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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아 여기서 나가면 찐하게 뽀뽀 해줄래?”

“예에?”

 

전면에 좀비 떼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좀비에 물리기 전에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오는 게 더 빠르겠다 싶을 정돈데 재민은 핸들만 꽉 붙잡은 채로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지성이 재민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대로 샅샅이 살폈다. 이 형 좀비 물렸나? 좀비에 쫓기는 동안 미용실에 못 가서 가위로 대충 자른 머리는 부스스하고 얼굴 곳곳에 생채기가 있었지만 큰 상처 하나 없었다. 어깨와 팔뚝, 옆구리에도 물린 자국은커녕 철철 흐르는 핏물도 없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헛소리를 하는 거지? 지성은 안전벨트를 움켜잡은 두 손에 힘을 주고 양팔을 옆구리에 딱 붙였다. 형 장난치지 말구요…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로 타박했는데 재민은 커다란 눈을 더 커다랗게 뜨고 지성을 압박했다.

 

“장난 아닌데. 원래 목적의식이 있어야 더 불타오르는 법이거든.”

“형이 불타오르기 전에 좀비한테 먼저 물어 뜯기게 생겼다구요!”

 

나재민은 좀 미쳐야 사는 사람인지, 이럴 때일수록 아드레날린이 흰자까지 차오른 듯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형 눈이 반짝반짝한 게 싫어요, 동태 눈깔이어도 싫은데 때와 장소 분간 없이 빛나는 게 싫어요, 라며 지성이 누누이 말했지만. 재민은 목울대를 울리는 목소리로 건성건성 대답했다. 대답을 했으면 좀 시늉이라도 할 것이지.

 

재민이 헤드라이트를 껐다. 이미 달려오는 좀비들이 불빛이 사라졌다고 허둥댈 리가 없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브레이크는 없었고 오로지 가속만 더해질 뿐이다. 어두컴컴한 터널 안에 좀비들의 기괴한 소리가 벽과 천장을 타고 울렸다. 구형 세탁기 안에 갇힌 듯 온몸이 어질어질하고 내장이 뒤틀렸다. 공포에 질식하면 구토감도 몰려오는가. 지성은 손바닥에 땀이 배어 미끄러지는 보조 손잡이를 다시 붙잡았다. 차 시트에 등과 엉덩이를 바짝 붙었다. 차라리 납작하고 평평하게 눌려져서 시트에 찰싹 달라붙고 싶은 심정이었다.

 

쿵!

 

“아악!”

 

좀비가 차 본네트와 부딪히는 소리에 지성이 비명을 질렀다. 솜털 하나하나 곤두서는 오싹함, 피가 식는 게 아니라 발바닥에서 줄줄 새어 나가는 싸늘함, 그리고 차에 좀비가 부딪히고 들썩거릴 때 얄팍한 지성의 가슴 뼈 안에서 팔딱팔딱 뛰는 심장 소리. 가슴에 비늘이 메마른 생선 한 마리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물 밖에 나온 생선이 몸통을 펄떡이다 점점 굼뜬 속도처럼.

 

차갑게 식은 지성의 뺨에 거칠거칠한 손바닥이 감싸졌다. 재민의 손에는 아직 피가 혈관을 제대로 돌고 있었다. 재민이 지성의 입을 가리고 쉿, 속삭였다.

 

“지성아. 내가 목숨 갖고 장난치려는 게 진짜 아니고.”

 

지성이 눈동자만 굴려 재민을 바라봤다.

 

“생각하고 있었어. 돌파구를.”

 

심각한 상황을 환기시키려 한 말도 맞았고 목표가 생기면 사고력이 팽팽 돌아갈까 싶어서 한 말도 맞았다. 그러나 장난은 없었다. 아무리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도 눈앞에 좀비를 보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박지성은 말할 것도 없다. 타고나길 겁이 많고 엄살이 심하며 비명을 못 참는다. 숨죽이라는 언질 보다 차라리 직접 지성의 입을 가리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러니 누구 오금 무너지라고 나재민이 농담 따먹기나 할까.

 

“생각 끝났으니까 이제 겁먹지 마.”

 

재민이 손을 떼자 안정된 숨결이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서 조수석 창문에 철썩 달라붙는 손바닥이 보였다. 지성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눈을 감으면 오히려 공포심이 상승하니까 재민에게서 시선을 고정했다.

 

갑자기 터널이 무너지지 않는 한 좀비 떼를 한꺼번에 해치울 수는 없었다. 터널에 진입하면서 들은 정보가 재민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빛이 나고 큰 소리를 내는 것. 과연 그런 게 자신들에게 있나? 버려진 차에 오르기 전 재민과 지성은 몇 차례 가게를 털었다. 약국이며 편의점이며 닥치는 대로 쳐들어갔다. 대형 쇼핑몰은 이미 사람들이 쓸고 가서 건질 게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몇 군데에서 꽤 쏠쏠하게 얻기도 했다. 매장에 전시된 여행용 배낭 가방을 가져와 식료품과 의약품, 생필품을 넣었다. 그 중에는 지성이 기겁하며 그딴 걸 왜 넣냐고 도로 집어 던진 콘돔도 있었다. 재민이 언제 어디서든 비상시를 대비해야 한다고 일장연설을 늘여놓았지만 금세 묵살됐다. 꼭 필요해서 챙긴 물건도 있고 언젠가 사용할 때를 기약하며 챙긴 것도 있었다. 미래를 기약한 것. 이래서 사람은 유비무환을 해야 해.

 

“지성아 가방에서 폭죽 찾아 봐.”

 

언젠가 구조 요청에 사용할 용도로 폭죽 세트를 가방에 넣어뒀다. 희망과 약간의 긍정적인 사고가 남아있었을 때였다. 재민의 의도를 깨달은 지성이 다급하게 뒷좌석에 둔 커다란 가방을 끌어와 지퍼를 열었다. 30발 연발 폭죽 5개 세트가 가방 옆면에 세워져 있다. 폭죽을 들고 지성이 그 담에는요? 하는 눈빛으로 재민을 쳐다봤다.

 

“너 라이터는 켜봤어?”

 

탕!

 

운전석 창문에 붙은 좀비가 차를 밀어 흔들었다. 지성이 자동적으로 비명을 지르려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몸이 옆으로 기울어 창문에 기대졌다. 유리창 너머로 지독한 악취가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흡, 숨을 참으며 지성이 뻣뻣한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사실은 안 켜봤다. 지성은 큰 손으로 500ml 페트병 음료수 두 개를 한 번에 쥐어 봤고 시답지 않은 손가락 댄스를 해봤지만 라이터는 안 켜봤다. 몰라도 해야만 한다. 어떻게든 되게 해야 하는 지금이다. 고갯짓과 달리 잘게 떨리는 지성의 눈동자에 재민은 바로 알아차렸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은 질문이었기에 딱히 실망하지 않았다. 상체를 옆으로 숙여 글로브박스를 열었다. 각종 주유소 티슈와 잡동사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아 지성에게 시범을 보였다. 요즘 라이터는 편하게 나온다. 부싯돌 역할의 부품에 마찰을 일으키며 켜야 하는 라이터였으면 재민도 지성에게 시킬 엄두가 안 났겠지만 버튼을 아래로 꾹 누르면 불이 나오는 라이터였다. 간단한 조작법을 본 지성이 할 수 있겠다고 여겼는지 시선에 불안감이 사라졌다.

 

차문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왼쪽으로 차가 기울었다. 재민이 기어를 움직여 후진에 맞췄다.

 

“후진할 테니까 좀비가 좀 떨어졌다 싶을 때 바깥에 폭죽을 쏴. 앞으로 쏴야 해.”

“으응, 알았어요.”

“폭죽이 나가는 시간차가 있으니까 창문 열고 쏘기 전에 미리 심지에 불 붙여.”

 

단단히 일러두고 재민이 손을 뻗어 보조석 시트 뒤를 손으로 받쳤다. 사륜구동 차량이라서 힘차게 나가겠지만 후방 카메라가 달려 있지 않아서 뒤를 봐야했다. 쿵. 쿵. 쿵. 온몸이 울리도록 요동치는 소리의 근원은 재민의 심장이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여태 저만 바라보는 지성과 눈을 마주쳤다.

 

“하나, 둘.”

 

셋을 외치는 대신 액셀을 힘껏 밟았다. 덜컹! 차 범퍼에 붙은 좀비가 타이어에 걸렸는지 차량이 크게 들썩였다. 지성은 안전벨트 대신 폭죽과 라이터를 양 손에 꽉 쥐었다. 차제의 좌우에 붙은 좀비가 차량 속도를 못 이기고 하나둘씩 떨어져나갔다. 창문에 붙은 손바닥이 사라지자 지성이 라이터를 켜고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폭죽 심지에 불을 붙였다. 텅, 울리는 소리와 함께 끈질기게 달라붙은 좀비 하나가 드디어 떨어지자 재민이 소리쳤다.

 

“지성아! 지금!”

 

지성이 창문을 열어 차량 앞을 향해 폭죽을 뻗었다. 생각보다 길어서 타이밍을 맞출 수 있을까 걱정했던 심지는 창문을 엶과 동시에 다 타들었다. 좀비의 기괴한 소리와 타이어가 바닥에 미끄러지는 묵직한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소음을 가르는 날카로운 굉음.

 

피유웅! 퍼엉!

 

폭죽이 쏘아지고 앞에 달려오는 좀비를 맞췄다. 퍼엉 터지는 소리와 함께 좀비의 어깨가 떨어져 나갔다. 30발이 끝나기 전에 터널을 빠져 나가야 한다. 피유웅, 폭죽이 연발하는 족족 달려오는 좀비들을 맞췄다. 불꽃이 번쩍 터지는 주변으로 좀비들이 몰려들었다. 터널 안에서 폭죽이라니 일상에서는 결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퍼펑!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이 좀비 떼를 비췄다. 불씨가 튄 좀비는 괴성을 지르며 서로에게 묻혀 뭉개지고 으스러졌다. 절반 쯤 터졌을까,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던 타이어가 미끄러지며 터널 벽에 범퍼가 부딪혔다. 차체가 크게 흔들리자 창밖으로 뻗은 지성의 팔이 반동으로 흔들리며 폭죽을 놓쳤다. 다행히 폭죽은 막바지였는지 불꽃이 크게 튀지 않았다. 재민이 잇새로 욕설을 내치며 핸들을 꺾었다. 타이어가 바닥을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지성은 귀를 막고 싶었지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라이터를 켜고 새 폭죽에 불을 붙였다. 폭죽으로 떨쳐냈나 싶은 좀비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두 번째 폭죽이 쏘아졌다.

 

좀비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는 매년 가을마다 도시에서 불꽃놀이 행사가 있었다. 행사 주 무대인 강 일대는 산책로나 도로변이나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지성은 징글징글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불꽃이 맹렬하게 앞으로 날아가면 무조건 좀비를 맞추며 터졌다.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차가 비틀거려도 불꽃은 적확했다. 차 움직임 때문에 지성의 팔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피유웅 날아가는 불꽃이 터널 천장에서 번쩍 빛을 내며 터졌다. 좀비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봤다. 아, 이거다. 터지는 불꽃 주변으로 몰리는 좀비와 타이어 소리를 쫓아오는 일부 좀비들로 나뉘었다. 그마저도 움직임이 둔해져서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터널 밖으로만 나간다면.

 

터널 출구 끝자락에 가까워지자 폭죽이 다 터졌다. 좀비 떼는 멀리 떨어졌고 바닥이 덜 미끄러워졌다. 터널 바깥 빛을 본 재민이 액셀을 밟은 발에 서서히 힘을 빼고 보조석 시트에 걸쳤던 팔을 빼내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좀비가 보조석 사이드 미러를 붙잡고 매달렸다.

 

“으아악!”

 

겨우 좀비에게 벗어나는 상황에 안도하던 지성이 비명을 질렀다. 바짝 붙은 좀비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창문 밖으로 내민 지성의 팔을 잡으려 했다. 지성이 연신 비명을 지르며 팔을 당겼다. 허공을 휘저은 좀비의 팔이 창틀을 턱 짚었다.

 

“형! 형, 어떡해요!”

 

내내 꾹 눌러 참아왔던 눈물이 터졌다. 지성이 울음 섞인 외침으로 재민을 간절히 찾았다. 박지성이 그렇게 부르면, 나재민은 이상하게도 뒤통수 아래가 싸늘하게 식는다.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무언가 저지를 것 같은 충동일지도 모른다. 재민은 눈조차 깜빡하지 않은 채 지성의 손에서 폭죽을 낚아챘다. 그리고 창문으로 들이미는 좀비의 머리통에 폭죽을 꽂아 밀어냈다. 손바닥 사이로 벌레를 짜부라트리는 신음을 뱉으며 좀비가 뒤로 떨어졌다. 지성이 안전벨트를 잡고 울음을 억누르려 애를 썼다. 아무리 입을 다물고 숨까지 참아봐도 울음 새는 소리가 들렸다.

 

터널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오자 재민이 핸들을 옆으로 돌렸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 다른 갈림길로 방향을 바꾸며 최대한 터널에서 멀리 벗어나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 넓은 국도에 다른 차는 없었다. 국도에서 고속도로로 향하는 갈림길에 차를 세웠다. 지성도 눈물을 그치고 잔류한 떨림을 스스로 다독이고 있었다. 재민도 긴장 때문에 온 근육을 경직해서 어깨부터 발끝까지 뻐근하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지성의 턱을 한 손에 쥐어 천천히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새 부운 눈두덩과 축축한 뺨에 열이 올랐다.

 

“지성아 잘했어.”

 

광대 아래에 맺힌 이슬처럼 작은 눈물을 엄지로 문질렀다. 지성은 피부에 닿는 타인의 온기에 기대 마음을 진정시켰다. 히끅거리는 딸꾹질이 차츰 멎었다. 울지 말라는 말 대신 신체의 작은 면적만으로도 재민은 지성을 수월하게 달랬다. 평상시에는 간지럽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피하기 일쑤였던 지성이었지만 지금은 절실했다. 재민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뺨에 기댔다. 손가락이 장난스럽게 뺨을 간지럽혔다. 위기에서 벗어난 후에야 장난기가 살아난다. 이 또한 박지성을 살린다.

 

살았다. 이번에도. 나재민이 아니었으면 박지성은 죽어도 벌써 골 백 번은 죽고도 남았다. 살아난 뒤에는 꼬리 잇기처럼 의문이 따라 붙는다. 자신은 도대체 재민에게 어떤 의미일까? 쓸모가 있기나 할까. 물론 아까와 같은 상황에서는 재민이 운전과 동시에 폭죽을 터트리기 힘들었을 테니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매순간 아니었다. 지성이 아니었다면 굳이 재민이 하지 않아도 될 행동들, 처하지 않았을 위기들 사이에서 지성은 무서워서 울었고 괴로워서 또 울었다. 그래도 살고 싶어요 형. 재민은 가만히 지성의 뺨을 도닥였다. 알겠다는 듯이.

 

라디오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파수가 안 맞는지 음성이 들리다가 금방 소음에 묻혔다. 재민이 라디오 버튼을 누르며 주파수를 돌렸다. 지방마다 주파수가 달라서 어디에 맞춰야 소리가 잘 나오는지 몰랐다. 몇 번 누르자 지지직 소리가 잦아들고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새벽 네시 경 IN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해외로 이주하는 여객선에 탑승하던 승객들이 좀비의 습격을 받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원인은 승선을 호위하던 해양경찰단에 소속된 감염자였습니다. 이로 인해 IN시 해양경찰서는 감염 경로 수사와 함께 추가 감염자를 적발 중에 있습니다. 기존의 최장 하루 잠복하는 좀비 바이러스와 달리 새롭게 목격된 변형 바이러스는 최단 이틀을 잠복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IN시 해양경찰서는 국과수에 분석 의뢰를 요청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국제여객터미널을 비롯한 일부 항구에서 해외로 이주하는 생존자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일부 항구에서 정식 해외 이주가 아닌 밀항을 시도하는 자들이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좀비에게 감염되어 지역 거주민들에게도 바이러스가 빠르게 확산이 되고 있습니다.’

 

녹음본이 아니었다. 어느 방송국에서 송출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 시점에서 유용한 정보였다. 애써 발로 짓밟아 꺼트렸던 희망이 다시 살아나려 했다. 구형 자동차는 네비게이션이 없어서 표지판을 의지하며 운전해야 했다. 목적지는 여기서 가까운 항구. 지성이 고개를 창밖으로 내빼어 표지판을 읽었다.

 

“형. 여기서 직진하고 좌회전하면 G시에 갈 수 있어요.”

“거기도 항구가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근데… 배가 없으면요?”

 

재민이 핸들 위에 올린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다가 다시 액셀을 밟았다.

 

“일단 가보자. 어디든 가봐야지.”

 

움직이는 차가 표지판을 따라 직진 후 좌회전 했다. 한바탕 난리 후에 허기가 진 지성이 발아래에 둔 가방을 뒤져 군것질을 찾았다. 아몬드와 헤이즐넛이 들어간 초콜릿 포장지를 까서 하나는 제 입에 넣고 다른 하나는 재민에게 건넸다. 운전하느라 한눈 팔 수 없는 재민이 고개를 살짝 틀어 입만 아, 하고 벌렸다. 별 의심 없이 초콜릿을 입에 넣어주려던 지성은 손가락을 핥는 혀끝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형! 뭐하는 거예요!”

“미안. 그게 지성이 손이었어? 형은 초콜릿인 줄 알았지.”

 

재민이 시침 뚝 떼고 대답했다. 일부러 그랬음이 분명했다. 지성은 알았지만 거짓말이라고 면박 줄 수가 없어서 조용히 숨만 골랐다. 면박을 줘봤자 먹히지도 않을 테니까. 지성이 재민의 타액이 묻은 손가락을 옷에 닦아내고 초콜릿 세 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말을 말아야지. 힐끔 쳐다본 시야 끝에 볼을 가득 부풀린 채 초콜릿을 오독오독 씹어 먹는 지성이를 보고 재민이 웃음을 실실 흘렸다. 부풀었던 볼이 어느 정도 꺼졌을 쯤 재민이 말을 붙였다.

 

“근데 지성아. 너 형아한테 뽀뽀는 언제 해줄 거야?”

“예? 뭔 소리예요 그게?”

“아까 터널에서 벗어나면 해주기로 했잖아아.”

“아 그건…”

 

지성의 귀 끝이 달아올랐다. 형은 왜 그런 거는 안 잊어버린담. 머릿속에 그 생각 밖에 없느냐고 톡 쏘아대고 싶지만 이미 재민의 아이디어로 또 목숨을 건졌으니 질책이 무용했다. 지성은 초콜릿 향이 잔뜩 묻은 입술을 안으로 빨아 지그시 물었다가 풀었다. 일단 지금은 운전 중이니까, 운전에 집중해야 하니까, 사고라도 나면 안 되잖아? 그치 그치. 고심 끝에 찾은 구실거리가 합리적이며 정당하다고 생각한 지성이 새침한 투로 말했다.

 

“도착하면요. 항구에 도착하면.”

“너무하네. 그러면 형이 과속할 수밖에 없잖아.”

 

재민이 액셀을 좀 더 힘줘 밟았다. 차는 금세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해는 아직 머리 위에 걸려 있고 이대로 속도를 낸다면 날이 저물기 전에 도시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밤은 안전한 곳에서 자야지. 재민은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글로브박스 안 잡동사니 사이에 끼어있던 콘돔을 상기했다.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 꼬리에 무던히 힘을 주어 버텼다. 차 주인이 누구였는지 몰라도 참 건전하고 왕성한 성생활을 했을 것 같다는 인식이 박혔다. 나재민이 거기에 질 수야 없지. 얼굴도 모르는 차 주인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땡큐베리머치요 아멘.

 

어쩌면 이 차를 발견한 게 행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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