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아. 우리 이제 그만할까?"
어떻게. 나재민이라고 그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간 무기력함이 일었다. 겨우 서월을 빠져나온 뒤엔 더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다른 지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이 묶였다. 내내 단단하던 나재민의 입에서 희망이 다 죽어버린 소리가 나온다. 절망을 듣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었는데. 당연하게도 살아낼 거라고 단단하게 받쳐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살자면서. 형이 살자고 했잖아요. 기댈 곳이 없어지자 혼자 바로 설 수 있었다. 흔들리던 박지성의 눈빛이 변한다. 난 이제 살고 싶어졌는데 형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지금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요? 정신 차려요. 우리 그만 못해요. 내가 형 살릴 거야. 그런 말 할 거면 나와요. 제가 운전할 거니까."
다리에 힘이 풀려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박지성을 업고 죽을 듯이 뛰던 나재민이 지쳤다. 박지성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당장 시간도 없는데 힘 빠지는 말이나 하고 있는 나재민을 두고 박지성이 무작정 운전석으로 몸을 일으켜 클락션을 울린다. 높고 큰 소리가 넓은 터널 안을 꽉 채웠다.
"핸들 꺾어요 빨리!"
기다렸다는 듯 뒤엉켜 밀려오는 좀비들이 소리를 향해 왼쪽으로 몰린다. 지성아 이런 건 제발 말하고 해. 집어삼킬 듯 코앞까지 다가온 좀비에 질책할 시간은 없었다. 상황 판단이 빠른 나재민이 바로 라이트를 끄곤 세게 엑셀을 밟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다. 창문에 붙어있던 좀비가 후두둑 나가떨어졌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오로지 감만 믿고 핸들을 돌려댔다. 어딜 받더라도 어차피 탈출 못 하면 죽는 건 똑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람소리와 부딪히는 소리들이 이어졌다. 와 영화같다. 영화에서 이런 거 본 적 있는데. 그때도 지금도 박지성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소리만 듣고 있는 것까지 똑같았다. 자기가 벌여놓은 일이면서 심장이 쿵쿵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그냥 문에 자꾸 몸이 부딪혀서 다시 손잡이를 잡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나재민이 이를 악물곤 어떻게 되든 말든 끝까지 엑셀을 밟는다. 어쩔 수 없이 크게 울리는 차 소리에 좀비 몇 마리가 쾅쾅 부딪혀대는 걸 무시하곤 무조건 직진했다. 운전석 쪽으로 계속 오는 충격에 차가 비틀거린다.
"형!!!"
지속적인 충격에 운전석 창문이 흔들렸다. 조금만 더 부딪히면 깨진다. 버텨. 버텨야 되는데. 씨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박지성이 주머니를 뒤졌다. 이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이 본능적인 움직임이였다. 급하게 창문을 내려 바깥으로 무언가를 흩뿌린다. 눈을 꽉 감고 창문을 올리는 손이 떨렸다. 3, 2, 1. 이미 뒤가 되어버린 곳에서 펑, 하고 큰 파열음이 울린다. 좀비들은 소리가 울리자마자 단번에 떨어져 나갔다. 이제야 희미한 빛이 보인다. 긴 터널의 끝이였다.
"와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아까 그거 뭐야?"
빈 껍데기만 달랑달랑 흔든다. 바닥에 던지면 터지는 도구.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비였다. 나재민이 그걸 보더니 헛웃음을 쳤다. 전에 촬영장처럼 보이는 곳에서 식량을 찾다 발견한 거였다. 위험하니까 내려두라고 했던 것까지 기억한다. 우리 지성이 말 진짜 안 듣네. 아 아무튼 도움은 됐잖아요... 살짝 눈치를 보면서 웃는다. 사실이라 할 말은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박지성은 뛰는 심장을 잠재웠다. 장난쳤으면 큰일 날 뻔했네. 진짜. 그래도,
"우리 또 살았네요."
그러게. 우리 또 살았네. 나재민이 그제야 박지성을 보곤 제대로 웃는다. 다 내려뒀던 아까의 그 얼굴이 거짓말인 것처럼. 고마워. 살려줘서. 내내 박지성이 해야했던 말이 나재민의 입에서 나온다. 나재민의 말에 다시 희망이 보였다.
서월을 지나 둘의 목적지는 원선이였다. 첫 좀비 발현시기에 안전지역이라고 대피하라는 알림이 울렸던 곳. 지금까지 안전지역일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더는 살아갈 수 없는 곳에서 함께 썩어가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더 멀리 갈 수 있지도 않았다. 아무거나 주워 탄 차는 겨우 원선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였다.
금방 긴장감이 풀린 몸은 시트로 기대어진다. 아 갑자기 배고프다. 갑자기일리가 없다. 어제도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배고프다는 말은 서로 하지 않기로 했는데 무의식적으로 박지성은 그렇게 뱉어버리곤 입을 막는다. 배고프다는 말을 들으면 더 배고파진다나 뭐라나 그런 걸 이유로 정한 규칙이였으나 나재민은 이제 그런 감각도 잘 안 느껴져서 괜찮았다.
"도착하면 뭐라도 있을 거야. 날 어두워졌으니까 찾으러 갈 수도 있을 거고."
"차에만 있어서 그런가. 아직 이렇게 어두워질 시간 아니지 않아요?"
"그러게."
"이번엔 해가 돌연변이인가…."
딱히 진심을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였다. 스치듯 하는 생각. 나재민은 그런 어이없는 것에 웃어버린다. 귀여워서. 나재민을 유일하게 그렇게 만드는 게 박지성이였다. 앞 창문이 피와 살점으로 얼룩져있어 바깥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 없는 박지성을 확인하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까만 구름이 가득했다. 비가 오려나 보다. 박지성은 피곤한지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럴 만 했다. 오늘도 누구 하나 잠을 편히 못 잤으니까. 아니, 이렇게 된 이후로는 한 번도 그렇게 잔 적이 없다. 나재민이 괜찮으니 편하게 자라고 해도 박지성은 꼭 피곤한 눈꺼풀을 억지로 뜨고 이것저것 말을 늘여두며 밤을 버텼다. 그중에는 꽤 슬픈 얘기도, 너무나 일상적이라 비현실적인 얘기들도 섞여 있었다.
나재민은 박지성이 깰까 이젠 더 나오지 않는 치직거리는 라디오도 끄고 달렸다. 당장 눈에 보이는 상황은 잔혹했으나 꼭 지금이 좀비가 발현하기 이틀 전, 서월에 오던 그날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도 지성이 이렇게 말하다가 피곤해서 잤었는데. 나중에야 들은 말이지만 처음 둘만 여행 오는 게 기대돼서 밤을 샜다고 했다. 귀여워. 설레하는 게 다 보였던 그 얼굴이 겹쳐 보인다. 그때와는 달리 조금 더 말라버린 몸과 더렵혀진 옷이였지만 나재민 눈에는 똑같아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자마자 좀 더 놀걸.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지만 괜히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 왔을까, 토독토독 하고 창문을 울리는 소리에 박지성이 깼다. 어... 비 온다. 세상에 서로밖에 남지 않은 이후로 처음이였다. 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박지성이 비로 피가 씻겨 내려가 창문이 깨끗해지는 걸 멍하게 바라봤다.
"깼어?"
"언제 잤지? 저 많이 잤어요?"
"아니. 거의 다 왔어."
"와. 갑자기 다 깨끗해진 거 같아요."
"이쪽에 원래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하더라고. 아까 그 터널 지나면 날씨가 많이 바뀐대."
아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깨끗해진 시야가 낯설다. 밖이 다 조용해요. 진짜 아무도 없는 거 같아. 순간 박지성은 이 모든 게 꿈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좀비, 돌연변이, 바이러스. 그런 지긋지긋한 것들이 사실 다 꿈에 갇혀있는 거였고 지금은 빠져나온 거라고. 그렇게 믿겨졌다. 그래도 그런 질문은 안 했다. 애써서 확인받고 싶지 않아서. 만약 현실이라도 잠깐은 그 속에 있고 싶어서.
"지성아 차 뒤에 뭐 없는지 봐봐."
"어... 아무것도 없는데요. 좀비 손가락 두 개. 문에 걸렸나 봐요."
잠깐도 여유를 안 주네. 박지성은 툴툴댔다. 이젠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것들을 내뱉는다. 나재민은 그런 박지성이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단단해진 건 좋았지만 이런 거에 익숙해져 버리는 게 싫었다.
"우리 지성이 그런 건 말 안 해줘도 되는데."
"아, 저거 뭐지? 밑에 우산 있는 거 같은데요?"
박지성이 안전벨트를 풀어 몸을 뒤로 넘긴다. 투명우산 하나가 바닥에 놓여있었으나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피랑 이것저것 섞여 더러워져 있었다.
"근데 엄청 더러워요. 피 묻어있고 별로 튼튼해 보이지도 않는데."
"그래도 일단 챙겨 지성아. 우리 이제 내려야겠다."
에. 벌써요? 이제 겨우 마을에 도착했는데 더 안 살펴보고 내린다고 한다. 비 오는데 그냥 건물 앞에 서는 게 낫지 않아요? 기름 없어. 아. 그렇구나. 이건 운이 좋다고 해야 돼요 나쁘다고 해야 돼요? 일단 도착은 했으니까 좋다고 치자. 한적한 마을 아무 데나 차를 세우곤, 나재민이 차 이곳저곳을 뒤진다. 뭐 식량이나 흉기 같은 걸 찾는 거였다. 조수석 서랍과 뒷좌석 서랍을 뒤진다. 뭐 있어요?
"돈밖에 없네. 카드랑."
"에이 완전 쓸데없는 것만 들고 다니네. 뭐야."
박지성이 아쉬운 소리를 낸다. 당연히 제일 필요한 것들이였다는 걸 아는데 그냥 내는 심술이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막 칼이나 총 같은 것 좀 들고 다니지. 그건 범죄 아니에요? 나재민은 살짝 웃고는 돈과 같이 있던 안경닦이를 꺼내 우산 손잡이를 닦았다. 형 먼저 내리고 나서 내려. 넹. 비가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차 문을 열자마자 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비 맞으면 감기 걸릴 거 같은데. 펼치자마자 떨어지는 피를 대충 안경닦이로 훔치곤 바닥에 버린다. 망가져서 처박아둔 우산이였는지 상태가 말이 아니였다. 크기도 작았고. 아까부터 자꾸 애매한 운이다.
나재민이 박지성 쪽으로 우산을 대주곤 문을 연다. 당연하게도 우산은 박지성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진 않았는데 빗방울이 굵었다. 박지성이 문을 닫곤 조금 더 나재민과 가깝게 선다. 제가 들까요? 키가 더 큰 박지성 때문에 우산을 부러 높게 드는 게 보였다. 눈에 보이게 기울어진 것도. 박지성이 나재민을 쳐다보자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 닦긴 했어도 만지면 피와 알 수 없는 것들이 자꾸 묻어서 거절했다. 박지성이 그런 걸 만지는 게 싫었다. 나재민의 고개짓에 박지성이 우산을 든 나재민의 손을 잡곤 우산을 나재민 쪽으로 기울인다.
"이쪽으로 기울이지 마요."
"우리 지성이 형 걱정해주는 거야?"
"형 감기 잘 걸리잖아요."
전에 심하게 감기를 앓았던 이후로 박지성은 자꾸 조금만 춥거나 비가 오면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왔던 그 날이 계속 신경이 쓰여서. 결국 어깨를 한쪽씩 내놓곤 걷는다. 거리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좀비가 보이지 않는 도로. 처음엔 마을 입구라 그런 줄 알았는데 건물이 많아졌음에도 눈에 거의 보이지가 않았다. 가끔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는 좀비 몇 마리와 느리게 바닥을 기어 다니는 좀비 몇 마리. 그게 다였다. 안전지역이라는 말이 아직 유효한 것 같았다. 기대가 차올랐다.
"우리 정말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요?"
"그럴 거 같아."
"응. 그래야 돼요."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박지성이 나재민을 쳐다본다. 나재민은 끄덕였다. 살아서 다 괜찮아지면, 다시 여행도 가고 별도 보고.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빗소리에 섞여 들어간 말들이 빗방울과 함께 떨어진다.
우선 식량을 찾아야 했다. 비 오면 더 빨리 상하는데. 최대한 안 상하는 통조림 같은 걸 가지고 와야 했다. 편의점이나 마트를 찾는데 죄다 옷가게뿐이였다. 옷 말고 무기 같은 거 팔면 좋을 텐데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지만 박지성은 영화에서 봤다며 아쉬워했다.
"형은 총 있으면 쏠 수 있을 거 같아요?"
"응. 지금은."
"총은 아직 무서운데..."
한국에는 총 없어 지성아. 그래두요. 누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실없는 상상들에 나재민은 꼬박꼬박 대답했다.
"근데요. 좀비들 물 무서워하는 거 같지 않아요?"
박지성이 가리키는 좀비가 쌓여있었다. 비가 닿지 않는 좁은 공간이였다. 모여있다는 표현보단, 쌓여있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잔뜩 뒤엉켜 마른 땅에 붙어있었다. 비를 맞자 몸부림치며 기어가는 좀비. 터널 안에 가득 차있던 좀비. 이곳이 안전지대인 이유.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나재민의 눈이 커진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물에 닿으면, 연기가 나."
기어가는 좀비가 혹시나 일어서서 다가오기라도 할까 멀리 떨어졌던 발걸음을 옮긴다. 가까이 보니 빗방울이 닿는 곳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유는 몰랐는데, 물에 닿는 걸 싫어한다는 건 확실했다.
"총 필요 없겠네요. 다행이다."
"그러게. 진짜 총 말고 물총 가지고 다녀야 하나?"
"헐 그럼 진짜 웃기겠다. 난 멋있는 게 좋은데. 아 근데 그 총은 쏠 수 있어요. 아마도?"
장난처럼 하는 말이지만 꽤 큰 정보였다. 주위에 있던 쇠막대기나 날카로운 걸 아무거나 주워들고 헤쳐나가는 것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물이 부족하지 않은 여기에선 안전할 수 있을 거다. 박지성과 나재민이 불안함을 지우고 웃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젠 진짜 희망이 보여서. 옥상에만 올라갈 수 있다면 다 해결될 테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형 저기 마트 있어요."
"가자."
나재민은 유일한 무기인 우산을 꽉 쥐었다. 어느새 또 우산은 박지성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재민도 의도한 게 아니라 습관적이였다. 박지성은 주위를 살피느라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나재민의 등까지 완전히 젖는다. 비를 가릴만한 천막 같은 것도 설치되어있지 않은 마트 앞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래된 유리문 새로 비가 새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 밤새 비가 꽤 많이 온 거 같았다. 잠길 만큼 많이 왔다가 비가 약해지곤 조금 빠진 것 같았다. 나재민이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딸랑, 하는 맑은 종소리가 조용한 마을에 울려 퍼졌다. 아. 순간 둘의 눈이 마주친다. 좀비가 소리에 반응한다는 건 이미 몸으로 학습해서. 우리 또 위험해지는 건가? 둘은 문이 열린 채로 시간이 멈춘 듯 굴었다. 그렇게 몸이 굳어버린 걸 비웃기라도 하듯, 그 몇 초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뱉는다. 미끄러워. 조심해. 박지성을 들여보내고 나재민은 우산을 접었다.
찰박거릴 정도로 비가 곳곳에 고여있는 마트에선 썩은 내가 났다. 아마 과일과 채소가 썩었기 때문일 거다. 나재민은 물통밖에 들어있지 않은 가방을 열곤 통조림을 찾았다. 당연하게도 마트에 뭔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제발 몇 개라도 건질 게 있으면 좋을 텐데. 혹여나 좀비가 있을까 움직이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형이 이쪽 볼 테니까 그쪽 보고 있어."
"응. 찾으면 여기로 와요."
마트는 꽤 넓었다. 층도 나눠져있었으나 그렇게까지 찢어지면 곤란했다. 나재민은 왼쪽, 박지성은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산도 물통도 모두 나재민에게 있어서 멀리 떨어진 박지성을 불러 건네려 했지만 괜히 소리만 내는 거 같아 관둔다. 아까 그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 보면 아마 괜찮을 거다.
왼쪽으로 갈수록 이상하게 물이 점점 더 발 주위에서 찰박거렸다. 바닥이 기울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낮은 신발을 신어 이미 다 젖어버린 발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가끔 피나 살점도 같이 떨어져있는 것만 조금 피하곤 나재민은 계속 먹을 걸 찾았다.
마트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는지 위에 걸려있던 판넬들이 죄다 떨어져 나가 대체 어느 코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기 위해선 이미 다 흐트러진 진열들을 자세히 봐야했다. 바디워시나 샴푸같은 것들만 놓여있는 걸 확인한 나재민은 옆 코너로 걸음을 돌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판넬엔 도움 하나 안 되는 것만 적혀있었다. 욕실용품. 여기도 아니다. 이쪽은 죄다 필요 없는 것들이였다.
"악!!!"
나재민이 발걸음을 돌리자마자 짧은 비명이 스친다. 분명히 박지성이였다. 씨발. 혼자 보내는 게 아니였는데. 아까 불러서 뭐라도 쥐여줬어야 했는데. 나재민은 비명소리를 따라 빠르게 뛰었다. 다 젖은 신발이 자꾸 미끄러졌다. 어디야. 비명에 자극을 받았는지 자꾸 여기저기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좀비. 좀비가 없는 게 아니였다. 왼쪽에선 들리지 않던 기척이 오른쪽에서 수도 없이 났다. 마른 바닥. 나재민은 이제야 알았다. 큰 소리를 내 박지성을 찾으려다 좀비를 자극하면 더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제발. 제발. 지성이라면 아마도 찾았을 거다. 우리가 찾는 거.
두 다리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좀비가 손을 뻗어 박지성을 쥐었다. 잡힌 옷 끝을 힘주어 잡아당긴다. 아마도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진열대를 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박지성의 손이 잘게 떨렸다. 형. 형 제발. 빨리요. 움직일 수 없으니 힘을 줘 박지성을 끌어당긴다. 좀비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 낮게 울린 소리와 함께 손은 미끄러졌다. 제발. 제발. 힘이 풀린 몸은 순식간에 끌어당겨진다. 어떻게든 밀어내려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진짜 허무해. 오자마자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난 진짜 살 줄 알았는데. 형이랑 같이 살기로 했는데. 몸 위로 좀비의 손에 박지성은 눈을 꽉 감았다. 입술을 꽉 물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 했다. 소리 내면 형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이를 악문다. 금세 퍼질 고통을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까 곧 다리가 뜨거워질 거였다. 그럼 형도 못 알아보겠지,
"지성아!!!"
순식간에 터트릴 듯 움켜쥐던 손에 힘이 풀린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났다. 아, 형이다. 심장이 귀에서 뛰는 것 같았다. 숨이 격해진다. 혹시나 거짓말일까 봐 느리게 뜬 눈엔, 바닥에 생긴 물웅덩이와 빈 생수병을 든 나재민이 있었다.
"괜찮아? 다쳤어?"
다행히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잡힌 다리가 살짝 욱신거리긴 했지만 금방 떨어져 그렇게 아픈 수준은 아니였다. 가지고 있는 걸 다 내려두고 살피는 나재민에게 박지성이 꽉 쥐고 있던 걸 내보인다. 미안. 이거 하나밖에 없었어요. 옥수수 콘 통조림. 그 상황에서 절대 놓치지 않고 잡고 있던 건 초라했다. 고작 천 원도 안 되는 캔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게. 박지성은 웃으며 그걸 나재민 가방에 넣었다. 저기 초콜릿도 두 개 있던데. 그건 나가면서 가져가요. 나재민은 웃는 박지성을 따라 웃어 보이질 못했다. 조금만, 그러니까 일 초만 늦었어도. 아까 나재민이 피하던 피와 살점이 박지성의 것이였을 수도 있다는 게.
충격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음에도 힘이 없다며 손을 내미는 박지성을 일으켜 세운다. 빨리 나가요. 무서워. 박지성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재민을 풀어주려 웃었다. 나재민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죽을 뻔한 건 박지성인데 누가보면 나재민이 그랬던 것 같이 군다. 결국 초콜릿도 박지성이 챙겨 넣곤, 찰박이는 입구를 또다시 지났다. 비는 그쳤다.
"형 괜찮아요?"
"...미안해."
"형이 왜 미안해요. 형이 좀비에요?"
"혼자 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무것도 안 주고 혼자,"
"정신 차려요. 지금 비 그쳤어요. 언제 또 나올지 모른다고."
그리고 왜 자꾸 미안하대. 저 살았잖아요. 형이 살렸고, 지금 같이 있잖아요. 아까부터 왜 그래요. 형이 그럴수록 나 더 불안해. 단단하게 다 맞는 말이다. 나재민은 재차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러게. 왜 그러지. 오늘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단단해져 가는 박지성과는 반대로, 나재민은 점점 더 약해져 가는 기분이였다. 다시 형이 그러면 그냥 한 대 쳐. 에? 그건 좀... 대신 예고하고 때려줘. 안 때릴 거거든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와요. 이끄는 박지성을 따라 다시 걸음은 움직인다.
찾는 곳은 백화점같이 튼튼한 건물이였다. 넓고 숨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공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옥상이 있는 공간. 그만큼 좀비가 숨어들 확률도 높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그런 건물에 있는 안전한 방에 숨어지내다 낌새를 보곤 옥상으로 올라가는 게 제일 가능성 있는 루트였다.
비가 온 직후라 안개가 심해 고층 건물을 찾기가 힘들었다. 둘은 보이지 않는 하늘을 응시하는 대신 말라가는 바닥에 자꾸 튀어나오는 좀비를 경계하는 데 힘을 썼다. 혹시 몰라 물웅덩이가 진 곳에서 빈 물통에 빗물을 채우기도 했다. 병 하나 더 있으면 좋은데. 우산 있으니까 일단 그건 지성이가 가지고 있어. 네. 담담한 듯 굴었지만 아까 발목에서 느껴졌던 생생한 감촉이 잊혀지지가 않아서 거절하지 않았다.
해가 안개에 가려 애매하게 가라앉았던 하늘이 점점 새까맣게 변해간다. 은은히 비춰오던 햇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플래시가 있긴 하지만 작아서 멀리 있는 곳까지 비추기는 어려웠다. 그럼 건물을 찾기는 더 힘들 거다. 괴랄한 소리가 커져가는 길을 둘은 조금 더 빠르게 지났다. 박지성이 힘들어하는 소리가 들릴 때서야, 백화점이 보였다. 아마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인 것 같았다.
나재민과 박지성이 일제히 멈추곤, 하늘을 올려다본다. 도착해야 할 옥상까지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진짜 마지막 같았다. 여기서 죽든 살든, 좀비 소굴에서의 마지막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지성도, 나재민도.
"들어갈까?"
"...네."
나재민이 먼저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박지성은, 박지성은 그런 나재민을 보지 않고 몇 층인지 모를 창문에서 계속 흔들리던 블라인드를 응시하다, 이내 블라인드가 찢기고 피로 물든 좀비가 유리창에 달라붙는 걸 보곤 눈을 감았다.
"지성아. 괜찮아?"
"잠시만요."
놀라서 숨이 고르지 못한 걸 내쉬곤 천천히 아래부터 하나하나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여덟. 팔 층. 괜히 그 장면을 다시 보면 발이 움직이지 않을 거 같아 옆 창문을 보고 세었다. 가요. 팔 층은 피해야 한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말했다.
들어간 건물은 느린 좀비가 몇 명 돌아다니는 것 말곤 조용했다. 좀비들은 척척히 젖은 신발에서 물 냄새를 맡았는지 가까이 다가오진 못하고 멀리서 둘을 응시했다.
"형. 여기 봐봐요."
"일 층 안내소. 사 층 보안실. 팔 층, ...수영장. 구 층 식당. 옥상은 십일 층."
"보안실에 열쇠 있겠죠?"
"응. 일단 사 층으로 올라가야겠다."
괜찮겠어요? 응. 지성아 물병 잘 들고 있지? 네. 아마 비상계단은 닫혀있어서 좀비는 없을 거야. 나가고 나서가 문제지. 나재민은 아직 물기가 남은 우산을 꽉 쥐곤 박지성을 확인했다. 비상계단 저쪽. 제가 물 가지고 있으니까 먼저 들어갈게요. 한 발자국씩 뗄 때마다 물기가 남은 바닥을 나재민은 쳐다보면서 끄덕였다. 물기가 말라갈수록 위험해진다. 얼마간 열릴 일이 없던 문은 꽤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높고 찢어지는 좀비를 자극하는 소리. 둘 다 신경이 곤두섰다. 사 층까지 올라가려면 꽤 걸릴 거다. 아무리 좀비가 없을 거라고 해도 큰 소리에 숨어있던 좀비가 올라올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나재민이 혹여 좀비가 뒤따라올까 문을 제대로 닫곤 박지성을 불렀다. 혹시나 싶어 들고 있던 물병을 조금 기울여 바닥에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지하에서 올라올 수 없도록.
"와 형 똑똑하네요?"
"나 죽으면 우리 지성이 어떻게 살아."
"그렇긴 해요."
긴장을 풀려고 하는 말이 짧게 이어졌다 끊긴다. 소리를 내는 건 좋지 않은 일이였다. 미끄러운 계단을 박지성이 먼저 조심스럽게 올라간다. 나재민은 플래시로 박지성의 앞을 비추고 앞뒤를 계속 살폈다. 숨까지 죽이며 움직이는데 뛰는 심장소리가 다 울렸다. 쿵쿵, 낮게 웅웅대는 그 소리를 서로 들으며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두운 곳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만큼 두려운 건 또 없을 거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 발을 내딛는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이 층을 알리는 간판이 보이자 센서등이 미약하게 깜빡였다. 망가졌을 줄 알았는데. 나재민은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플래시를 껐다. 아마 올라갈수록 전기실이랑 가까워서 미약하게나마 남아있긴 한 것 같았다. 일 층은 완전히 나가 있던 걸 보면.
별 무리 없이 또 계단을 오른다. 간간이 뒤를 봤으나 기척은 문밖에서만 잠깐씩 났을 뿐이다. 예상했던 대로, 좀비가 비상계단까지 들어와 있지는 않았다. 이제 삼 층. 꽤 밝은 빛이 켜지고, 둘은 멈춰 섰다. 얼마 되지 않았는지 피가 뚝뚝, 계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 층. 누군가 같은 생각을 했음에 분명했다.
"형..."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는 박지성의 입을 하얀 손으로 막는다. 소리 내면 안 돼.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에 박지성은 끄덕였다. 눈이 마주쳤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위험하다고. 여기서 올라가면, 좀비가 있을 거라고. 나재민이 위치를 옮겼다. 우산을 내세우고 제 뒤로 박지성을 숨겼다. 이미 위험에 노출되었던 몸을 다시 앞세울 수가 없었다. 뒤로 손을 뻗어 제 옷깃을 붙잡는 박지성의 손을 천천히 토닥여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꺼졌던 센서등이 다시 켜지고, 옮겨지는 발걸음은 아까와 비슷한 물소리를 냈다. 이번엔 좀 더 질척하다는 게 달랐지만. 흐르는 피를 따라 서서히 올라간다. 박지성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까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피가 배어 나왔으나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한 곳에선 별거 아니였다. 피는 사 층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에서 흐르고 있었다. 아니, 그 문에 기대어있는 어떤 몸에서부터 흐르고 있었다.
좀비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허리 쪽에 심한 출혈이 있었으나 엉겨버린 피와 옷조각들에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처를 달고 다니는 좀비들과는 달랐다.
"...저기요."
작게 울린 목소리에 몸이 살짝 움직이다, 이내 눈이 뜨였다. 마주친 눈은, 텅 비어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눈이 아니였다. 사람이다. 나재민이 사람이라는 걸 알아채자마자 가방에 걸쳐져 있던 남방을 들고 다가섰다.
"괜찮으세요? 물린 거에요?"
"흐... 허억,"
"일단 지혈할게요. 자꾸 피가 나와서."
겨우 고개를 젓는 걸 보고 가져온 남방을 허리에 꽉 조였다. 일단 지혈 안 하면 죽을 거 같아서. 아는 지식도 하나 없지만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였다. 일단 하고, 상황을 파악했다. 나재민이 주위를 살핀다. 떨어져 나간 살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칼을 맞기라도 한 것 같은 상처인데. 어쩌다가. 그 사람은 자꾸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뭔갈 말하려 했다. 도저히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가 않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살려달라고, 대충 그런 말이겠지. 그래도 사람인데, 죽은 시체이면 몰라도 아직은 살아있는데. 어떻게든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나재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머리부터 뚝뚝 빗물이 쏟아져 내렸다.
"형은, 형은... 왜 아무나 믿어요."
"무슨 소리야,"
다 젖은 몸 뒤로 탄 냄새가 났다. ...설마. 뒤를 돌자 연기가 나서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도 믿지 마요."
저 빼고.
내민 박지성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젖은 옷에선 뚝뚝 물이 떨어졌다. 머리가 멍했다. 거짓말 같아서 돌아본 고개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몸만 있었다. 보지 말고 빨리 나가요. ...응.
미끄러운 손으로 잡고 돌린 문밖은, 예상과는 달리 조용했다. 아까 그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큰 살점이 떨어져 있는 것 빼곤 조용했다. 아마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다. 그 전에 보안실을 찾아야 한다. 투명한 물웅덩이를 남기는 발 뒤로, 박지성의 빨간 발자국이 남았다.
"일단 어디든 가서 쉬어요. 지금은 그게 맞는 거 같아요."
"보안실로 가려면 꽤 많이 움직여야 할 거 같은데."
"그러네요. 완전 끝에 있네. 헐. 형, 여기요."
안내판엔 없던 직원 휴게실 같은 공간이 있었다. 안에 좀비만 없다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일 거다. 나재민은 무기가 되어버린 몸을 들이대곤 움직였다. 어차피 난 못 무니까, 혹시 좀비 있으면 오른쪽으로 피해. 형이 알아서 할게. 이미 몇 번이나 증명된 일이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으니 무섭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여 물이 닿아도 살이 타오르지 않는 좀비라든가, 물을 이기고 살을 물어버릴 좀비 따위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재민이 문고리를 돌리고 발로 문을 찬다. 순간 미약한 쾅 소리와 함께 문 옆에서 기던 좀비가 달려 나왔다.
"형!"
"피해,"
문과 꽤 떨어져 있던 곳으로 순식간에 달려 나온다. 어떤 이유로 혼자 거기에 갇혀있는지 몰랐으나 좀비의 사정까지 헤아릴 필요는 없었다. 박지성을 반대쪽으로 보내고 젖은 몸으로 억지로 기어 덮쳐오려는 좀비의 머리를 우산으로 찍어 내렸다. 별로 튼튼하지 않은 우산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꽤 소란스러운 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울린다. 미약하게 박혀있는 우산을 머리에 한 번 더 내리찍곤 다 젖은 발로 몸을 밟았다. 형, 빨리요!!! 기척이 순식간에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입에 물고 있던 플래시를 이미 방에 들어가 있는 박지성에게로 던지고 뛰었다. 나재민이 들어오자마자 박지성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세게 닫았다. 힘이 풀린 듯 기댄 문에선 좀비가 부딪히는 진동이 수차례 울렸다. 바이러스가 퍼진 이후로 제일 위험한 하루였다. 안전지대라며. 분명 안전지대라고 했는데, 서월과는 달리 좀비가 빠르고 힘이 셌다.
"괜찮아?"
문밖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나재민은 물었다. 겨우 문에서 몸을 떼고 일어난 박지성이 벽을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찾았다. 아마 여긴 불 켜질 거 같은데. 아, 찾았다.
밝아진 방에 둘 다 눈을 찌푸린다. 흐린 밖보다도 더 밝았다. 빛은 보이지 않던 것들을 비췄다. 형 피나요. 나재민 다리에 생채기 몇 개가 나 있었다.
"방금 다친 거 같은데. 괜찮아요?"
"지성아. 너도."
아까 마트에서 버티느라 살짝 까진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눈을 한다. 살짝 베인 거 같은 가벼운 상처였다. 나재민 다리엔 피가 맺힐 정도였는데.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요. 저기 옷 있어요."
나재민의 상태를 제외하곤 이 공간에서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니, 그래서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옷도 있고, 침대도 있는 공간. 이미 꺼져버린 휴대폰 두 개도 있었다. 마주쳤던 두 마리의 좀비가 떠오르는 걸 애써 지운다.
"형 잠깐만요. 뭐야!"
"우리 지성이 부끄러워?"
"말하고, 아니..."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돌아오자 다 벗은 몸이 앞에 있었다. 왜 말도 안 하고... 처음 본 것도 아닌데 눈을 가리는 게 귀엽다. 지성아. 근데 왜 눈은 뜨고 있어. 손 틈 사이로 보이는 눈이 마주치자 귀는 빨개졌다. 진짜 귀여워 지성아.
"하지 마요 진짜."
"다 갈아입었어. 이제 손 내려."
"저도 알거든요? 아, 초콜릿 먹을래요?"
"응. 그러자."
나재민이 다 젖어 더러워진 옷을 가지고 일어났다. 아직 젖어있어 물이 나와 적실까 구석에 두려는데 그 벽 끝에 어떤 종이 하나가 있었다. 고이 접어둔 쪽지 같은 걸 나재민은 무의식적으로 집어 펼쳤다.
[보안실 비밀번호 *8425]
보안실. 나재민과 박지성이 가려고 했던 곳. 쪽지 안에 적힌 내용은 상상도 못 했던 거였다. 보안실이 한 번에 열릴 리가 없는데. 당연히 비밀번호가 있을 텐데.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변수다. 근데 그 변수를 맞닥드리기도 전에 열쇠를 찾았다. 지성아, 이거 봐.
"헐. 뭐에요?"
"누가 여기에서 지냈었나 봐. 우리처럼. 비밀번호도 알아냈고."
"혹시 아까... 아 아니다. 몰라요. 아무튼 잘됐다."
박지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으나 덧붙이지 않았다. 파고 들어가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하곤 급하게 마무리한다. 아까 그 눈이 자꾸 아른거렸지만 나재민은 그냥 웃어 보였다. 우리 진짜 살 수 있나 보다. 순탄하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그랬다. 박지성이 한 입 작게 베어 문 초코바를 나재민에게 건넨다.
"형두 먹어요."
"지성아."
"넹?"
"귀여워."
아 뭐야... 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그리고 형은 이 상황에서 귀엽다는 말이 나와요? 삼 일을 굶고 겨우 초코바를 먹는 이 상황에 어울릴만한 말은 아니다. 숨 쉴 때도 귀엽고 먹는 것도 귀엽고 다 귀여운데 상황이 어디 있어. 형 안 먹으면 내가 다 먹을 거에요. 진심이 아닌 말인데 나재민은 그래도 된다며 또 순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박지성이 먼저 나재민 입에 초코바를 물렸다. 형은 왜 자꾸 뭐가 다 된다고 해요.
초코바 하나와 옥수수캔 하나가 남아 있었지만 어떻게 될지 몰라 일단 하나만 나눠 먹고 둘은 침대에 누웠다. 당연하게도 자리는 비좁았지만 지금까지 잠자리 중 가장 편안했다. 그때 서월에서 함께 누워있었던 호텔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온한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이렇게 다시 돌아가면 어떨까. 어떤 기분일까. 형은 무슨 생각 할까. 그런 게 문득 궁금해졌다.
"형 있잖아요. 우리 진짜 살아서 여기 나가면 뭐 하고 싶어요?"
"말했잖아. 우리 다시 여행도 가고, 별도 보고, 못했던 거 해보고 싶다고."
"저도요. ...재밌을 텐데. 근데 그거 말고. 진짜 하고 싶은 건 뭐에요?"
내 앞에서 하는 그런 얘기 말고요. 나랑 하고 싶은 거 말고, 형이 진짜 하고 싶은 거. 형이 좋아하는 거랑 해보고 싶었던 거 중에서요.
"지성이랑 같이 살고 싶어."
"..."
"지성이 없이 하고 싶은 게 없어. 그런 생각 하고 싶지도 않고. 떨어져 있기 싫어."
같이 살아서 나갈 건데 왜 그런 생각을 해야 돼? 하루종일 죽을 뻔했던 일을 몇 번이나 겪고 은연중에 생긴 불안감을 내비친다. 혹시 죽을지도 모르니까 물었던 질문은 아니다. 그냥 나재민의 일 순위가 항상 박지성이라고 말하니까, 그게 아닌 정말 나재민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을 물었던 건데. 사실은 그게 스스로도 모르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질문이였다는 걸 안 박지성이 입술을 물었다. 나재민의 대답도 역시 그 불안을 기반으로 한 과하게 단단한 말이였다.
"형 혹시 무서워요?"
"응. 무서워. 너무 무서워 지성아."
"...괜찮다고 해주고 싶은데 저도 안 괜찮아요. 미안."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근데 지성이랑 같이 살 수 없을까 봐 무서워."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까 좀비 머리에 우산을 꽂을 때 떨리던 그 손같이 느껴졌다. 비상계단에서부터 줄곧 깔려있던 감정이 맞닿은 살을 통해 전달됐다. 박지성은 해줄 수 있는 어떤 말도 어떤 위로도 없었다. 그냥 혹시라도 놓칠까 봐 제 손에도 힘을 주어 잡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시계나 알람따위는 없었으나 아침임이 느껴져 박지성은 눈을 떴다. 어디선가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게 햇살의 열기인 줄 착각하고 눈을 떴다. 여름의 해가 아니라 제 태양이 끓어오르는 거라는 걸 알았을 땐 몸을 일으켰다. 형 지금 열나는 거 같은데.
급하게 이불을 걷고 나재민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느 정도가 열이 나는 건지 정확하게 몰라도 분명히 뜨겁게 느껴졌다. 아마도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우산을 아무리 제자리로 돌려놔도 건물에 들어설 때 완전히 젖어있던 어깨를 봤다. 그 상태로 꽤 오랜 시간 추운 밖을 있었으니 감기에 걸릴 만 했다. 게다가, 피하기 위해 온몸이 젖었던 것까지. 순간 패닉이 왔다. 형 아프면 안 되는데. 여긴 약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혹시나 싶어 여기저기를 뒤졌으나 해열제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형 깨면 안 될 텐데. 일단 열은 식혀야 하는데. 혹시 밖에 뭐라도 있으려나. 약. 의무실이 아마 오 층에 있었던 거 같았다. 갔다 올까. 갔다 올 수 있을까. 입술을 짓씹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젖어있는 티셔츠를 꾹 짜서 나재민 머리 위에 올렸다. 다행히 꽤 차가웠다. 이걸로 열이 식으면 다행인데 그럴 것 같진 않다. 아. 안 되겠다. 갔다 와야지. 약을 먹고도 낫지 않았던 몸이 이걸로 괜찮아질 리가 없다. 박지성이 가방을 뒤져 라이트를 찾았다. 약만 빠르게 챙겨서 오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괜찮을 거야.
"...지성아."
깨지 않게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문에 다가가니 뒤에서 다 갈라진 목소리가 울렸다. 분명히 가지 말라고 할 거다. 가지고 있는 무기라곤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라이트 하나만 들고 약을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박지성은 무모했다.
"이리 와."
"형 저 약만 찾아올게요. 조금만,"
"박지성."
제발. 와서 손잡아줘. 멀리 있지 마.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하는 말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결국 라이트를 내려두고, 나재민 곁으로 간다. 손은 뜨겁고 계속 잘게 떨렸다. 박지성이 떠는 건지 나재민이 떠는 건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응. 열 내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고개짓으로만 해요. 목 아프잖아."
끄덕이는 탓에 살짝 비틀어진 티셔츠를 다시 올렸다.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오늘은 보안실에 가서 열쇠를 찾고, 바로 옥상에 가기로 한 날이였는데 이 상태로는 좀비에 물리기도 전에 쓰러질 게 뻔했다.
"추워요?"
열을 식히겠다고 이불을 걷어서 그런지 나재민은 계속 추워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냥 미지근한 손을 줬더니 꽉 잡는다. 나재민의 몸엔 열이 올라 박지성이 차갑게 느껴졌을 게 분명한데도 따뜻하다는 듯이 웃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뜨겁게 열이 올라 아무것도 못 하는 나재민에게 어설프게 물수건을 올리고, 필요한 거 없냐는 물음에 손만 꽉 잡았던 날. 바로 나을 줄 알았는데 나재민은 그렇게 며칠을 앓았다. 박지성은 그때의 열기를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아까부터 아픈 나재민보다 정신없이 구는 이유였다. 그땐 약도 꼬박꼬박 먹었는데 잘 안 나았던 걸,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어서 체력이 약해졌을 몸으로 스스로 버틸 수 있을지 불확실해서. 아니, 사실 그럴 수 없을 거 같아서.
"일단 좀 자요. 자고 일어나서 뭐 좀 먹어요. 빨리 나아야 되니까."
나재민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본다. 무슨 눈인지 알았다. 걱정하는 눈. 말렸지만 또 나가서 약을 찾아오려는 무모한 짓을 할까 걱정하는 눈. 박지성이 고개를 저었다. 안 할 거니까 자요. 알겠어. 말하지 말라니까. 혹시라도 잠이 깰까 박지성은 불도 안 켜고 바닥에 앉아서 나재민을 봤다. 아픈 몸은 숨소리가 금세 바뀌었다. 이어서 박지성의 숨소리도 바뀌었다. 짙게 한숨을 내쉰 건, 정말 처음이였다.
혹시 만약에 정말 형이 계속 아프면 어떡하지. 이제 몇 층만 더 올라가면 되는데 못 버티면 어떡하지. 학습한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좋지 않은 습관도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형이 낫기를 기도해야 하는데 계속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싫어서 눈을 꽉 감았다. 같이 살아야지. 둘이서 수없이 했던 말들이 울렸다. 아냐. 살 수 있어. 그래야지. 그러니까 형 살려야 돼. 깨기 전까지만 다녀오면 된다고. 박지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밖이 낮인지 밤인지는 몰랐다. 탈의실 안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래서 플래시를 들고, 나름 가방에서 제일 무기가 될만한 빈 물통을 챙겼다. 혹시나 잠이 깰까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나재민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밖은 조용했다. 박지성은 홀린 듯이 자기가 올려다봤던 창문에 서서, 자신이 서 있었던 곳을 내려다봤다. 까마득히 먼 곳 같았다. 아마 옥상에서 보면 훨씬 멀겠지. 거긴 아래에서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밖에선 좀비가 느리게 비가 닿지 않는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박지성은 조심히 걸음을 뗐다. 아마 복도에 정수기가 하나쯤은 있을 거고 거기서 물을 받을 계획이였다. 그리고 보안실로 가서 열쇠를 찾은 뒤 의무실에서 약을 챙겨오면 됐다. 거창한 계획이라는 건 알았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나재민이 언제 깰지 몰라 걸음이 급해진다.
보안실은 복도 끝쪽에 있었고, 거길 지나려면 우산이 꽂힌 좀비 시체와 허겁지겁 달아났던 비상구를 지나야 했다. 좀비가 문을 열 수 없다는 것과 대가리에 우산이 꽂힌 좀비가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박지성은 떨었다. 처음으로 혼자 움직이는 거라 그랬다. 뭔가 잘못돼도,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복도에서조차 그랬다. 괜히 나왔나. 혹시 이렇게 있다가 누가 숨어있으면? 보안실에 좀비라도 있으면?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쓸 데가 없는 상상력이였다. 멈출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박지성은 내내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호흡을 했다. 아마 죄다 문이 닫혀있는 걸로 봐선, 괜찮을거다. 괜찮다고 스스로 주문을 외우는 것과는 달리 심장이 너무 뛰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백화점의 길고 넓은 복도는 두 갈래였다. 탈의실이 있는 왼쪽 벽만 타고 쭉 걷다 보니 생각보다 쉽게 저 멀리 오른쪽에 정수기가 보였다. 무기이자 약과 함께 가장 필요한 거. 거기까지 가려면, 어딘가에도 기댈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곳이 생기고, 등 뒤로 갑자기 좀비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형 있었으면 분명히 자기가 간다고 했겠지. 만약에 좀비가 있으면 말하라고 망보게 시키고. 지금은 혼자였으니 망보는 걸 포기해야 했다. 없을 거야. 없겠지. 혹시 소리 때문에 저 멀리 있는 어딘가에 있는 좀비라도 나올까 박지성은 숨을 죽이며 빠르게 움직였다.
급할 때마다 아무렇게나 잡고 뜯어 제대로 꽉 닫히지도 않는 병을 열곤, 물이 떨어지느라 꽤 큰 소리가 나는 걸 어쩔 줄 몰라하며 박지성은 물을 받았다. 반병만 있으면 충분했다. 어제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다 채울 기세로 계속 쏟아지던 물은 서서히 약해지더니 딱 삼 분의 일에서 멈췄다. 물이 끊겨 겨우 남은 물만 나온 것 같았다. 우산 같다. 비 오는 날을 대비라도 한 것처럼 차에 있던 우산. 근데 망가져 제대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던 우산. 애매하게 좋은 운에 대해서 박지성은 계속 생각했다.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생각은 불안을 만든다. 이것도 다행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박지성은 우산 대신 애매하지 않고 확실히 좋은 운, 어제 나재민이 발견한 쪽지를 상기시켰다. 보안실 비밀번호. *8125. 쉽게 얻은 비밀번호를 속으로 잊을까 몇 번이나 외우곤 물병의 뚜껑과 플래시를 주머니에 넣었다. 보안실로 가면 됐다. 그럼 반은 성공한 거였다. 어제처럼 당장이라도 쏟아버릴 수 있게 물병을 쥐곤 걷는다. 그치만 쏟을 일은 없어야 했다. 약을 구해서 가져다줘야 하니까. 열쇠를 가지고 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약을 구하러 의무실까지 가는 건 꽤 위험도가 높았다. 그러니까 적어도 사 층에선 물을 쓰지 말아야 했다. 그냥 약이 여기에 있으면 좋을 텐데. 없으려나? 각 층마다 비상 상비약 같은 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그것만 찾으면 되는데.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의무실에 가는 것보다, 그걸 찾는 게 더 빠를 거다. 보안실에 가기보다 박지성은 약을 찾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이젠 꽤 조용한 공간에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았다.
비상 상비약을 두는 곳. 아마 직원휴게실 같은 곳에 두는 게 제일 일반적이다. 어제 여기저기 뒤졌을 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원래 거기 없었던 건가? 아니면 거기에 지내던 사람들이 가져간 건가? 그럼 결국엔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가 됐다. 어제 일 층 로비에 좀비 많이 없던데, 그냥 거기 가볼까? 갔는데 없으면? 문소리 때문에 좀비가 빨라지면? 의무실에 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위험도인 것 같았다. 일단 찾아보자. 어딘가에는 뭐라도 있을 거 같았다. 넓어서 혹시 나재민이 있는 곳을 잊을까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걸었다. 저기. 혹시 좀비 나오면 반대쪽으로 뛰어서 저 화분 넘어트린 다음, 좀비가 반대로 갈 때 뛰어 들어가면 되겠지. 몇 주 살았다고 쉽게 머리로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다시 머리로 경로를 그리다, 아깐 보지 못했던 문을 찾았다.
"어?"
밀어서 여는 문이다. 유리로 되어있어 안이 다 보였는데, 사무실처럼 생긴 공간이였다. 뭐 하는 곳이지? 일반적인 백화점보다는 조금 작고 박지성으로서는 알 수 없는 장소들이 계속 있었다. 뭘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일하는 곳엔 비상 상비약이 있을 거다. 박지성은 보안실을 지나서, 당연하게 유리문으로 다가갔다. 꽤 부드럽게 열리는 문 뒤로는, 인기척도 하나 없었다. 비상약. 구급상자 같은 게 있을 텐데. 조용한 사무실을 뒤졌다. 서랍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몇 번 울렸을 때쯤, 제일 안쪽 책상 아래에서 파란 뚜껑의 상자를 발견했다. 완전히 열려 속에 있는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휴게실에 있었던 사람인가? 바닥엔 붕대와 밴드 같은 것들이 있었고, 소독약 같은 액체류들은 죄다 비어 있었다. 약. 감기약만 있으면 되는데. 박스조차 없는 몇 개 되지 않는 약들을 뒤적이다 박지성은 익숙한 약을 발견했다. 전에 아픈 나재민을 보고 울면서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달라고 했을 때 받았던 약. 그때가 너무 생생해서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 약이 딱, 두 알 남아있었다.
"...다행이다."
사무실에 박지성의 목소리가 낮게 울린다. 날카로운 은색 포장지가 박지성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약을 쥐는 동시에 어딘가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안도감에 잠깐 잊고 있었다. 어디서 좀비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박지성이 빠르게 일어나 날카로운 걸 찾았다. 물병을 내려두고, 책상 위에 있는 조금 두꺼운 커터칼을 쥔다. 한 마리가 아닌 듯 사방에서 계속 괴이한 소리가 울렸다. 어제 문에 부딪히던 그 좀비들인가? 한 마리가 아니였던 거 같은데. 제발. 아냐 침착해. 일단 좀비 유인하고, 빠져나오면 되니까. 빠르게 책상을 스캔하다 여러 색의 클립이 든 통을 저 멀리 던져버린다. 출입구와 먼 곳이였다.
얇은 플라스틱 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높지만 작은 소리에 박지성 주위에 있는 것들은 그쪽으로 도망가질 않았다. 멀리 있던 좀비들이 저 멀리로 소리는 들렸으나, 가까이 있는 좀비들은 계속해서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안 되는데. 형 곧 있으면 깰 텐데. 언제까지 숙이고 있을 수는 없다. 칼을 든 손에 힘을 꽉 주고 일어선 순간, 좀비는 책상을 타고 넘어 박지성 쪽으로 기어 왔다. 옆구리에 펜이 박혀 느린 움직임이였으나 멀지가 않았다. 닿을 게 분명했다. 아, 제발. 제발 저기로 가라 제발. 비명을 지를뻔한 걸 속으로 꾹꾹 눌러 삼켰다. 박지성의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좀비는 미세한 소리로 박지성을 알아챘는지 자꾸만 손을 뻗어댔다. 도망치려고 해도 뒤는 벽이였다. 칼로 단번에 머리를 뚫으면 될 텐데. 어제 나재민이 했던 것처럼. 눈 꽉 감고 한 번만 하면 되는데. ...못 하겠어. 죽은 시체를 보거나 유인해서 도망친 적은 많아도 직접 이렇게 죽여야 하는 상황은 처음이였다. 물. 물 뿌릴까? 당장 손을 뻗으면 쉽게 닿을 수 있었다. 피를 묻히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아냐. 그럼 약은. 형 약 먹어야 되는데.
잠깐 고민하는 사이 박지성 소매가 잡힌다. 순간이였다. 잡히는 순간 순식간에 끌어당겨졌다. 일이 일어나는 건 단지 몇 초의 순간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생각은 몇 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박지성이 힘을 준 칼을 단번에 머리에 꽂았다. 이를 악물고 내리쳤다. 눈을 감을 생각도 못 한 채로. 온 힘을 다해 꽂아 넣었다. 어제 나재민이 냈던 그 소리가 울린다. 손끝엔 힘이 풀렸으나 계속해서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눈을 꽉 감고, 칼을 계속 쑤셔 넣었다. 금방이라도 울렁이는 속은 토할 거 같았다. 스스로 하고도 믿기지가 않는 행위였다.
박지성은 제 쪽으로 쓰러지는 좀비를 밀치고, 올려둔 물병을 챙겨 빠르게 도망쳤다. 소리로 좀비가 올까 비명도 지르지 않고 한 행위가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언제는 사람이였을 걸 죽였다. 아무렇지 않게라는 말과는 달리 당장 나재민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 행위 자체는 누가 보면 그랬다. 피가 묻어 미끄러운 손은 자꾸 물병을 놓치려고 했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도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아마 좀비가 문을 밀고 나올 수도 있다. 그러니까 빨리 보안실에 가서 열쇠를 가지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면 된다. 아무렇지 않게, 피가 묻어 있긴 했지만.
쿵쿵 뛰는 심장에 숨을 몰아쉬면서도 뛰듯이 보안실로 향했다. 혹여 닫히지 않았을까 봐 뒤돌아 문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복도 끝에 단단히 닫혀있는 보안실 문이 보였다. 열쇠로 쉽게 풀 수 있는 다른 문과는 다르게 도어락 형식이였다. 몇 번이나 잊을까 외웠던 번호를 천천히 누른다. 피 묻은 손이 지나간 숫자는 빨갛게 물들었다. 버튼 하나를 누를 때마다 소리가 났다. 삐, 삐, 삐, 삐, 삐, 다섯 글자 이후엔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나야 했는데, 짧게 삐삐삐-, 경고음이 울렸다 꺼졌다. ...왜 안 되지? 자꾸 속이 울렁거린다. 토할 거 같아. 빨리 형 보고 싶어. 손이 미끄러져 혹여 잘못 누른 걸까 봐 박지성은 다시 하나하나 꾹꾹 버튼을 눌러댔다.
팔, 일, 이, 오-.
삐삐삐-, 삐삐삐-, 삐삐삐-, 삐삐삐-
아까와는 달리 경고음이 멈추질 않았다. 맞는데. 대체 왜. 박지성은 당황한 손으로 천천히 한 번 더 외우던 숫자의 배열을 눌렀으나, 이번엔 더 경고가 심했다. 보안실 도어락에서 나는 경고가 아니라, 백화점 전체에서 나는 경고음이였다. 그 쪽지, 사실은 거짓말이였던 건가? 당연하게도 진짜라고 믿었다. 머리를 울리는 소리에 박지성은 당장 죽을 것 같았다. 큰일이였다. 높고 큰 소리는 좀비들을 자극시킨다. 게다가 언제까지 이 경고가 울리는지도 몰랐다. 비상계단 불은 나갔는데, 왜 비상 알림은 제대로 작동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말 이 상황을 만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박지성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처럼. 경고음을 꺼야 하는데. 이대로 계속 있다간 좀비가 나오고, 자극받아서 더 빨라질 텐데. 그 전에 꺼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도 탈출할 수 있는데. 이젠 피로 완전히 얼룩져버린 도어락을 아무렇게나 눌러봤으나 될 리가 없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착각이기를 바랐다. 제발. 아닐 거야. 열려. 열리라고. 도어락이 망가질 듯 번호를 눌러댄다. 돌려서 여는 문 같은 건 열 수 없었으나 밀어서 여는 문 같은 건, 좀비의 무게로 단번에 열렸다. 착각이길 바라는 일들은 대부분 착각이 아니다.
곳곳에 붙은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빨간 경고음들을 따라 좀비들이 빠르게 나온다. 그중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보안실 쪽으로 다가온다. 항상 보던 그 속도가 아니다. 박지성이 뛰면 도망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건 꼭 터널에서, 미친 듯이 쫓아왔던 속도였다. 그만큼 많은 좀비는 아니였지만 차도, 나재민도 없는 박지성에겐 그 세 마리의 좀비가 몇십 마리의 좀비들보다 더 무서웠다. 이제야 판단이 제대로 가능했다. 아까 도망쳐야 했고, 지금도 이 생각을 하기 전에 도망가야 한다. 머리로는 이제 아는데 도저히 힘이 없었다. 어떻게서든 기어서 도망가야 하는데. 좀비는 달려왔다. 아까와는 달리 눈을 꽉 감는다. 동시에 쥐고 있던 물병이 힘에 의해 박지성 손을 벗어났다.
"제발."
쥐고 있던 물병이 바로 앞에 흩뿌려진다. 박지성의 의지는 아니였다. 멍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박지성의 손이 아니였다. 물병을 빼앗아 드느라 잠깐 닿은 손이 뜨겁다. 눈앞에서 연기가 나고, 좀비가 쓰러진다. 고개를 돌려 나재민의 눈을 맞추자마자 마법처럼 경고음은 꺼졌다.
"...형."
"가지 말라고 했잖아. 안 간다며."
"..."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약속을 깬 건 박지성이였으니까. 그게 나재민을 위한 일이라 해도, 나재민에겐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다 갈라진 목소리가 더 그랬다. 머리가 아픈지 눈을 감고 잠깐 숨을 몰아쉬는 나재민을 껴안았다. 박지성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안. 나재민도 박지성의 이유를 알아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곤 하나였다. 빨리 가자.
피로 잔뜩 물든 박지성의 손을 한 번 내려다보고, 피로 얼룩진 도어락을 한 번 쳐다본 나재민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팔, 사, 이, 오. 나재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쪽지는 한 번 구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가볍게 보안실 문이 열리고, 그 안엔 몇십 대의 화면이 작동하고 있었다.
"형, 수영장에…"
하나하나 속으로 층을 셌던 곳이 팔 층이다. 창문에 들러붙어 있던 그 좀비가 팔 층이였다. 물을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다른 층의 좀비와는 확연히 다르게 느렸다. 물이 닿은 것도 아닌, 단지 물과 가까이 있을 뿐인데도. 그럼 그 좀비가 사실은 위험한 게 아니라, 물을 피하느라 부딪힌 건가. 경보로 자극을 받은 다른 층의 좀비들은 빠르게 몸을 부딪쳐 어딘가로 탈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수없이 창문에 몰려들어 몸을 부딪치기도 했다. 떨어져 내리려는 듯. 나재민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옥상을 여는 열쇠를 찾았다. 가자. 당장 일단은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게 좋았다.
급하게 뛰어나온 건지 열을 식혀주던 티셔츠는 바닥에 굴러다녔고, 가방도 죄다 엎어져 있었다. 나재민은 그 티셔츠를 주워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박지성 손에 가져다 대곤 살살 닦아냈다. 피 묻히는 거 싫었는데. 뭔가를 힘을 주어 쥐고 있는 듯한 손을 닦아내려 천천히 펼치자, 안에서 부서진 듯한 알약 두 알이 나왔다. 날카로운 끝이 얼마 동안이나 박혀있었는지 자국까지 남아있었다. 그게 박지성의 피인지, 좀비에게서 묻은 피인지조차 구분이 안 갔다.
"지성아."
"부서졌네... 그래도 먹을 땐 상관 없을 거에요."
"안 아팠어?"
자기보다 서로를 걱정하는 게 더 익숙해진 것 같았다. 박지성은 표정이 굳은 나재민에 다친 지도 몰랐다고 계속 안심만 시켰다. 사실 아픈지도 지금 보고 나서 알았다. 조금 따끔거리긴 했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라 하나도 안 아픈 척을 했다. 붕대나 밴드같은 게 없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깨끗하게 닦인 손엔 상처가 선명했다. 누군가를 치료하려고 제 몸에 상처를 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다. 박지성이니까. 더는 없을 거다. 적어도 나재민이 아는 사람 중에서는. 나재민이 그렇게 할 사람도 박지성밖에 없었으니까.
"나 괜찮으니까 빨리 약 먹어요."
"응."
"...물 없어서 이걸로 먹어야겠다."
전에 박지성이 약처럼 꽉 쥐고 있던 옥수수 캔이였다. 가지고 있는 액체류라곤 캔 안에 든 물밖엔 없었다. 나재민이 부서진 약을 털어 넣곤 캔을 기울인다. 부서져 단번에 녹아내리는데 물에서 달달한 맛이 느껴져 나름대로 괜찮았다. 그걸 본 박지성은 자기가 더 쓰다는 듯 표정을 찡그린다. 으. 괜찮아요? 초콜릿 먹을래요? 어린애 가루약 먹고 사탕 챙겨주는 것처럼 구는 게 웃겼다. 누가 어린앤데. 사탕은 지성이 먹어. 에. 이거 초콜릿인데. 많이 아파요?
"물이랑 먹을 때보다 맛있어."
"약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닌데요."
전에 나재민이 했던 말이다. 형 너무 써서 못 먹겠어요. 지성아 약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니야. 나으려고 먹는 거지. 형. 응응. 사탕 먹어. 그때를 따 라하면서 장난치는 게 귀엽다. 우리 지성이 왜 이렇게 귀엽지. 나재민이 웃는 걸 보니까 박지성도 이제 꽤 안심이 됐다. 형은 웃는 게 더 예뻐.
"키스해도 돼요?"
"안 돼. 감기 걸렸잖아."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는데요?"
형 나으면 우리 옥상으로 올라갈 거잖아요. 근데 진짜 만약에, 우리가 올라가다가 죽으면, 그럼 후회할 텐데. 그래도 안 돼요?
"그리고 약도, 하나 더 있는데."
거부하느라 손만 잡은 나재민을 눕힌다. 그리곤 허락 없이 입술을 부딪혔다. 나재민도 그냥 눈을 감았다. 언제 죽더라도 후회는 안 하고 싶어요. 의도적으로 자꾸 피했던 스킨십은 한 번 건드리자마자 터지듯 이어졌다. 생존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였다. 체력이 필요하고, 열을 나누면서 에너지를 쓰는. 그런 것들. 근데 그런 계산에서 벗어나면 그만이였다. 평소와 달리 나재민의 움직임이 없었다. 아직도 옮길까 봐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나재민이 그랬던 것처럼 입술을 물고, 혀를 섞는다. 약의 쓴맛과 캔의 단맛이 섞여 들어왔다. 진짜 좋아해요. 너무. 숨이 서서히 막히는 느낌이 들었어도 떼고 싶지가 않았다. 결국 나재민이 살짝 밀어내고 나서야 박지성은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얼굴은 다 젖어있었다.
"나 형이 죽는 줄 알았어요."
"내가 왜 죽어."
"만졌는데 너무 뜨겁고, 약은 없고... 근데,"
"지성이가 살아있는데 형이 왜 죽어."
우리 같이 살기로 했잖아. 내가 죽으면, 너가 못 사니까. 내가 어떻게 죽어. 응?
무서웠다고,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고. 그래서 밖을 나간 거라고. 형이 만약에 죽으면, 그럼 진짜 죽어버릴 거니까. 나가서 죽어도 상관없었다고. 박지성은 우느라 툭툭 끊기는 숨으로 말했다. 나재민의 손이 천천히 눈물을 계속 닦았다. 그래도 얼굴은 자꾸만 젖었다.
"안 죽을게. 우리 안 죽을 거야. 내일이면 다 나을 거고, 우리 살 수 있어. 지금까지 그랬듯이."
"사랑해요."
"내가 더."
내가 더 사랑해 지성아. 애정의 크기를 따지고 싶진 않지만 너가 나를 더 사랑한다면 내가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됐어. 아마 그럴 거야. 꽉 안은 몸에서 심장이 똑같이 뛰었다. 터질 듯이 빠른 속도였다.
열은 식었다. 박지성이 이른 눈을 뜨자마자 나재민의 손을 잡았다. 평소처럼 차가웠다. 혹시 몰라 이마에 올린 손도 뜨거워지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 손에 잠이 깼는지 나재민이 눈을 떴다. 미안. 깼어요? 좀 더 자요. 작게 말하는 목소리에 살짝 웃곤 몸을 돌려 박지성을 껴안는다. 그리곤 가볍게 자꾸만 입을 맞췄다. 아 간지러. 뭐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밀어내진 않았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싫을 리 없었다. 이러니까 진짜 돌아간 거 같애. 조금 있으면, 정말 돌아가겠지만.
얼마나 안고 있었는지는 몰랐으나 슬슬 몸을 일으킬 시간이였다. 구조 헬기가 언제 여길 지나칠지 모르고, 추운 밤을 밖에서 지새는 건 어제와 같은 날이 되풀이될 게 뻔해서. 둘은 어젯밤에 먹지 않았던 초콜릿을 나눠 먹곤 짐을 챙겼다. 혹시 몰라 남은 약과 빈 물병을 손에 쥐곤, 옥상 열쇠도 잃어버리지 않게 챙긴다. 계획은 그랬다. 어제 경보로 자극받은 좀비 때문에 바로 옥상으로 올라가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어제 봤던 수영장에서 무기를 얻기로 했다. 물. 빈 물병에 최대한의 무기를 채우고, 어쩔 수 없이 몸을 적셔버리기로. 그럼 중간에 좀비를 만나도 무사할 거다. 팔 층. 거기까지만 안전하다면 계획에 차질이 없었다.
"가자."
"가요."
이젠 다시 하지 않을 말을 꾹꾹 눌러 말한다. 나재민이 박지성의 다친 손을 잠깐 살피고, 반대쪽 손을 잡았다. 이틀 전 닫았던 문을 다시 연다. 그때와 같았다. 그때, 나재민을 물려고 했던 그 좀비. 물을 맞으면 무슨 이유인지 몸에서 연기가 났고, 움직임이 없었다. 그럼, 죽은 건가? 나재민의 발걸음이 좀비 앞에서 느려지는 걸 보고 박지성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만 보고 빨리 가요. 시간 없어. 나재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좋은 기억이 아니였으니까.
계단을 오르는 건 쉬웠다. 좀비는 문을 따고 들어올 수 없다. 무슨 일인지 밝았던 계단이 다시 어두워진 것만 빼면 장애물은 하나도 없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랬다. 그럼에도 수영장으로 향하는 건, 여전히 혹시 모를 일 때문이다. 숨어있는 좀비가 갑자기 들이닥치면 무기가 없이 꼼짝없이 먹이가 될 게 뻔했으니까. 어쩌면 이게 더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일인 줄도 모르겠다. 그치만 몇 번이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좀비를 마주치고 목숨을 잃을 뻔한 둘에게는 무기를 얻고 가는 쪽이 더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오 층, 육 층. 나재민이 계단에 붙어있는 숫자를 비춘다. 층과 연결된 문을 지나갈 때면 문밖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틀 전에 들었던 소리가 아니다. 문에 쾅쾅 들이박는 소리였다. 힘과 무게 때문에 조금 흔들리는 게 보였다.
"최대한 빨리 가자. 곧 열릴 수도 있을 거 같아."
"경보만 아니였으면... 안 저랬겠죠?"
"지성아."
"알았어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안다. 나재민이 박지성의 자책하는 말을 잘라내곤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리곤 걸음을 빨리했다. 그 소리에 도망치려는 듯이. 그러면 또 다른 층의 문과 가까워졌고 소리는 반복됐다. 거기서 도망치면 또 문, 박지성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 이곳이 어쩌면 똑같은 미로를 뱅뱅 돌고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다행히도 나재민이 팔 층을 비춘 뒤로 소리는 멎었지만.
"들어가면 왼쪽에 바로 수영장 입구가 있을 거야. 어제 씨씨티비에선 수영장 입구가 열려있었는데, 지금은 닫혔을 수도 있어. 그리고 수영장에 있던 좀비가 밖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만약에 문을 열고 좀비가 나오면, 소리 지르지 말고 바로 왼쪽으로 뛰어. 어차피 물 주위에 있던 좀비들이라 빠르진 않을 거야. 금방 유인하고 형도 거기로 갈게."
"지금 무기도 없는데,"
"안 다칠게."
아파도 참아. 알겠지. 피가 굳은 손을 매만지곤 말한다. 이 상황에서 이 정도는 신경 쓸 거리도 되지 않았지만 나재민은 박지성의 상처가 제일 걱정이였다. 그럼 문 열게. 하나, 둘, 셋.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문에선 꽤 높고 자극적인 소리가 난다는 것. 문을 열자마자 느리게 움직이던 좀비들은 모두 일제히 둘을 향해 몸을 돌렸다. 뛰어. 나재민의 말에 박지성이 빠르게 왼쪽으로 뛰었다. 문은 열려있었다. 나재민은 빠르게 문을 닫아 박지성 쪽으로 주의가 분산되지 않게 만든 다음 오른쪽으로 뛰었다. 대충 손에 집히는 것 아무거나 들곤 가까이 있는 좀비를 후려친 다음 머리로 계속 생각했다. 물. 물로 처리할 방법.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는 것들밖엔 없다. 카운터에 있는 라이터와, 문서들. 물 대신 불.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했다.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돼라. 제발. 가까이 있는 좀비들의 속도를 늦춰 몇 초의 시간이 있었다. 나재민이 금방 불을 붙인 종이를 좀비 쪽으로 던진다. 예상과는 달리, 불이 활활 타오르지가 않았다. 살이 점점 타올라 몰려있던 좀비가 전부 불에 붙을 거라 생각했는데. 좀비는 느려지지도 않았다. 그냥 물어뜯기기 전에, 물에 빠져드는 게 빠른 방법일지도 모른다. 좀비는 열에 강했다. 살이 그을려지며 연기가 나는 몸을 끌곤, 카운터를 넘는 나재민의 발목을 잡아채려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손끝이 스치자 소름이 돋았다. 그냥 뛰자.
"씨발..."
물이 약점이라면 불은 강점이였나보다. 뒤돌아 묘하게 점점 속도가 붙는 걸 확인하다 벽에 몸을 완전히 부딪혔다. 쾅, 큰 소리가 남과 동시에 좀비들이 연기를 내며 손을 뻗는다. 닿지 않았는데도 뜨거웠다. 어제의 나재민 몸보다 훨씬.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화상을 입을 정도의 온도였다. 겨우 내려간 열인데 곧 다시 끓어오를 판이였다. 스치듯 박지성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안 다칠게. 그냥 어떻게든 같이 뛰어들었어야 했나. 지성이 수영 못 하는데. 발 안 닿아서 혹시 숨 못 쉬고 있으면 어떡하지.
그냥 화상을 입든 말든 정면 돌파해서 뛰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즉시 온몸이 젖어 들었다. 순식간에 천장에서 물줄기가 쏟아진다. 비가 내리는 것처럼 차가운 물이 온몸을 적셨다. ...안 되는 줄 알았네. 뒤늦게 스프링클러가 터져 금세 좀비들을 물에 적셨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연기가 쏟아졌다. 됐다. 나재민의 예상으로는 아까 터졌어야 했는데 꽤나 느린 속도였다. 터지기 전에 닿지 않은 게 다행이였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없었다. 박지성을 찾아야 했으니까. 지성이. 지성이 못 올라왔으면 안 되는데.
제 앞을 막아선 좀비를 밟곤 입구로 뛰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좀비들 중앙에 물 표면이 자꾸 일렁이는 게 보였다. 박지성. 이미 젖은 몸은 망설임 없이 단번에 뛰어든다. 예상한 곳에 가라앉고 있는 몸을 붙잡고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늦어서 미안해. 물속에서 뜬 눈으로 보이는 건 눈을 꽉 감고 있는 얼굴이였다.
"왜 이렇게, 콜록, 늦게, 하아... 와요,"
"미안해. 괜찮아?"
"다친 거 아니죠?"
"하나도."
형 약속 잘 지키지. 약속의 문제가 아니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 선을 붙잡고 있던 팔이, 나재민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축축하게 젖은 몸을 끌어안는다. 나재민이 가볍게 박지성의 허리를 받치고 젖은 앞머리를 넘겨줬다.
"아팠어?"
"아뇨."
"무서웠어?"
"네."
물속에서 초를 셌는데, 초를 세면서 형이 뭐 하고 있는지 상상했는데, 이쯤 되면 들어와서 안아줘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형 다친 줄 알았어요. 근데 안 다쳤으니까. 괜찮아요. 긴장해서 빠르게 말하는 걸 천천히 듣는다. 응. 안 다쳤어. 괜찮아. 나재민의 대답에 웃는 얼굴이 잔뜩 젖어있어 자꾸 입을 맞춰댔다. 옆에선 좀비들이 어슬렁거리는데, 그런 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그냥 앞에 있는 서로만 보였다.
"헐 소리 나서 그런가. 우리 쳐다봐요."
"우리 지성이 예뻐서 그런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왜애. 귀여운데."
"...몸 차가워요. 또 감기 걸리겠다. 빨리 나가요."
다치지 않게 박지성을 물 위로 올려주고 나재민도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올라왔다. 다 젖은 몸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흔적을 남겼다. 좀비들은 가까이 다가오질 못하고 둘을 피하듯 움직인다. 와. 신기해. 우리가 좀비된 거 같아요. 박지성의 말처럼 상황이 역전됐다. 복도에도 발이 살짝 잠길듯하게 물이 깔려있었다. 나재민이 수영장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몇 분 동안이나 계속 터진 듯했다.
"여긴 왜 젖었어요?"
나재민이 천장을 가리키곤, 도망치느라 바닥에 던졌던 물병을 가져와 대충 물을 채워 담았다. 혹시 스프링클러 터진 거에요? 와 진짜 똑똑하다. 형 원래 이렇게 똑똑했어요? 안전함이 보장된 뒤로 긴장이 풀렸는지 말이 많아진다. 나재민이 물병을 찰랑대곤 웃었다. 죽기 직전까지 갔다는 말은 굳이 안 했다.
젖을까 계단에 뒀던 플래시를 챙기곤, 어렵지 않게 계단을 올랐다. 찰박대는 소리를 들으며 오르는 계단은 길었다. 팔 층에서 십일 층은 그리 멀지 않았음에도 젖은 몸은 아까와 다른 무게였다.
"우리 구조돼서 가면, 뭐부터 할 거에요?"
"김치볶음밥."
"네?"
"먹고 싶다고 했잖아. 지성이 김치볶음밥 해주고, 나도 먹고. 배부른 상태로 낮잠 자면 좋겠다."
"나도. 나도 그러고 싶어요."
플래시가 십일 층을 비추자 둘의 걸음은 조금 더 느려졌다. 눈 앞에 보이는 계단 몇 개만 올라가면, 정말 문이 열리고, 머지않아 구조헬기가 올 테고, 몇 번이나 질리게 말했던 하고 싶은 것들도 다 할 수 있게 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나재민에게서 플래시를 빼앗아든 박지성이 앞서나간다. 십일 층. 그다음에 보이는 건, 옥상의 철문. 박지성이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들고 문 앞에 섰다. 경보를 울려대며 머리를 어지럽혔던 건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형. 자물쇠가 부서져 있어요."
박지성이 쥐고 있던 열쇠를 떨구곤 나재민을 돌아봤다. 자물쇠가 부서져 있다. 완전히 어그러진 채로 간신히 문에 걸려있었다. 툭 치면 떨어질 것 같이. 스쳐지나가는 몇 개의 장면들이 있었다. 비상계단에 있던 좀비와, 휴게실에 있던 쪽지와, 널브러져 있던 약들. 전에 누군가 이곳으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근데 정말 옥상까지 올라왔을 줄은. 그 사람들은 탈출했을까? 놀란 박지성 대신 나재민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큰 소리 없이, 문은 열렸다. 순간 쏟아지는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늘이 맑았다. 완전히 다 갠 하늘을 본 건 처음이였다. 아까 나왔을 때만 해도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죄다 어두웠는데. 박지성이 뒤따라 나오자마자 문은 닫혔다. 쾅, 미약하지만 무거운 소리였다. 햇빛은 둘을 기다렸다는 듯 삼켰다. 완전히 젖어버린 몸이 빠르게 말라가는 게 느껴졌다. 이전엔 느낀 적 없는 강한 햇빛이였다. 몸이 쩍쩍 말라간다. 하늘을 미처 볼 수가 없었다. 홀린 듯 난간으로 다가가는 발걸음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우리 지금 다른 세계에 온 거 같아요."
나재민도 그렇게 생각했다. 끈 적 없는 플래시는 빛에 먹혀 아무런 효력도 내지 못했다. 잘못 온 건가? 다른 문을 열었다거나. 박지성이 난간 앞으로 홀린 듯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형. 이거 봐요."
멍하게 쳐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박지성에 나재민의 걸음도 난간 앞으로 멈춰 섰다. 고개를 숙이자 보이는 건, 익숙한 안개였다. 정말 다른 세계처럼 경계가 나눠진 듯했다. 안개 아래의 모습은 나재민과 박지성이 알던 모습일 게 분명했다. 좀비가 느리게 어슬렁거리고 비가 왔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우리 아무래도 잘못 온 거 같지. 네. 여기 있으면 안 될 거 같아요. 여긴 아무도 안 올 거에요. 어떻게 할까. 다시 내려가서, 우리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다른 경로를 찾던 머리는 박지성의 재채기 소리에 멈췄다. 금방 변한 온도에 아마 몸이 놀란 것 같았다. 박지성이 다 말라간 머리를 털며 뒤를 돈다. 약 하나 남아서 다행, 아...
"왜?"
"형 지금 다시 내려갈 수 있어요?"
"아마,"
안 될 거 같네. 뒤를 보고 멍하게 묻는 박지성을 따라 몸을 돌리자 그런 말 밖에 안 나왔다. 되돌아간 기분이다. 이 건물에 오기 전으로. 원산에 오기 전으로. 터널 속에 있던 그때로.
햇빛에 정신을 못 차리던 그 시간 동안, 좀비들은 현저히 느린 걸음으로 도망갈 틈이 없이 둘을 좁혀오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나올 때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문 뒤에 있는 기둥 뒤에 숨어있었던 건가?
"...어쩐지 너무 쉽더라. 그쵸. 영화에서 보면 이렇게 쉽게 살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좀비에 나재민이 결계라도 치듯 급히 들고 있던 물을 뿌려댔다. 그리고 그걸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젖은 바닥은 치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단번에 말라버린다. 희망이 증발하는 소리였다. 겨우 옥상에 올라왔더니 마주한 탈 듯이 뜨거운 햇살과 좀비 떼의 소리였다. 차라리 이럴 거면 열이 올라 죽어버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애매한 운 같은 건 없었다. 악운의 연속이였다는 걸 둘은 몰랐다. 허무하고 힘이 빠져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 꿈이지. 그게 더 현실성 있을 거 같은데. 말이 되는 일이 아닌 거 같은데. 둘 다 서로를 보고 웃었다. 진심에서 나오는 웃음은 아니였다. 그냥 우는 대신 나온 웃음이였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형. 형 말이 맞았어요. 우리 진짜 그만했어야 했나 봐."
"미안해 지성아."
이제 그런 말 안 할게. 놓지 말아봐. 잠깐만. 형이 꼭 살려줄게. 나재민은 일단 되는대로 내뱉었다. 방법도 없으면서.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거짓말. 형이 어떻게 살려줘요.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왜 그런 말을 해. 그렇게 말하는 건 스스로한테 말하는 것과 같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왜 이렇게 됐냐고 자책하는 것과 같았다. 박지성이 다시 뒤를 돌아 아래에 깔린 안개를 보곤 말했다.
"형. 좀비 돼서 영원을 사는 거랑 그냥 여기서 떨어져서 죽는 것 중에 뭐가 더 나을까요. 아... 떨어져서 머리 깨지기 전에 좀비한테 물어뜯기려나."
느리게 조여오는 좀비 떼에 박지성 손이 떨린다. 와 근데 진짜 허무하다. 저는 완전 살 줄 알았어요. 그건 나재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럴 거라고 다시 말하고 싶은데 이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코앞이였다. 나재민 시야가 점점 흐려진다.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눈물이였다.
"형 울어요?"
"...아니."
"형 우는 거 진짜 별로다. 예전에는 좀 보고 싶었거든요? 근데 진짜 별로. 완전 싫어요. 그니까 그만 울어. 나 이제 말도 못 하는데."
나 눈 한 번만 맞춰줘요. 나 무서워. 형. 제발요.
박지성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이내 떨리다 멎는다. 나재민은 피로 얼룩진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냈다. 맨날 지켜준다고 하더니. 형이 먼저 울면 어떡해요. 지켜줄 거면 끝까지 지켜주던가. 괜히 하는 소리였다. 마지막이라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였다. 좀 이렇게 끝내야 그래도 괜찮을 거 같아서. 이제 길어봤자 십 초. 아직 몸을 덮쳐온 것도 아닌데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조여오는 좀비 떼들에 숨이 막힌다. 박지성의 숨이 거칠어졌다. 나재민이 아까 좀비를 따돌리느라 찢어졌던 손으로 박지성 손을 꽉 잡는다. 미안. 나재민이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한다. 피가 흥건한 손으로 잡았다고 사과를 했다. 진짜 형은 마지막까지. 짜증을 내고 싶었지만 소리 하나 크게 낼 수 없었다. 이젠 알았으니까. 큰 소리를 내면 좀비가 빨라진다는 걸. 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그런 거에 반응해서 한 마디도 제대로 못 하게 하는지. 박지성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 높지 않은 난간으로 박지성의 발이 올라선다. 나재민은 그걸 보더니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같이 올라섰다. 찢어진 상처가 손 때문에 짓눌려도 젖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이젠 진짜 끝이였다. 완전히, 그러니까 완전히 끝. 허무하다. 악착같이 살려고 했던 게 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려서. 일부러 나재민이 자긴 먹지 않고 식량을 내어줬던 것도, 서로 지켜내려 잠을 한 번도 제대로 못 잔 것도, 다 이젠 의미가 없어져서.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웃을걸. 아니 좀 더 아래에서 버텨볼걸. 살기 위해서 참았던 것들도 다 할걸. 나재민의 표정을 따라 박지성도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뒤를 돌면 좀비가 손을 뻗고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재민의 눈도 완전히 맞추질 못하고 반쪽 얼굴만 바라봤다. 그리고 뒤에서 소리가 나는 순간, 나재민의 입이 열린다.
"지성아."
사랑해.
귀에 꽂히는 느린 고백과 동시에 몸이 빠르게 낙하한다. 아. 그냥 나도 그렇게 말할걸. 박지성의 늦은 후회도 함께 빠르게 낙하한다.
쿵,
크게 울린 파열음을 따라 좀비 떼가 여전히 잡고 있는 손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 해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