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면 저 같은 사람이 있겠어요?”
재민은 제가 뱉고도 참 실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름 모를 그 남자는 그걸 또 수긍하는 듯한 아아… 하는 소리를 옅게 내었다. 본인은 잘 모르는 듯했지만, 재민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어떤 말이라도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는 얼굴을 가지긴 했다. 눈을 뜨긴 했어도 잠은 덜 깼는지 남자는 멍한 눈으로 재민을 보다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어찌 보면 저 끔찍한 소리와 일제히 울리던 경고음에도 깨지 않은 걸 보면 잠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엽긴 했어도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재민은 창밖을 가리켰다. 여전히 기괴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거 보이죠. 여기 가만히 있다간 죽어요. 일단 여기서 내려야 해요.”
잠을 못 잔 탓에 날이 선 듯 예민한 목소리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재민은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그제야 바깥 상황이 눈에 들어온 듯한 남자는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헉, 하고 짧게 숨을 들이쉰 남자는 몸을 떨면서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민의 소매를 꾹 쥐었다. 제 옷 끝자락만 소심하게 잡은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어째 잠도 못 잔 저보다도 더 먼저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내리는 문 앞에서 둘은 밖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봤다. 파리한 낯빛의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여기서 나가면, 그다음은? 친분도 안면도 없는 둘이지만 지금은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한 생존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쌓여버린 유대감은 재민이 남자에게 동질감과 함께 연민을 느끼게 했다. 일단 둘이 최우선으로 알아야 할 것은 저 감염자들은 무엇에 반응하는가, 그것이었다.
재민은 평소에 겁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옆에 있는 고딩… 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학생처럼은 보이는 이 남자가 새파랗게 질린 모습을 보았기에 재민은 가방 안의 흔한 까만 볼펜 하나를 꺼내어 이제 사람이라고 부르기조차 힘든 형태를 한 감염자의 옆에 힘껏 내던졌다.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기보다는 달려들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듯했다. 볼펜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주변의 감염자들이 일제히 볼펜을 향해 달려들었다. 부피가 큰 물체가 아니었던 탓에 서로 엉겨지고 넘어지는 꼴이 참 가관이었다. 볼펜의 까만 잉크가 터지는 모습이 꼭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쓸데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잠재우고 재민은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을 대신 떠올렸다. 저 감염자들은 소리에 반응한다. 재민 옆의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재민은 한창 예민해져 있던 터라 알아챌 수 있었다. 볼펜이 날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던 감염자들이 소리가 나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든 것을. 혹시 시각이 발달했을까 싶어 조금 수그렸던 몸을 펴낸 재민이 옆의 남자를 힐끗 흘겼다. 덩치와 맞지 않게 커다란 백팩의 가방끈을 꼭 눌러 쥔 손이 실소를 자아냈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 웃는다면 미친놈 취급을 당할 게 뻔했기에 재민은 안쓰러울 정도로 꽉 쥐어 떨리는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그러쥐었다. 서툴기 그지없는 달램이었다. 그 작은 손길에도 몸을 퍼뜩 떠는 남자의 모습이 잔뜩 겁먹은 소동물 같기도 했다. 완전 애기네. 스쳐 간 생각을 무시하고 재민은 남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해서 내리면 될 것 같다는 손짓을 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도 막상 내리기엔 무서운지 한참을 머뭇거렸다. 지켜보던 재민이 남자보다 먼저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조심스럽게 한 발, 또 한 발을 내딛고서야 재민은 뒤를 돌아 남자를 바라봤다. 괜찮다는 듯 눈짓을 하자 그제야 남자도 재민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은 어디로 가야 좋을지 고민하다 재민이 먼저 남자의 손을 잡고 자신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당황한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재민을 바라봤지만 지금 상황에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얌전히 재민의 손에 이끌려 걸었다. 역겨운 소리와 광경들을 겨우 헤쳐나와 도착한 재민의 집은 다행히도 아직 감염자들이 도착하지 않아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뒤에야 재민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좀 늦은 질문인 것 같긴 한데… 이름이랑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저… 지성이에요. 박지성. 19살이고요… 그쪽은요?”
“저는 나재민이라고 해요. 21살. 편하게 불러요. 동생이네, 반말해도 괜찮죠?”
자연스럽게 말을 끌어가는 재민에 자신을 지성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저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지성은 아직 조금 낯을 가리는 듯 쭈뼛거리며 재민을 바라봤다. 그럼, 당연하지. 긴박한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여유로운 미소로 지성에게 답한 재민은 주변을 살피려는 듯 고개를 돌리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야근으로 인해 잠을 통 못 잔 탓에 지끈거리는 머리며, 지금 벌어진 일이며 좋은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 좁혀진 미간을 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덩달아 표정이 굳은 지성이 조심스럽게 재민에게 말을 걸었다. …형 근데. 그때였다. 또다시 시끄러운 경고음을 내며 둘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긴급 재난 알림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 감염자의 식인 행동, 감염자의 타액과 접촉 시 감염되는 것으로 추정. 어느 B급 감성 좀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은 꿈도, 영화도 아니었다. 사람도 아닌 듯한 소리와 행동들은 상상으로 만들어낼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재민은 시끄러운 알림 소리와 함께 더욱 지끈거려오는 머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편히 잠이나 자고 있을 수도 없었다. 식량과 식수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 재민은 지성을 지나쳐 화장실로 달려가 세면대와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았다. 항상 재난 영화나 공포 영화 같은 곳에서는 식수 부족 등으로 사망하는 무리가 꼭 하나쯤은 있었던 것을 재민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성은 멀뚱히 재민을 바라보다 작은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저… 형…? 그제야 재민은 자신이 데려온 지성에게 제대로 된 시선을 두었다.
“어, 어… 지성아 왜?”
“그… 저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그러게. 미래를 살아갈 구체적인 방법은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눈앞에 닥친 급한 상황만 벗어나려 했던 재민이었기에 재민은 지성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재민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충분히 피곤한 상황들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겪은 재민은 더는 아파져 오는 머리를 굴릴 자신이 없어 거실 소파에 등을 붙이고 앉아 눈을 감았다. 일단 조금만 쉬고… 한숨 쉬듯 내뱉으며 감았던 눈을 슬쩍 뜨자 어디에 앉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지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옅게 웃음을 지었다. 재민이 빈 옆자리를 힘없이 손으로 두어 번 치며 지성에게 말했다. 여기 앉아도 돼, 지성아. 온종일 야근만 하다가 온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든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지성은 그제야 쭈뼛대며 재민의 옆에 자리했다. 지성은 앉아서도 아직 긴장을 풀진 못하는지 바짝 굳어 손만 꼼지락대고 있었다. 마음 편히 잘 상황은 분명 아니었다. 잠이 올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나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굳이 따지자면 낯선 사람 쪽에 속하는 지성이 옆에 있음에도 왜인지 곁에 온기가 있으니 편해지는 마음에 재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빠져들었다.
지성은 재민의 옆에 앉았지만 어색함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재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눈을 뗀 사이 잠이 든 것에 한 번, 금방이라도 발등을 찍을 만큼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에 한 번 놀란 지성은 새삼스럽게 참 잘생겼다고 생각하며 재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감상했다. 사람이 이렇게 생길 수도 있구나… 멍하니 보기만 하다 정신을 차린 지성은 제 핸드폰을 확인했다. 가족에게 온 연락이 없었다. 다들 피하느라 바쁜 거겠지… 부정적인 상상들이 계속되자 지성은 억지로라도 자신을 위로하며 괜찮을 거라 믿었다. 그럼에도 급격히 몰려오는 걱정과 함께 떠오르는 생각들에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문지르지 마, 언제 깼는지 졸음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하며 지성의 손목을 잡아 내린 재민이 벌써 붉어진 눈가를 엄지로 아프지 않게 조심히 쓸어주었다. 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자신을 탓하는 지성의 말에 재민이 급히 말을 끊었다. 그런 거 아냐 지성아,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깼어. 그 말에 작게 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린 지성이 재민을 바라봤다. 왜 아파요? 잠을 못 자서. 그럼 자야지 나을 텐데 왜 깬 거예요… 그러게, 네가 울고 있을 것 같았나? 실없는 말에 둘은 동시에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밤이 깊어지자 재민은 지성을 자신의 침대로 데려갔다. 자신에게 맞지 않아 언제 수선이라도 해야지 하던 잠옷을 주고는 자신은 다시 거실로 가 소파에 누웠다. 지성은 당황하며 재민을 말렸다. 형, 아무리 그래도 제가 손님인데… 그 말에도 재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성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완강한 재민의 태도에 지성은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재민에게 말했다.
“형 그럼… 같이 자는 건 어때요.”
“어?”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본가에서 쓰던 것을 가져온 터라 제법 큰 사이즈의 침대는 두 사람이 눕기엔 충분했다. 재민은 지성에게 반박하려다 딱히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끄덕였고, 그날부터 둘의 의도치 않은 동거가 시작되었다. 첫 일 주일 동안에야 별 탈 없이 서로 말을 트고 사소한 얘기도 하는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서로 원래 하던 일이 어떤 거였는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취미 같은 건 있는지… 그러면서도 잘 시간이 다가오면 서로 뻘쭘해 하며 등을 돌리고 자기 일쑤였다.
2주째, 바깥 상황만 빼면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으나 조금씩 양이 줄어가는 식량을 본 재민은 곧 나가야 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통신도 끊겨버려 더욱 불안해하는 지성을 달래주었다.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 길고양이처럼 지성은 잠들기 전 침대에 누운 재민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형, 자요?”
“아직. 왜, 잠이 안 와 애기야?”
“아 형,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어색한 호칭에 지성이 볼을 붉히며 쑥스러워하자 재민이 옅은 웃음소리를 내며 지성을 돌아보았다. 왜, 귀엽고 잘 어울리는데. 이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선이 느껴지자 지성도 몸을 돌려 재민을 마주 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부끄러운지 시선은 슬쩍 피한 채 안 어울리거든요… 완전 오바. 라며 볼멘소리나 했다. 그것마저 재민의 눈에는 귀엽게 보였는지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재민이 지성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 뒤로도 짧은 수다를 나누던 재민과 지성은 어느새 본인들도 모르게 마주 본 채로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둘은 등을 돌리고 자는 일 없이 항상 마주 보고 잠들기 전까지 이야기하다 잠드는 것이 하나의 규칙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3주째, 갑작스러운 재난은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찾아와, 숨통을 조여왔다. 바닥을 보이는 음식들에 재민은 다음 주에는 나가봐야겠다 생각하며 늦은 밤 이미 곤히 잠든 지성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던 찰나, 잠든 줄만 알았던 지성의 눈이 떠졌다. …형? …자는 거 아니었어? 서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눈이 마주치자 놀란 탓에 어느 한 사람도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다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뭐 해. 그러게요, 진짜 완전 웃겨. 그 후는 짧은 정적. 그렇지만 어색하기만 한 정적은 아니었다.
한참 눈을 마주하던 중 재민이 정적을 깼다. 여기서 지내는 거 불편하진 않아? 3주나 지나서 하는 말치고는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지성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좀… 불편하긴 했는데요, 지금은 전혀 안 불편해요. 형이 잘 대해줘서 그런가… 짧은 틈을 주고 지성이 말을 이었다. 형은 저랑 있는 거 안 불편해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재민이 답했다. 안 불편해. 형은 너랑 있는 게 좋아. 질문과 틈 없이 이어진 답에 지성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봤다. 재민이 옅게 웃고선 말을 이었다.
“형은 어릴 때부터 혼자가 익숙했는데, 그게 좀 외로웠거든. 그래서 항상 언젠가 평생 같이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 사람이 생기면 동거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어.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럼… 저랑도 평생 같이 살 거예요?”
재민이 길게 눈을 깜빡였다.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지성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고서야 재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까, 형이랑 평생 같이 살래 지성아? 지성의 뺨에 순식간에 열이 올라 붉게 물들었다. 아 형… 갑자기 그러는 거 진짜 오바… 그래서 싫어?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됐지 뭐. 얼른 자자, 애기들은 많이 자야 한댔어. 애기라고 부르지 말랬죠. 그럼 뭐라고 불러.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너무 정 없다. 좀 없어도 될 것 같아요. 아냐, 사람 사이에 정이 얼마나 중요한데. 네… 그러세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둘은 사소한 말다툼이나 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재민은 꿈을 꾸었다. 지성과 함께 살아남아서 행복하게 평생 같이 사는 꿈을. 다음 날 아침, 재민은 빗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눈 깜짝할 새에 시간은 지나고 한 달이 되는 날, 재민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성아. 장난스러운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재민의 목소리에 지성이 바짝 긴장해서는 재민을 바라봤다. 왜요 형? 우리… 다른 곳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네? 놀란 눈으로 되묻던 지성이 어느새 텅 빈 찬장을 보고 아… 하며 탄식했다. 재민은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큰 배낭에 필요할 것 같은 것들을 모조리 넣었다. 손전등, 배터리, 우비, 라이터, 라디오, 담요… 또 필요한 게 있나. 재민이 가방을 꾸리는 사이 지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가족에게 연락을 넣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했어. 주머니에 핸드폰을 다시 쑤셔 넣고 재민의 곁으로 간 지성이 물었다. 형 근데… 저희 어디로 가요? 이미 정해두었던 건지 고민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재민이 답했다. 마트로 가야지, 먹고 살려면. 그럼, 갔다가… 다시 오는 거예요?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거야. 근데 솔직히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아… 지성이 짧게 내뱉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술 다쳐. 재민의 다정한 손길이 지성의 입술을 스쳤다. 자연스럽게 힘이 풀어져 물었던 입술을 놓고 얌전히 끄덕인 지성은 처음 재민을 만났을 때 메고 있던 가방을 찾아 안을 비우고 몇 가지 물건들만 담아 메었다. 갈까 지성아? 재민의 말에 지성이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서 끄덕였다. …네, 가요 형.
혹시라도 서로를 잃어버릴까 손을 굳게 맞잡은 둘이 현관문 잠금을 풀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피비린내와 썩은 시체의 냄새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코를 찔렀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악취에도 둘은 나아가야만 했다. 둘은 서로가 서로의 생명줄인 것처럼 꽉 붙잡은 손을 놓지 않고 큰 도로까지 숨죽여 걷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도 계속 보이는 끔찍한 광경들에 지성은 몇 번 헛구역질하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재민은 걸음을 멈추어 지성을 안고 괜찮다며 토닥여 위로했다. 가는 길이 험난할 것이라는 재민의 예상과는 다르게 오히려 거리는 우리가 알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했고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감염자들이 공격해오는 일은 없어 생각보다 순탄하게 마트로 향할 수 있었다.
차를 타고 갈 수만 있다면 해가 지기도 전에 도착할 수 있었을 테지만 소리를 낼 수 없다는 조건 탓에 걸어가던 둘은 서서히 찾아오는 밤을 막을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거리를 걷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더 어두워지기 전 둘은 근처 작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전기는 아직 끊기기 전인지 음식들은 모두 멀쩡했고, 진열대 한편에 있는 생필품도 파손된 것이 없어 필요한 것들을 챙길 수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기온이 내려가 서늘해지자 재민은 챙겨온 담요를 꺼내어 지성에게 덮어주며 작게 속삭였다. 슬슬 잘까? 오랜만에 오래 걸어 피곤했는지 감겨오는 눈을 끔뻑이던 지성이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든 지성을 바라보던 재민이 옅게 웃었다. 아직 어린 티가 묻어나는 얼굴을 보다 뺨을 쓰다듬은 재민이 작게 말했다. 평생 같이 살자는 거 진심이었는데, 꼭 그랬으면 좋겠다. 지성이 잠든 뒤에도 재민은 주변을 살피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재민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만, 지성에게 내색할 수 없었다. 일찍 일어난 척, 바깥 풍경이 밝아지자 재민은 지성을 조심히 깨웠다. 지성아, 아침이야. 지성이 조금 뒤척이는가 싶더니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게슴츠레 떴다. 잠이 덜 깬 비몽사몽 한 얼굴에 재민은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잠 깨고, 얼른 가자. 지성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재민이 담요를 다시 가방에 넣고 일어나 지성에게 손을 뻗었다. 지성은 졸린 눈을 끔뻑거리다 이내 재민의 손을 잡고 끄덕이며 일어났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지성이 재민의 손을 고쳐 쥐었다. 갈까? 준비됐냐는 듯 묻는 재민에 지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재민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얼마 안 걸려, 곧 도착할 거야. 어제보다는 덜 걸어도 돼. 재민의 말에 안심한 지성이 먼저 발을 움직였다. 그 걸음을 시작으로 둘은 다시 편의점 바깥으로 나왔다.
길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둘은 다시 마트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머물러도 되기는 하겠지만 언제 물건이 동날지 몰랐다. 최대한 소리 없이 가야 했기에 둘은 말조차 나눌 수 없었다. 한참 소리를 죽여 걷던 그때, 지성의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예상치 못한 소리는 둘을 위험에 빠뜨렸다.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감염자들에 재민은 재빨리 지성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껐고, 지성은 겁에 질려 사색이 된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재민은 지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린 채 큰소리로 외쳤다. 박지성! 그 소리에 지성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재민을 바라봤다. 정신 차려, 뛸 수 있지? 얼른 가자. 재민은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도 두려웠지만 여기서 침착해지지 않는다면 더 큰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걸 알았다. 빠른 속도로 둘에게 달려드는 감염자들에 재민이 지성의 손을 붙잡고 뛰기 시작했다. 지성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울음에 입술을 꾹 깨물고 달렸다. 눈을 감았다 뜨고 나면 모두 꿈이길 바랐다. 전부 없던 일이었다고, 지독한 악몽이었다고 누군가 말해주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염자들은 각종 미디어에 나오는 좀비들처럼 느리지 않았고, 따돌릴 수 있을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재민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점점 뛰기 힘든 기색을 보이면서도 재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어떻게든…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에도 재민은 최선을 다해 뛰었다. 체력이 다한 지성으로 인해 느려지긴 했지만, 쫓아오는 감염자들 또한 적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었다. 다리가 저렸다.
둘은 땀범벅이 된 채 구석진 곳의 폐건물에 몸을 숨겼다.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고서야 재민이 지성을 봤다. 지성은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고 있었다. 지성아, 형 봐. 재민의 목소리에 지성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숨이 아직도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재민이 지성을 안고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지성아. 그 말에 지성은 재민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한참을 울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형… 저 때문에… 재민이 지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우리 둘 다 안 다쳤잖아. 그러면 된 거야. 괜찮아…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야 지성이 숨을 고르고 진정했다. 이제 괜찮지 않은 쪽은 재민이었다. 둘 다 다치지 않았다고는 했지만, 재민은 이미 지성의 정신을 차리게 할 때 감염자에게 물려버렸다. 발목 쪽에 물린 탓에 뛰는 중에 힘들긴 했지만, 잘 보이지 않는 부위라 다행히 지성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지성이 자신 때문에 위험해질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지성과 떨어지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재민은 생각했다. 마트까지만, 마트까지만 몸이 버틸 수 있다면 지성이 다른 생존자들과 합류하게 한 뒤에 자신이 떨어지자고.
편의점에서 먹을 것과 생필품을 챙겨와서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폐건물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기에 챙겨오지 않았다면 앞으로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둘은 간단한 즉석식품으로 배를 채웠고, 재민은 지성을 먼저 재웠다. 전날 잠을 못 잔 데다 감염자에게 물린 상태로 온 힘을 다해 뛰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지성이 안다면 또 자기 탓이라며 자책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지성이 자는 것을 확실히 확인한 재민은 가방에서 붕대를 꺼내어 물린 발목에 감고, 양말을 최대한 올려 신었다. 몸이 변하고 있다는 건 지성과 함께 식사할 때부터 알았다. 평범한 음식은 먹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같이 먹고 있는 지성에게 눈이 갔다. 그걸 깨달았을 때 재민은 자신의 입안 여린 살을 깨물어 참았다. 아팠지만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빨리, 최대한 빨리. 완전히 감염되기 전까지 지성을 생존자 무리와 접촉시켜야 했다. 그날도 재민은 잠을 자지 못했다.
재민은 지성을 깨웠다. 아직 해가 다 뜨기도 전이었지만, 시간이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지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봤지만, 재민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상황을 넘겨버렸다. 지성은 별 의심 없이 납득했고, 둘은 다시 마트에 가기 위한 걸음을 옮겼다. 감염자들을 피해 정신없이 뛰었던 터라 마트에 가려면 원래 걸어야 했던 거리보다 많은 거리를 걸어야 했다. 걷는 동안 평소보다 피곤해 보이는 재민의 낯에 지성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봤다. 재민은 괜찮다며 웃었다. 한참을 걷다 재민이 걸음을 멈췄다. 맞잡은 손이 떨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본 지성이 재민을 돌아봤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형? 최대한 작게 속삭인 지성의 말에도 재민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 작은 움직임으로 끄덕이기만 했다. 재민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지성이 가까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재민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심하게 저렸다. 감염이 진행되는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재민이 떨리는 손으로 지성의 손을 그러쥐었다. 어떡하지 지성아… 형 너무, 배가 고파… 말하는 목소리마저 떨려왔다. 지성이 당황하다 가방에서 음식을 꺼내었다. 재민은 고개를 저었다. 지성아… 형 두고, 마트로 가. 물기 섞인 목소리였다. 지성은 그제야 눈치를 챘다.
"형… 설마, 물렸어요…?"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재민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끄덕였다. 그러니까… 얼른 가, 지성아… 재민의 말에 지성이 한참 침묵을 유지하다 내뱉었다. 싫어요. 예상치 못한 답은 아니었지만 직접 들으니 훨씬 착잡해지는 말이었다.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냐고 해야 할지… 핏발이 잔뜩 선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뜬 재민이 힘겹게 웃어 보였다. 그럼, 얼른 가자. 이럴 시간 없어.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난 재민이 휘청거렸다. 지성이 다급히 일어나 재민을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넘어졌을 것이다. 형… 괜찮아요? 괜찮아, 가자. 가쁜 숨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재민이 끄덕였다.
또 한참을 걸었다. 점점 다리에 감각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지성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더 힘들 것이란 걸 알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대형마트의 큰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하기에 재민은 다리를 절면서도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가는 길에 지성의 핸드폰이 또 울리는 사고는 없었지만, 죄책감 탓인지 지성은 계속 재민을 곧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럴 때마다 재민은 지성의 손을 고쳐잡고 엄지로 손등을 쓸어 괜찮다는 것을 표현했다. 걸음을 재촉한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마트에 도착했고, 둘은 마트 입구에서 사람을 마주쳤다. 아마 생존자 무리에서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사람일 것이었다. 문제는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남자는 둘을 막고 몸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지성은 아무런 말 없이 넘어갔지만, 재민의 몸을 검사하던 남자는 금방 물린 상처와 울긋불긋하게 튀어나온 핏줄을 발견했다. 감염 초기 증상이라는 것을 안 남자는 한 걸음 물러서 재민에게 총을 겨눴다. 재민은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지성은 어쩔 줄 몰라 하던 것도 잠시, 재민과 총을 겨눈 남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비키지 않으면 같이 쏘겠다는 듯 남자는 총을 거두지 않았고, 재민은 당황하여 지성을 옆으로 밀어내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 재민이 지성을 밀어낼 수는 없었고 재민의 계획에 없던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죽을 각오는 당연하게도 하고 있었지만, 지성이 막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총을 든 남자가 지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 그러다 죽어. 안쓰럽게 눈을 질끈 감은 채 덜덜 떨면서도 지성은 재민의 앞에서 비키지 않았다. …못 비켜요. 목소리까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성은 행동하는 지금도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자신을 한 달간 돌봐준 정 때문이라기엔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다른 감정이… … 지성의 생각보다 못 비킨다는 말에 반응해 방아쇠를 당긴 남자의 손이 빨랐다.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울렸다.
재민은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총을 쐈고, 지성은 재민 대신 총에 맞았다. 총알이 지성의 몸을 꿰뚫었다. 그것을 받아들인 순간 재민은 힘없이 늘어진 지성의 몸을 안고 몇 번이나 지성의 이름을 되뇌었다. 지성아, 지성아… 대답 좀 해봐, 응? 지성아… 제발… 미친 사람처럼 실성한 웃음을 내비친 재민이 아직 온기가 남은 지성의 몸을 껴안고 마트에서 멀어졌다. 조금이나마 거리를 두고서야 바닥에 주저앉은 재민이 점점 식어가는 지성을 품에 안았다. 안고 있으면 심박 수가 같아진다는 말을, 재민은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죽은 사람의 심장이 다시 뛸 리는 없었지만, 재민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재민은 품에서, 자신에게서 떠나지 말라는 듯 지성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감염이 얼마나 진행된 건지 울 것 같은데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눈에 핏발이 잔뜩 서 붉어졌음에도 눈물 한 방울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눈물 대신 피눈물을 흘리라는 듯이.
사흘이 지났다. 재민은 여전히 딱딱해진 지성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재민은 지성과 함께였던 날들을 곱씹으며 어느덧 차가워진 지성을 계속 응망했다. 이딴 거지 같은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 널 알았다면 어땠을까. 좀 더 행복한 일상 속의 너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사실 이런 흉한 모습이라도,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아도 너와 함께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너와 있을 수만 있다면 다 괜찮았는데… 재민이 지성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겹쳐 안았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지성아, 여기 지옥 맞나 봐.”
“나 같은 사람은 지옥에 있어도 너는 지옥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서, 네가 없는 여기가 지옥이 됐나 봐.”
“지성아, 보고 싶어…”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어.
/ 익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