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앤온리 소꿉친구
비트네오
모양부터 익숙하다 했더니 입에 넣으니 확실해졌다.
"형, 나 어렸을 때 이거 많이 먹지 않았어?"
소파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다가 지성 쪽으로 다가온 형은 지성이 손에 든 동그랗고 작은 빵을 보다가 픽하고 웃었다.
"야 너 지금도 어려."
"아니 진짜 애기 때 말이야."
지성은 대꾸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는 형의 뒷모습에 작게 중얼거렸다.
"또 무시야."
"뭐라했냐?"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래 이 폭신하고 달달한 맛. 먹다 보면 목 막혀서 우유 생각나게 하는 거. 이거 진짜 애기 때 많이 먹었는데. 딱 일곱여덟살 그쯤... 그때의 기억이 날듯말듯 한 게 답답했다. 기억해내고 싶은데! 손가락에 묻은 설탕을 털어내고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러 생각을 짜냈다. 기억나는 건 누구랑 같이 그리고 자주 먹었다는 것 밖에 없었다. 형은 단 거 싫어하니까 당연히 제외고, 소꿉친구라고 부를 만큼 오래된 친구도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진 엄마 사업 때문에 이사를 많이 다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작년에서야 입시가 중요하다면서 지금 사는 이 집에 정착했다. 지금까지 연락되는 가장 오래된 친구는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성훈이뿐이었다. 성훈이가 알 리가 없겠지... 지성은 봉지에 설탕 부스러기만 남을 때까지 그 기억에 대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엄마 저 어렸을 때 이거 많이 먹었죠?"
엄마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지성은 구석에 둔 봉지를 들이밀었다.
"그럼. 통 안 보이다가 요번에 새로 생긴 마트 가니까 있어서 사 온 건데."
역시! 드디어 이 기억의 단서를 줄 사람을 찾았다.
"누구랑 맨날 같이 먹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서... 혹시 엄만 알아요?"
"유치원 때 우리 옆집 살았던 형아랑 맨날 같이 먹었잖아. 그 형 기억 안 나?"
"....옆집 형?"
'옆집 형'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기억을 훑어봤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게 누구지? 엄마도 그 형 이름이 가물가물한 듯 여러 이름을 되뇌다가 박수를 크게 쳤다.
"아! 재민이! 나재민 형 기억 안 나?"
"헐."
해맑은 엄마의 표정과는 다르게 지성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재민이라는 이름이 흔할 리가 없지... 그니까 우리 학교에서 '얼굴 잘생겼고 공부 잘 해'로 유명한 사람이 내 어린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라는 거잖아? 복도에서 나재민형 무리를 마주칠 때마다 눈을 깔았던 날들이 생각났다. 재민이 형의 친구들이 소위 말하는 일진이라는 건 지성의 학교에 다니는 모두가 알았다. 갔겠지 생각하며 살짝 든 고개에 재민과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히던 기억도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그럼 나재민형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건가? 왜 나는 그 형을 기억에서 도려낸 듯 까먹고 있었지? 추억의 빵에서 시작된 추리는 장편소설을 써도 될 만큼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눅눅한 먼지가 가득한 앨범을 열어보니 옆집 형 나재민은 우리 학교 나재민이란 것이 확실해졌다. 앨범을 한 장씩 넘기며 기억의 공백들을 채워갔다. 그 사진 속 둘은 세상에서 가장 친한 듯 어깨동무를 한 채로 활짝 웃고 있었다. 둘만의 약속이었는지 파워레인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대다수였다. 엄마도 옆에서 같이 보면서 한 마디씩 추가설명을 해줬다.
"너네 둘이 맨날 유치원 끝나면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나서 저녁 먹을 때까지 놀았어. 주말에는 낮잠도 같이 자고. 티비에서 뭐 재밌는 거 보면 둘이 헤어질 때까지 따라하고... 재민이랑 재민엄마는 잘 지내려나. 생각난 김에 연락해봐야지.“
어렸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지성이 깜짝 놀라 엄마! 하고 큰 소리를 냈다.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니 지금 시간도 늦었고... 재민형네 어머니께서 자고 계실지도 모르잖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게. 했다. 추진력이 좋은 엄마는 재민형네 어머니랑 연락한 날에 곧바로 약속을 잡을 게 뻔했다. 재민이형과 만나게 되겠지... 그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꺼려졌다. 제발 내일 엄마가 이 일을 까먹게 해주세요.
어림도 없지. 다음날 하교한 지성에게 엄마의 통보가 떨어졌다.
"이번 주 토요일에 재민이네랑 만나기로 했으니까 점심 비워놔."
"재민이형 고삼 아니야?"
"너랑 한 살 차이였으니까 벌써 그렇게 됐네."
지성이 울상을 지으면서 물었다.
"고삼이면 바쁘지 않나...?"
"재민이가 지성이 너 본다고 주말자습도 뺀다더라. 재민이는 그 어렸을 때를 기억하고 있나 봐. 애기때부터 똑똑하더라니."
엄마가 재민이형의 찬양을 할 동안 지성은 어떻게 빠져나갈지만 생각했다. 그래 약속 있다ㄱ
"너말따나 바쁜 고삼이 자습도 뺐으니까 올 거지?"
잇다만 문장을 다시 말하기엔 양심에 찔렸다. 애초에 지성은 거짓말을 할 성격이 못됐다.
"전화만 받고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아잉 같이 가요. 기다릴게.“
엄마가 눈에 힘을 줬다. 무언의 압박. 지성은 잘 뻗어지지 않는 다리로 레스토랑에 아주아주 느리게 들어갔다. 이 정도면 엄마가 자신을 따라잡을 정도였는데 엄마의 발걸음은 들리지도 않았다. 후... 계단을 다 올라오고 문을 조심히 열었다. 웨이터가 와서 일행이 있냐고 물었다. 엄마 이름을 대니 친절히 자리를 안내해줬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에서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았다. 파티션에 가려져 있던 인영과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에 처음 보는 낯선 표정이었다.
"어머 지성이니?"
지성은 시선을 옆으로 살짝 옮겨 반갑게 마주해주시는 재민이형 어머니를 봤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재민이형 어머니를 마주하니 어렸을 때 기억이 확 몰려왔다.
"그래. 이모는 지성이가 이 근처로 이사 왔는지도 모르고 살았네. 알았으면 바로 봤을 텐데."
자연스럽게 칭호를 정리해주셨다. 예전처럼 다정하시구나.
"저도 이모 이쪽에 사시는지 몰랐는데. 알고서 약간 깜짝 놀랐어요."
빠르게 풀어진 분위기 덕분에 방금 전 긴장을 잔뜩 했던 것과 무색하게 웃음이 나왔다. 오래된 인연은 장시간 못 만나도 이렇게 편하구나. 이모와 여러 이야기를 나눌 동안 재민이 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화가 멈춘 동안에도 말을 걸 생각이 없어 보여서 형도 내가 어색하나? 생각했다. 엄마가 들어오고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모가 스파이시 리조또가 어떠냐고 물었다.
"네 좋ㅇ..."
"지성이는 매운 거 못 먹어요."
둘이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지성이 놀란 것보다 재민이 더 놀란 것 같았다.
"지성아 너 이제 매운 거 잘 먹어?"
"네... 저 매운 음식 좋아해요."
재민은 입을 꾹 다물고 창밖을 공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대화에 끼지 않고 계속 사색을 하는 재민에 지성은 괜히 자신이 잘못 말한 게 있나 스무 번은 돌아봤다. 재민이 테이블 흐름에 다시 끼기 시작한 것은 음식이 나왔을 때부터였다.
"재민이는 아직도 지성이를 먼저 챙기네."
재민이 지성의 접시에 음식을 먼저 덜어주는 모습을 보고 엄마가 흐뭇하게 말했다. 지성은 자기 기준에서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재민을 쳐다봤다. 재민은 큰 숟가락으로 음식을 나눠주며 뭔가 더 필요하냐는 듯이 눈썹을 올렸다. 지성은 살짝 앙다문 입술로 고갯짓으로 이모 쪽을 가르켰다. 분명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을 텐데 하던 행동을 멈추지 않고 맛있게 먹어 지성아. 했다. 이모 눈치를 봤지만 이모도 지성이 맛있게 먹어~ 라고 다정하게 말해주셔서 지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밥을 먹고 카페까지 갈 거라고 예상했다. 근데 그건 엄마와 이모만의 플랜이었다.
"우린 할 얘기가 많이 쌓였으니까 둘이서 놀다 집에 들어가."
지성이 고개를 가로로 작게 흔들었다. 엄마는 끄떡없이 이모에게 팔짱을 낀 채 뒤돌아갔다. 덩그렇게 레스토랑 앞에 남겨진 둘. 지성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재민을 쳐다봤다. 재민은 지성을 마주 보며 부드럽게 웃다가 지성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재민이 형이 손을 왜 잡았지? 초등학교 졸업 후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것이 처음이어서 지성은 이 상황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입까지 바싹바싹 말라갔는데 그에 반해 손은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사막과 정글의 공존이었다. 어떡해... 지성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재민이 무슨 말이라도 꺼내 이 적막을 끝냈으면 좋겠지만, 덥썩 손을 잡았던 것과는 다르게 입을 열지도 않았다.
둘이 도착한 곳은 놀이터였다. 처음 보는 아파트의 처음 와본 놀이터. 지성은 그네를 한 번 봤다가 재민을 쳐다봤다. 얼굴을 마주하니 재민이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지성아."
"에?"
"그네 타는 거 아직 좋아하지?"
갑자기? 뭐 가끔 하교할 때 그네를 타곤 하니까... 아직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긴 했지만, 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민의 얼굴에서 초조함은 한순간에 사라졌고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생 두 명은 그네에 앉아 입시 이야기를 했다. 개인적인 얘기를 시작하기엔 아직 그 정도로 편해지진 않아서 지성이 먼저 주제를 꺼냈다. 입시의 마지막을 달리고 있는 고삼 재민은 지성에게 친절히 설명해줬다. 세특, 자소서, 동아리 등 지성이 생각치도 못했던 부분을 강조해주면서 꿀팁들을 전수해줬다. 신뢰감이 생긴 지성은 고민이었던 자신의 부진한 수학 성적을 털어놓았다. 이과지만 국어보다 수학이 더 힘든 지성이었다. 좀 진지하게 말을 꺼냈는데 재민이 갑자기 활짝 웃었다. 내가 수학을 못하는 게 웃기나...
"지성이 애기 때 공룡 좋아하더니 역시 이과 갔구나!"
갑자기요? 지성은 공룡이랑 이과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봤다. 도대체 뭐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어색하게 웃으니 재민이 지성의 볼을 잡았다. 아 깜짝이야. 잔뜩 늘어난 볼을 한 지성은 인상을 썼다. 놓으라는 의도였는데 재민은 몇 번이고 주물럭 댔다. 지성은 그런 재민의 팔목을 살짝 잡았다.
"이헤 그만 나즈세여."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재민은 웃음을 금방 지우며 지성의 볼을 놓았다.
"미안. 옛날 생각이 나서."
지성은 약간 늘어난 것 같은 자신의 볼을 손바닥으로 비비다가 궁금증이 생겼다. 물어봐도 될까? 고민하다 안 물어보면 집에 가서도 계속 생각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재민이 형 있잖아요."
재민이 뭐든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 기억하면서 모르는 척 했어요?"
재민이 형의 눈썹이 순간 쑥 내려가며 팔자를 그렸다. 내가 말실수 했나? 뭔가 눈이 촉촉해진 것 같기도...
"아니 형... 울어요?"
재민의 긴 속눈썹이 한 번 움직이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당황한 지성이 우왕좌왕 하다가 손등으로 약하게 축축해진 볼을 쓸었다. 위로에 소질이 없는 편이어서 지성은 재민의 옆에 서서 등만 계속 쓸어줬다. 일정한 속도로 팔을 움직이면서도 머리 속은 아주 시끄러웠다. 아 박지성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하고 말했어야지... 근데 어느 부분이 재민이 형을 울렸던 거지?
"지성아."
재민의 부름에 지성의 정신이 재민에게로 집중되었다.
"지성이가... 형 무시했잖아."
"제가여?????"
너무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어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오른손까지 허공에 멈췄다. 재민은 고개를 위로 들어 지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 와중에도 눈물은 떨어지고 있었다.
"복도에서 처음 봤을 때 너무 반가워서 인사하려고 했는데 일부러 다른 데 보면서 피했잖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지성이 너가 나를 싫어했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얼마 전까지 어렸을 때 친했던 그 형이 형인지도 몰랐어요. 근데 어떻게 싫어하고 무시해여! 알았으면 먼저 인사했져."
재민이 형의 속눈썹에 작은 방울들이 질 때마다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지금도 형을 왜 까먹고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 그렇게나 붙어 다녔다는데."
재민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 진짜 너무 나쁜 사람이었네.
"미안해요 형. 앞으로는 절대 잊어버리는 일 없을 거예요. 형이 제 유일한 소꿉친군데... 진짜 미안했어요. 제가 일방적으로 형의 소꿉친구를 빼앗은 거잖아요."
재민이 다시 지성의 손을 꼭 잡았다. 이번엔 지성이 놀라지 않고 다른 손으로 재민의 손을 감쌌다. 그제야 재민이 예쁘게 웃었다. 재민이 형은 웃는 게 진짜 예쁘구나.
예쁘다, 그 단어가 남자한테도 사용할 수가 있나? 지성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냥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 단어만큼 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고삼인 재민은 바쁘지도 않은지 점심시간마다 지성의 반에 찾아왔다. 지성이 좋아하는 간식을 손에 잔뜩 들고서. 야자가 없는 수요일은 하교도 같이 했다. 가끔씩 재민의 형 친구들도 같이 왔는데 소문이 잘못난 게 확실했다. 이 형들이 일진? 착하고 웃기기만 했다. 암튼 그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재민은 매번 지성의 손을 가득 채운 뒤 맛있게 먹어 한 마디 하고 반에 돌아갔다. 지성은 그게 왠지 아쉬웠다. 딱히 할 말도 없지만, 재민과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었다. 그래도 고삼이 바쁘고 힘든 걸 알기에 지성은 꾹 참았다.
수능이 백일 남았을 때 지성은 재민에게 줄 딸기우유를 준비했다. 맨날 받아먹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삼에겐 특별한 날이니까. 분홍색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딸기우유도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다. 재민은 지성의 손에 들린 딸기우유를 보더니 울상을 지었다.
"지성아. 미안한데 형이 인조 딸기향을 못 먹어. 그리고 우유도..."
미안해야 되는 건 자신인데 앞에서 더 미안해하는 형을 보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서운함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가 그보다 더 큰 자책이 다가왔다. 형은 내가 좋아하는 거 다 기억하는데. 나는 뭐야 정말... 지성은 풀이 죽은 채로 딸기우유를 제 뒤로 숨겼다.
"진짜 미안해요 형..."
"아니야 지성이가 뭐가 미안해. 지성이가 형 생각해줘서 사준 걸로도 형은 너무 기뻐."
코가 찡하면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지성은 애써 웃음 지었다.
"형, 다음 시간 숙제를 깜빡하고 안 해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지성은 얼른 몸을 돌려 반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시간 숙제는 없었다. 그냥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5교시 시작까지 15분이나 남았는데 지성은 귀중한 점심시간을 그저 책상에 엎드린 채 보냈다. 옆에서 친구들이 지성을 찔러봤으나 꿈쩍도 않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친구들은 지성에게 뭐라 말을 걸려고 오는 애들을 팔로 엑스자를 만들며 물렸다.
그날 하루 동안 기분이 바닥을 찍었다. 안색이 파래진 지성을 보고 담임쌤도 걱정하며 몸이 안 좋아 보이니 보충을 빼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지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보충하는 반이 아닌 학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서도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봤다. 형이 딸기우유를 거절한 거? 형이 딸기우유를 먹지 못하는 걸 몰랐던 거? 형이 오히려 더 미안해했던 거? 어떤 부분이 이렇게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는지 확신을 못 내렸다. 어쩌면 그 세 가지 모두일지도. 별것도 아닌 거에 힘들어 하는 자신도 너무 한심했다. 왜 이렇게까지 마음이 저릿하지... 눈물이 코 끝에서 울렁였다.
"재민이 형!"
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지성이 웃으면서 손을 드는데 재민이 눈을 피하며 뒤로 돌아갔다. 지성이 잠시 당황하다가 크게 재민을 한 번 더 불렀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다 지성을 쳐다볼 정도로 크게 외쳤는데 재민은 모퉁이를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넋이 나간 지성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야... 아니야... 몇번이고 이 상황을 부정하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꺽꺽 울어댔다.
지성이 눈을 번쩍 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꿈이었구나... 지성은 천천히 돌아오는 현실감각에 아까의 상황은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꿈인 걸 알겠는데... 재민이 자신에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데도 이상하게 지성은 한참을 울었다. 꿈속의 재민이 너무 미웠다. 그런 재민 형은 싫어. 만나고 싶지 않아. 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 흐느꼈다. 꿈속의 지성처럼.
눈이 팅팅 부은 채로 지성이 식탁에 앉았다. 엄마가 지성의 얼굴을 보고 무슨 일 있었냐 물었지만 지성은 힘없이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잘 넘어가지 않는 늦은 저녁을 먹고 지성은 다시 방에 들어가 눈을 팔로 가리고 누웠다. 너무 울어서 지쳤는지 자꾸만 졸려왔지만, 아까처럼 나쁜 꿈을 또 꿀까 봐 주먹을 쥔 손에 힘을 꾹 쥐었다. 짧게 깎은 손톱이 손바닥을 눌러 자국을 냈다. 애써 잠을 참으며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아 맞다. 오늘 현우랑 롤 듀오 하기로 했지.
"미안.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게임 못 들어갈 것 같아."
"..."
대답이 없었다. 뭐야. 지성이 팔을 치우고 화면을 확인했다. 팔의 무게를 지탱하던 눈이 초점을 잡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지성이 눈에 힘을 줘 찌푸릴 때 대답이 왔다. 소리가 너무 작아 지성은 스피커폰을 누르고 말했다.
"뭐라고? 못 들었어."
"지성아 어디 아파?"
지성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타이밍 좋게도 그 순간에 초점이 되돌아왔다. 검은 바탕에 하얀색으로 적혀진 글씨. 재민이 형. 지성이 얼어 있을 동안 재민이 다음 말을 꺼냈다.
"지성아 괜찮은 거 맞아? 형이 병문안 가도 돼?"
이 형은 무슨 병문안을 온다고... 지성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살짝 웃었다.
"나 안 아파요 형."
"형이 걱정돼서 그래. 얼굴만 보고 오면 안 될까?"
점점 지성의 광대가 올라갔다. 지성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수능 백일 남았는데 공부 안 해요?"
"지성아. 나한테는 너가 제일 중요해."
지성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서 웃었다.
"흐흫. 그게 뭐예여. 형 괜찮으면 와요."
"진짜? 형이 30분 안에 갈게. 뭐 필요한 거 없어 지성아?"
지성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이었는데 다시 재민이 질문폭탄을 날렸다.
"지성아?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요즘 학교에서 너무 냉방을 세게 하긴 했어. 형이 감기약 사갈까?"
"재민이 형."
"어 지성아."
지성이 폰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잡고 말했다.
"지금 형이 제일 필요한 것 같아요."
"...지성아. 형 10분 안에 도착해. 조금만 기다려."
곧바로 땅을 박차는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떡해. 지성은 전화를 끊고 계속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밖으로 내보내면 재민이 형을 좋아하는 게 진짜가 될까 봐. 하지만 지성은 어렸을 때부터 재민과 함께면 웃음이 많아졌다. 결국 지성은 끝까지 참지 못하고 터뜨리며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