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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뛰어들어야지."

 

 

예?

 

그의 말을 되새기기도 전에 재민이 잽싸게 기어를 변환했다. "가방 챙겨 지성아." 라이트는 그대로 켜둔 채, 재민이 곧장 후진을 시작했다. 차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자 운전석이며 보닛에 달라붙은 좀비들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달려들던 좀비들은 코앞에서 넘어진 좀비의 몸에 걸려 넘어지고, 그다음으로 달려든 무리들이 쌓인 육체들을 짓밟고 전진했다. 햇빛이 안 드는 완전한 암전이라 라이트를 켰던 터널 중간에서부터 몇 십 미터쯤 후진하는 동안 재민이 뒤쪽을 가리키며 비장하게 말했다.

 

 

"비상구 보이지? 저기로 들어가는 거야."

"열려있을까?"

"그래야지."

 

 

지성은 떨리는 제 목소리에 비해 단호한 재민의 음성을 들으며 패닉에 휩싸이지 않으려 애썼다. 젠장, 최악의 결과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지만, 후진을 멈추자마자 바로 차에서 내리라는 재민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내리기 전에 흘긋 돌아본 뒤쪽에서는 이미 좀비가 소리를 듣고 서넛씩 몰려오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상황. 차의 후진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기에 멈추었을 때 차와 좀비 떼의 거리는 불과 앞뒤로 몇 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지성은 차 문을 열어제끼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무기라곤 재민의 손에 들린 쇠몽둥이 하나뿐이었다. 둘은 서둘러 터널의 가로 달려갔다. 갓길에는 보행자용 비상구가 나있었다. 터널로 진입하면서 재민은 비상구 위치를 눈여겨본 것이다.

 

비상구의 입구는 도로보다 1미터 정도 안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먼저 입구 앞에 도착한 지성이 뒤를 엄호 받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너무 긴장해서인지 손에 땀이 흥건해 한번 손잡이를 놓쳤다. 그러는 동안 재민이 입구 바로 앞 자동차 진입 방지용 펜스에 부딪힌 좀비를 파이프 선단으로 밀쳐냈다.

 

 

"빨리!"

 

 

대부분의 좀비는 자동차 라이트에 관심이 쏠려 차창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하나둘씩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몰려온 녀석들도 있었다. 만약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둘러싸이게 생긴 상황이었다.

 

 

"형!"

 

 

손잡이를 돌리자 금속 긁히는 소리가 났다. 지성이 몸에 힘을 실어 무거운 쇠문을 반쯤 열고서 재민을 불렀다. 막 펜스를 넘어오는 좀비의 가슴을 찍어눌러 뒤로 넘어뜨린 다음 재민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뒷걸음질 쳤다. 재민까지 무사히 내부로 들어옴과 동시에 지성이 쇠문을 닫았다. 반사적으로 문을 잠그려고 보니 비상구 문에는 잠금장치가 달리 달려있지 않았다. 비상구이니 당연한 일이다. 좀비들은 인위적 장치를 이용할 지능이 없다지만 만약 우연으로라도 열린다면. 둘의 흔적이 끊기자 밖에서 서성이던 좀비의 소리도 이윽고 조용해졌음에도 지성은 좀처럼 문고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제 어떡해요?"

 

 

타던 차는 버려두고 왔다. 서월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는 셈이었는데 결국 터널 안에서 발이 묶인 셈이 되었다. 혹시 조금 전 우리가 최악의 선택을 한 거라면 어떡하지? 차라리 그대로 전속력으로 뚫고 지나갔거나, 계속 후진을 해 우리가 떠나온 지역으로 돌아갔더라면. 아니, 애초에 서월에서 벗어나지 않고 가만있었더라면. If는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사고를 장악했다. 지성은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다리에 힘을 주려는 노력도 그만두고 땅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절망이 함께 몰려왔다.

 

재민은 그사이 내부를 간단히 둘러보고 있었다. 위험요소가 없음을 대강 확인한 후, 그가 문 앞에 지성과 마주 보고 쪼그려 앉았다. 지성의 호흡은 긴장으로 아직 정돈되지 않았고 얼굴엔 울고 싶은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 지성을 안심시켜주려는 듯 그가 어깨를 두드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괜찮아, 우리 맞게 온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지성아."

"그래도 이제 에너지바나 물도 다 떨어져 가는데..."

 

 

에휴. 재민이 볼을 가볍게 꼬집어주었다. 파이프를 쥐고 있던 그의 손가락에서 쇠 냄새가 올라왔다. 아니, 피 냄새인가.

 

 

"형이 언제 널 못 살린 적 있었어?"

 

 

더없이 확신에 찬 어조였다. 그 말이 맞았다. 가장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에서도 그는 지성을 데리고 나왔다. 교실 책상 아래 숨어 나가지 못하고 있을 때도, 한강 다리 위에서 고립되었을 때도 그랬다. 좀비 사태 발발 후 몇 주나 되는 시간 동안 심각한 부상 없이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건 다 옆에서 이끌어준 재민의 덕이었다. 그때 혼자 버려졌다면 그 가능성에 대해선 상상하기도 싫었다.

 

 

"우리가 죽어도 여기선 아니야."

 

 

재민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건지, 제3자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태도로 중얼거렸다. 그가 따라오라는 듯 지성에게 고갯짓을 했다.

 

터널의 보행자용 비상구는 맞은편 터널과 이어지는 문만 나있는 게 보통이었다. 양쪽 터널을 잇는 통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공간 한쪽에 문이 나있었다. 출입 금지라든가 위험구역이라는 표시가 되어있지도 않았다. 재민이 벽면과 같은 시멘트 빛 회색으로 칠해진 문을 여니 좁은 통로가 보였다. 곧장 지하로 계단이 나있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 그가 겁 없이 발을 뻗었다.

 

 

"한번 내려가 보자."

"조심햇!"

 

 

지성이 작은 목소리로 경계했다. 이런 외길에서 좀비라도 마주친다면 그야말로 낭패다. 그러나 반대로 이 좁은 일직선 통로에선 무언가 튀어나오기도 쉽지 않았다. 재민이 두세 걸음 내딛자 센서가 작동했는지 천장 형광등 하나에 새초롬히 불이 들어왔다.

 

 

"아까 위에도 전등이 켜져 있었잖아. 터널 조명은 다 나갔는데. 이 안에선 전력이 아직 돌아가는 거야."

 

 

아마 안에는 좀비보단 사람이 있을 확률이 더 높다는 뜻이겠다. 어느 쪽이 더 위험한가는 아직 모르지만.

 

지하로 1.5층 정도를 걸어내려가 그들은 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반투명 유리창이 나있는 철문 안에선 확실하게 노란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재민이 지성을 제 등 뒤에 바짝 붙였다. 한번 시선을 교환한 다음 똑똑, 문을 두드렸다. 잠깐의 침묵 후 문 앞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박지성은 맨 처음 기억을 떠올렸다(세상이 뒤집히면서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이제는 좀비 이전의 기억을 거의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대피 방송이 울리기도 전에 학생들이 교사 바깥으로 앞다투어 뛰쳐나갔고 어디나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지성은 나갈 타이밍을 놓쳐 간신히 책상 아래 몸을 숨겨 떨고 있었다. 교실에는 친구들의 시체가 몇 널브러져 있었으며, 교탁 앞을 서성이는 좀비는 금방이라도 이쪽으로 달려들 것만 같았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지성이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하얘졌다.

 

그때 혼란한 복도에서 누군가 교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제정신인 사람들은 다 건물 밖으로 나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재민은 첫 등장부터 구세주 내지는 난세의 영웅 같았다. 겉모습은 좀 불온했다. 그는 긴 마대자루 중간을 부러뜨려 끝을 뾰족하게 만든 것을 한 손에 들고 하얀 교복 셔츠에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재민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좀비의 배를 있는 힘껏 찔러 관통시킨 후 발로 차 바닥에 넘어뜨렸다. 피가 튄 손을 탁탁 터는 재민과 책상 위로 머리를 빼꼼 내밀고 훔쳐보고 있던 지성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후 지성은 그의 손을 잡고 학교 뒷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집에 도착해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지성이 물었다.

 

 

'왜 왜 형이 저를 도와주세요?'

'응? 왜냐니, 그럼 죽게 내버려 둬?'

 

 

그게 아니고 물론 감사하지만 말끝이 흐려졌다. 재민이 그를 도울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둘은 같은 학교에서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눠본 적도 없는, 남과 다름없는 사이였다. 그전에도 서로를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아마 관계될 일은 없을 것이라 단정 짓고 있었다. 지성의 옷장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갈아입은 재민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 친구가 죽었거든. 혼자가 됐지 뭐야. 앞으로 같이 움직이자. 나쁘지 않지?'

 

 

더운 밥 찬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재민이 꼭 찬 밥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의 의도도, 심중도 오리무중이었으나 가장 놀라운 건 재민의 능력치였다. 요 몇 주간 그는 꼭 이 사태를 몇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처럼 준비되고 단련되어 있었다. 분명 저와 같은 고등학생인데도 좀비들을 찌르거나 때려눕히는 데에 기겁스러울 만큼 주저함이 없었고 어깨너머로 대충 배웠다며 차를 운전할 줄도 알았다.

 

지성은 점차 어느 길이든 앞장서 걷는 남자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목숨을 내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민에겐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지성을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지성을 해하고자 했다면 어떤 행동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재민은 지성을 귀찮아 하기는커녕, 회사에서 발이 묶였을 부모님을 찾으러 가야 한다는 지성의 의지를 따라 안전한 집을 떠나 한강 다리를 함께 건너 주기도 했다. 생존력이 바닥인 지성이라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형 옆에 딱 붙어있어야 한단 것쯤은 본능으로 알았다. 다만 지성은 가끔 학교에서 죽었다는 재민의 친구를 떠올렸다. 나는 그 친구 대신으로 즉석에서 간택 받은 걸까? 단지 외롭거나 심심해서 동행이 필요했을 뿐일까. 형에게는 상대가 누가 되든 아무나 상관없었던 걸까?

 

 

 

 

지성이 묽게 끓인 오뚜기 크림수프와 냉동 빵 몇 조각을 꼭꼭 씹어 넘겼다. 급식을 받아먹을 적엔 꽝 취급하는 메뉴 중 하나였는데 오랜만에 맛보는 음식 맛이 각별했다.

 

그들에게 문을 열어준 것은 덩치가 거대한 중년 아저씨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친 게 권총의 총구였기에 뒤에 숨어있던 지성은 흠칫 놀랐으나, 재민이 차분하게 대응하자 남자가 대화에 응했다. 재민이 그와 짧은 얘기를 나누고 온 후 다른 일행들이 둘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몇 번을 얼른 먹어두자 권해도 재민은 아직 배가 고프지 않으니 너 먼저 먹으라며 한참 어린애를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지하실은 노란색 장판이 깔린 거실에 화장실 하나, 방 두세 개가 더 딸려있는 여느 가정집과 다름없는 구조였다. 생활감이 가득한 게 어떻게 봐도 직원실이나 통제실 같지는 않았다. 터널 아래 사람이 세를 들어 산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처음 마주친 대장 격 아저씨를 제외하고도 사람이 다섯은 더 있었다. 전부 남자고 나이대는 다양해 보였으나 재민과 지성이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깨끗이 비운 그릇을 식탁 한쪽에 밀어두고 지성이 눈치를 살폈다. 사기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 아무도 이쪽에 관심이 없었다. 이런 외진 곳에 갑자기 찾아온 방문자가 있으면 경위가 궁금해서 말을 걸어볼 만도 한데. 적어도 지성은 호기심을 가졌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모두 이불을 깐 거실 구석에 모여앉아 철저히 둘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다.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이 사람들도 당장 내일 이곳을 떠나 이동할 예정이라고 했다. 재민과 지성은 가는 길 트럭을 얻어타기로 했는데, 그들이 제공한 호의에 무얼 대가로 지불할 수 있을는지는 몰랐다. 지성은 이제 어떻게 시간을 때워야 하나 궁리하다 저절로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고 어리둥절해졌다. 벌써 잘 때가 된 것인지 금방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졸음이 쏟아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배낭 속을 뒤지고 있던 재민을 향해 말했다.

 

 

"형, 나 졸린데 지금 자도 될까요."

"어어 그래. 자고 있어, 망볼 테니까."

"으응. 형도 빨리 자요."

 

 

곯아떨어진 지성을 제대로 눕혀 담요를 덮어주고 나서야 나재민이 목을 한 바퀴 돌리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 그를 의식하고 내내 의자에 앉아 둘을 곁눈으로 감시하고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의 목엔 험상궂은 흉터가 나 있었고, 운동선수처럼 강인해 보이는 어깨에는 재민이 익히 아는 문장이 달려있었다. 남자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타이밍이 좋군. 딱 하루 남기고 도착하다니. 아니, 시간을 맞춰 온 건가?"

 

 

바닥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로 정리하던 가방 속에서 시선을 옮기지 않으며 재민이 입을 뗐다.

 

 

"재미없게 여기 내내 숨어계셨나 봐?"

"저런 짐덩이를 데리고 잘도 살아남았구나."

"사람 등쳐먹으면서 드럽고 치사하게 살아남는 것보단 뒷맛도 깔끔하고 좋던데."

 

 

재민이 여유롭게 방안을 둘러보는 척 둘의 마찰에 몸을 떨고 있는 사람들 쪽을 훑었다. 재민은 터널에서 라이트를 켠 순간 목격한 광경을 기억했다. 지성은 좀비 떼에 놀라 보지 못한 듯했지만 분명 바닥에는 시체가 여러 구 뒹굴고 있었고, 아스팔트 바닥을 적신 것 중에는 눌어붙은 혈흔도 있었다.

 

이들이 언제라도 출발시킬 수 있도록 트럭을 준비해놨다는 곳은 차량용 비상구로, 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한 너비와 높이일 뿐 구조는 보행자용과 같았다. 문은 전부 수동식으로 움직이게 되어있어 트럭이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좀비가 득시글거리는 터널에서 직접 문을 열어주고 닫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희생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남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기관에 있을 때도 느꼈지만, 이 귀엽지도 않은 꼬맹이와는 아예 말을 섞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린놈이.. 너무 까불지 마라. 명줄 재촉한다."

"아저씨 협박은 안 무서워."

 

 

탕! 남자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권총을 집어 든 즉시 발포했다. 탄알이 재민의 오른팔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박혔다. 재민은 피가 흐르는 제 팔뚝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히이익, 한구석에 옹기종기 앉은 인질들이 눈앞의 총질에 겁을 집어먹고 꾸물꾸물 저들끼리 더욱 붙어앉기 시작했다. 경고도 없이 총을 쏜 남자는 그 뒤 가타부타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난리가 나는 동안 곤히 잠든 지성은 깨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수면제 탄 수프를 한 그릇 비운 탓이었다.

 

 

 

 

 

잠결에 총성을 들은 영향인지, 지성은 그날 악몽을 꿨다. 그는 재민과 함께 하염없이 좀비 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지성이 재민을 돌아보며 허공에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상하다! 왜 죽여도 죽여도 자꾸 생겨나죠? 둘을 쫓아오는 좀비는 갈수록 수를 불려만 갔다. 계속해서 달려 캄캄한 터널을 뚫고 지나가니 도시가 나왔고, 그들의 모교가 나왔다. 다 같이 운동장을 빙글빙글 돌 때쯤 결국 둘은 선두에 선 좀비에게 어깨를 잡혔다. 그런데 그게 가까이서 보니 좀비가 아니라 좀비를 닮은 경찰이었다. 그가 어디선가 꺼내든 칼로 재민과 지성을 차례대로 푹푹 찔렀다. 그리고는 무전기에 대고 이렇게 보고하는 게 아니겠는가. '생존자 제로 확인 완료.' 땅에 쓰러진 자신을 내려다보는 경찰의 차가운 음성을 들으며 지성은 꿈에서 깨어났다.

 

지성이 식은땀을 흘리며 발작하듯 눈을 뜨자 재민이 배낭을 챙기며 잘 잤어? 물었다. 막 잠에서 깬 지성은 방금 본 장면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아 마구 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최근에는 어쩔 수 없이 악몽을 자주 꾸었다. 심호흡을 하며 불안을 억누르니 그제서야 붕대로 단단히 감긴 재민의 오른쪽 상완이 눈에 들어왔다.

 

 

"재민이 형, 팔 왜 그래요…? 밤중에 무슨 일 있었어요?"

"으응, 그냥 좀. 이제 괜찮아."

 

 

재민은 이 정도는 가뿐하다는 듯 어깨를 돌리며 웃어 보였다. 좀비에게 습격당할 일도 없었을 한밤에 생긴 상처란 어쩐지 너무 불길해 보였으나, 그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뜨는 바람에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지성이 얼마나 오래 기절 잠을 잔 건지 시각은 벌써 오후를 넘기고 있었다. 그들 8명은 모여 앉지 않고 각자 자리에서 배부 받은 냉동 빵과 수프 - 어제 먹은 것과 똑같은 것으로 배를 채웠다.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인데, 이제 전장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인지 다들 말없이 죽은 안색이었다. 재민만 신경줄 굵은 행세를 하며 음식을 싹 긁어 해치웠다.

 

그들 무리는 짐을 지고 지하실에서 곧장 차량용 비상구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를 지났다. 차가 한 대 들어차 반쯤 메워진 느낌이 나는 크기의 공간에는 1톤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다. 본래는 하얀색인데 거칠게 다뤄졌는지 아래쪽은 진흙으로 뒤덮여 페인트 색이 보이질 않았다. 운전석엔 대장이, 옆자리엔 다른 중년 남자가 앉았고 문을 열 두 명을 뺀 나머지 인원은 화물칸 짐을 싣고 남은 공간에 올라탔다. 지성이 허전한 느낌에 팔을 한번 쓸었다. 재민과 둘이 차를 탔을 때와는 달리 몸을 한 겹 보호해 주는 막도 없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오싹했다.

 

트럭에 시동이 걸렸다. 거대한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에는 재민과 지성이 통해 온 반대쪽 터널과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더 득시글대는 좀비 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지성이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떠는 기척을 느꼈는지 재민이 지성을 화물칸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급조된 죽창을 손에 단단히 쥐었다.

 

 

"열어."

 

 

운전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각각 문 한쪽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남자 둘이 있는 힘을 다해 무거운 쇠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캄캄해서 더 공포스러운 터널 속이 그들 앞에 드러났다. 지나갈 틈이 생기자마자 트럭은 라이트를 켜고 전방을 향해 굴러갔다. 지성은 빛에 비친 좀비들을 볼 용기가 안 나 부러 고개를 뒤로 돌렸다. 옆에서 무사히 문을 여는 임무를 마치고 달려와 화물칸에 올라타는 남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엔진 소리와 강한 불빛에 휴면 상태에 있던 좀비들이 불나방처럼 몰려들었다. 좀비의 몸이 보닛에 부딪혀 튕겨나가고 바퀴에 짓밟혀 뭉개질 때마다 차체가 덜컹댔다. 일반 승용차의 내구도로는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지성은 저 터져나가는 좀비들도 한때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해 말이 나오질 않았다. 트럭은 속도를 붙여가기 시작하는데, 조금 떨어진 뒤쪽에서 기이한 숨소리가 들렸다.

 

 

"헉, 헉, 헉 기다려 헉, 헉."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사람 모습이 보였다. 아까 왼쪽 문을 담당했던, 배가 둥그런 서른 살 남자가 트럭에 올라타지 못하고 쫓아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당장 남자를 잡아챌 듯 좀비들이 달려들었다.

 

 

"엥? 형, 저 사람 아직 안 탔는데."

 

 

지성이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화물칸 양쪽 끝에 앉은 재민과 20대 남자는 죽창으로 차에 달라붙으려는 좀비를 찔러서 밀어냈다. 운전석을 돌아봤으나 선두에선 속력을 늦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앞에서 끝없이 부딪혀대는 장애물과 고르지 못한 바닥 덕에 속력이 좀처럼 나지 않아 여기서 조금만 더 느려진다면 당장 저 좀비 떼에게 따라잡히고 말 것이었다. 이미 안간힘을 다해 어둠 속을 달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점점 트럭과의 거리가 멀어져 갔다.

 

 

"아 버리지 마 아아아아아악!!!"

 

 

지성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손 놓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른 인원들은 죽창질을 하느라 바빴다. 지성밖에 도울 사람이 없었다. 그가 달리는 트럭 위에서 무릎으로 기어가 화물칸 끄트머리로 향했다. 지성이 남자를 향해 한 손을 쭉 뻗었다.

 

 

"내 손 잡아요! 빨리!"

"흐, 흐아아 으아아아아아악!!"

"아, 빨리!"

 

 

남자는 이미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달리는 속도도 그게 최선인 듯했다. 그가 지성을 보고 제 팔을 뻗었으나 손끝이 간신히 스칠 거리였다. 트럭은 계속해서 어두운 터널 속을 달리고 있었다. 끝나지 않는 지옥과 같이 느껴졌다.

 

리치를 늘리기 위해 지성이 몸을 낮춘 뒤 차체를 힘껏 붙잡고 어깨까지 허공을 향해 쭉 뻗었다. 남자의 손이 잡혔다. 하지만 이대로는 그를 트럭 위로 끌어올릴 수 없었다.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이 남자를 올릴 수 없다면 터널이 끝날 때까지 이 상태로 달릴 수는 있을까? 좀비가 더는 쫓아오지 않게 되면 차를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엔 붙잡은 남자의 체력이 바닥나기 직전임이 느껴졌다. 지성이 차를 움켜잡아 몸을 고정하던 다른 손을 떼어내 양 팔을 내민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마자 몸이 바깥으로 끌려나갔다.

 

 

"너 미쳤지?!"

 

 

균형을 잃기 직전에 재민이 창을 내려두고 다가와 잽싸게 지성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트럭에서 떨어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다. 이윽고 남자가 지성의 양손을 굳게 붙든 채로 달리게 되었다.

 

 

"읏, 조금만 더!"

 

 

이제 힘을 줘서 위로 당겨 올리기만 하면 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이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희망을 주었다. 며칠 치 쓸 기력을 쏟아부으며 재민의 힘도 가세해 남자를 끌어당기는데 엇, 얼빠진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쫓아오던 좀비가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채 당긴 것이었다. 일순 힘이 풀린 남자의 손아귀에서 지성의 손이 빠져나왔다.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로 넘어지고, 그 주위를 좀비들이 바퀴벌레처럼 순식간에 에워쌌다. 팔을 거두지도 못하고 그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던 지성의 몸을 재민이 급하게 안으로 끌어당겼다. 재민이 지성의 눈을 가리며 품 안에 안았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차에 부딪히는 좀비의 수가 줄어들어 그제야 속도가 정상적으로 밟히기 시작했다. 터널의 끝이 보였다. 이제 죽창을 내려놓은 화물칸 인원들은 가만히 멀어지는 터널 출구와 좀비들을 바라보았다. 낯선 이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고 벙찐 상태로 안겨있는 지성을 포함해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터널을 벗어나자 고속도로에는 좀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차 속도가 바깥 사람들에게도 안전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트럭은 덜컹대며 도로를 한참 달리다, 방향을 틀어 빠져나가 오르막길로 향했다. 지성도 전날 밤 대략 계획을 들었다. 가까운 산 정상으로 올라 하늘을 향해 불빛을 비춰 정부의 구조를 기다린다는, 어제 라디오로 들었던 얘기였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 구조가 오지 않고 산에서 고립당한다면? 지성의 물음에 재민은 걱정 말라는 투로 안심시켰었다.

 

코앞에서 살릴 수 있었던 남자의 최후를 목격한 뒤로 지성은 혼이 나간 듯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동안은 자신을 보호해 주는 재민과 함께 다니느라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타격이 심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너무 극적인 일들의 연속이라 게임 속에 들어온 기분으로 상황을 한 발 떨어져 관조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요 한 달간 길을 가다 타인의 죽음을 여러 차례 목격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죽음이 가까운 적은 없었고, 직접 누구를 구하려 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없는 그 대신 재민이 앞에서 좀비와 싸우며 길을 터주었기 때문에.

 

지성은 그 남자를 구하지 못했지만 재민은 또 지성을 붙들어 주었다. 실은 이러다 남자와 함께 트럭에서 떨어져 버릴까 봐 손을 놓아야할까 하는 생각도 본능적으로 스쳤다. 그러나 지성이 손을 놓지 않아도 되게끔, 남자를 구한다는 선택을 스스로 저버리지 않아도 되게끔 재민이 힘을 보태주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 부모님을 찾으러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식량이 남아있는 집에 가만히 처박혀 있는 선택지가 훨씬 안전함에도 지성의 뜻을 따르겠다며 함께해준 나재민이었다. 이번에도 그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리셋 버튼이 있는 게임이 아니다. 상처는 힐을 받아 낫지 않고 죽은 사람은 결코 리스폰 되지 않는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지성아 좀 괜찮아? 그래도 밥은 먹어둬야 해."

 

 

재민의 목소리가 들려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트럭은 산의 초입에 멈춰있었고, 그들은 잠깐 휴식 겸 식사를 위해 바닥에 앉아 물과 건빵 같은 것을 배분 받는 중이었다. 지성이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이며 제 손에 넘겨진 물병을 꽉 쥐었다. 자신이 아무 노력 없이 재민에게 보호받기만 해왔다는 게, 이제서야 절절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대장이 운전석 아래 보관해둔 짐을 풀어 보였다. 각종 무기였다. 이 앞으론 트럭이 올라갈 수 있는 높이에 한계가 있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각자 몸을 지켜야 했다. 대장은 본인의 소총과 피스톨을 따로 챙기고, 두어 명에게 총과 탄창을 나눠주었다. 미국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실제 총기를 이렇게 몇 정이나 보게 될 줄이야. 지성은 까만 총신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겁이 났다. 재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장 쪽에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는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다가 권총 대신 도끼 한 자루를 바닥에 던져주었다. 총을 들려줄 정도로 신뢰를 쌓은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그 정반대였다-.

 

전력 외로 평가되었는지 아무것도 받지 못한 지성은 트럭 위에 나뒹구는 긴 죽창을 집어 들었다. 사정거리가 긴 편이 안심이 되었다. 이 정도라면 유사시 제 몸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재민에게 의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재민이 창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지성을 언뜻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물을 짬도 없었다.

 

일행이 트럭에 올라타고 출발하려는 찰나, 총을 받은 인원 중 아까 문 열기를 맡았던 이십 대 남자가 덜덜 떨며 총을 대장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그가 등지고 있을 때 겨눈 것이었으나, 그 기척을 알아챈 대장이 홱 고개를 돌려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발포할 용기가 없단 걸 알았는지 대장이 그대로 성큼성큼 다가가 손목을 꺾어 총을 빼앗았다. 발차기 몇 번에 남자가 무너져 몸을 웅크리고 경련했다. 대장은 운전석에 올라타 남자를 버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모든 행동에 프로스러움이 묻어나, 지성은 입을 막고 가만히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산 중턱부터 나무가 빽빽해져 차가 지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트럭에 실었던 짐을 하나둘씩 짊어지고 산행을 시작했다. 다행인지 산속에는 좀비가 많지 않았다. 이런 곳엔 원래도 인적이 많지 않았을 테니 당연했다. 간혹가다 몇씩 튀어나오는 건 선두에서 해결했다. 지성과 재민은 무리 꽁다리에 붙어 올라갔다.

 

몇 시간이 지나 정상에 다다랐을 땐 노을이 거의 지고 있을 즈음이었다. 높이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며 크게 위 공기를 들이마시니 지성은 이 구조 계획이 성공할 것 같다는 희망찬 기분이 들었다. 꿈자리는 끔찍했지만 현실이 희망과는 다르더라도 아무렴 그 꿈처럼 삼류 반전영화 같을 순 없을 것이다.

 

그들은 손전등을 하나씩 들고 어두워져 가는 하늘에다 흔들었다. 배터리가 조금씩 닳아갈 때까지도 하늘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말 구조 헬기가 오는 걸까. 그런 국가 기능이 아직 작동한단 말인가. 있어도 자원이 부족해 이쪽으로는 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마음속에서 불안만 커져갔다. 지성이 서있기도 지쳐 손전등을 세워두고 나무 아래 주저앉아있던 참이었다.

 

어째서 총소리가 울린 걸까. 지성은 본인이 앉은 나무 옆으로 총알이 빗겨나간 것도 모르고 눈을 크게 떴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을 쥔 쪽은 내내 트럭 조수석에 타고 있던 비쩍 마른 50대 안경 쓴 남자였다. 재민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재, 재, 재민이 형."

 

 

의도된 상황이었는지 무기를 하나씩 든 남자 셋이 나재민을 원으로 둘러쌌다. 멀찍이 떨어져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대장까지 머릿수에 넣으면 4 대 1의 위기. 재민이 잘 싸운다고는 하지만 차라리 좀비면 몰라도 총을 든 사람들 상대로는 터무니없었다. 재민을 도와야 한다. 지성이 풀숲 옆에 내려놓은 죽창을 찾으려 땅을 더듬자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거기 가만있어, 박지성!"

 

 

동시에 그가 손에 든 뭔가를 던졌다. 그게 아저씨 손에 직격으로 꽂혀 총을 떨구게 만들었다. 재민이 배낭에 챙겨 다니던 주머니칼이었다. 언제부터 바지에 넣고 다녔던 거지. 손을 관통당한 남자의 소름 끼치는 비명, 땅에서 제 도끼를 집어든 재민이 두 번째 남자를 노린다. 단숨에 쫓고 쫓기는 구조가 뒤바뀌었다. 이윽고 떨어진 총을 주워든 재민이 세 번째까지 손쉽게 처리했다. 지성이 그 자리에서 얼어있던 몇 분간 일어난 일이었다. 액션 영화에선 학살 장면에 대비되게 흥겨운 비지엠이 깔리곤 했는데, 이곳의 배경 음악은 귀를 긁는 비명, 그리고 총성뿐.

 

단둘이 남은 대장과 나재민이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재민보다 몸집이 1.5배는 거대한 남자가 소총을 꺼내들었다. 안돼. 도무지 이 장면만은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지성이 웅크려 앉아 질끈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그 순간 눈을 감지 말걸, 후회되는 때가 올 수도 있겠다는 먼 예감이 찾아왔다.

 

퍼더더더 머리 위에서 굉음이 들리는가 싶었다. 지성이 멍하니 무릎 사이 숨겼던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구원자 헬기가 있었다. 구조될 수 있다는 소식은 정말이었다. 헬기가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지성이 천천히 기체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하늘에서 땅으로 이동시켰다.

 

그 짧은 사이 모든 게 일단락되어 있었다. 그러게 안 무섭다고 했잖아. 피가 섞인 침을 투 뱉는 재민의 모습. 그 이외에는 누구도 두발로 서있을 수 없었다. 정수리부터 정강이까지 온몸에 사람 피를 뒤집어쓴 재민이 도끼를 땅에 던져버리고 나무 밑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극도의 안도감에 지성은 그만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상한가? 그동안 믿고 따르던 형이 버젓이 살인을 한 모습을 보고도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여 눈물이 흐른다는 것은, 이상한 반응일까?

 

몇 걸음 앞에서 재민이 주저하고 있으니 지성이 먼저 자리에서 튀어 올라 재민을 껴안았다. 방금 튀긴 따끈한 핏물에 지성의 티셔츠도 젖어갔다. 그런 것은 상관하지도 않고, 지성이 수도꼭지 열린 듯 눈물을 쏟아내며 재민의 등짝을 쥐어짰다. 재민은 처음 겪어보는 뜨거운 포옹에 얼마간 어설픈 자세로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랑스러운 포옹을 받고 있자니 지성에게 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첫 만남에서는 변덕스런 기분이 내켜 도와준 것에 불과했지만 같이 행동하는 동안 지성을 지켜보며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 지키고 싶은 사람에겐 모두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일까. 다들 이런 일그러짐을 가슴에 안고 생활한단 말인가. 이로써 박지성을 잔혹한 세계로 끌어들인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그 앞에서 무릎 꿇고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용서를 빌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지금 지구의 좀비 사태는 사실 어떤 조직에 의해 만들어진 상황이며, 아직 본게임으로 들어가기 전의 여흥에 지나지 않는다고? 좀비 바이러스는 사회 분열을 가속시키기 위한 연막일 뿐이고, 인류에 더욱 치명적인 재앙이 차례차례 기다리고 있다고? 나재민은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라 이 재난을 대비해 기관에서 어린 시절부터 훈련받아온 플레이어라고? 걸음마를 떼자마자 들어가 스무 해 조금 덜 되게 지냈던 기관에서의 마지막 훈련, 그의 전담 교관와의 대화를 천천히 되새겼다.

 

 

'핸디캡이야. 너는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되겠어.'

'에효. 또 뭔데요.'

'동료를 만들어서 지켜.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동료를 만드는 거야.'

'뭐요?'

 

 

그게 이렇게 빠른 기간 안에 가능할 줄 알았다면, 그리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인 줄 알았더라면 '동료'를 고르는 데에 조금 더 신중했을까.

 

우느라 기력을 다 소진한 듯, 어느새 팔에 힘이 풀린 지성을 그가 품에서 떼어냈다. 재민이 자신이 선택한 코앞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는 지성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성아, 미안해. 앞으로가 더 힘들지도 몰라. 나 때문에 네가 산지옥을 겪어야 할지도 몰라."

"안 들려요오"

 

 

헬기의 소음 탓에 재민이 하는 말이라곤 하나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입술을 읽는 능력도 없었다. 지성이 훌쩍이며 코를 먹었다. 개의치 않고 재민이 지성의 마른 양 어깨를 붙잡은 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가며 선언했다.

 

 

"근데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 나는 계속 너를 지킬게. 내가 널 살릴게."

 

 

그러니 그때 재민의 뜻이 전달되었다면 그건 텔레파시거나, 진심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것이리라. 한 달간의 생존 테스트가 종료되었다. 1차 통과자들을 데리러 온 헬기는 산 정상에서 두 사람을 싣고 날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 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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