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臭
노랑 (💛)
켈록켈록. 다소 만화책 효과음처럼 기침을 내뱉으며 지성은 몇번이고 켁켁댄다. 창문에 고개를 박아도 보고 손부채질도 해본다. 그렇다고 이 불쾌하고 코 찌르는 냄새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지성은 그 공기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몇 번이고 후회한다. 7평 원룸이 지독한 모기약 냄새로 가득 찼다.
박지성은 지독한 (진짜) 독립 신고식을 하고 있었다.
지성은 저번주까지 재민과 함께 살았다. 얼굴 알고 지낸건 10년이 넘고 사귄지는 7년이 넘던 나재민. 모기향이나 모기약은 안 좋다고 굳이 자기가 몇군데 물리면서까지 다 잡아주던 나재민이랑. 더 이상 모기약 냄새 안 좋다고 말려줄 나재민도 대신 물려가면서 모기 잡아줄 나재민도 없어서 콜록거리면서 모기약으로 가득 찬 방에서 모기가 다 죽을 때까지 버텼다. 꼴사납게 눈물이 났다. 나재민이랑 헤어지던 날에도 안 나던 눈물이 쉬지도 않고 났다. 이건 이제서야 형의 빈자리가 느껴져서 우는 걸까 모기약 냄새때문에 우는 걸까. 어느 쪽도 맞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박지성이 홀로 서는 방법이었다.
왜 헤어졌느냐, 박지성은 더 이상 초라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둘은 원래 시골에 살았다. 대학 전형에 한두명 들어가는 농어촌전형에서 농촌. 달리 불편한 건 없었으나 엄마아빠도 전에 도시에서 일하다가 돌아온거라며 너도 한번은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려 어쩌다 보니 상경했다. 지성은 그냥 작은 평범한 집 아들이었고, 재민은 요양 온 부잣집 도련님에 가까웠다. 지성은 낡은 집에 사는데 재민의 집은 항상 으리으리하고 번쩍거렸다. 나재민은 거기서 제일 반짝거리고 이질적인 주제에 여기에 제일 동화된 박지성을 귀여워 죽으려고 하며 찰싹 달라붙었다. 하루에 열 번도 넘게 고백하는데 지성이 안 넘어갈리 없었다. 지성은 한번 찍어도 넘어가는 나무였는데 재민은 백번 찍었다. 그놈의 사랑이 뭐라고 재민은 공부는 흥미 없다고 수능은 쳐다보지도 않다가 박지성이 서울로 대학간다니까 황급하게 따라와서 근처 대학을 붙어왔다. 지성은 표를 두 장 끊게 됐다.
"지성아, 우리 진짜 행복하게 살자."
"... 우리 결혼하러 가는 거 아니고 대학 가는 거거든요."
재민의 집안은 넉넉했다. 이 말만 들으면 둘의 상경은 넉넉했을 것 같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짜고짜 대학을 서울로 가서 지성이랑 살겠다고 집안에 통보한 나재민은 대학 등록금 제외 아무것도 지원해주지 않겠다는 부모님의 답변을 들은 후 몇 대 얻어맞고 쫒겨났다. 사내놈이 남자애한테 돌아서 이게 뭐 하는 짓꺼리냐며 제법 깨진 모양이었다. 나재민은 그 와중에도 바보같이 웃으며 또 고백했다. 지성아 좋아해. 지성은 말없이 그 품을 파고드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둘은 요만한 방 하나 간신히 구해서 상경했다.
처음엔 마냥 좋았다. 사랑이 다 그렇지 뭐.. 두명 몸 누이면 좁은 원룸에 있어도 불평 하나 없이 마냥 웃었다. 서로 입술을 맞대고, 껴안고, 사랑을 속삭였다. 서로의 체취가 가득히 찼다. 작은 원룸은 창문이 달랑 하나라서 영 환기가 안 됐다. 그래서 나재민이 한 밥 냄새 박지성이 라면 몰래 끓여먹은 냄새 몰래 과자먹은 냄새 다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처음엔 불평했지만 그게 다 사람사는 흔적이라 생각하고 함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해 마냥 좋았다. 좁아터진 방구석에서 둘은 행복에 절어 죽어도 좋은 사람들처럼 굴었다.
"형 또 밥 했어요? 안 해도 된다니까.."
"밥 냄새가 나야 사람 사는 집 느낌이 나지. 우리 애기 얼른 앉아용~"
집에선 항상 음식 냄새가 났다. 기분 나쁜 냄새가 아니라 찌개냄새, 반찬 냄새, 밥 냄새 같은 거. 원래 살던 고향 집에선 항상 나던 냄새라서 지성은 익숙했지만 재민은 영 익숙치 않을 터였다. 안 해도 된다고 투덜거려도 알았다. 그게 다 나재민의 사랑이었다. 쏟아내고 쏟아내도 한참을 나오는 그런 사랑. 지성은 차마 그 사랑을 다 집어삼키긴 버거워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밥이며 국이며 반찬을 꼭꼭 씹어 삼켰다. 그 위에 가득 얹힌 사랑을 먹어치우고 나면 나재민이 행복해 보여서, 그 사랑에 나름대로 대답하는 법이었다.
둘은 사랑했다. 초라하고 좁고 바빠도 행복했다. 한명 살긴 적당해도 두명 들어가긴 좁은 방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공부하려면 무조건 도서관에 박혀있어야 했고 갖가지 재밌는 일을 포기해야 해도 둘은 사랑하니까 괜찮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괜찮다는 말은 쉽게 흔들린다. 세상에 영원히 절대로인 것은 없듯이 사랑에도 절대로는 없었다. 정확히는 사랑이 아닌 다른 문제에서 발생했다. 지성에게 일방적으로.
"너는 왜 그러고 사냐? 그냥 부모님한테 가서 싹싹 빌지."
"그럼 지성이 못 보잖아."
지성은 그날 처음 알았다. 재민의 부모님은 항상 재민을 '용서' 할 의향이 있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의향은 전부 재민에 의해 거부당했다는 것까지. 재민의 부모님이 요구하신 건 딱 하나였다. 그 남자애랑 헤어져라. 재민은 그 제안 하나를 못 받아들여서 이러고 사는 거였다. 혼자 살다 못해 여럿이서 써도 넓은 집을 얻을 수 있고 밥 대신 차려주는 사람 청소 빨래 대신 해주는 사람 두고 살 수 있으면서 굳이 그 궂은 일 다 하며 박지성 옆에 있던 거였다. 재민을 만나려고 했다는 목적은 다 잊어버리고 발소리도 숨도 죽이고 미친듯이 뛰었다. 발끝에서부터 목구멍을 조여오는 감정은 명백히 죄책감이다. 코 끝에 닿은 담배냄새가 숨을 틀어막아 지성은 정말 숨막혀 죽을 뻔 했다. 진짜 죽진 않았지만.
헤어져야 한다. 나재민이 더이상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지성은 그날부터 재민의 짐을 야금야금 쌌다. 재민이 눈치채지 못하게 정말 야금야금. (지금 생각해보면 그 눈치에 모를 리가 없는데 왜 모른 척 했던 걸까, 더 울적해질것같아 깊은 생각까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짐을 싸는데만 2주일이 걸렸다. 재민의 물건을 다 싸니 집안이 텅텅 비었다. 온 집안에 있던 나재민이 서서히 사라졌다. 희미하게 남은 흔적은 몇 달이나 갈 수 있을까. 지성은 고개를 두어 번 젓고 휴대폰을 든다. 고향 집에 수소문해 간신히 얻어낸 재민의 부모님 번호였다.
"안녕하세요. 네.. 네.. 아니요, 그런 게 아니구요.."
연결음 끝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용케 지성의 번호를 이미 알고 계시던 모양이었다. 지성은 손이며 목소리까지 벌벌 떨면서 주소도 부르고 본론도 다 말했다. 재민이형 데려가세요. 제가 형 인생에서 떨어질게요. 짐도 다 쌌어요. 이삿짐센터만 불러주시면 돼요. 긴장한 것 치곤 야무지게 잘 말했다. 우리 지성이는 실전에 강하지. 뿌듯하게 속삭이던 재민의 목소리가 귀에 감도는 것 같아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끊었다. 현관에 덩그러니 서있는 재민이 이게 무슨 소리야? 물어도 냉정하게 굴려 애썼다.
"가요 형."
"여기가 우리 집인데 내가 어딜 가?"
이 집에서 처음 흐르는 적막이고 차가운 공기였다. 한참을 언쟁했으나 결국 이삿짐센터가 등장하고 재민의 아버지가 재민에게 전화를 거시면서 상황 종료. 재민은 거의 끌려나가는 표정으로 나갔고, 지성은 대충 환기해놓고 집을 둘러봤다. 꼭 해야 하는 일을 해냈는데도 숨이 턱턱 막혔다. 온통 나재민 냄새로 찬 이 방에서 편안하게 숨쉬면서도 숨막혀 죽을 것 같았다. 사랑은 참 알다가도 모를 감정이다. 지성은 이대로는 못 견디겠다 싶어서 창문 열어놓고 천러네로 달려갔다. 나 일주일만 재워줘. 천러가 재민은? 둘이 싸웠어? 나한테 전화오는 거 싫은데- 하다가 지성이 계속 같은 말만 하니까 한숨 푹 쉬며 알았어 빨리와. 했다.
지성은 천러한테 아무 옷이나 빌려입고 대충 누웠다. 천러네는 넓고 강아지도 있고 천러도 있어서 (천러: 내가 제일 뒤야?) 지독한 외로움에 사로잡힐 일은 없었다. 지성은 대갈이랑 구르고 천러가 시켜준 마라탕 먹다가 울고 아이스크림 먹다가 켁켁대고 학교도 다니고 그러면서 점점 진정됐다. 티비소리 웃음소리 별 소리가 다 나는 집에 있어도 돌아가면 나재민이 없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상기시켰다. 그러려면 일주일은 필요했다. 정확히 7일째, 지성은 깨끗히 빨아놓은 자기 옷 주섬주섬 주워입고 돌아갔다. 평소같으면 나중에 밥 사라고 덧붙혔을 천러도 별 말 안했다. 천러는 눈치가 빨랐다. 괜히 고마워서 한번 끌어안았더니 징그럽단 소리나 들었다.
.. 여기서 다시 현재. 지성은 그렇게 일주일 만에 돌아온 집에 창문을 열고 나간 죄로 급하게 에X킬라 사다가 모기나 잡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던 집이 모기약 냄새로 가득 차서 지성은 결국 모기한테 몇 대 뜯길 각오 하고 창문을 다시 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멍하니 앉아있고 나서야 모기약 냄새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모기약에서만 벗어난 게 아니었다. 지성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나재민 냄새가 하나도 안 났다. 향수에서 나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나던 밥냄새도 아닌 그 나재민 냄새가 안 났다. 이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지성은 주저앉아 고민하다가 벽에 기대앉아 그대로 자버렸다. 애기야 거기서 자지 말고 침대에서 자야지 하고 창문 닫고 다정하게 잔소리해줄 나재민도 없어서 그대로 감기에 걸렸다. 아플때 제대로 못 먹으면 서럽다는 걸 이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결국 혼자 버텨내야 했지만.
그 뒤로도 멀쩡하게 살진 못 했다. 아무렴, 몇년 동거동락하면서 볼거 못 볼거 다 보는 와중에도 농담으로라도 헤어지자는 말은 안 하던 사이였다. 음식냄새 조금이라도 나면 나재민 생각이 나서 집에선 물만 마셨다. 하도 밖에서 사먹었더니 매일 가는 식당 사장님이 아들같다고 반값만 받기 시작하셨다. 그러고 가득 담긴 찌개를 받는데, 그걸 보니까 또 나재민 생각이 나서 그 식당도 잘 못 가게 됐다. 집 안에 나는 냄새라곤 과자냄새가 다였다. 그것마저도 조금만 먹고 내일 먹으라고 잔소리하는 나재민 없으니 영 안 들어가서 곧 안 먹게 됐다.
전해들은 소식으로 나재민은 잘 살았는데 잘 못 살았다. 방이 세 개나 딸린 넓은 집에 들어가서 그 방을 다 마음대로 쓰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어지럽혀지는 날도 없고 사람 사는 거 맞나 싶을 정도로 깨끗해서 놀랐다고 동혁을 통해 전해들었다. 지성은 그 소식을 듣고 끊임없이 울다가 웃었다가를 반복할수밖에 없었다. 지성도 같았다. 혼자 쓰기에 딱 맞는 크기가 됐지만 무언가 채우기가 두려워 쌓인 것도 없는데 치우기만 반복했다. 사람 사는 집 맞냐 삭막해서 숨이 안 쉬어진다 천러가 불평하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사람 사는 집 냄새가 안 나. 이제 여기엔 우리가 없어. 형이 없으니까 나도 없어, 진짜 이상하게. 지성은 또 주저앉아서 울었다. 바보같은 짓을 했어. 좁아터져도 행복하게 살걸.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계속 후회했다. 우리는 이미 끝났지만, 이 후회라도 놓치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지성은 끊임없이 울었다.
"지성아, 일어나서 밥 먹어."
"입맛 없어요..."
"너 지금 밥 안 먹으면 니네 집 끌고가서 니네 집 밥솥에 밥 한가득 해놓을 거야."
지성은 한참 울었던 그날 뒤로 남의 집을 전전했다. 천러한테 갔다가 이동혁(형)한테도 갔다가 마침 집에 공간이 좀 넉넉했던 인준의 집에 눌러앉았다. 런쥔은 밥 퍼주고 물 따라주고 토닥토닥 해주면서도 끊임없이 잔소리했다. 지성이 한두숟갈 먹고 수저 내려놓으려고 하면 떠먹여서라도 더 먹였다. 제가 애기예요? 불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에는 니가 애기가 아니면 뭐니, 하면서 더 먹였다. 입맛없다 배 안 고프다 중얼거렸으면서 결국 한그릇 다 먹고 콜라까지 까마시는 모습을 보고 인준은 웃었다. 이제야 좀 괜찮아 보이네 싶어서.
인준은 지성을 집에 두고 가끔 재민을 보러 갔다. 괜찮은 집에 잘 차려진 식탁이 나오는데도 재민은 끊임없이 야위어가고 있었다. 전엔 생기가 있다 못해 넘쳤는데 지금은 완전 시체꼴이다. 지성이 인준의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재민이 좀 더 사람꼴이었는데 지성이 나아지는 사이 이번엔 재민이 시체꼴이 됐다. 하여튼 둘 다 똑같아. 퀭한 꼴로 엎어진 걸 보고 안타까워서 한마디 하니 대답의 꼴이 가관이었다. 인준은 헛웃음을 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너 이러다 죽겠다, 밥 좀 먹어."
"우리 애기는 다 죽어간다는데 내가 어떻게 밥을 먹어.."
"니네 애기 내가 다 살려놨더니 이제 니가 죽으려고 하면 어떡하냐?"
짧게 핀잔 한마디 했더니 일어나서 꾸역꾸역 뭐라도 쑤셔넣는다. 그 꼴이 안쓰러워서 뭐 필요한 건 없냐고친절하게 물었더니 대답하는 꼴이 또 가관이었다. 우리 애기 편식 심하니까 안 먹는 거 한입씩이라도 먹게 좀 해줘.. 육아하냐고 핀잔주는 대신 말라빠진 등짝 한대 때리고 나왔다. 하여튼 둘다 이럴거면서 왜 헤어진 거야? (이 이후에 이유가 생각나서 한숨이 나왔다. 좋으라고 한 게 이렇게 될 줄 지성이가 알았나..) 나름 저대로 안 두려고 동혁과 인준 제노 천러는 최선을 다 했다. 영 방법이 안 생길 뿐이었다.
둘은 딱 죽지 않을 정도의 상태로 살았다. 그게 지긋지긋해도 정말 죽거나 쓰러진 건 아니라서 당장 만나서 해결하라 하기도 어려웠다. 둘은 딱 죽기 직전까진 먹었고 잘 잤고 해야 하는 건 다 했다. 사정을 아는 입장이 아니면 그냥 바쁘구나 힘들구나 하고 말 꼴이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죽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멀쩡하게 살 수 있으면서 왜 그러고 있냐고. 인준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붓다가 뼛속에서까지 끌어올린 이성으로 컵은 살살 내려놨다. 세게 내려놨다간 방에 숨어있는 지성이 깜짝 놀라 당장 오늘이라도 집 싸서 집에 갈지도 몰랐다. 그건 가급적 막아야 해서 한숨 푹 쉬고 밥이나 마저 차렸다.
"지성아 밥 먹어."
"네엥.."
커다래가지곤 뽈뽈거리며 나오는 지성이 귀여워서 조금 웃었는데, 지성이 나오다 말고 갑자기 멈춘다. 뭐 두고 나왔나? 가만히 쳐다보는데 지성은 몇번 사부작거리고 꼼지락거리더니 고개를 확 들고 인준을 쳐다본다. 곤란한 일이 생긴듯한 표정으로 눈을 꿈뻑였다. 형 저 냄새가 안 나요. 너가 냄새가 왜 나? 아니 밥 냄새가 안 나요. 인준이 당황스럽다는듯이 쳐다봐도 지성이 하는 말은 같았다. 갑자기 그럴 리가 없는데 싶어서 캐물어 보니 며칠 전부터 좀 그렇긴 했단다. 인준은 밥 먹으려다 말고 상 방치해놓고 지성을 질질 끌고 당장에 병원부터 갔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후각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 혹시 요즘 과로하셨어요?
의사의 걱정스러운 한마디에 둘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절레절레, 한다. 살다살다 이별 후유증으로 후각 사라지는 사람은 처음 봤다는 소릴 들을까 대충 그런 것 같다 얼버무리고 병원을 나섰다. 지성은 인준이 더이상 자기때문에 신경쓰는 게 미안하다고 야무지게 짐 싸서 한참 비워져 있던 제 집으로 돌아갔다. 우편함에 누가 봐도 나재민이 쓴 손편지가 잔뜩 들어있었는데 차마 읽을 수가 없어서 외면하고 집에 들어갔다. 텅 빈 집안은 여전히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건 내 문제일까 집이 진짜 비어있는 걸까... 알아서 뭐해. 지성은 대충 침대에 드러누워 잠이나 잤다. 자고 일어나서는 물을 마셨고, 그러고 다시 잤다. 냄새라는 게 생각보다 역할이 컸는지 옆에서 먹으라고 혼내는 사람도 없는데 아무 냄새 안 나는 음식을 먹으려니 거북했다. 인준이 한참을 노력해 겨우 찌워놓은 살이 허무하게 빠졌다.
그쯤에 결국 재민이 찾아왔다. 뭔 일이라도 생길까 넷 다 입 꾹 닫고 비밀로 했는데 하필 딱 한번 얘기한 마크에게서 얘기가 새어나가서 그렇게 됐다. 재민은 잔소리하는 대신 죽이라도 끓여놓고 먹였다. 지성은 말 없이 받아먹었다. 다시 만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드라마틱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성은 코앞에 재민을 두고도 그토록 그리워했던 나재민 냄새 한번을 못 맡았고, 재민은 온갖 베게를 다 끌어안아봐도 지성을 안았을 때의 느낌이 안 나서 그토록 잠을 설쳐놓고 한번 껴안지를 못 했다. 꼬이고 꼬여서 둘은 같이 있는데도 영 풀리는 게 없었다. 사랑하지 않아서 무력한 게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무력했다. 재민은 다시 온다며 냅다 사라졌고, 조금 뒤에 몇달 전 지성이 바리바리 들려 보낸 짐을 주렁주렁 달고 맞은 자국 주렁주렁 달고 돌아왔다. 지성은 그걸 보고 망설이지도 않고 냅다 울어버렸다. 재민은 지성을 끌어안고 그저 웃었다.
"아직도 냄새 안 나?"
"쪼금 나요."
둘은 병원에 다시 가는 대신에 약간 유치하고 이상한 치료법을 썼다. 하루에 한 시간 무조건 끌어안고 있기. (사실 이것보다 더 많이 안고있다는 점에서 별 의미가 있나 싶긴 했다) 지성은 재민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가만히 숨만 쉬었다. 처음에는 아무 냄새도 안 났다가, 나중엔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지성은 이제 다 돌아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걸 눈치챈 재민 역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둘은 그 시간에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했으니까. 재민도 지성도 금새 다시 살이 붙었다. 좁아터진 집에서 더 좁게 끌어안고 자면서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굴었다. 이제 일이 잘 안 풀려도 둘이 있으면 마냥 괜찮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앞으로 더 안 풀릴 줄 알았는데 앞날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재민의 부모님은 자식 이기는 부모였으나 친구 이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성의 부모님은 거의 일주일을 꼬박 재민의 부모님을 설득했고 결국 두 분은 넘어가셨다. 전에 살던 집에 둘이 같이 들어가서 살라는 말까지 왔는데 둘은 거절했다. 좁고 불편해도 여기가 우리 집이야, 그치? 재민이 가만 웃었다. 지성은 조용히 따라 웃었다. 그날 저녁에는 재민이 큰 마음 먹었다며 청국장을 끓였다. 지독한 냄새를 맡으면서도 둘 다 몇 그릇씩 비우고 며칠동안 냄새가 빠지지 않아서 고생했다. 그래도 둘은 웃었다. 이제야 정말 우리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둘은 여전히 두명이 살기에 좁아터진 7평 집에 산다. 당장 삼십몇평 집으로 갈 수 있지만 아직은 7평 집에 눌러앉아 산다. 밥해먹고 나면 음식냄새도 잘 안 빠지고 온갖 냄새가 다 나는 그 작은 집에서 살았다. 지성은 더이상 이 속의 재민이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작고 초라하고 좁아도 그 속에 서로가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영영 이대로 살아도 행복할 거라고 속삭였다. 어쩌면 갈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는 데에 대한 안정감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둘은 그렇게 살았다. 오래오래, 불행해도 헤어지지 않고 아주 오래. 서로가 남겨둔 향기로 가득한 그 공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