 차가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선 재민은 지성과 함께 창문에서 좀비들의 행태를 더 세세하게 관찰했다. 걷는 속도를 확인했고 물건을 던져서 소리에 대한 반응을 보기도 했다. 던지는 물건의 종류는 가지각색이었는데 성경책을 던진 날에 형 그거, 그렇게 던졌다가 벌 받으면 어떡해요? 지성이 뜬금없이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우리 어차피 지옥 갈 거라서 괜찮아. 그럼 재민은 담담하게 말했다. 언젠가 지성이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의 말이었다. 그래서 지성도 아. 그렇지. 하고 말았다.
관찰 결과 좀비들은 반응 속도도 이동 속도도 처음보다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이 정도면 차 같은 거 안 타도 피할 수 있겠다. 재민이 조심스레 결론을 내면 지성도 동의했다.
"걸어가도 되겠는데요?"
"……."
"장난인데…"
생각보다 속상해하는 지성을 달래느라 좀 대화가 길어지긴 했지만 둘은 긴 회의 끝에 반대편 건물에 기대 세워진 자전거 무더기 중에서 두 개를 골라보기로 했다. 시간이 여유 있진 않겠지만 거리에 좀비의 수는 많이 줄어 있었으니 무모한 듯 하더라도 영 가치 없는 선택은 아니었다. 마지막 여유를 즐기는 것처럼 창가에 서서 어떤 자전거가 좋을지 어처구니없는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몸체가 까만 자전거를 짚은 지성은 그래 죽더라도 걸어가다가 물려 죽는 것 보단 확실히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죽는 게 더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말로 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여길 떠나긴 하는구나.
생을 유지하는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놀이방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지성은 달빛이 스미는 천장에 눈을 깜빡였다. 신기하게도 마음을 떨리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설렘이었다. 먼저 잠에 든 재민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면 잠결에도 빈틈없이 마주 잡아 왔다. 신기한 인연이었다.
"…형. 그거 알아요?"
가장 평온한 낯의 재민에게 지성은 말했다.
"형이 내 구원이에요."
그리고, 형한테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대답은 없었지만 지성은 한결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함께 하는 재민이 꿈 같았다.
. . .
필요한 것으로 채운 가방을 등에 메고 무기로 쓸만한 걸 하나씩 들었다. 재민은 지성에게 공구함에서 찾은 망치를 들리고 자기는 어딘가의 벽에 붙어있다가 교체를 위해 떼어놓은 듯해 보이는 팔뚝 만한 십자가를 들었다. 그걸로 되겠어요? 차라리 이걸 형이 드는 게… 지성은 걱정하는 얼굴을 했지만,
훙-
"……."
훙!
"이건 좀 별론가?"
"아뇨…"
휘두르는 소리가 범상치 않아 말을 않기로 했다. 저걸로 맞으면 사람도 어디 하나 부러지겠다. 어쩌면 내 망치보다 셀 지도… 조용히 소중한 제 망치를 꼬옥 쥐었다. 그래도 재민은 칼 하나를 더 챙겼다. 혹시 모르잖아.
"다 챙겼어?"
"네."
"마음의 준비는?"
"했어요."
"잘했어."
과하지 않게 챙긴 짐을 등에 메고 둘은 첫날 잠갔던 비상구 앞에 섰다. 이때까지 실감 나지 않았던 긴장이 약하게 몰려왔다. 괜찮을까, 괜찮겠지, 괜찮아야 돼. 그래야만 했다. 재민은 담담하려 노력하는 지성을 가만히 바라보며 팔뚝을 꾹 잡았다가 놓았다.
"뭐가 튀어나왔다, 하면 망치로 머리를 깨버려."
"네."
"그게 힘들면 다리라도 걸고, 그리고 만약에 형이 물리면."
"……."
"……."
찬찬히 주의를 주던 재민이 말을 멈췄다. 만약 지성이를 두고 내가 먼저 물리게 된다면. 예상하고 싶지 않은 수였지만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 재민은 저를 두고 가라는 말도, 저와 함께 있어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나를 죽여줘. 그 말은 지성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급격하게 기분이 가라앉는 재민을 알고 지성이 망설이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난 기다렸다가 형한테 물릴래요."
제 이기적인 마음일까 재민이 고르지 못한 선택지였다. 재민은 지그시 제 입술을 깨물었다. 단호한 지성의 대답에 걱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성아. 아무래도 그것보다는,"
"아무리 바다여도 형이 없으면 이젠 의미 없어요."
"……그래."
속이 시원한 결론은 아니었지만 재민은 끄덕였다. 만약 지성이 먼저 물린다면 저도 그걸 선택할 테니까.
이제 가자. 다짐하듯 말하고 몸을 바로 했다. 재민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끼이익,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한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 청각에 집중했다. 다행히 느려진 좀비들은 징그럽게 그륵 대기만 할 뿐 움직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후. 짧게 숨을 뱉은 재민이 지성을 돌아본다.
"바로 뒤에 붙어서 잘 따라와야 돼. 혹시 뒤에서 뭐가 나와서 놀라도 바로 나 잡을 수 있을 만큼."
"응. 근데, 내가 앞에 서도 되는데."
"그래?"
"응!"
"자전거 탈 때는 양보할게."
…자전거 타면 뒤에가 더 위험하잖아. 위험한 걸 다 본인이 감수하려는 재민이 걱정이 됐다. 하지만 지성은 투덜대는 대신 끄덕인 뒤에 망치를 고쳐 쥐었다. 만약 제가 대신 위험한 순서에 들어갔다간 재민이 저를 더 신경 쓰느라 주의가 흐트러질 게 분명했다. 긴장한 듯 가슴팍에 손을 얹은 지성과 눈을 길게 마주친 재민이 고개를 돌리고 계단참으로 한 발 내디뎠다. 바로 아래층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서로 거리가 벌어지지 않게 노력하면서. 숨까지 참아가며 계단을 내려간 두 사람은 잠시 발을 멈췄다. 목전에 좀비 두 마리를 두고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두 좀비는 비슷한 계단에 나란히 서 있다. 본능적으로 재민은 십자가를, 지성은 망치를 꽉 잡았다. 지성이 꿀꺽 침을 삼켰다. 아, 장갑이라도 하나씩 챙길걸. 손에 난 땀 때문에 미끄러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다시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는 사이 재민이 조용하게 두 손으로 십자가를 쥐었다. 공격 준비 자세였다. 그러곤 지성을 돌아본다. 정해둔 적은 없었지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하나. 둘. 셋. 속삭이듯 들린 재민의 목소리와 동시에 휘두른 무기에 퍽 하는 소리를 동반한 더러운 피와 살점이 터져나갔다. 그게 제 얼굴로 튄 기분이 들어 지성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술을 손등으로 쓸었다.
캬아악!
끄륵, 키이익!
크게 난 소리에 위아래층에서 울음소리가 울렸다. …빨리 가자. 재민은 앞을 본 채 뒤로 손을 뻗어 지성의 손을 잡고 남은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탁탁탁탁, 주저할 것 없이 울리는 저와 재민의 발소리에 알 수 없는 이들의 발소리가 겹치는 걸 멍하니 듣고 있던 지성은 불현듯 초점을 되찾았다. 등줄기로 소름이 끼쳤다. 이제는 이게 현실이야. 정신 차려야 돼. 쉴 틈 없이 재민이 휘두르는 십자가에 계단으로 바닥으로 피가 깔렸다. 지성은 불편하게 뒤로 뻗어진 재민의 손을 놓고 망치를 쥐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작게 악 소리를 내며 뒤로 망치를 휘두르면 알고 싶지 않은 타격감이 느껴졌다. 축축한 게 와르르 무너지는 역겨운 느낌까지. 으으 등 젖은 것 같애… 울고 싶었지만 지성은 꾹 참았다.
형, 안 미끄러지게, 조심해요. 재민은 그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팍! 이번엔 지성이 휘두른 망치에 살점이 터진다.
"헉, 허억…"
"으… 우욱."
"흐, 왜그래? 어디 다쳤어?"
"아니, 그냥 좀 역해서요."
"조금만. 조금만 참자."
재민이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지성의 등을 쓸어내리려다 멈칫 한다. 더러운 피로 젖은 제 손을 몇 번 쥐었다 펴고는 그대로 거뒀다. 지성은 서운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가쁜 숨은 단지 계단을 내려와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일 층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 두 사람은 위에서 내려오는 인기척이 가까워지기 전에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란을 일으키며 내려온 탓에 문 앞에 몇몇 좀비가 모여 있었지만 위협이 될 숫자는 아니었다. 침착하게 머리를 조준해 든 걸 휘둘러 길을 텄다.
거리는 한산했고 썩어 문드러진 이목들을 끌긴 했으나 일부러 옆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달렸다. 자전거를 골라 타는 행동에는 일련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원래 골라뒀던 검정 자전거에 바구니가 달려 있지 않아서 지성은 옆에 있던 하늘색으로 자전거를 바꿔야 했지만 재민이 골랐던 분홍색 자전거와 잘 어울려 보여 불만을 갖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얼른 바구니에 가방을 던져 넣고, 십자가와 망치를 바구니 철망 사이에 꽂아 놓고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조금 주저하는 지성을 먼저 보내고 재민이 뒤따랐다. 그러느라 재민의 등 뒤 가까이까지 좀비가 모여들었는데, 그걸 모르지 않는 지성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 하고 불안하게 핸들을 꺾어댔다. 지성아 뒤 돌아보지 마, 나 신경 쓰지 말고 앞만 보고 가! 다 안다는 듯이 재민이 그렇게 말을 해야 움찔대던 고개를 가만 뒀다.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고 미리 약속했던 길로 두 사람의 자전거는 빠르게 달렸다. 그래도 지성은 뒤에서 자전거 바퀴 소리가 따라오는지, 재민의 비명이 들리진 않는지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 . .
얼마 동안 페달을 밟았는진 모르겠지만 체감상 반나절은 된 기분이었다. 점점 세워진 건물의 수가 적어졌고 따라서 좀비 숫자도 줄어들었다. 마침 힘이 빠질 때가 된 두 사람은 주위를 살핀 후 자전거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마지막 즈음의 커다란 건물 너머로는 고속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형, 그래도 우리 여기까지 왔어요. 지성이 빙긋 웃으면서 말하면 재민은 웃었다. 그러게. 바다까지 금방 가겠다 그치. 나른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지성은 긴장을 조금 풀었다.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던 고속도로가 바로 지성이 타려던 그 버스가 지나가는 고속도로였다. 그래서 종이 지도와 함께 남은 거리를 대략 계산해볼 수 있었다. 저 고속도로를 넘는데에 삼십 분, 고속도로가 끝나고 다시 이십 분. 물론 버스 기준이었지만 고속도로를 벗어난 뒤부터는 조금 돌아서 가는 노선도였기에 얼핏 비슷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드문드문 땅에 박힌 듯 서서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좀비들을 피해 자전거를 끌던 지성이 이내 멈춰 섰다. 그러면 한 손으로는 자전거를 끌고, 다른 한 손으론 지도를 보며 걷던 재민도 따라 멈췄다. 지성은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여기서 하루 보내야 될 것 같아요."
그에 재민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지성이 말하는 '여기'는 주유소였다. 도로와 두 사람이 있는 지점 사이에 놓인 주유소. 너머로 조용한 도로를 살피는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주유소의 뒤편이었다. 겉으로 본 것 뿐이지만 별다른 소란도 없었고 재민이 보기에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아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에 가까운 계절이니 아직 어두워질 시각은 아니지만 긴장한 상태로 자전거를 오래 탄 탓에 꽤 지쳐 있었다. 세차장이나 주유 기계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유소에 딸린 편의점이었는데, 아직 식량이 궁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것보다는 편의점 뒤에 달린 작은 사다리가 눈에 띄었다.
"안에는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우선 자전거는 아래에다 세워두고 저 위로 올라가 있자."
아직은 모를 일이지만 편의점 안에 좀비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괜히 여기서 소란을 만들면 도로 위의 무언가들을 깨우게 될 것 같았으니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예방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직 갈 길이 남았으니까. 도로든 건물이든 어디든. 멀리서 봤을 때 조용한 듯 보인다고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재민의 말에 지성이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러면 저 위에서 자게 되는 건가? …겨울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러면서 제 팔을 감싸 안아서 재민은 지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수가 없었다.
자전거를 넘어지지 않게 잘 세워 두고 얼마간 주위를 살핀 뒤에 재민 먼저 사다리에 올랐다. 등에 멘 가방에 피 묻은 십자가를 꽂아 놓은 채였다. 혹시라도 이 위에도 뭐가 있을 수 있으니까. 지성과 함께이니 모든 것에 주의하고 또 주의했다. 다행히 편의점 옥상에는 아래와 통하는 다락문 같은 것과 실외기가 있을 뿐 사람도 좀비도 없었다. 눈으로 탐색을 마친 재민이 빠르게 올라와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성아. 가방 형한테 주고 올라와."
나, 이거 메고 올라가도 괜찮은데. 재민의 배려가 조금 과하다 싶었지만 지성은 만류하려다가 말없이 가방을 올리고 사다리를 잡았다. 괜히 혼자 아래에 있을 때 시간을 끌면 옆에서 없던 것도 튀어나올 것 같아서.
낮은 옥상 벽에 기대앉아 두 사람은 잠시 긴장을 다 푼 채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라디오를 작은 소리로 켜놓고 멍하니 도로를 바라봤다. 치이이익. 치지직. 라디오 노이즈를 배경 삼았다. 어처구니없게도 노을이 지고 있어 나름 운치가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음. 잘 모르겠지만. 고속 도로 위 엉망으로 놓인 차들이 빽빽한 게 마치 함께 버스에서 내리던 그때 풍경과 흡사했다. 저 차들 사이사이에, 그리고 안에 좀비들이 숨어 있겠지. 하나가 달려들면 그 소리에 다 같이 벌떡 일어나서… 고요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끔찍한 상상을 하던 지성이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저기 지나갈 수 있을까요?"
무릎 위로 턱을 괴는 재민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을쎄에. 뜸을 들이는 말이 있었다.
"…아예 못 가지는 않지 않을까? 자전거 지나갈 틈만 있으면 되니까."
"형은 되게 긍정적인 것 같아요.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게 물론 아니구요."
풋. 지성이 멍하니 읊조리다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치면 재민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긍정적이야? 되물으며 무릎을 끌어안는다.
"그냥. 이럴 땐 긍정적으로 말하는 게 좋으니까 그러는 것도 있고."
사실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 너랑 있어서 그런 건데. 원래 나재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재민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지성은 여전히 생각이 많아 보였다. 물론 재민도 마찬가지였기에 지성을 이해 못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다. 그러는 대신에 그저, 저기에 좀비가 많을까? 간간이 그런 걸 물어가며 여유 있게 시간을 흘렸다. 어차피 고민 해봤자 고속도로 아래는 강이라 돌아갈 길도 없었고 둘은 서로 함께하지 못하게 되는 게 무서운 거지 죽는 게 무섭지는 않았다. 최대한 함께 살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애쓸 것이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러지 못하게 된다면, 선택지는 하나였다. 물론 그렇대도 물려 죽는 건 피해야겠지만. 그건 멋있지가 않아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재민은 가방을 뒤적여 작은 수건을 하나 꺼냈다. 생수를 하나 뜯어 제 손을 씻어내고 수건을 적셔 지성의 뺨에 문질렀다. 깜빡 졸다가 차갑고 이질적인 감촉에 숨을 삼키며 깬 지성이 놀란 눈으로 재민을 바라보면 묵묵히 핏자국을 닦을 뿐이다. 지성은 재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는데 재민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되려 간간이 눈을 마주쳤다.
지성의 얼굴이 말끔해지면 이번엔 손을 내밀게 하고 제 손을 씻었던 것처럼 그 위로 물을 흘려보냈다. 그 행동들을 지성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제 손의 핏자국이 모두 씻겨지면 자연스레 재민에게서 수건을 가져왔다. 재민은 저지하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고 지성이 가져가는 대로 내주었다. 더러워진 수건을 반대로 뒤집은 지성이 그 위에 다시 물을 적셨다.
"…너무 많이 부은 거 아니야?"
"……."
민망한 듯 못 들은 척을 하는 지성은 재민을 도로 제 옆에 앉히고 좀전의 재민처럼 제 다리 사이에 재민을 두고 바닥에 무릎을 댄 자세로 앉았다. 젖은 수건을 재민의 얼굴에 대려다가, 멈칫. 눈치를 보면서 물기를 꾹 짜내고 조심스레 재민의 얼굴에 튄 핏방울들을 닦아낸다. 하지만 지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손을 멈칫대더니 조용히 손을 내렸다. 재민이 의아한 눈으로 지성을 살피면 느긋하기도 다급하기도 하게 지성은 말했다.
"형 나요."
"응."
"아빠를 죽였어요."
"……."
재민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어릴 때부터 아빠랑 둘이 살았는데. 아빠가 딱, 그랬거든요.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맨날 술 마시고 도박하고 돈 잃고. 내가 아르바이트 해서 벌어온 돈 아무렇지 않게 뺏어가고 내가 안 주려고 버티면 때리고."
"……."
"다 때리면 마시던 술병을 꼭 던져서 깨고 나갔어요. 그거에 맞아서 다치기도 하고, 치우다가 다치기도 하고…"
갑작스레 꺼낸 얘기지만 오래 준비해온 말을 하는 것처럼 길게길게 말하는 지성은 어느새 조금 떨고 있었다. 재민은 지성을 당겨 제 다리 위로 앉혔다. 괜찮다는 듯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면 흐읍 숨을 들이마신 지성이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그런 게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면. 그거에 당하는 사람이 보통 주인공이니까. 어떻게든 벗어날 틈이 있잖아요.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이 돼서인진 모르겠지만, 왕자님이나 공주님이 찾아오든, 자기가 몸부림을 치든."
점차 흐느낌이 섞이고 호흡은 고르지 않다. 재민은 지성을 품에 안았다.
"나는, 나한테는 그게 현실이라서 그런가. 아무리 몸부림을 치면서 버텨도 왕자님도 공주님도 안 오고 맨날 맞는 거예요."
"……."
"……."
"……."
"…그게 내 마지막 몸부림이었어요."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그 날도 아빠가 들어와서 내가 숨겨놓은 돈을 찾는 거예요. 하지 말라고 내가 그랬는데 쳐다도 안 보고. 서랍장을 뒤지고 있는 그 등을 보는데, 보는데 맨날 잘 참았는데 그날따라 참을 수가 없어서, 내가.
"그만. 말 안 해도 돼."
"죽였어요… 내, 내가."
"진정해야지. 응? 지성아."
"흐윽… 내가 죽였어요. 아빠를."
뭐에 홀린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지성에게 재민은 무슨 말을 해야될 지 잘 몰랐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런 지성을 탓할 마음이 단 하나도 들지 않는다는 것. 덩달아 넋이 나간 재민이 지성을 안고 달랬다. 괜찮아. 지성이 잘못 아니야. 그 사람을 죽게 만든 건 그 사람이 저지른 죄고,
"형."
"…응."
"아빠가 죄를 지어서 나한테 심판 당한 거면요."
"……."
"내 죄는 누가 심판해줄까요. 나도 아빠처럼, 그렇게."
"……."
"……."
"죽을까요?"
제발. 그런 말 하지 말고. 그쯤부턴 재민도 울고 있었다. 머리가 어질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뜨면 저와는 비교도 안 되게 젖은 얼굴을 하고 있는 지성이 있었다. 재민은 눈을 다시 질끈 감으며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 아이한테 죄가 있을 리가 없다. 이 아이가 한 행동이, 죄가 될 리가 없다.
지성이 속을 까맣게 태워 가며 제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재민은 금세 다시 눈을 떴다. 머릿속이 온갖 잡념으로 들끓어 금방이라도 과부하를 겪을 것 같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선명하게 칠해졌다. 이 아이가, 지성이 뭘 무서워하는 지는 재민이 이미 아는 것이다. 지성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지옥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아이에게 해줄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재민은 떨리는 손으로 지성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우리는 죽지 않을 수 없어. 그러니까, 우린 살아있으니까."
"……."
"그런데 지성아. 알잖아.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거. 네 죄가 심판당할 때면 내 죄도 심판당할 거고, 우린 같이 지옥에 가겠지. 나는 네가 뭘 죽였든, 무슨 죄를 지었든 그냥 네가 좋은 거고."
"…윽, 흑."
"내가 만약 널 조금 더 일찍 만나서 그런 걸 다 봤다면, 내가 그 사람을 죽였겠지. 그랬을 거야 분명. …지성아. 그러면 넌 나한테 뭐라고 할래."
곧은 목소리로 제 생각을 말하는 재민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고 가쁜 호흡을 정리하던 지성은 그 물음에 간절한 몸짓으로 재민을 껴안았다. 젖어 망설여지는 목소리가 한참을 주저하다 흘러나왔다.
"내가, 형의 구원이 될게요. 내가 형을 구원해 줄게요…"
"그래. 지성아, 내가 너의 구원이 될게."
한 치의 갈등 없이 내리는 말에 지성은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재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네가 알았으면 좋겠어. 너도 나의 구원이야."
좀 전보다 더 차분하게 하는 말은 여실히 지성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한참을 서럽게 울던 지성은 문득 고개를 들더니 여태 쥐고 있던 젖은 수건으로 재민의 얼굴을 마저 닦았다. 남아 있던 핏자국과 함께 재민이 흘렸던 눈물까지 같이 닦여 나갔다. 다 닦아내고는 더러워진 수건을 아무 데나 휙 던져 놓고, 재민의 양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불안한 듯 응시하는 시선을 재민은 손으로 가려주고 저도 눈을 감았다. 눈을 가렸던 손을 옮겨 지성의 뒷머리를 약하게 눌렀다.
라디오는 언제부터인지 꺼져 있었다.
. . .
…그 자리에서 도망쳤어요. 아빠가 가져가려던 돈을 들고. 그걸 가지고 한동안 헤맸어요. 근데 그러면서 생각해보니까 이대로 계속 있으면 가장 끔찍한 전개가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바다에 가려던 거였어요. 내 삶에는 끔찍한 일밖에 없는데, 그 삶이 이어지면 계속 끔찍한 일만 생길 테니까요.
…….
내 손으로 결말을 지으려고. 바다에 잠겨서 죽는 건 꽤 마음에 드는 결말이었어요. 바다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상상만 해도 좋은 게 있잖아요.
그럼 지금은. 생각해둔 결말 있어?
결말은 안 정했는데요. …그냥, 형이랑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우리 그렇게 하자.
달빛보다 환하게 지성이 웃었다. 붓기가 남아있는 눈이 귀여웠다. 재민은 다정하게 웃으며 지성을 토닥였다. 우리가 살든 죽든, 같이 하자. 지성은 행복한 얼굴로 재민의 품에 안겼다. 처한 상황을 자꾸만 잊게 만드는 고요한 하늘, 그 아래 잔잔한 둘의 세상. 담요 하나를 나눠 덮고 가방을 베고 두 사람은 눈을 감았다.
그날 지성은 파란 바닷가에 재민과 나란히 앉아있는 꿈을 꿨다.
더는 아무것도 바랄 게 없었다.
/ lethatg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