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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도 살아야죠.”

 

그러니까, 나갈까요? 우리. 재민은 덜덜 떨며 가방 가죽을 꼭 쥐어 하얗게 질려버린 큰 손을 잡았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보다 어리리라 생각은 했지만, 곳곳에 두려움이 묻어있는 얼굴을 정면으로 보니 정말, 곧 쓰러질 것 같은 병아리 같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몰라도 혼자 두고 가면 절대 안 되겠구나.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맞잡은 손을 더 단단히 깍지 꼈다.

 

재민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저 뛰쳐나갔던 버스 안의 사람들은 원인 모를 바이러스인가 뭔가 감염된 사람들에게 저항할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물려 천천히 관절이 꺾이더니 눈이 뒤집히면서 사방을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물었다. 이리저리 엉킨 차 사이에 숨어있던 사람들도 좁은 공간에서 도망가지도 못한 채 살이 뜯겨 나갔다. 이거 섣불리 나갔다간 곧장 몸에 이빨 자국 새기겠는데. 눈깔이 뒤집혔는데 어떻게 알고 멀쩡한 사람들만 골라 물어뜯는 건지 의문이었다. 당장에 이 아이와 함께 나가서 저것들이랑 대항할 수도 없겠다 생각한 재민은 그것들이 우리가 버스 안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걸 최우선으로 잡아 버스 주위를 살폈다. 위급상황에 쓸 수 있도록 측면에 달아놓은 비상용 망치 세 개, 차량용 소화기 하나가 그나마 쓸모 있어 보였다. 최대한 효율적인 보폭으로 들고 온 재민은 아랫입술을 지긋하게 깨물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게 안 된다면. 재민은 자세를 낮춰 소년과 눈을 맞췄다.

 

“내 말 잘 들어요.”

“...”

“도로로 나가기에 너무 위험해서, 그러니까 우리는 올라갈 건데- 잘 따라와야 해요. 알겠죠?”

 

입술이 발발 떨리기만 해서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소년은 고개만 위아래로 흔들었다. 재민은 짧게 한숨을 뱉더니 냅다 비상용 망치로 버스 제일 커다란 버스 창문을 깨뜨렸다. 파편이 제멋대로 휘날리며 나는 소리는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들의 괴성 때문에 크게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계속 앉아있던 소년만이 깜짝 놀라 일어섰을 뿐. 재민은 깨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곳저곳 살펴보더니 상체를 쑥 빼서 창틀을 디딤 삼아 발을 올려 순식간에 버스 위로 올라갔다. 혼자 남겨지는 상황이 더 두려운 소년은 재민이 깨뜨린 창문 앞까지 다가갔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발 한 번 잘못 놀리다가 저 도롯가로 떨어진 상황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때, 위에서 재민의 손이 내려왔다.

 

“어떻게든 내가 끌어올려 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과격한 소음들을 뚫고 목소리를 내었다. 소년은 땀에 흥건한 손을 쥐었다 피며 불안에 떨었다. 이때 반쯤 열린 버스 문 사이로 그것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목을 긁으며 괴이한 소리를 지르더니 허리가 뒤로 꺾였다. 10M조차 되지 않는 거리에서 두 눈으로 목격한 소년은 신발 안에서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아, 어떡해. 어떡해요... 살려, 살려주세요.”

 

팔까지는 내릴 수 있지만, 머리까지 내리면 시야 확보가 잘 안 돼서 위험할 수 있기에 지금 재민은 버스 안에서 소년이 그것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목소리를 크게 해도 들릴까 말까인 이곳에서 소년의 작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들릴 수가 없었다. 한 발짝, 두 발짝. 위태위태하게 걸어오는 그것에 소년은 재민을 믿어보기로 했다. 상체를 창문 바깥으로 꺼내고 재민의 손을 잡았는데 휘청이다 잠시 아래쪽으로 고개가 돌아간 순간 바로 밑에 있던 그것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볼을 뜯긴 것인지 얼굴 살이 반쯤 너덜너덜한 상태로 위에 있는 자신을 향해 입질하는 모습에 털이 주뼛 서고 다리에 힘이 풀려 소년은 도저히 창틀을 밟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손은 재민이 단단하게 붙잡고 있어 놓치지 않았는데 정말 이도 저도 못 하다가 점점 다가오는 괴이한 것에 물어뜯길 것 같았다. 최대한 소년을 보면서 끌어올릴 타이밍을 잡던 재민은 소년과 얽혀있던 팔에 무게가 느껴져 다리가 풀렸다는 것을 알고선 괜찮다고 일어나라 소리쳤지만, 소년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도통 가벼워지질 않았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있다가 죽어요. 도저히 안 되겠으면 양손으로 제 팔 잡아요.”

 

말 마침표를 찍자마자 잽싸게 남은 손을 휘적거리며 자신의 팔을 잡는 것을 본 순간 재민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팔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열심히 근육을 단련한 재민이라 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손쉽게 소년을 올리기 힘들었다. 소년은 재민의 힘에 허벅지까지 창틀 밖을 억지로 빠져나왔는데 애매하게 걸쳐져 여전히 안에 머물러 있는 건지 밖으로 빠져나온 건지 이러다가 버스 안에 있던 것과 방금 눈이 마주쳤던 것에게 다 물어뜯길 지경이었다.

 

재민은 재민대로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비슷한 덩치에 자신보다 키가 큰 사람을 잡고 있기가 매우 고되었다. 소년의 상황도 상황대로 안 좋으니까 이리 힘을 못 주겠지 싶었다. 딱 한 번만 힘을 줘도 올라올 거 같은데. 그 순간 재민의 귀가 찢어지도록 울리는 굉음들을 뚫고 소년의 목소리다 싶은 비명이 들려왔다.

 

 

“아!!!”

 

소년의 품이 큰 후드가 방금 마주쳤던 그것의 손에 잡혔다. 소년은 이성을 잃은 사람의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에 덜컹거리며 도로로 끌어내려 질 것 같은 기분을 온몸과 정신으로 느꼈다. 재민도 덩달아 더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에 슬쩍 밑을 내려다보니 소년의 옷이 그것에게 잡힌 건지 아등바등하며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계속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하던 재민은 소년에게 소리쳤다.

 

“제발!!”

 

재민의 말을 들은 건지 안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소년은 저도 모르게 살려고 걸쳐져 있던 다리를 내빼고 버스 옆면에 긴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붙이고 버텼다. 이제- 이제 뭐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요. 반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재민은 어리둥절하게 소년의 행동을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곤 잘했다며 소년의 팔을 꽉 잡고 끌어올렸다. 사람이, 생명에 위협을 받으면 정말 뭐든 할 수 있구나.

 

소년조차 자신이 한 행동이 믿기지 않는지 바닥을 보고 숨을 헉헉대며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재민은 여태껏 자신이 버스 위에 있을 때 좀비의 위협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며 소년을 달래었다.

 

“위험했는데,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인 걸까요?”

 

소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며 재민에게 물었다. 정말 안심해도 괜찮은 걸까. 재민은 소년의 말을 듣고 소년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 도로에 살아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건 아닌지 싶을 정도로 멀쩡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재민은 소년에게 차마 대답할 수 없어서 다른 화재로 대화 방향을 돌렸다.

 

“후드 그거,”

“아... 계속 입고 다니면 위험, 위험하겠죠?”

“응, 벗어야 할 거 같아요.”

 

잠시 주춤거리다가 훌렁 회색 후드를 벗자 재민이 이른 새벽에 나왔거나 늦은 밤길에서 드문드문 봤던 교복이 보였다. 베이지 톤에 브라운으로 포인트를 준 나름 예쁘다고 하면 예쁜 춘추복 조끼에 달린 초록색 플라스틱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박지성. 소년의 이름이구나. 재민은 나름 현실을 받아들인 건지 아님 순간적인 각성인지 헷갈릴 정도로 제 앞에서 무릎을 감싸고 급하게 휴대폰을 두들기는 소년, 그러니까 지성을 쳐다보았다.

 

급하게 채팅을 치다가 전화를 거는 건지 한 쪽 귀를 검지로 틀어막고 남은 귀에 휴대폰을 대는 것을 몇 번 반복하다가 이내 두 손으로 휴대폰을 꼭 쥐며 덜덜 떠는 걸 바라보다가 재민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비릿하게 피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입가에서 턱 끝으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지성은 재민의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히익... 저 그 입술에 피...”

“아 괜찮아요,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많이, 나는데...”

 

지성의 말을 듣고 재민은 손등으로 입가를 훑었는데 턱에 흐르는 게 땀이 아니라 피였다. 아까 입술을 많이 감춰 물기는 했지만 이정도로 입술에서 피가 날지 몰랐던 재민은 급하게 제 흰 티로 피를 닦았다. 지성은 당황하며 흰 티에 피 잘 안 닦이지 않냐며 걱정했지만 재민은 웃어 보이며 괜찮다 하였다. 이미 흰 티는 방금 버스를 타고 오를 때 묻은 얼룩들로 가득해 재민의 피 색깔만 .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신의 옷에 피가 더 튈 수도 있겠다. 뭐 그런 생각까지. 버릴 옷이 되었다는 뜻이다.

 

급하게 몸을 피했다 하더라도 버스 위에서 버티는 것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사상자가 많은 사태면 지원이 올 재민은 저 멀리 도로를 달려가는 그것들을 보고 설마 서울까지 퍼지는 건 아닌지, 이러다가 전국적으로 확산이 된다면 정말 답이 없었다. 정부를 기다리고 여기서 있다간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일단, 저것들이 뭔지를 파악해야 했다.

 

“어!! 종천러 괜찮아? 응 나는 지금 버스, 버스 위인데... 응 나도 괜찮, 괜찮아.”

 

지성은 전화 연결이 극적으로 되어 천러라는 이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깜짝 놀라다가 반갑다가 절망적인 표정을 짓다가 울먹거리다가 재민을 쳐다보았다. 안 하고 가만히 눈만 마주치다가 전화가 끊긴 것인지 귓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재민에게 조금 다가왔다. 방금 지었던 표정들을 다 한 통에 넣어 휘저은 듯 지성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재민에게 말을 걸었다.

 

“저 괴물들... 좀비 같아요.”

“좀비요?”

“네... 막 워킹데드, 부산행 거기서 나온 그거…. 요.”

“그건 영화에서 일어난 일이지 아-.”

“네... 그렇긴 한데요 사람을 물어뜯고 물리는 순간 분간이 안 되는 걸 보니까... 너무 딱. 좀비... 같아서요.”

 

재민은 직업상 온종일 운동하고 뛰어넘고 구르고 생난리를 부리기에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걸 막 즐겨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부산행은, 재민이 출연한 영화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내용은 알고 있었다. 건물 벽면의 큰 유리창을 깨고 우수수 떨어지는 좀비들 중의 한 명인데 촬영을 할 당시에 스턴트맨들 사이에 압사당하는 줄 알았다. 분장할 때 어느 곳 하나 뜯기고 피 칠갑해서 촬영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정말 자신이 했던 좀비 분장과 액션이 지금 도롯가에서 서성이는 그것들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소리와 빛에 정말 예민하던데, 빛은 몰라도 자신이 지금까지 소리친 걸 보면 소리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까... 누구랑 전화한 거예요?”

“제 친구인데... 학교에 있대요. 도로보다는 안전할 거라는데...”

 

지성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절망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학교까지 살아서 갈 수 있을까요... 지금이라도 못 간다고 얘기를 해야 하겠죠 그쵸... 지성이 휴대폰을 켜려 하자 재민은 차분하게 말렸다. 언제 우리가 안전해질지 몰라요. 그러니까 배터리는 아껴두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일단 숨 좀 돌릴까요, 너무 놀랐죠.”

 

 

지성은 무슨 소리냐며 당장이라도 천러를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아까 자신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살아서 갈 방법을 구색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딱히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지만 지성은 자신도 침착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켜서 살아남아 안전하게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천러에게 문자를 보냈다.

 

X_내일까지 내가 안 오면

X_먼저 도망가

 

야속하게도 문자가 보내지지 않았다. 왼쪽 상단에 뜬 시계만이 제 기능을 다 하고 있었다.

 

PM 3:37

 

 

지성은 이제야 숨이 트였다. 정말 죽을 뻔했다고 자신도 좀비가 될 뻔했다고. 양반다리를 하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재민을 쳐다보았다. 저분...이 아니었으면 정말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다고, 되게 봉사 정신이 뛰어난 사람 같다 생각했다.

 

새벽 내내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성인이라는 것에 많은 불안과 생각을 안아버린 지성은 해가 뜰 때 자버리고 일어나니 이미 3교시를 넘어가고 있는 시간이라 아예 결석해버릴까도 했지만 얼마 남지 않은 고등학교 생활이 혹시나 미래의 자신이 아쉬워할까 봐 느직느직 학교 갈 준비해 버스에 올라타 버스가 좌회전하면 왼쪽으로 고개가 꺾이고 우회전을 하면 오른쪽으로 고개가 꺾이다가 빨간불에 멈춰서면 잠깐 정신을 차리며 꾸벅꾸벅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발라드를 들으며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노래가 끊겨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천러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박지성 어디야 너

 

“학교 가는 중이지 너는, 학교 맞아? 왜 이렇게 시끄러워...”

 

/지금 난리도 아니야 너...

 

지가 전화했으면서 지가 끊어... 어. 전화가 끊기고 자동으로 재생되지 않는 노래 애플리케이션 때문에 여태껏 들리지 않던 바깥소리가 지성의 귀로 무자비하게 들려왔다. 천러와 함께 통화했을 때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이 난잡한 상황들을 듣자니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버스 기사가 정차하고 차 안에 있던 승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불티나게 뛰어가는 걸음으로 전해지는 진동조차 온전히 느끼고 있는 지성은 잠자리를 뒤척이다가 꿔버린 악몽이라고. 곧 깨어나리라고 자신을 세뇌했다. 그때 재민이 지성을 깨우지 않았더라면 도롯가에 나뒹굴어 다니며 정신이란 것을 망각한 듯이 사람들을 물고 다녔을 것으로 생각하니 회상하고 있던 지성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저...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동생 같아서 지나갈 수가 없었어요.”

“동생... 동생이라 생각하셔도 좋아요! 근데 이름이...”

“나재민이에요, 스물 하나니까 말 편하게 해요.”

 

아... 나중에 편해지면 지금은 좀... 말 편하게 하세요. 그래 지성아. 어 뭐야 형은 제 이름 어떻게 아셨어요. 처음이 어렵지 말 한 번 하니 이래저래 대화가 매끄러웠다. 지성이나 재민이나 낯을 가리는 성격인데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마음이 편해지는 대화가 신기하다고 느꼈다. 극악의 순간을 함께하고 지금 기댈 곳이 서로밖에 없어서인지 당장 펼쳐진 상황을 둘 다 망각한 듯 열심히 떠들었다. 근데여... 어떻게 나를 막 끌어올렸어요? 형보다 키도 크고... 무게도 내가 더 나갈 거 같은데. 고것은 이제 힘이 아니라 기술이라 할 수 있지. 헐 대박 좀... 멋지네요. 장난이고, 직업이 스턴트맨이라 밤낮 상관없이 운동한 것도 있는데 그때는 상황이 상황이니까. 스턴트맨이여? 진짜 멋있다...

 

“저는 목표도 없구,.. 꿈도 없거든요. 부럽당.

“목표가 있고 꿈이 있어도 별 소용이 없는 사람도 있어. 나도 지성이처럼 급식 먹고 싶다.”

 

오이... 우리 서로를 부러워하네요, 근데 이러다가 둘 다 좀비한테 죽을 수도 있는데 뭔 소용이 있을까여, 지성아 그런 소리 하지 말자. 이상하게 끊긴 대화가 잊고 있던 현실을 깨우쳐줬다. 생각해보니 더는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목이 들끓는 짐승 소리만 가득했다. 우리 빼고... 그 많은 사람이... 지성과 재민은 두려움이 똘똘 뭉쳐 굴러오는 공포감과 다시 마주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지성은 무릎을 세워 몸을 둥글게 말아 다리를 감싸고 하늘을 쳐다봤다. 그와 동시에 재민은 일어나서 밑을 둘러보았다.

 

“노을이다.”

 

평소에 봤을 때는 엄청 낭만적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꼭 지구 멸망하는 거 같고 그러네요. 지성은 나름대로 담담하게 말을 건넸지만 잘게 떨리는 목소리는 어째 숨길 수가 없었다. 붉게 타오르며 천천히 하늘에 녹아가는 걸 보니 지성은 곧 찾아올 어둠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부모님 생각이 제일 많이 나면서도 쉽사리 연락하기가 두려웠다. 나도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부모님이라고 안전한 공간에 있으리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지성에게 연락을 한 사람은 천러 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쉽사리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한 번 우울해진 마음은 우물을 파 자신을 스스로 떨어뜨리고 끝도 없이 추락했다.

 

“지성아, 밑에 봐봐.”

 

재민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본 지성은 바짝 긴장했다,

 

“좀비들이 이상해.“

 

재민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밑을 본 지성은 눈을 껌뻑였다. 에 ... 나도 모르겠는데 확실히 느려진 거 같지. 네... 그런 거 같아요. 좀비들이 느려졌다. 당장 어떤 이유인지는 버스 위에서만 있을 수 없는 재민과 지성에게는 기회였다. 추측뿐이지만 소리를 못 듣는 거 같고 눈도 잘 안 보이는 좀비들이 느려진 것이면 부딪히지 않게 조심만 하면 충분히 버스 위보다 나은 곳을 찾을 수 있는 때가 왔다.“

 

“학교 가자.”

“...네?”

“학교 가는 길, 안내해줄 수 있지?”

“얼마 멀진 않은데... 괜찮을까요?”

“지금 당장 우리가 제일 잘 알고 넓은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배 안 고파? 급식실 가서 먹을 거 챙겨야지.”

“아..”

“친구도 학교에 있다며. 약속한 거 아니었어?“

 

 

.

.

.

 

 

 

“아 이걸 어떻게 해요 아 오바... 형 제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요. 진짜 와 저 지금 식은땀 나는 거 보여요? 으아 살려주세요. 진짜 오바 이렇게 학교까지 어떻게...”

“지성아, 진정하고 형 귀에 딱지 생기겠어.”

 

버스에서 겨우 내린 지성은 도로를 밟고 정면으로 좀비들을 마주하니 넋이 나가 눈을 질끈 감고 입에 10㏈ 정도 소리가 나는 모터기를 단 마냥 재민의 등 뒤에 딱 붙어서 재민의 귀 바로 뒤에서 중얼중얼 거렸다. 지성아 계속 직진이야? 네, 네...

 

이리저리 좀비가 기고 삐걱거리며 걷는 도심 한가운데에서 생각보다 손쉽게 이리저리 피하는데 지성과 재민이 노하우가 생긴 것인지 좀비들이 점점 더 느려지는 것인지 학교 정문 앞에 다다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문에 다다른 재민은 여전히 눈도 못 뜨고 있는 지성의 어깨를 두드리려다가 동공이 풀린 채 정처 없이 맴돌고 있는 좀비들을 봤다. 물론 방금까지도 본 좀비지만 교복을 입고 있었다. 중간중간 사복을 입은 좀비도 있는 걸 보니 학교에서도 시내에서만큼이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으리라 재민은 되려 지성의 눈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 이 광경을 최대한 보지 못 하도록 가렸다. 지성의 친구는 살아있을까. 재민은 착잡해졌다. 그래서 교복들을 볼 때마다 명찰에 적힌 이름을 유심히 봤다. 김민성, 유한영, 김대현...

 

“형 아직 덜 왔어요?”

“친구가 어디서 기다린다 했어?”

“네? 아 강당이요... 거기가 교실 건물이랑 사람도 많이 없는 거 같아서 네... 간 거 같아요, 아 형 근데 손 좀...”

 

재민은 지성의 말을 들었는지 더 단단히 지성의 눈가를 감쌌다. 강당을 가서 천러가 살아있는지 먼저 확인을 하고 이미 좀비가 된 상태라면 당장에 급한 것들만 챙기고 빠져나올 작전이었다. 같이 다닐 지성의 정신력이 흔들리고 주저앉는 것은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 같고 이유는 없었다.

 

드림고. 재민은 지성이 다니는 학교를 처음 들어와 다 크기가 있는 편이라 위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강당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1층은 급식실이었고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넓은 강당이 보였다. 지성의 눈을 가리고 있어 계단을 오르기에 속도가 느렸지만 굴러떨어진 공들과 이곳저곳에 칠해진 피 빼고는 조심할 좀비도 없어 다행이었다. 2층을 올라오자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강당이 보였다. 재민은 천천히 문을 밀고 들어가 주변을 살펴봤지만, 좀비고 사람이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강당 중간까지 발을 내릴 때 찰박거리는 작은 소리가 강당에 울렸다. 재민은 급하게 자신의 발을 뗐다. 뚝뚝 떨어지는 액체는 다름 아닌 피였다.

 

신발을 확인하고 강당 바닥을 확인하니 검붉은 피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니 강당 오른쪽 한 곳에 최소한 다섯 구는 되어 보이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시내에서부터 온갖 역한 냄새를 맡아 코가 적응한 건지 마비가 된 건지 평소에 맡았으면 구역질이라도 했었을 텐데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사실 냄새가 잘 나지도 않았다. 시체들을 좀 멀리서 보던 재민은 교복을 입고 있는 시체도 몇 구 있다는 것을 알고 혹시나 해 다가갔다.

 

피에 흠뻑 젖어서 명찰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명찰이 깨진 것도 있어 이름 확인이 어려웠다. 그때 저 멀리 모서리에 있던 매트리스 틈 사이에서 누군가가 야구 배트를 들고 달려왔다. 재민은 살아있는 생존자라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저희 사람이에요.”

“뭐래... 저 뒤에 달린 건 뭔데.”

 

교복을 입은 남자의 말은 꽤 당차 보였지만 야구 배트를 쥔 손이 진동기를 단 마냥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길게 찢어진 눈매 안에 들어있는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패기는 가득해 보였다. 좀비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재민의 뒤로 여전히 눈이 가려진 지성이 입을 열었다.

 

“...종천러?”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재민은 다급하게 제 앞에 있는 남자애의 교복을 확인했다. 종천러. 재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선 지성의 눈가에서 손을 떼었다. 지성은 갑자기 들어온 밝은 빛에 눈을 잠시 찡그리다가 그렁그렁해져 천러를 와락 껴안았다. 살아있었구나, 다행이다 진짜 종천러 나는 너, 너 죽은 줄 알고... 줄 알고... 야 박지성 나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야.

 

“그럼 지금 생존자가 우리밖에 없는거야?”

“아니, 한 명 더 있어요.”

“에? 누구인데? 나도 아는 사람이야?”

“이제노형.”

“내가 아는 그 이제노요? 아역배우?”

“네 그 이름 어디 흔한 것도 아니고.”

 

들어가서 얘기 더 나눕시다앙. 재민과 지성의 뒤에서 힘차게 미는 천러에 반항하지 않고 밀리다 보니 강당 안에 따로 마련되어있는 체육 관리실로 들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가방을 뒤적거리던 제노를 볼 수 있었고 지성은 이 순간에도 어색해했고 재민과 제노는 화들짝 놀랐다. 이상하게 뭉쳐버린 네 명은 이 학교 안에서 유일한 생존자들이다.

 

“형 잘 지냈어요?”

“똑같지 뭘 여기서 만나니까 반가운 건지 뭔지... 이상하다.”

 

둘 다 멀쩡히 살았으니까 반갑고 다행인 거죠. 재민과 제노는 서로를 보자마자 아는 체를 했다. 제노가 찍는 드라마에서 제노의 위험한 액션씬을 재민이 대신 찍기도 했지만, 제노가 액션에 열정이 많아 재민에게 많이 물어보기도 하고 같이 연습도 했었다. 재민은 함께 연습하면서도 이거 대역들 일자리 줄어드는 거라며 시작하기 전 제노의 긴장을 풀어주면서 막 친한 건 아니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정도의 사이였다.

 

 

생각보다 넓으면서도 좁은 체육 관리실은 말 그대로 체육에 관련된 운동용품들이 천지였다. 천러가 들고 있던 야구 배트를 시작해서 하키스틱까지 다양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제노를 기준으로 이렇게 하자 얘기도 없었지만, 자연의 윤리인 마냥 조로록 둥글게 앉았다.

 

 

“강당에는 좀비가 왜 없어?”

“시험 기간이라 강당에서 수업하는 반도 없었고 자습 째고 튄 양아치 애들밖에 없었어요. 천러랑 도망쳐왔을 때 같이 뛰어오던 애가 물려서 비틀거리는 걸 걔네들이 건드렸다가 다 물렸는데 말리다가 우리도 물릴 거 같아서 죽였어요.”

 

제노의 말이 끝나자 천러가 한 마디를 더 거들었다.

 

“한 대 치니까 안 죽더라고, 배트를 들고 있었으니까 그냥 막 때렸어. 때리다가 우리가 먼저 힘 풀려서 죽겠구나 싶었는데 머리를 때리니까 죽었어요.”

“머리를 얼마나 때렸는데?”

“...터질 정도로?”

“으...”

 

지성은 온 얼굴을 찡그리며 주먹을 꽉 쥐었고 재민은 심각해졌다. 혹시나 좀비한테 위협을 받으면 머리가 터질 정도로 가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팔이 뻐근했다. 뾰족한 것을 구해야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아날 것 같았다.

 

“저 가방은 뭔데?”

“으응 가방인데 뭐가 없네요, 평소에 가방은 안 들고 다니는데 가득한 걸 보니까 놔둘 곳이 딱히 없어서 가방에 넣어놓고 준비실 구석에 .”

 

준비실에 선생님 잘 안 들어오셔? 넹 공 같은 거 필요할 때는 체육부장 맡은 애들한테 시키지, 귀찮게 여기까지 안 와요. 수업 준비물 챙기는 게 귀찮으면 왜 선생을 ... 천러는 슬슬 재민에 대한 경계를 풀고 제노 대신 열심히 대답해주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체육한테 원한이 많이 쌓인 것 같았다. 재민은 담배가 있다면 당연히 라이터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제노가 뒤지고 있는 큰 주머니 앞 작은 주머니 지퍼를 열었다.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형광 가득한 반투명 라이터가 세 개 정도 나왔다. 어느 재난 상황에서나 필수적으로 유용하게 쓰였으니까... 재민은 라이터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저 밑에 있는 건 뭐야 라디오 같은데?”

“라디오긴 한데...”

 

 

라디오 만질 줄 몰라요.

 

천러가 말하고 제노가 끄덕였다.

 

지성도 마찬가지인지 재민을 보고 형은 이거 만져본 적 없냐며 물었다.

 

나 MP3 시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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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하나 스물 열아홉 둘만 있는 마당에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생존의 방향을 알려주던 라디오는 단순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강당으로 들어올 때도 이미 어두운 상황이었지만 창문 하나 없는 체육 준비실 안에 형광등 켜고 있으니 몇 시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휴대폰 배터리를 아끼려고 얼핏 본 것 같은 강당 맨 위에 시뻘겋게 숫자가 적혀있는 전자시계를 보려 재민이 문을 열려고 할 때 천러가 재민을 붙잡았다.

 

빛이 새어 나간단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니 제노와 천러가 입을 열었다. 좀비들이 빛에 강하고 어둠에 약하다고. 오전부터 강당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강당은 큼지막한 창문이 없었고 그나마 천장 근처에 달린 작은 창문들 사이로 간간하게 세어오는 빛이 전부여서 대낮에도 강당 형광등을 켜지 않는 이상 어둡다고. 강당에서 죽인 좀비들이 도망치면서 봤던 좀비들보다 훨씬 느렸다고 했다. 형, 이거 우리... 지성이 재민을 바라봤다. 좀비가 점점 느려졌던 게 착각이 아니었다. 제노는 무심하게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껐다가 켰다. 7시 32분이요. 날짜도 알려드릴까요? 2020년 9월 11일이요. 휴대폰 배터리 닳으면 어떡해. 보조배터리 있어요. 그래도... 꼬르륵. 대화하고 있던 재민과 제노는 어리둥절 놀라 시선이 가는 대로 천러를 봤다. 저 아닌데요. 6개의 눈동자가 지성을 향했다.

 

“아침을... 안 먹어서요...”

 

지성이 배를 문지르며 멋쩍게 웃었다. 8시에 내려가자 급식실이니까 뭐라도 있겠지. 재민이 모두에게 말하자 천러는 노래하듯이 줄줄 중식 메뉴와 석식 메뉴를 읊었다. 중식은 흑미밥 어묵국 대패삼겹숙주볶음 파채 무침 두부 양념구이 배추김치 석식은 비빔밥 삼색 수제비국 짜요짜요 배추김치. 여기 급식 끝내주네... 꼬록 꾸르륵 여기저기서 배가 난리 쳤다. 이게 다 종천러 때문이야.

 

“제노가 스물 아역배우로 삼학년 교실에 앉아있는데 반 친구들이 좀 다가오나? 아 더 불편하나...?”

“좀... 피하긴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제노형 놀아주잖아~”

“응 고오맙다 천러야.“

 

작년에 스케줄 조정을 잘못해서 수업일수를 못 채운 덕에 일 년 꿇어서 지성과 천러의 옆 반에서 자신을 선생님도 반 친구들도 어려워하니까 수능 공부나 열심히 해야겠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책상 위에 올려진 문제집만 보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성격 좋은 천러 만나서 학교에 재미를 붙였다고 말했다. 그거 기억나? 제노형 매점 한 번도 안 가봤다길래 내가 데리고 가서 맛있는 거 사주고 운동장 뒤뜰에서 놀았잖아~ 툭툭 치며 말하는 천러에 제노는 흐흥 하고 웃었다. 잠자코 얘기를 듣던 지성은 벌떡 일어서서 어쩐지 종천러 아픈 곳도 없는 애가 자꾸 보건실 갔다 온다고 그랬었냐며 종알종알 화를 냈다. 박지성 너가 제노형 어색해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천러의 말을 들은 지성은 반박할 말이 없는 건지 코를 훌쩍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성이랑 천러는? 어떻게 친해졌는데?”

 

흥미진진한 학교 썰을 열심히 들어주면서 질문까지 하는 재민에 천러는 신이나 광대가 봉긋 솟아올랐다. 나 중국에서 이민 와서 한국말도 잘 모르고 그랬는데 짝꿍이 박지성이어서 하루 종일 같이 붙어서 다니다 보니까 나는 다른 친구도 있었는데 박지성은 나 없으면 안 됐지! 아 야 종천러 진짜... 왜 맞는 말이잖아. 아니 그거보다...

 

“너 중국인이었어?”

 

네 저 한국 3년 차. 몰랐어요? 이름부터 한국인 아닌 거 같지 않아? 너 그거 되게 차별적인 말이야 천러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인이 있을 수도 있지. 내 이름 내가 중국인이라는데! 그래 그럴 수 있어... 천러가 재민에게 한 방 먹은 듯 파시식 식었다.

 

“형 얘기해 주시면... 안 돼요?”

“나? 나는 먹고살기 바빠서 딱히 할 얘기가 없어.”

“그래도...”

“8시 됐지? 슬슬 준비하고 나가자.“

 

재민은 반쯤 열려있는 술 가방과 담배 가방을 탈탈 털어 깔끔하게 비우고 어깨에 멨다. 제노도 남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재민을 따랐다. 천러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배트를 들었고 지성은 눈치를 보다가 불이 꺼지고 문이 열릴 때 담배 한 갑을 몰래 제 가방에 넣어두고 총총 따라갔다.

 

낮에 있었던 상황이 거짓말 같았다. 평화롭다는 말이다. 내려가 급식실 주방으로 가 문을 닫고 창문을 검은 앞치마로 덮은 뒤에 형광등을 켜고 대패삼겹살을 꺼내 한 상 차려 먹었다. 천러가 고기를 굽고 재민이 된장찌개를 만들고 제노가 그릇을 찾아 세팅하고 지성은 가만히 기다렸다. 입이 곧 터질 것 같이 쌈을 욱여넣은 천러는 팩 소주를 몇 개 들고 왔어야 한다고 오른손으로 소주잔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야 종천러 그래도 지금 좀비가 사방에 널려서 엄마아빠랑 연락도 안 되는데 그런 소리가 나오냐구... 밝았던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죄송해요... 근데 진짜 나나 다른 사람이 죽는 게 너무 무서워요... 살짝 눈물이 고인 상태로 제 감정을 말하는 지성에 제노는 고개를 푹 숙였고 재민은 지성을 달랬다. 누가 죽어 아무도 안 죽을 거야. 천러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난 죽는 거 안 무서워. 죽으면 죽는 거지 근데 지성, 죽지도 않았는데 죽음 걱정하는 거 시간 아깝지 않아?”

“아까워...”

“그럼 울지마.”

“그래 울지 말자 지성아.”

 

재민이 지성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려 상체를 기울이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아 괜찮아여... 제가 할게요.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그거 잠깐 울었다고 호흡이라도 가팔라진 건가. 지성은 고개를 저었다.

 

고기를 거하게 먹고 짜요짜요 주욱 짜 먹고 재민은 주방에 있는 칼도 챙겼다. 지성이 옆에서 기웃대자 작은 과도 하나를 쥐여주었다. 다음은 매점이었다. 매점에서 가방 지퍼가 반쯤 잠기다가 말고 양손과 품에 공간이 없을 때까지 들고 다시 체육 준비실로 올라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너무 과장되게 나온 거 같아. 아니지, 우리가 울트라캡숑인거지. 그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박지성이요~ 아 종천러 조용히해...

 

과자 봉지를 뜯고 넓게 펼쳐 놔두고 게임이나 하자고 했던 천러는 진작에 대자로 뻗고 제노는 얌전히 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잠에 빠졌다. 오전 2시. 평소라면 재민은 개인 운동하기 바쁜 시간이었고 지성은 침대에서 뒤척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깔깔 댈 시간이었다. 온종일 뛰어다니고 소리쳤으니 피곤해서 잠들법한데 사람의 습관이라는 게 무서웠다. 지성은 제 앞에 있는 콘칩을 한 두어 개 집어 먹으며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행동을 빤히 보던 재민이 먼저 말을 걸었다.

 

“지성아 너는 상황이 괜찮아지면 제일 하고 싶은 거 있어?”

“음...”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바닥에만 뒀던 시선을 마주 보고 있는 재민에게 향했다가 급히 거두었다. 더운 것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불편하다고 벗어던져 양말만 신고 있는 발이 끝부터 살살 꼬였다. 그... 그게... 지성은 결심한 듯이 비장하게 고개를 들어 재민에게 말했다.

 

“연애요.”

 

잠깐의 깡은 금방 식어버렸다. 재민의 눈을 5초도 못 마주치고 내려온 고개는 다시들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왜 이러는 거야... 막말로 재민한테 고백한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걸 얘기한 것뿐인데 지성의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설마 오늘 만난 형을 그것도 이 상황에 좋아하게 된 거 그런 거냐고 맞으면 대체 언제부터인데... 양반다리 한 무릎 위에 올려뒀던 손에 땀이 차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는 것을 반복했다.

 

“나도 하고 싶다.”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졸려서 잔다고 엎드린 지성에 재민은 팔을 뻗어 형광등을 껐다. 그저 수줍음이 많은 애인 줄 알았는데 착각했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강한 형광등 밑에서 고개를 숙여도 제철을 맞이한 새빨간 사과처럼 빨간 볼은 잘만 보였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 표정과 몸짓은 분명 사랑 앞에서 몸을 배배 꼬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근데 나는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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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아아악!!!!”

 

한 새벽에 여자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쪽잠을 자던 재민은 금방 눈을 떠서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칼을 하나 챙겨 일어섰다. 다른 아이들도 일어나 재민을 보고는 곧장 제노는 하키 스틱을 천러는 야구 배트를 손에 쥐었다. 지성은 제 가방을 메고 한 손에 작은 과도를 들었다. 강당 안에서는 좀비들이 느리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름 평화로웠던 곳에서 비명이 들린 것 자체로 온 세포가 바짝 긴장됐다.

 

“문 열게.”

 

철컥- 하고 열린 문 너머 넓은 강당은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운동장에서 난 소리일까. 재민과 제노가 먼저 몇 발자국 앞으로 슬금슬금 나아갔고 바로 뒤에서 천러와 지성도 주춤거리며 따라갔다. 강당의 중심 줄을 지성이 밟을 때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이, 이게 무슨 소리예요...?”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지성을 제외한 셋도 진동을 느껴 발걸음이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꽤 다급한 것 같았다. 강당 문 너머로 피 칠갑하고선 민소매로 된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강당으로 다가왔다. 제노는 미간을 찡그렸다. 저 여자 몸에 묻은 피... 다 자기 피인 거 같아요. 물린 자국이 너무 많아요. 제노의 말대로 여자는 얼굴을 시작해서 신은 것 하나 없는 맨발까지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이 진동을 저 여자 혼자 달려오면서 만들었을 리가 없을 텐데. 재민이 중얼거렸다. 여자는 문을 밀고 힘없이 걸어왔다,

 

“제발, 살려주세요...”

 

삐걱-

 

“죽기, 죽기 싫-.”

 

우두둑-

 

“아아악!!!!!”

 

여자가 또 한 번 비명을 질렀다. 한두 걸음을 디딜 때마다 여자의 관절은 기괴하게 꺾였다. 열 손가락이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가만있는 어깨에 귀가 붙을 정도로 목이 꺾이고 허리가 완벽히 뒤로 돌아가 바닥에 엎어졌다. 찰나의 고요함이 극도의 불안감을 가져왔다.

 

미친 광경이 펼쳐졌다. 학교에 있는 모든 좀비가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좀비가 강당 문에서 제 몸을 부딪쳤다. 동시다발적으로 너무 많은 괴물이 문을 미려고 하니 이리저리 뒤엉켜서 문이 열리지도 않고 곧 끊어질 활처럼 휘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폭탄 버튼을 누른 것 마냥 유리문이 터지듯이 깨졌다. 파도처럼 좀비들이 달려왔다. 뒤돌아 재민은 지성을. 제노는 천러를 잡고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제노와 천러는 체육 준비실로 뛰고 재민과 지성은 벽에 붙은 사다리로 뛰었다. 지성아, 가방 줘. 어깨 한쪽에 걸치고 사다리에 올라탄 재민은 세 칸 네 칸을 팔 힘으로 한 번에 뛰어넘으며 도착이 몇 칸 남지 않았다. 지성도 곧장 열심히 올라갔지만, 속도가 느려 위태위태했다.

 

이 순간 지성의 마음이 제일 급박했다. 이러다가 잡아먹히겠는데 벽에 딱 붙은 사다리를 올라가 보는 것이 게 처음이라 조금이라도 속도를 내면 기우뚱거려 넘어질 것만 같았다. 지성아!!! 재민이 위에서 소리쳤다. 그 순간 지성의 밑으로 좀비들이 몰려들었다. 좀비들끼리 깔리고 겹쳐서 작은 언덕처럼 만들어진 것을 저 멀리서 좀비가 달려와서 밟고 올라와 지성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재민은 들고 있던 날카로운 칼을 지성을 붙잡고 있는 좀비의 머리로 조준해서 떨어뜨렸다. 겨우 한 마리는 처리했지만 한 번 지성에게 관심이 쏠리니 체육 준비실 근처에는 좀비가 하나도 없었다. 제노는 어서 들어가자며 손을 잡았지만 위태로운 지성을 지켜보고 있던 천러는 탁 뿌리치며 한숨을 푹 쉬더니 턱 아래로 양 엄지손가락을 붙인 그대로 양손을 크고 둥글게 말아 입가에 붙이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이 바보야!! 꼭 살아서 보자!!!”

 

 

지성을 향해있던 무수한 좀비들이 휙. 천러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일제히 달려갔다. 제노는 다급하게 천러를 잡아당겨 준비실 문을 닫았다. 그 틈에 지성은 겨우 올라올 수 있었다. 죽다 살아난 지성을 재민이 끌어당겨 안았다. 고생했어. 씨이... 종천러 진짜 짜증 나... 그러다가 자기가 죽으면 어쩌려고... 점점 물이 차오르는 목소리에 재민은 안고 있던 지성을 살짝 밀어내고 얼굴을 바라봤다. 괜찮아, 다 살았잖아. 지성은 젖은 눈가를 문질러주는 재민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재민과 지성은 창문을 뛰어넘어 바깥 벽면에 붙어있는 비상계단으로 내려가 학교를 빠져나왔다. 형 이제 어딜 가야 할까요 아 헐 좀비한테 다 들리는 거 아니에요...? 큰소리에만 반응하는 거 같아. 아, 그럼 다행이네요. 분명 처음에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큰소리에 반응해 쫓아오는 걸 보면 좀비가 날이 지날수록 발전한다는 말 말고는 답이 될 게 없었다. 지금보다 더욱더 체계적인 계획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무언가 이상했다.

 

 

어제와 같은 시내를 걷는데 좀비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낮에 안 돌아다니는 그런 거로 바뀐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민은 연쇄추돌이 일어나 이리저리 어지러운 차들을 봤다. 계속해서 서월을 맴맴 돌며 살기보다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려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성아, 차 타자.”

“네? 형... 운전할 줄 알아요?”

“무면허로 널 어떻게 태워.”

“그래요 그럼... 믿을게요.”

 

연쇄추돌이 너무 많이 나서 가세에 있는 차들은 좀 멀쩡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멀쩡해 보이는 흰색 아반떼 차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을 살펴봤다. 차 키도 있고 좀비도 없고 기름이 좀 부족해 보였지만 언제 또 좀비가 바뀌어 쫓아올지 모르니 잽싸게 탔다. 타긴 탔는데... 내비게이션도 당연히 안 되고 휴대폰 먹통에 고전적인 지도까지 없으니 표지판만 보고 달려야 했다. 천천히 가다가 주유소가 있으면 기름 채워야지. 정말 말도 없이 막막한 상황인데 재민은 차를 타자 마음이 편해졌다. 이상하게 약간 신나기도 했다. 부산은 쫌 안전하지 않을까요. 제가 어릴 때 살았던 곳인데 맛있는 것도 많고! 바닷냄새도 나고 헐... 진짜 좋은 거 같아요. 착실하게 안전벨트를 매며 종알거리는 지성을 보니 재민은 웃음이 터졌다. 지성아, 우리 도망가는 건데, 그것도 좀비한테서. 지성은 민망한 듯 볼을 검지로 긁었다. 분명 오른쪽 볼을 긁었는데 왼쪽 볼도 붉었다. 아 맞네... 뭔가 갑자기 신나서... 혹시 모르니까 벨트도 안 해야겠어요.

 

“지성아, 우리가 지금 멀쩡한 걸까 이상한 걸까.”

“글쎄요 지금 상황에 멀쩡한 게 이상한 거 아닐까요?”

“네 말이 맞나봐.”

“네?”

“좋아해 지성아.”

“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맘속에 있는 말은 다 하려고.”

 

재민의 물 흐르듯 이어진 고백에 꽤 당황한 지성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머뭇거리다가 힘차게 재민의 어깨를 잡았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을 갈아 볼에 물들인 얼굴을 하고서는 나름의 박력이라고 어깨를 붙잡은 게 박지성만 할 수 있는 행동 같아서 재민은 살풋 웃었다. 지금 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든 인생에서 들은 말 중 제일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다.

 

“나도 좋아해요, 재민이형.”

 

어디로 갈까. 너랑 어딜 가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할 거 같은데.

 

 

 

 

부산을 종착지로 찍고 며칠을 차 안에서 지냈는지 모른다. 둘 다 휴대폰의 필요성을 잃어버려서 저 구석에 처박아놓고 지성의 가방 속 빵과 과자를 먹으며 지냈다. 가방을 비우다 보니 세상에서 제일 보고 싶던 가글이 나와 청결하게 뽀뽀도 했다. 가끔 도로에 나뒹구는 시체들만 빼면 정말 평화로운 여행길이었다. 서로의 인생사도 얘기하니 끝도 없었다. 어릴 때는 손만 커서 이러다가 키도 안 크고 계속 손만 크면 어떡하나 걱정했다는 현 180cm 남성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박장대소하고 살기 막막해서 하고 싶었던 배우 대신에 경쟁자가 상대적으로 없고 페이가 그나마 쏠쏠한 스턴트맨을 선택했다는 재민의 이야기에 지성이 울었다.

 

나도 안 우는데 네가 울면 어떡해 응?

형이 TV에 나와서 연기하는 거 꼭 보고 싶어요.

나 이제 너만 있으면 되는데, 그래도 지성이가 원하니까 꼭 보여줄게.

 

 

 

부산은커녕 이제 겨우 시월북도를 벗어난다는 터널이 70km 남았다는 소리에 신나서 막 떠들다가 지성이 가방에서 공책과 필통을 꺼냈다. 뭐 하려고? 버킷리스트 이런 건 너무 진부하잖아요, 우리가 진짜 안전해지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서로에게 한 마디 미리 적어주는 거 어때요?? 좀 신박하져. 그래, 너 형한테 뭐라 적어줄 거야? 에이 그걸 지금 밝히면 왜 적어요. 나중에 봐요. 나중에. 새 공책의 첫 장에 지성은 뭘 그리 고민을 하는지 한참 펜을 돌리다가 겨우 적어 내렸다. 공책을 받은 재민은 맨 뒷장에 망설임 하나 없이 썼다. 너무 대충 적는 거 아니냐며 지성은 인상을 잔뜩 썼다. 나중에 보고 울면 안 돼 울 지성이. 부루퉁한 얼굴에 툭 튀어나온 입술을 재민이 쪽쪽 거리며 집어넣었다.

 

 

 

 

 

 

“형 있잖아요. 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딱 두 개요.“

“응.”

“놀라지 마요 진짜 호기심이니까... 죽기 전에 궁금했던 건 풀고 죽어야...”

“무슨 소리야 그게 우리 안 죽어.”

“말이 잘못 나왔어요... 그러니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좀 궁금해서요.”

“뭔데?”

 

저 담배 펴보고 싶어요. 사뭇 비장하고 진지하게 말하자 곧 터널 들어가는 마당에 담배가 없는데 어떻게 피냐며 물었다. 그... 체육 준비실에 무더기로 있을 때 하나 집어넣었어요. 그걸 아직도 들고 다녔다는 사실에 더 놀란 재민은 굳이 나한테 부탁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지성은 재민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를 꾹 눌렀다. 저한테는 없는 라이터가 형한테 있어서요. 재민도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걸 기억하고 말하는 걸 보면 보통 호기심이 아니었구나 싶어 차 창문을 모조리 열고 라이터에 불을 붙여줬다. 앞이 타는 걸 보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깊게 빨아들이는 지성을 보고 놀란 재민은 지성이 들고 있던 담배를 가져가 팔을 뻗어 다리 아래 깊은 강가로 던져버렸다. 처음부터 연기를 그렇게 마시면 엄청나게 쓰고 아픈데... 가방 앞주머니에 있는 마이쮸를 뜯어 입에 넣어주려고 하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는 지성에 재민은 자신의 입에 마이쮸를 넣고 지성의 뒷목을 잡아 입술을 부딪쳤다. 지성은 갑자기 달달한 맛이 느껴져 눈을 떴고 혀로 열심히 마이쮸를 밀어주는 형을 빤히 쳐다봤다. 재민은 지성이 급속도로 괜찮아졌다는 걸 알고 안도하며 입술을 뗐다.

 

“지성아, 괜찮아?”

“아직도 써요.”

“애고 마이쮸 더 줄게 기다려봐.”

“...형 저 아까 그거 첫 키스에요.”

“응?”

“저 막 정신도 없고... 그래서 기억이 안 나는데... 한 번 더 해보면 안 돼요?”

 

키스가 기억이 안 난다며 한 번 더 해보자는 담배 냄새 나는 고등학생 애인을 어떻게 거절합니까. 재민은 방금과 똑같이 지성의 뒷목을 잡고 다가가 입술을 닿게 했지만 느리고 부드럽게 입술을 깨물어 벌리고 혀를 옭아매었다.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을 너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조금 지나 눈을 살짝 뜨니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지성이 너무 웃겨서 재민은 입술을 떼고 푸학 웃어버렸다. 지성아, 진짜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겠다. ...저도요. 근데 나머지 하나는 뭐야? 키스였어요...

 

 

 

 

 

 

“어 지성아 저기 터널이다.”

“헐 진짜요? 진짜 부산 갈 수 있겠다.”

“당연하지~”

 

다리를 건너는 차 아래에는 깊고 넓은 강이 들어찼다. 꽤 긴 다리에 지성은 저렇게 깊고 넓은 강물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다리를 지나고 곧장 터널로 들어서서 사방이 어두워졌다. 며칠 운전했다고 제 차처럼 자연스럽게 헤드라이트를 켜는데 바닥에 시체가 사방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좀비 있는 세상에서 살기 몇 주차인데 좀비 시체를 무서워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이상했다. 좀비 시체가 아닌 것 같았다. 눈이 훼까닥 뒤집힌 것도 아니고 물린 자국도 없는 시체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재민과 지성이 상황 파악을 하려 머리를 굴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마치 우리를 향해 쏘려는 듯 탄을 갈아 끼우는 소리가 났다. 군인이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항상 지성보다 이성적이고 침착했던 재민이 바싹 얼어 핸들을 꺾지도 브레이크를 밟지도 못했다. 액셀만 천천히 밟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옆에서 똑같이, 그보다 더 심장이 빨리 뛰어 터질 것 같은 지성은 냅다 재민이 손을 대고만 있는 핸들을 완전히 끝까지 꺾어 유턴했다.

 

“지성아,”

“나 총 맞아서 죽기 싫어요.”

 

남한테 내 목숨 뺏기기 싫어. 울먹거리는 지성에 재민은 다시 핸들을 붙잡고 오른쪽 발은 엑셀을 망가뜨릴 것 같이 눌렀다. 탕- 탕탕- 군인들의 다급한 총소리가 들렸지만, 유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터널을 빠져나와 겨우 보인 것은 방금까지 봤던 강밖에 보이지 않았다. 분명 터널을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고 하며 많은 행복이 떠올랐는데 이제는 눈물에 시야가 흐릿해져 옆에 있는 재민과 강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민도 마찬가지인지 속도를 주체할 수 없는 차는 강을 향해 달렸다.

 

 

형을 보면 꼭 운명이고 인연이라는 게 진짜 있는 거 같아요.

 

 

네 앞에서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 돼.

 

.

.

.

 

 

아아-. 오랜만에 인사하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정말 끔찍했던 식인 바이러스가 정부의 발 빠른 대처로 종식되었다고 하는데요. 이걸 듣고 있는 여러분도 저희도 모두 안전해서 다행입니다. 그럼 오늘의 사연! 들어볼까요?

/ 武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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