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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마카

저 미술 시작할 거예요.

 

풉. 지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혁의 추임새가 끼어들었다. 빨간 라면 국물이 동아리실 책상 위로 물감처럼 흩뿌려졌다. 아, 뭐하는 거야아! 옆에서 뿅뿅거리며 화면을 두드리던 인준이 큰 소리를 냈다. 삐끗한 손은 다급하게 움직이다가 이내 멎었다. Lose. 휴대 전화에서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준은 포기한 듯 책상 위로 폰을 던지려다가 이내 거두고는 물티슈를 뽑았다. 어지럽게 튄 국물을 무심하게 닦아 내는 손과는 다르게 눈길은 지성에게로 향해 있었다.

 

 

"갑자기 미술을 하겠다고?"

"네, 아니, 갑자기 아닌데요."

"야야, 니가 무슨 미술이냐. 공부가 힘들어?"

 

 

콜록거리며 요란하게 입을 닦던 동혁이 다시금 지성의 말에 끼어들었다. 지성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공부가 힘든 것은 맞았지만 그 이유만으로 미술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눈이 '아니, 그러면 왜?'의 의문을 담고 지성에게로 모였다. 음, 지성은 잠시 고민하는 소리를 내었다가 "아니, 뭐..."와 같은 말로 얼버무리듯 시간을 끌었다. 뒷머리를 정리하는 손길이 어색했다. 단순한 궁금증만을 담고 있던 동혁과 인준의 얼굴에도 심상치 않은 의문이 피어났다.

 

 

"지성아, 가만히 있어야지."

 

 

이런 상황에서도 차분한 건 재민뿐이었다. 재민은 지성이 앉은 소파의 끄트머리에 기대 누워 슥슥 연필을 움직였다. 녹은 햄스터처럼 풀어져 있던 지성이 바짝 허리를 세워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재민의 입꼬리가 만족한 듯 올라갔다. 매점 햄버거와 바나나우유를 걸고 시작한 드로잉 연습 모델이었다. 사실 햄버거와 바나나우유는 빌미였다. 동혁과 인준 사이에서 박지성 전용 지갑이라고 불리는 나재민은 연습 모델 따위 해 주지 않아도 수시로 지성을 매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니까 이건 재민에게는 지성에게 간식을 사 주기 위한 빌미였고, 지성에게는...

 

 

"아니, 그래서 왜 갑자기 미술을 하겠다는 건데."

"저 미술 동아리잖아요."

"야, 이게 말만 미술 동아리지,"

"우리 찌송이는 입술이 참 예뽀."

 

 

아, 나재민. 분위기 파악 쫌 하라고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동혁이 볼멘소리를 냈다. 분위기가 왜. 아니, 얘가 미술을 한다잖아. 우리 찌송이가 하고 싶을 수도 있지. 야, 너는 애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는 못하고... 투닥거리는 다툼 사이로 인준의 한숨 소리가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티키타카에 인준은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동혁과 재민의 말소리, 인준의 뿅뿅거리는 게임 소리, 그리고 슥삭거리는 연필 소리가 멈추지 않아서 지성은 곧추 세운 허리를 편안하게 굽힐 수 없었다. 등에서 목까지 이어지는 선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지성에게는, 좋아하는 재민을 한 번 더 볼 수 있는 빌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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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지만, 동아리 활동이 필수가 아닌 드림고에서 팔팔한 젊은 피의 학생들은 사서 고생을 마다했다. 그나마 하겠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학생회, 밴드부, 그것도 아니면 댄스부 정도였다. 미술 동아리는 동아리실이 모여 있는 별관에서도 가장 끝,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있는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동아리의 역사는 3년. 한때 미술 뽕에 취했던 동혁이 입학하면서 만들었고, 졸업하면서 없애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신입생이 들어와 가늘게 이어지는 중이었다. 물론 그 신입생은 지성 하나뿐이었다.

 

동혁의 표현을 따르자면 드림고의 미술 동아리는 '미술 빼고 다 하는 동아리'였다. 줄여서 말하면 미빼동. 모여서 하는 활동이라고는 서로 엽사 찍어서 웃기게 그리기, 게임 그래픽 탐구하기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부원의 반 이상이 미술 전공이었는데, 그중에서 유일하게 미술을 하지 않았던 게 지성이었다. 비율을 따지기 무색하게 부원은 단 네 명뿐이었지만. 동혁은 조소에 관심이 있었고, 인준은 동양화, 재민은 서양화였다. 지성은 그냥 깍두기나 감자에 해당됐다. 오랜만에 들어온 신입생이기 때문인지 세 명의 선배는 꽤 살뜰하게 지성을 챙겼다. 동혁은 지성이 심심하지 않게 다양한 방법으로 지성을 골렸고, 인준은 지성이 어떤 행동을 해도 수용하고 귀여워해 줬다. 그리고 재민은 차분하게 지성을 지켜보다가, 가끔 귀엽다느니 예쁘다 같은 말을 던지다가, 때때로 지성의 허리를 당겨 안고 목이나 볼에 입을 맞췄다. 지성은 이따금씩 그런 행동이나 말들이 남자끼리 하기에는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미빼동도 가끔은 미술을 했다. 어쨌든 학교에 존재하는 동아리였기 때문에 미술 관련 활동을 한다는 것을 보고해야 했다. 그래서 축제 때마다 작은 전시회를 열었는데, 지성도 1학년 가을 축제에 참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빼동은 존재감이 없었지만 미빼동 구성원들은 학교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미빼동 부스에 학생들이 와글와글 모여든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지성은 학생들의 뒤에서 우물쭈물거리며 길을 트기 위해 노력했다. 동아리 부원이니 부스를 지켜야 했는데,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지성아, 여기!"

 

 

인준이 손을 쭉 뻗어 지성을 끌어당겼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학생들 사이로 끌려가는 동안 지성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왜 거기에서 그러고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손으로는 접혀 있던 의자를 착착 펴 지성의 자리를 만들었다. 자기는 지금까지 내내 서 있었으면서 지성은 오자마자 자리에 앉혔다. 지성은 앞에 놓인 팜플렛을 정리했다.

 

 

"다른 형들은요?"

"재민이 그거 또 작품 마무리 늦었잖아. 캔버스 가지러 갔어."

 

 

이번이 첫 행사인 지성은 몰랐지만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재민은 늘 작품 출고가 늦다고 했다. 느릿하게 구상하고 구성을 짜다가 행사 당일이 되어서야 마무리하는 것이 다반사라고 동혁은 내내 툴툴거렸다. 이번에도 늦으면 니 작품 안 걸어 준다. 으름장을 놓았지만 역시나 늦었다. 언젠가 동혁이 지성에게 말했다. 존나 느려 터지기는 했는데, 존나 쩔어서 안 걸 수가 없다고.

 

지성은 맨들맨들한 팜플렛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대며 목을 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내심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동아리실에서 작업하고 완성시켰던 인준이나 동혁과는 다르게 재민은 개인 작업실이 집중이 잘된다며 축제 준비 내내 동아리실에 뜸했다. 꽁꽁 숨기고 안 보여 주니 더 궁금했다.

 

 

"작품 처음 걸린 건데 안 봐?"

 

 

아. 지성이 멍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품은 안내 테이블 왼쪽 간이 벽면에 걸려 있었다. 솔직히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지성은 지금까지 그림이라고는 그려 본 적 없는 일반 고등학생이었다.) 어쨌든 처음 걸어 본 거니까 보기는 해야 했다. 옆으로 돌아 나가자 처음 보이는 것은 동혁의 조소 작품이었다. 커다란 묠니르가 어딘가에 처박혀 여기저기 깨진 형태였는데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만 들 수 있는 묠니르가 깨진 형태를 표현해 정의가 사라진 우리 사회를 담았다며 설명하던 것이 떠올랐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 감동해서 만든 거면서. 지성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자 팔팔 날뛰었던 것까지.

 

인준의 작품은 작은 화판에 그려진 동양화였다. 커다란 수박과 작은 여우 한 마리가 베이지 색의 화판 위에 자수처럼 수려하게 놓여 있었다. 선이 워낙 가늘고 섬세해 가까이에서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은 작품이었다. 와, 형, 어떻게 이렇게 그려요. 대박. 짱. 몇 번이고 붙여지는 감상에 인준이 부끄럽다며 지성의 등을 밀었다. 빨리 니 거나 봐. 아,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요.

 

지성의 작품은 미술 기본서에 등장할 법한 사과 하나였다. 그것도 색감조차 없는. 미술 갓 시작한 사람들이 명암 연습하겠다고 그려 놓은 듯한 그런 사과 그림이었다. 왜 하필 인준이 형 다음일까. 유독 격차가 크게 느껴지는 작품 배치에 지성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그나마도 지성은 별로 한 게 없었다. 작품의 지분을 따지자면 동혁 35%, 인준 50%, 재민 10%, 지성은 나머지 5% 정도였다. 구도 잡기, 연필로 명암 넣기 같은 것들을 가르쳐 준답시고 다 해 준 덕이었다.

 

 

"야야, 비켜 봐, 빨리."

 

 

지금이라도 그림을 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동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꽤 다급한 목소리에 지성이 빠르게 옆으로 비켜섰다. 동혁은 낑낑거리며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툭 놓았다. 야, 조심을 좀. 뒤따라오던 재민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동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숨을 고르다가 다시 들어 봐 하며 재민과 함께 캔버스를 들어 지성의 사과 옆에 걸었다. 옹기종기 모여 작품을 보던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혁은 재민보다 뿌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척 끼고 그림을 보았다. 내심 기다리고 있던 지성도 동혁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큰 캔버스를 보며 지성은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이유는 몰랐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묘한 푸른빛의 색채가 잠식하듯 지성의 눈에 가득 찼다. 단지 색깔만으로 이런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유화에 남은 거친 붓 자국이 파도와 심연을 표현한 것 같기도, 이른 새벽에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 같기도 했다. 지성은 한참이나 그 속을 헤엄쳤다.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그래서 어느새 다가온 누군가가 어깨를 짚을 때까지도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다.

 

 

"지성아."

 

 

화들짝 놀란 지성이 어깨를 떨며 재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놀라. 정작 재민은 평온한 얼굴로 실실 웃기만 했다. 지성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왼쪽 심장 부근에 손바닥을 올렸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엇박을 타며 뛰었다. 재민의 검은 머리 위로 푸른빛이 도는 것만 같았다.

 

 

"사과 잘 그렸다. 동글동글한 게 꼭 지성이 같네."

 

 

재민은 꼭 미술 비평가 같은 얼굴로 턱을 긁으며 지성의 사과를 평가했다. 내용은 비평가스럽지 않았다. 지성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그림을 번갈아 보았다. 조악하고 색감이라고는 없는 무채색의 그림과 모든 푸른색을 다 빨아들여 모아 놓은 것 같은 재민의 그림을.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그림 밑에 적힌 제목과 이름이었다. <처음> 박지성, <무제> 나재민.

 

축제가 끝나고 지성의 그림은 미빼동 벽면 중앙에 걸렸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지성은 약간 죽고 싶어졌다. 첫 번째는 형편없는 그림 실력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기억과 함께 의문도 떠올랐다. 지성이 그때 '처음' 가지게 된 그 감정은 미술에 대한 열정이었을까, 재민에 대한 열망이었을까. 사실 어떤 것이어도 상관없었다. 지성은 재민을 좋아하게 됐고, 재민을 좋아하게 된 이유인 미술을 꼭 잘하고 싶었다.

 

 

 

 

 

 

 

 

 

덜덜. 쌀쌀해진 날씨에 후드만 대충 걸친 지성의 몸이 잘게 떨렸다. 익숙한 걸음으로 향한 곳은 조용한 동네에 위치한 오피스텔이었다. 삐삐삐삐. 달칵 열리는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니 훈훈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입시 미술을 왜 돈 주고 배워, 신이 여기 있는데. 시작은 동혁의 말이었다. 미빼동 미술 전공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같은 학교에 진학했다. 그중에서도 재민은 수석이었고, 인준은 딱 중간, 동혁은 턱걸이였다. 합격이 보장된 이후부터 그들은 심심하면 동아리실에 모여 매점을 털거나 게임 머니를 털거나 서로를 털었다. 지성은 그사이에 꼭 끼어 있었다. 그날은 미술을 시작하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진 이후로 지성이 미술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뗀 날이었다. 저, 그, 입시 미술 시작하려는데 어떤 학원이 좋아요? 그러니까 동혁이 저렇게 대답한 것이다. 다리를 쭉 펴 발가락으로 나재민을 가리키면서.

 

그래도 과외비도 없이 배우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은 지성만 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재민의 눈이 지성을 향했고, 뒷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지금은 배우기 시작한 지도 꽤 되어서 재민의 개인 작업실로 출퇴근하는 것이 익숙해질 정도였다.

 

 

"찌송이 왔엉?"

 

 

오피스텔 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치고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 준비하고 있던 재민이 인사했다. 하얀 도화지와 색색의 물감들 앞에서 작업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앞치마를 맨 재민은 볼 때마다 새로웠다. 에. 애매하게 대답한 지성이 괜히 가방을 정리하는 척 고개를 돌렸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심하게 잘생겼을 때, 지성은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얼굴을 숨기는 것이 상책이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재민은 수업 일수를 더 늘렸다. 입학하면 정신없어질 것을 미리 대비해 진도를 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냥 적당히 가르쳐 주고 말지 않을까 했던 지성의 생각과는 다르게 재민은 꽤 본격적으로 지성을 가르쳤다. 그 말은 이 미술 수업이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오는 꺄르르 꺄르르 분위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평소에도 잔소리가 많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미술 수업을 시작하고서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입으로 때리는 회초리를 맞다 보면 재민에게 가졌던 감정이 흐릿해지고는 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재민이 대학 오티로 자리를 비운 며칠, 그 목소리마저 그립다고 느껴진 이후로 그 생각은 접었지만.

 

그리고 오늘은 며칠 간의 짧은 이별 끝에 다시 만난 첫 수업이었다. 익숙하게 앞치마를 맨 지성이 이젤 앞에 앉았다. 죽어라 선만 그리던 것이 며칠, 죽어라 곡선만 긋던 것이 또 며칠, 최근에는 죽어라 명암만 넣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물리는 사과에 연필을 쥔 지성의 입에서 한숨이 삐져나왔다. 지겹다고 하기에는 지금껏 그린 사과가 곧 갈변 직전의 모양이었다. 잘 그리고 싶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꼭 재민처럼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재민의 수업 스타일을 따라가야만 했다. 지성이 하얀 도화지에 사과의 모양을 그려 나갔다. 책상에 몸을 기댄 재민이 다정한 웃음을 지우고 날카로운 눈빛을 냈다.

 

 

"지성아, 사물을 보면서 그려야지."

 

 

사과에 집중한 탓에 재민이 바로 뒤로 다가온 것도 몰랐다. 재민의 스킨십은 언제나 자연스러웠다. 터치에 예민한 사람들도 재민의 손길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지성의 왼쪽 어깨에 닿은 따뜻한 손이 은근한 압력으로 어깨를 누르고 있는데도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며칠 전에 그렸을 때랑 햇빛의 방향이 다르잖아. 그대로 그리면 어떻게 해."

 

 

반대쪽 손으로 연필을 쥔 지성의 손을 겹쳐 잡는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쥐고 지성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지성은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바로 등 뒤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더운 날의 아지랑이처럼 열기를 가진 몸이 존재감을 뿜어냈다. 지성의 몸의 온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지금 숨을 뱉으면 세찬 심장 소리가 재민에게까지 전해질까 아기 햄스터처럼 미약한 숨만 색색 내뱉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는 가까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그 울림까지 전달되었다. 지성이 어떤 기분으로 안겨 있든 재민의 손은 거침없이 움직여 어느새 빛의 방향을 수정하고 있었다. 재민이 움직이는 지성의 손에서 완벽한 사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우리 이렇게 있으니까."

 

 

연필이 멈추고도 재민의 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깨를 잡았던 손은 밑으로 떨어져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지성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재민의 볼이 지성의 어깨에 꾹 눌렸다. 다분히 애교스러운 몸짓이었다.

 

 

"꼭 사랑과 영혼 장면 같네. 우리 찌송이 사랑과 영혼 알앙?"

 

 

아래로 쿵 떨어진 심장과는 다르게 표정은 장난스럽게 일그러졌다. 으, 하는 표정을 짓자 재민이 실실 웃으며 어깨에서 떨어졌다. 말랑한 볼을 꼬집는 것은 수순이었다. 톡 튀어나온 입술도 한번 쥐어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재민은 지성의 그런 점이 좋았다. 늘 예상의 범주 안에 들어서는 귀여운 반응. 한 번만 더 꽉 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책상 위에 둔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었다. 사과 다시 그리고 있어. 걸음을 옮기며 말하니 에, 성의 없는 대답이 들렸다. 휴대폰을 집어 드는 얼굴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어, 지영아."

 

 

쫑긋. 새로운 이름에 드로잉북을 넘기면서도 신경이 쏠렸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재민의 다정이 사람 가리는 법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날이 섰다. 아니, 오히려 축 처졌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수강 신청? 전공은 듣겠지."

 

 

사각사각. 연필이 도화지 위를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대화 내용은 듣지 말아야지. 그건 실례야.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재민의 말을 복기했다. 수강 신청, 교양, 점심, 공강. 나오는 단어들이 고등학생인 지성에게는 모두 어색했다. 하지만 전화를 건 목적은 알 수 있었다. 여자로 보이는 수화기 너머 상대방은 재민이 형과 같이 시간표를 짜고 싶어 했다. 같이 점심도 먹고, 공강도 함께 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지성의 눈앞에 벚꽃이 흐드러진 캠퍼스가 펼쳐졌다. 화사한 벚꽃 나무 길목 아래 초록 잔디밭, 그 위에 앉아 있는 재민이 형과 얼굴 없는 여자애. 울고 싶어졌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잘 어울렸던 탓이다.

 

재민은 짧은 통화를 끝내고 지성의 곁으로 돌아왔다. 지성의 뒤에서 조용하게 연필의 움직임을 쫓았다. 지성은 미적미적 움직이다가 이내 고개를 틀어 재민을 올려다보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사과를 뚫을 듯 쳐다보던 재민이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한 시선을 맞춰 왔다. 저, 형. 용기를 낸 한마디였다.

 

 

"오리엔테이션 재미있었어요?"

 

 

쥐어짜낸 것치고는 싱거운 물음이었다. 재민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샜다. 재미있었지. 복잡한 지성의 마음과는 다르게 간단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리고 다시 연필을 움직여야만 했다.

 

그날 수업은 마음으로 쏟아지는 벚꽃 잎 때문에 단 한 순간도 집중하지 못하고 끝이 났다.

 

 

 

 

 

 

 

 

 

 

고등학생의 삶의 이유라고 불리는 점심시간. 지성은 아무도 없는 미빼동 동아리실 소파에 혼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휴대폰, 화면 안에는 인스타그램이 열려 있었다. 단 몇 장의 사진만 게시된 재민의 피드 옆 태그 게시물에 익숙치 않은 새로운 사진 하나가 보였다. 누가 봐도 대학교 단체 사진이었다. 볼까. 보지 말까. 사진 위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한참 고민하던 지성이 눈을 꾹 감고 게시물을 클릭했다. 그 안에는 단체 사진 말고도 여러 행사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다. 지성은 바글바글한 얼굴들 사이에서도 단번에 재민을 찾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재민의 주위에는 뽀얀 얼굴의 여자들밖에 없었다. 심지어 옆으로 넘기니 함께 찍은 셀카까지 보였다.

 

툭. 쿵. 쿵.

 

손에서 휴대폰을 툭 떨어뜨린 지성이 책상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짜증 나, 나재민. 재민의 앞에서는 절대 못 할 속마음이 툭 불거져 나왔다. 인준이 형이랑 동혁이 형은 어디에서 뭐 하는 거야. 방향을 잘못 잡은 원망도 솟았다. 사실 그 사진 안에 둘 모두 있었지만 지성의 눈이 재민만 담았을 뿐이었다. 인준과 동혁의 억울함을 뒤로하고, 이제 지성만 남은 동아리실에 쿵쿵 소리가 한참을 울렸다.

 

 

 

 

 

 

 

 

 

 

슥슥. 사과를 그리는 손에 열정이 없었다. 커다란 손에 붙잡혀 있는 연필은 꼭 토라진 것처럼 종이에 닿기를 꺼렸다. 수업이 있을 때마다 재민이 꼬박 새 것으로 사 오는 빨간 사과만 머쓱하게 자리를 지켰다. 드로잉북에는 흠이 너무 많아 어느 하나 흠잡을 것이 없는 사과가 느릿하게 완성되는 중이었다. 지성의 영혼 없는 손짓을 한참 지켜보던 재민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성아. 따뜻한 손이 다정하게 뒤통수를 쓸었다.

 

 

"무슨 고민 있어? 그림이 잘 안 그려져?"

 

 

수업료도 받지 않는 봉사 수준의 수업에 집중조차 하지 않는 것은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일이었음에도 재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것은 지성이 웬만하면 이런 식으로 티를 내는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지만 이미 꼬일 대로 꼬인 지성은 발끝에서부터 작은 스파크가 튀어 온몸을 덮치는 듯한 짜증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이유는 하나였다. 얼마 전 통화했던 '그' 지영이에게도 이런 식으로 다정하게 굴까. 뻔하지. 재민이 형은 다정이 화수분이니까. 멈춘 연필은 다시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지성은 한참 연필을 잡고 부들거리다가 이내 꾹 쥔 주먹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전혀 괜찮지 않아서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언제까지 사과만 그려요?"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재민에게 지영이에 대해 따질 수는 없었던 탓이다. 겨우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친한 사이에 대학교에서 사귄 친구까지 간섭하는 것은 지나가던 햄스터가 봐도 웃긴 상황이니까. 마침 지성의 머릿속에 떠오른, 끓어오르는 감정을 분출할 만한 적합한 이유가 겨우 이 정도였던 것이다.

 

 

"언제까지 물감도 못 쓰고 이런 것만 해요."

"지성아."

"저 이제 2학년이고 수시 준비도 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 언제 하냐구요."

 

 

한번 터뜨리니 봇물 터지듯 밀려 나왔다. 당황한 듯한 재민과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유래 없이 또박또박 말을 쏟아 내자 지성은 이게 마치 자신의 속마음인 양 착각까지 들었다. 감정을 표출하고 나니 어쩐지 속이 후련해졌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쉬고 연필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꾹 쥐었는지 손바닥에 손톱 모양이 깊게 패어 있었다. '그' 지영이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멀어졌다.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방금 뱉은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재능도 뭣도 없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뒤처지게 시작했으니 더 빠르게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성아."

 

 

다정한 목소리가 지성의 양심을 쿡 찔렀다. 재민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형 지금 너한테 겨우 입시 미술 가르치자고 이러는 거 아니야."

"……."

"지성이 니가 진심으로 미술을 하고 싶으면 시작부터 기본을 잘 잡아야 하니까. 그래서 그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지성의 몸을 따뜻하게 감쌌다가 이내 얇고 긴 채찍이 되어 사정없이 내리쳤다. 다 뱉었다고 생각한 불 같은 감정은 열기만 남긴 채 눈가에 모여 송골송골한 물방울을 맺었다. 지성은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줬다. 양심에 찔릴 때는 언제고 서러운 감정이 몸을 덮쳤다. 형이 뭘 알아요. 그런 말을 내뱉고 싶은 걸 겨우 참는 중이었다.

 

재민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재민은 지성에게 애정의 대상이기도,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가끔은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미술을 좋아하게 만든 장본인이 자신의 위치에 비해 너무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재민의 그림을 사랑하면서도 그렇게 그릴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그 원망은 방어 기제처럼 재민에게로 향했다. 감정은 결국 하나로 모아졌다. 잘하고 싶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재민이 형처럼 잘 그려서 재민이 형의 옆에 당당하게 서고 싶다. 재민에 대한 애정이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민을 좋아하는 마음이 지성의 컨트롤을 벗어났듯 그림 역시 지성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과 감정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지성아, 울어?"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를 재민이 짚은 순간 지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누구 중에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상대가 재민이었다. 죄송해요. 저 가 볼게요. 젖은 눈을 들킬 새라 분주하게 가방을 챙겼다. 재민의 목소리가 몇 번 더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모르는 척했다. 재민의 것인 앞치마를 벗어 둘 생각도 못 하고 운동화 뒤축을 구긴 채 문을 나섰다. 재민은 더 이상 지성을 잡지 않았다.

 

재민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기다렸다는 듯 다리에 힘이 풀렸다. 몇 발자국 가지도 못했다. 지성은 그대로 주루룩 미끄러져 땅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재민이 봤으면 지지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했다. 멍한 얼굴에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지금 뭘 한 거지.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죄 없는 재민에게 화풀이를 했다.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아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재민은 지성에게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회색 후드에 토독 떨어진 물기가 점점 크기를 키워 나갈쯤 띠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느릿한 걸음 소리가 세 걸음만에 멈췄다. 도망가겠다고 뛰쳐나와 놓고 이것밖에 안 왔네.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단단한 손이 겨드랑이 밑으로 쑥 들어오더니 그대로 몸이 훅 일으켜졌다. 아, 형, 잠깐만요. 지성의 몸이 짐짝처럼 재민에게 안겨 질질 끌려 들어갔다. 바둥거려도 힘으로는 못 당했다. 칭얼거림에는 대답도 없었다. 누가 보면 범죄 현장처럼 보일 비주얼이었다.

 

 

"잘못했어, 안 했어."

 

 

그대로 다시 이젤 앞에 앉혀진 지성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주억댔다. 재민이 지성의 실수를 눈감아 주는 방법이었다. 혼내는 것 같지도 않은 목소리로 타박을 주면 지성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 됐다. 재민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같은 말로 마무리했고, 그렇게 지성은 껄끄러운 상황에 직면하지 않고도 사과를 할 수 있었다. 감정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지성을 위한 재민만의 배려였다.

 

재민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 테이블에서 달그락거렸다. 눈치 보며 고개를 든 지성이 빼꼼 목을 빼 재민 쪽을 살폈다. 이젤 위에는 새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재민은 지성의 의자 옆에 작은 테이블을 두고 그 위에 색색의 물감을 펼쳐 놓았다. 다양한 사이즈의 붓까지 준비하던 재민이 멍하게 벌어진 지성의 입술을 보다 씨익 웃었다.

 

 

"다른 거 그리고 싶다며. 어떤 거."

 

 

'어떤 것'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지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기도 했고, 재민에게 말하기도 민망했다. 어, 그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미루자 재민이 다리를 접어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꽃받침은 덤이었다. 그 얼굴이 심히 부담스(럽고 예뻐서)러워 지성은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을 내뱉었다. 형이 축제 때 걸었던 그림이요. 그 말에 재민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가 이내 풀어졌다.

 

재민은 거침없이 색을 골랐다. 옆에서 우물쭈물 서성이던 지성이 작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무슨 색 썼는지 다 기억해요? 당연하쥥.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조색했는지까지 다 기억하는데. 지성은 마치 사진처럼 기억 속에 박혀 있는 그림을 떠올렸다. 오묘한 푸른빛의 색감은 감으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성은 익숙하게 페인팅 나이프로 물감을 섞는 손을 바라보다가, 단단한 팔에 시선을 두었다가, 가지런히 내려앉은 속눈썹을 눈에 담았다. 작품만 들어가면 땅굴까지 파는 탓에 그림에 집중하는 나재민은 흔치 않았다.

 

유화를 그리기 전 밑 작업이나 도구의 용어 같은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지성은 오랜만에 접하는 새로운 지식에 손바닥만 한 수첩을 열어 개발새발 글씨로 내용을 메모했다. 재민은 가볍게 지성의 수첩을 빼앗았다. 오늘은 재미로 그릴 거라니까. 지성이 아쉬운 표정을 짓자 입매가 시원하게 벌어졌다. 귀여워. 그런 얼굴이었다.

 

 

"색을 여러 번 덮을 거야. 손가락에 힘주고, 꾹 누른다는 느낌으로."

 

 

나이프를 지성의 손에 쥐여 주고, 손등을 덮어 천천히 움직였다. 흑백 영화 위로 색이 퍼지는 것처럼 무채색의 캔버스 위에 푸른색이 덧입혀졌다. 재민은 지성의 첫 채색을 몇 번 더 도와주다가 이내 손을 떼고 혼자 해 보라고 했다. 지성은 꼭 처음 자전거를 타는 아이 같은 기분이 됐다. 뒤에서 잡아 주던 아빠가 손을 놓을 때의 기분. 물론 지성은 지금도 재민이 잡아 주지 않고서는 자전거를 못 탔다.

 

99%의 확률로 통했던 불쌍한 햄쮜송 표정에도 재민은 팔짱을 낀 채 모르는 척했다. 결국 지성의 손이 다시 캔버스로 향했다. 후우. 긴 숨을 내뱉고 물감을 칠했다. 물감은 마치 버터처럼 부드럽게 발리며 공간을 채워 나갔다. 흰색 여백에 손을 댄다는 것이 마냥 두렵게만 느껴졌는데, 긋고 보니 별것 아니었다. 그와 함께 불안함에 쿵쿵 뛰던 심장이 설렘으로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색을 다시 채우고, 거친 붓으로 결을 살리고, 도톰하게 색을 덮는 과정을 반복했다. 재민이 만들어 둔 색에 다른 색을 더 섞어 지성만의 색을 만들어 냈다. 아낌없이 물감을 덜어 색 위에 색을 덮었다. 붓으로 꾹 누르면 지성이 만든 파란색이 결마다 비집고 나왔다. 지성은 그것이 꼭 감정 같다고 느꼈다. 긁어내지 못하고 수없이 덧입혀지는. 그래서 궁금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재민은 무슨 감정을 눌렀기에 그런 색을 칠했을까.

 

 

"재미있어?"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지성을 관찰하던 재민이 물었다. 지성은 마치 장난치듯 슥슥 그리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 끝은 어느새 활짝 벌어져서 작은 하트 모양이 되었다. 언제 긴장했냐는 듯 슬쩍 봐도 신난 얼굴이었다. 이렇게 쉽게 풀릴 거면서. 마음 졸이게 만들었던 아까의 상황이 생각나 괜히 심통이 났다. 재민은 지성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리를 옮겨 검지손가락에 물감을 묻혔다.

 

쿡.

 

말랑한 볼을 콕 찌르자 팔랑팔랑 움직이던 붓이 뚝 멈춘다. 멍한 얼굴이 재민의 검지와 악마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을 번갈아 봤다. 아, 아. 지성의 입에서 가오나시 같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 혀엉!"

 

 

재민이 잽싸게 반대쪽 볼에도 물감을 묻힌 뒤 헤헹 웃었다. 지성은 파란색 인디언 같은 얼굴이 됐다. 어쩔 줄 몰라 기막힌 숨만 허, 내뱉었다. 개구지게 웃는 얼굴이 얄미웠다. 지성은 빠르게 마음을 먹고 양손에 물감을 묻혔다. 그것을 지켜보던 재민이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좁은 오피스텔 작업실 안에서 치열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재민은 쫓기면서도 신난 아이처럼 웃었다. 지성은 웃느라 접히는 눈 때문에 자꾸만 시야가 흐려졌다.

 

잠깐만, 타임. 한참 뛰던 재민이 숨을 몰아쉬며 멈춰섰다. 그 와중에도 지성의 손바닥이 타이밍을 노리고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진짜 한 번만 찍고 끝낼게요. 지성이 타협을 시도했다. 먹히는 제안이었던 듯 재민이 경계를 풀었다. 딱 한 번이야. 지성은 양쪽 다 묻힐 의사가 없다는 것을 내비치기 위해 물감이 묻은 양손 중 왼손은 뒤로 숨겼다. 헐떡이는 사자를 달래는 사육사처럼 천천히 다가갔다. 그 모양이 꽤 귀여워서 웃느라 풀어지는 사이 지성이 숨겼던 발톱을 드러내며 재민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야……."

 

 

우당탕. 어딘가로 쓰러졌다. 탄탄한 소파가 등을 받쳤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자 눈앞에 재민이 가득 찼다.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지성의 이마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물감이 묻은 손은 재민의 손아귀에 붙잡혀 머리 위로 포박되어 있었다. 결국 물감을 묻히지는 못한 것인지 재민의 얼굴이 말끔했다. 대신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들만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헉. 미친.

 

지성은 그제서야 자신의 다리 사이에 꽉 끼인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온몸에 열이 올랐다. 우당탕. 손목을 털고 재민을 밀쳐내자 소파 옆에 있던 테이블에서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죄, 죄송.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완성시키지도 못한 채 지성은 급하게 옷을 챙겼다. 지금 상황에서 이렇게 당황한 티를 내면 더 이상할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도저히 여기에 더 머물 수는 없었다. 재민과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재, 재민이 형, 저 엄마가 일찍 들어오라고 해서. 죄송해요!"

 

 

누가 고딩 아니랄까 봐 애 같은 변명을 중얼거리며 문을 나섰다. 오피스텔의 문이 닫힐 때까지도 재민은 소파 밑에 널브러져 지성에게 시선을 꽂고 있었다.

 

 

 

 

 

 

 

 

 

 

 

툭, 툭. 모자를 푹 눌러쓴 지성이 간헐적으로 바닥을 찼다. 몇 주만에 봄이 다가온 건지 날씨가 더럽게도 좋았다. 바닥을 쿡쿡 찍고 있는 운동화 코만 보다가 슬쩍 고개를 들어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화사한 얼굴의 벚꽃 같은 신입생이 반, 후드에 얼굴을 파묻은 재학생이 반이었다. 낯선 풍경에 다시 고개를 숙인 지성이 이번에는 폰 화면을 툭툭 건드렸다. 카카오톡 대화창에서도 한참 밑으로 내려야 재민과의 채팅방이 있었다. 재민을 못 본 지도 몇 주가 흘렀다. 지성의 수업은 마지막으로 그렸던 사과에서 멈춰 있었다. 재민이 보고 싶어 그림 속 사과도 갈변할 기세였다.

 

연락해 볼까. 지성의 손가락이 몇 번이나 키패드를 눌렀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바쁘다고 했으니까. 아마 입학식이니 개강이니 해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실제로 인준이나 동혁도 전화를 할 때마다 취해 있거나, 과제를 하거나, 교수를 씹거나 셋 중 하나였다. 재민은 지성에게 자신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았으니 대충 비슷하겠거니 예상했다.

 

 

"지성~ 많이 기다렸어?"

 

 

지성의 목에 팔을 감은 인준이 자연스럽게 지성을 캠퍼스 안으로 들였다. 대학생이 된 인준은 백색에 가까운 노란 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별로 안 기다렸어요. 중얼중얼 대답하는 게 귀엽다는 듯 인준이 지성의 뒷머리를 헝클었다.

 

중앙 도서관 앞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청포도에이드를 지성의 입에 물려 주고 인준은 아메리카노를 쭈욱 빨았다. 와, 이제 살 것 같네. 고등학생 때는 입에도 안 대더니 입학하고 커피가 늘었다고 했다. 일학년이라 과제의 양은 많지 않은데 술자리가 존나 많아. 인준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끌끌 찼다. 공부를 하러 온 건지, 술을 마시러 온 건지. 동혁은 대학에서도 성격 대로 놀아서 매일 밤 불려 다니느라 오늘 오전 강의도 땡땡이쳤다고 했다. 참 형들다운 대학 생활이었다.

 

 

"이동혁은 대학생이니까 그렇다 치고, 너는 고등학생이 이렇게 땡땡이쳐도 돼?"

 

 

궁금증을 담은 눈빛이 지성에게 닿았다. 쭈욱. 지성은 괜히 빨대만 빨았다. 될 리가 없었다. 구라에 구라를 더해 학교를 빠진 참이었다. 누가 보면 간도 크다고 할 행동이었다. 그나마 지성이 그동안 쌓아 온 이미지가 있기에 가능했다. 간이 콩알만 한 애가 설마 거짓말을 하겠어. 햄스터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큰 착각이었다.

 

 

"재민이 수업 열두 시에 끝나."

 

 

인준이 지성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뜨끔. 지성이 빨대를 문 채로 동작을 멈췄다. 눈알만 굴려 인준을 보니 무언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큽. 청포도에이드가 기도에 걸렸다. 콜록콜록. 괴로운 얼굴로 기침을 토해 내니 괜찮냐며 얼른 등을 두드려 준다. 지성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생리적인 현상인지, 울고 싶은 기분에 나온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뭘 그렇게 놀라, 티 다 났는데."

"아, 형, 제발 그만요."

 

 

이번에는 진짜 울고 싶은 기분이 됐다.

 

 

"학교까지 빠질 줄은 몰랐는데. 재민이가 안 만나 줘?"

 

 

걔 요즘 바쁘기는 해. 평온한 목소리로 근황을 전한 인준이 기침이 잦아들자 등에서 손을 떼고 다시 아메리카노를 쭉 빨았다. 흥미롭다는 눈빛은 여전히 지성을 향한 채였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겨우 진정한 지성이 물었고, 인준은 얼마 안 됐다고 답했다.

 

지성의 마음을 눈치챈 것은 졸업하기 전 일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랐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미빼동 동아리실에서 누구보다 편하게 지내던 지성이 문득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친구들 사이에서 얼굴 팔리기 싫다며 1학년 교실에는 절대 오지 못 하게 하더니 재민이 매점 가자고 부르는 것은 빼지 않고 응했을 때? 처음에는 재민만 좋아한다고 서운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다. 지성은 미빼동 부원들을 다 좋아했다. 그중 한 명만 다르게 좋아했을 뿐이었다.

 

 

"재민이 형 요즘 많이 바빠요?"

 

 

우물쭈물거리던 지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학교 적응하느라 정신도 없고, 선배들이 신입생들을 워낙 좋아해서. 걔가 좀 튀는 얼굴이잖아. 인준의 말이 이어질수록 지성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인준은 소리 내 웃을 뻔한 것을 겨우 참으며 위로했다.

 

 

"그래도 아직 너만큼 귀여워하는 애는 없어."

 

 

아직. 아직이라고 말했다. 지성이 의미 없는 단어 하나를 붙잡고 땅굴로 파고 들어갔다. 좋은 말 해 줬는데 왜 그러지. 옆에 앉은 인준만 물음표를 띄웠다.

 

 

"어? 나재민 나왔네."

 

 

땅굴로 들어가더라도 재민의 얼굴은 보고 들어가야 했다. 지성이 온갖 작전을 세워 하루를 뺀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니까. 야, 재민아! 인준이 큰 소리로 재민을 불렀고, 지성은 고개를 쭉 빼 눈으로 찾았다. 재민은 중앙 도서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에서 누군가와 함께 나오고 있었다. 나란히 걷는 얼굴이 익숙했다. 아,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그 얼굴이었다. 이름이 지영이던가. 지성의 어깨가 다시 축 처졌다.

 

인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무어라 대화하던 재민이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손을 붕붕 흔들다가 옆에 있던 '그' 지영이를 보내고 뛰기 시작한다. 지성은 괜히 빨대로 에이드를 쿡쿡 찔렀다.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는데 단숨에 뛰어온 재민이 지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재민과 마주했다.

 

 

"내 학생 데리고 뭐 해."

 

 

내 동생이거든. 인준이 지지 않고 응수하자 재민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손은 자연스럽게 아메리카노로 향했다. 말릴 새도 없이 커피를 쭉 들이킨다. 야, 사 먹어. 돈도 많은 애가. 눈 뜨고 커피 빼앗긴 인준이 짜증을 냈다. 시로. 인준이 커피가 맛있오. 재민이 약 올리듯 혀를 잘라먹고 대답했다.

 

오랜만에 보는 재민의 얼굴이었다. 겨우 몇 주만에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머리였다. 고수했던 까만 머리가 파랗게 변해 있었다. 염색한 지 얼마 안 된 듯 선명한 파란색이었다. 눈썹을 가지런히 덮은 파란색 머리를 멍하니 보다가 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원래 선명한 이목구비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우리 찌송이, 형 안 보고 싶었어?"

"아, 형, 잠깐만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냅다 끌어안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 손바닥으로 가슴을 밀어도 꿈쩍 않는다. 그게 갑갑하면서도 안정감을 줬다. 이렇게 오랜 기간 재민을 못 본 것이 처음이라 괜한 불안함이 자리잡던 중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재민은 너무나 나재민 그대로여서 그게 안심이 됐다.

 

 

"그런데 평일에 어떻게 왔어. 학교는?"

 

 

정수리에 쪽쪽 뽀뽀까지 마치고서야 떨어진 재민이 남은 자리에 착석하며 물었다. 지성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알을 바깥으로 굴리니 알겠다는 듯한 탄성이 나왔다.

 

 

"고등학생이 땡땡이야? 심각하네."

 

 

장난스러운 어투였지만 표정은 말 그대로 심각했다. 손에는 여전히 인준의 아메리카노를 든 채였다. 지성은 재민의 입술 안으로 사라진 빨대의 끝에 시선을 두었다.

 

 

"니가 수업도 제대로 안 해 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슬쩍 지성의 눈치를 보던 인준이 재민에게서 아메리카노를 빼앗으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지성을 배려하는 것이었다. 재민의 눈길이 지성에게로 향했다. 지성은 괜히 민망해져 빨대를 짓씹었다. 민망한 상황이 연출된 이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타이밍이 참 구리다는 생각을 했다.

 

 

"미안해, 지성아. 진짜 바빠서 그랬어."

"괜찮아요. 저도 바빴어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짐짓 심각한 얼굴로 사과했던 재민이 씨익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이번 주 주말은? 이번 주 주말도 바빠?"

 

 

갑작스러운 제안에 고민할 새도 없었다. 지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살랑 저었다.

 

 

"그러면 형 드로잉 모델 좀 해 줘."

 

 

오랜만에 듣는 부탁이었다. 재민의 드로잉 모델은 미빼동 셋이 졸업하기 전까지 해 줬으니 그럴 법도 했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약속을 잡는 사이 인준의 전화가 울렸다. 어, 이동혁. 점심 약속은 빠르게 잡혔다. 오랜만에 시작된 미빼동 점심 회식이었다.

 

 

 

 

 

 

 

드로잉 연습은 늦은 저녁부터 시작됐다. 재민의 조별 과제 때문이었다. 어둑해진 시간, 지성은 익숙한 길로 향했다. 그때 이후로 개인 작업실은 처음이었다. 도어락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바깥만큼이나 어둑어둑한 상태였다. 수업을 진행할 때에는 쨍할 만큼 환한 조명을 켜 두었는데, 간단한 드로잉인지 따뜻한 분위기의 조명들이 작업실을 밝히고 있었다. 왔어? 주방에서 무언가를 만들던 재민이 지성을 반겼다. 이게 다 뭐예요? 지성이 소파 위에 있는 폭신폭신한 담요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드로잉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재민이 지성의 손에 따뜻한 머그잔을 쥐여 줬다. 진해 보이는 핫초코였다.

 

 

"편하게 누워 봐."

 

 

재민은 소파를 마주 보고 앉았다. 지성은 엉거주춤 서 있다가 잔을 테이블에 놓고 어색하게 누웠다. 이, 이렇게요? 재민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이 터졌다.

 

 

"무슨 관에 들어가?"

 

 

너무 정직하게 누웠나……. 머쓱해진 얼굴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재민이 옳지, 하며 강아지 어르듯 칭찬했다.

 

드로잉 모델은 생각보다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사진처럼 찰칵 하고 찍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같은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해야만 했다. 그래도 지난 1년 동안 재민의 드로잉 모델을 해 줬기 때문인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참을 만했는데 지금 이 분위기는 참기가 힘들었다. 형은 조명을 괜히 낮춰서. 금방이라도 몸을 뚫고 들어올 듯한 눈빛과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재민 때문에 자꾸만 몸이 오그라들었다. 부끄러움에 어딘가로 숨고만 싶었다.

 

 

"지성아, 가만히 있어야지."

 

 

종이 위로 연필이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명령어를 들은 로봇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재민의 시선은 지성의 눈으로 향했다가 코, 입술, 턱을 지나 몸 전체를 훑었다. 헐렁한 바지를 입을 걸 그랬나. 딱 붙는 검은색 청바지가 신경 쓰여 다리를 꼬았다. 그 움찔거리는 움직임까지 재민은 모두 눈에 담고 있었다. 차가웠던 표정이 한 번에 풀어졌다. 모델이 좋네. 웃음기 섞인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한참 윤곽을 잡던 재민이 잠깐 고민하는 듯 숨을 깊게 쉬더니 이내 드로잉북과 연필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손으로 눌러 저지시켰다. 가만히 있어. 자세만 다시 잡게. 지성이 뚝딱거리며 다시 원래의 포즈를 취했다. 간지러운 손길이 지성의 손목에 닿았다. 갈피를 못 잡는 손을 정확한 위치에 놓은 재민이 쓰다듬듯 손끝을 움직여 엉덩이에서 다리까지 내려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봐도 의도적인 터치였다. 재민의 손이 이번에는 발목을 잡아 위치를 바꿨다. 재민의 손길에 따라 움직이는 기분이 이상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손끝은 다시 다리를 지나 위로 향했다.

 

재민의 손이 셔츠 깃을 잡았다. 지성은 본능적으로 재민의 손등을 붙잡았다. 마주친 눈이 평소와 달랐다. 파란색 머리 때문인지 눈동자 안에도 푸른빛이 도는 것만 같았다. 재민은 지성에게 잡힌 채로 손을 움직여 지성의 셔츠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 사이를 벌리는 손가락과 함께 시선이 벌어진 셔츠 안으로 향했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눈길이 하얀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재민을 붙잡은 지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으로도 박동이 느껴질까.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재민에게 닿을까 무서웠다. 아니, 어쩌면 닿기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재민의 손이 지성의 턱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고개가 위를 향했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시작점에 발을 맞추고 스타트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긴장감에 몸이 굳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재민의 마음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면서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피어올랐다. 확신은 그렇게 찾아온다.

 

슬로우 모션을 걸어 둔 것처럼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어쩌면 거절할 시간을 벌어 준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성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눈을 감고 잡은 손을 자신에게로 당겼다. 손이 지성의 허리를 감음과 동시에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담백하게 부딪히다가 이내 따뜻한 점막이 지성을 감싼다. 가지고 놀 듯 쓰다듬었던 손길과는 다르게 조심스럽고 다정한 입술의 움직임에 지성은 다시금 확신했다.

 

형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 지성의 몸 위로 재민의 몸이 겹쳐졌다.

 

 

 

 

 

 

 

 

 

 

 

 

 

 

 

 

 

"아, 나재민 또 늦어."

 

 

그냥 가지고 오기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 늦는다고? 인준이 볼멘소리를 했다. 미빼동의 부스에는 오랜만에 사람들이 몰렸다. 오늘은 지성의 고등학생으로써 마지막 축제였다. 2학년 때는 지성밖에 없어 부스를 열 수 없었고, 3학년인 지금, 미빼동 마지막인데 부스는 열어야 한다는 동혁의 강력한 주장으로 열게 되었다.

 

미빼동은 사실상 1인 동아리였다. 지성 이후로 누구도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았고, 지성 역시 가입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학교에서 해체시키면 없앨 예정이었는데, 동아리 관리가 귀찮았던 것인지 아무 말이 없어 그냥 두었다. 새로운 동아리 개설도 없었기 때문에 동아리실도 여전했다. 지성은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나 점심을 포기하고 잠을 선택할 때 동아리실을 이용했다. 복작했던 시절이 그리워 조금 외롭기는 했다. 미빼동은 지성의 졸업과 함께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밟을 예정이었다.

 

 

"야야, 선배 오는데 안 도와주냐."

 

 

동혁과 재민이 낑낑거리며 캔버스를 들고 왔다. 지성의 졸업 전시이니 자신들의 그림이 꼭 걸려야 한다고 했다. 동혁과 인준의 작품은 이미 자리를 잡았고, 항상 늦는 재민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작품을 전시하고 제목까지 야무지게 붙인 동혁이 뿌듯한 표정으로 감상했다. 이번 전시는 지성 1학년이었을 때 걸었던 작품들을 그대로 다시 걸기로 했다.

 

 

"졸업 축하해."

"아직 한참 남았는데요."

"대학 붙었으면 끝난 거지, 뭘."

 

 

오다 주웠다는 듯한 제스처로 동혁이 꽃을 건넸다. 졸업식도 아니고. 괜히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지성의 광대가 솟았다.

 

 

"우리 학교에 미빼동 만들어 놓을 테니까 빨리 입학만 해."

 

 

미빼동의 해체는 결성으로 이어진다. 셋의 학교에 지성이 수시로 입학함과 동시에 동아리 결성이 결정됐다. 교복을 입고 모였던 넷이 대학생이 되어 다시 모일 예정이었다. 추진력 좋은 동혁이 이미 초석을 깔고 있었다.

 

지성은 첫 축제 때처럼 천천히 작품을 둘러보았다. 왠지 먼지가 쌓인 듯한 동혁의 묠니르와 관리를 잘한 것인지 예전 모습 그대로인 인준의 동양화, 이제는 지성의 지분 100%가 된 사과 그림. 무채색이었던 그때와는 다르게 완벽하게 채색까지 마친 상태였다. 예전과는 다르게 오롯이 지성의 힘으로 그린 온전한 지성만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오랜만에 보는 재민의 작품이 있었다. 눈 안에 가득 들어오는 천연한 푸른색이 여전한 울림을 줬다.

 

옆으로 온 재민이 지성과 손끝을 얽었다. 고개를 돌리면 그림에 물든 듯 푸른색 머리의 재민이 있었다. 왜 사과야? 지성의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던 재민이 물었다. 그냥, 수미상관이요. 어이없는 대답에 웃음이 흘렀다. 지성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손을 겹쳐 잡았다. 두 사람이 작품을 보러 오는 학생들 사이로 묻혀 들어갔다. 맨들맨들한 사과와 푸른색 그림 아래로 작품의 이름이 나란히 걸렸다.

 

<처음> 박지성, <사랑> 나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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