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건 사랑이 아니야
하비
!CAUTION!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 형제 관련 소재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랑은 아니지. 아니고말고. 지난 모든 재민의 잘못과 본인의 실수를 저울질하던 지성은 생각을 멈춘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라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손 빠른 나재민에게 맨날 지는 거다. 지성은 이 집에서만 세 번째로 짐을 챙겼다. 이젠 챙길 물건도 별로 없었다. 어차피 언제가 되든 떠나게 될 거라고 의식하고 있으니 짐을 줄이는 생활 습관이 생겼다. 떠나는 거다. 이 안락한 아파트도, 재민의 곁도.
적당하게 들어찬 백팩을 현관 앞에 내려두고 부엌 찬장을 열어 가는 길에 챙겨 갈 과자들을 물색했다. 과자는 지성의 취향대로 채워져 있어서 손에 들고 갈 수 있게 딱 하나만 고른다는 게 후보를 좁히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사이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울린다. 타임 어택 실패다.
될 대로 되라고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집어 찬장을 쾅 닫고 잰걸음으로 현관까지 걸어갔다. 그 잠깐 사이 집안 분위기를 살피다 발 앞에 놓인 가방 하나만으로 상황을 알아차린 재민이 지성의 짐 꾸러미를 한 손으로 들었다 내려놓았다. 오이오이…. 점점 가벼워지는데…. 형은 신경 쓰지 마시죠. 단호하게 답한 지성이 가방을 잡아채 어깨에 메고 운동화에 급히 발을 뀄다. 재민은 신발을 벗고 마룻바닥에 올라있어, 어느새 둘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재민이 놀란 척도 않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입꼬리로만 웃었다. 무슨 짓을 해도 넌 내 손바닥 안이란다, 하고 말하는 듯한 그 얼굴이 너무너무너무너무 미워서.
"오늘 저녁 지성이가 좋아하는 소고기 구워주려고 사 왔는데. 먹고 가지?"
"흥. 안 넘어가요."
"젤 맛있는 부위로 달랬는데…. 많이 사서 나 혼자 다 못 먹는데…."
"부르면 올 사람 많을 텐데? 아, 너무 많아서 문젠가? 살림 다 거덜 날까 봐서?"
그러니 이쪽도 웃어야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던진 수사적 질문에 그제야 상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정색한 재민은 가만히 서서 문밖에 선 지성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찔리는 구석을 건들 때마다 어떤 설명 일절 없이 입을 다무는 버릇만큼 그를 열받게 한 것도 없어, 차라리 재민이 화내며 날뛰었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이 있었다.
숨 막히는 적막 가운데 지성이 돌아 나와 현관문을 닫았다.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한 생각은 딱 두 가지.
이젠 붙잡는 척도 안 하네. 그리고,
"아씨, 맛동산…."
하필 골라도 그 낮은 확률로 형 과자를 집어 오냐. 마지막 순간에 잘못 뻗은 자기 손을 탓했다. 잠깐 떠올리기 싫은 사람이 겹쳐져 혀를 찼지만, 지성은 이내 진정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고기도 맛동산도 죄가 없다. 죄인은 집에 혼자 남겨진 저 남자.
그리고 그가 죄인이라면, 지성도 공유하는 죄가 조금은 있다.
비상식량을 진작에 다 까먹고 길거리를 털레털레 돌아다니길 몇십 분째. 계획 없이 뛰쳐나오긴 했지만 이렇게 갈 곳이 적었나 지성은 탄식했다. 대학생 방학 시즌이라곤 해도 어째 집에 멀쩡히 붙어있는 놈이 하나 없지. 기세 좋게 나와선 궁상맞게 찜질방이나 기어들어 가는 건 좀 그렇다. 형 없이 알아서 잘 지낼 수 있다고 과시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하릴없이 걸어 다니며 연락처 목록을 죽죽 내려봐도 자신의 인간관계의 좁고 얕음에 절망하게 될 뿐이었다. 이 시간에 갑작스레 재워달라 부탁해도 괜찮을 만한 녀석이… 그래, 딱 하나 남았다. 따지자면 가장 절친인 편이지만 1순위로 찾아가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었으니.
"야아~ 천러야~ 나 좀…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역시나 완전히 문전박대다. 남의 아파트 복도에서 큰 소리를 내기도 애매해 현관문 앞에 딱 달라붙어 애걸복걸하는 볼품 없는 행위는 처음이 아니다. 학창 시절부터 집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찾아갔던 게 천러네 집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자기가 더 기뻐하며 받아줬는데. 지성의 가출 습관은 대학에 진학하고서도 계속됐고, 천러가 자취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곧 지성이 천러네 부모님 눈치 안 보고 좀 더 맘 편히 눌러앉을 수 있다는 것과 같았다. 결국 지난번에 장장 한 달을 얹혀살다 내쫓겼지만. 이제 지긋지긋하다 진짜아 너도 성인이니까 알아서 해! 하고 복식호흡으로 호통을 치던 천러의 얼굴이 생생했다.
물론 그런 미안한 과거도 있지만… 벌써 10분째 밖에서 이러고 있는데… 안에 있는 거 다 아는구만 매정한 놈…. 차가운 문짝에 볼을 눌러 식히며 기다리고 있자니, 건너편에서 의심이 덕지덕지 붙은 뚱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 또 나재민 얘기하려고 온 거 아냐?"
"어? 아, 아니라고. 진짜 사람을 뭐로 보고…!" (사실 맞음)
"흠……."
전자음을 내며 열린 현관문 너머 가늘게 뜬 눈이 지성을 꿰뚫어 보는 듯하다. 어찌나 멋쩍은지 헤헤… 하고 비굴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천러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한숨 쉬고 혀 쯧쯧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난 지 10초 만에 타박 3종 세트다.
"에휴에휴에휴. 뻔하지 뭐. 박지성 안 봐도 뻔하지."
"……."
천러가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는 멈춰놓았던 티비 화면을 재생시켰다. 농구 경기를 보며 한잔하고 있었던 듯 미리 꺼내둔 빈 잔에 친절히 와인도 따라 지성에게 건네줬다.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만 해도 너무하다느니 속으로 구시렁댔지만, 자신에게 둘도 없이 좋은 친구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뭔데?"
"음… 말하자면 복잡한데. 됐어. 농구나 보자."
태도를 바꿔, 지성은 가방을 벗어 저 멀리 밀어두곤 제 안방인 양 다리를 쭉 뻗었다.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은 무시한 채 안주를 바삐 집어 먹으며 경기 얘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상대도 곧 못마땅한 기색을 지우고 지성의 노력에 넘어가 주었다.
숨기는 데 별 이유가 있을까. 이런 건 어디 가서 고민 상담이랍시고 얘기도 못 하는 종류니까. 같이 사는 형한테 여자가 있는 것 같아 힘들다고 말하면 "그게 왜?" 하고 이상한 눈길을 받거나 뭔지 알겠다는 눈으로 동정을 받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근데 그 형이 사실 내 가족인데, 라고 덧붙였다간 그나마 이해심을 보여줬던 사람들도 떨어져 나갈 것이다. "미친 거 아니야?"
평범한 의붓형제들은 서로에게 뽀뽀하거나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등의 과하게 '사이 좋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시점부터 지성의 머리는 시한폭탄처럼 아슬아슬한 상태를 이어오고 있었다. 이런 건 정상적이지 않다는 자각, 부모를 속이는 죄책감, 언제라도 누구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매장되는 악몽에 시달린 나머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는 친구들 앞에서 형에 대해 언급하는 걸 관뒀다. 밖에선 최대한 엮이지 않도록 노력했으니 성도 다르고 생김새도 정반대인 그들을 한데 묶어 생각할 사람이 없었다. 사실을 아는 것은 지성 주위에서는 천러 뿐이었다. 그러니 천러에게만은 더더욱 싸움의 내용을 공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완전히 취한 상태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늦은 오전 햇살을 맞고 깨어나니 숙취로 머리가 무거웠다. 지성은 침대 위에서 게으름을 만끽하며 뒤척이다 곧 몸에 휘감긴 이불을 떼어내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어제 그렇게 마셨던가…. 잠들기 직전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있자니 현관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배달 시킨 거 벌써 왔나 보다. 너가 좀 받아봐."
부엌 쪽을 오가던 천러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성은 끄응… 하고 일어나 나체 위에 팬티는 생략, 트레이닝복 바지만 잽싸게 주워 입고 눈곱을 떼며 문 앞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 다시금 성질 급하게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는 배달원에게 네, 나가요~ 답하고 문을 열어준 순간.
"……."
그에게 스트레스를 배달하러 찾아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천러 집 아니면 갈 데도 없는 주제에 집을 나가긴 왜 나가."
그의 잠긴 목소리를 듣자마자 문을 닫으려 했지만, 그 남자가 집안으로 한 발 들여놓는 게 더 빨랐다. 재민이 고개를 쑥 내밀어 천러의 집을 한번 둘러보더니 지성에게로 시선을 돌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었다. 벗은 곳 위주로 특히 오래. 혀를 깨물고 싶어진 지성이 재민의 어깨를 잡고 바깥으로 밀어댔으나 쉽게 밀려나지도 않았다.
"…나가요, 형. 그냥 좀 돌아가요."
"집 나가서 하고 다닌다는 게 겨우 이런 짓이야."
"내가 뭘 했…"
천러에게 들키기 전에 돌려보내려 목소리를 낮추고 바짝 다가간 게 잘못이었나. 반항할 틈도 없이 맨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면서 부딪혀오는 입술. 물기 없이 부르튼 피로한 입술이 성급하게 달라붙으며 지성의 체온을 갈구했다. 이렇게 여유 잃은 재민에게 무작정 원해진 적이 없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건 불가항력이라고 하자.
"야, 무슨 문제라도 있…… 헐."
"여기 짜장면 시키신…… 어후."
등 뒤에선 컵을 바닥에 떨어트려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앞에선 배달 온 남자가 질색하며 물러섰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
부모의 재혼은 둘이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이루어졌다. 재민은 박지성 모자와 처음 만난 날을 아직도 기억했다. 자기 엄마 다리 뒤에 숨어 낯선 사람들을 흘끗대는, 하지만 인사를 시키면 제법 씩씩한 목소리를 내던 아이. 새 가족이 생긴다는 걸 알았을 때는 아무나 좋으니 이 서늘한 집안을 채워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함께 지낼수록 새엄마와 새 동생이 마음에 들었다. 재민의 아빠도 지성을 보며 흡족해하는 듯했다. 어린애를 좀처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처음에는 다정한 새엄마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관심을 끌려 온갖 재롱을 부리고 착한 아이의 모습만 보이려 노력했다. 엄마의 개입이 불필요할 정도로 고작 2살 차이 나는 동생을 있는 힘껏 돌봤다. 그럼 기특해서라도 한 번 갈 눈길이 두 번 가게 될 거란 계산에서였다. 쟤한테 관심 주지 말고 동생을 이렇게 열심히 챙겨준 나를 더 칭찬해줘요, 하는 몸짓. 아무래도 친아들인 지성보다는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런 속내도 모르고 동생은 재민을 친 형처럼 아빠처럼 신처럼 따랐다. 이제는 어딜 가서 낯선 얼굴을 보면 재민의 등 뒤에 숨어 안전하다는 통보를 기다렸다. 지성이 순진한 얼굴로 그를 향한 신뢰를 드러낼 때마다 그 모습이 주인만 아는 강아지처럼 귀여워서, 형 노릇이라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성이 납치됐다. 하필이면 재민이 방과 후 수업을 듣느라 함께 하교하지 못한 날 일어난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새엄마가 초조하게 부엌을 서성이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일찍 귀가한 아빠에게 네가 동생을 잘 돌보지 않고 한 눈을 판 탓이라며 뺨을 얻어맞았다. 그만두라고 아빠 앞을 가로막고는 거실 바닥에 나가떨어진 재민을 끌어안아 끊임없이 쓰다듬어주던 새엄마의 따뜻한 손….
동생은 그날 저녁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지성은 형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며 놀이터에서 놀다 스스로 엄마의 친구라는 아줌마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예쁜 아줌마네 집에서 간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었을 뿐이라 지성에겐 무서운 일을 당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아마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재민에게는 그 일을 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지성을 납치했던 것은 재민의 친모였다. 어른들끼리 한바탕 실랑이가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재민은 틈을 타서 자신의 친모와 단둘이 대화할 기회를 만들었다. 그를 낳은 여자는 헤어졌던 때보다 조금 여위어 있었다. 수척한 아름다움을 두르고, 눈은 광기로 빛났다.
"왜 내가 아니라 지성이를 데려갔어?"
아이가 몇 개월 만에 만나는 엄마에게 처음 묻는 문장으로서는 이상했지만, 그녀는 재민이 어리광을 부리고 있음을 알았다. 무릎을 꿇어 재민과 눈높이를 맞춘 그녀가 재민의 부어있는 오른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너는… 나랑 있고 싶어 했을 테니까."
인질로서의 가치가 낮았단 뜻이었다.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었으나 그때에도 재민은 그 비슷한 뉘앙스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새삼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지성이 괴롭히지 마. 나한테 해. 내가 엄마 아들이니까."
"그럴 줄 알았다. 너도 벌써 그 연놈들이 좋아졌지? 더러운 배신자. 지 애비랑 똑같이 말이야. 아유… 불쌍한 우리 강아지. 우리 귀여운 강아지 불쌍해서 어떡하니."
진심으로 재민을 연민하는 듯이 볼과 이마에 연신 입 맞추는 엄마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데,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지성이 보였다. 빼꼼 고개만 내밀고는 불만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재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형이 '엄마'가 아닌 다른 아줌마와 끌어안고 있는 게 퍽 불안했던 것이다. 본인이 납치되었을 때보다 지금을 훨씬 무서운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재민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사랑스럽다. 그래, 있었구나. 나를 어떤 상황에서든 필요로 해주고 사랑해주는 존재가 내게도 있었어. 가족을 가지고 친구를 가져도 항상 무언가가 부족한 게 이상했다. 채워지기 전까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욕구가 있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몫이라 재민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러면 내 몫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지성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은 느낌이라고 할까,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하는 근원적인 안도감이 밀려왔다. 재민은 제 엄마의 품에서 비집고 빠져나와 지성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곤 지성에게 자신이 받은 것과 같은 뽀뽀와 포옹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엄마가 재민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뒤돌아보지 않았으니까.
그날 밤, 재민은 처음으로 지성과 같은 침대에 누웠다. 동생을 안심시키려는 의도보다는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강했다. 앞으로는 형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줄게, 속삭이며 작은 몸을 꽈악 껴안았다. 그로부터 둘은 형과 동생으로서 십여 년을 함께 살아왔다. 몇십 년을 더 그렇게 살게 되겠지. 사랑과 경멸, 순종과 반항도 다 한때 지나가는 것이라 나재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적막했지만 그것은 곧 폭발하기 직전의 열기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상태에 불과했다. 정적인 패닉이 현재 지성의 머릿속 상태였다. 스쳐 지나는 창밖 풍경으로 멍하니 시선을 돌린 채 그는 조금 전의 해프닝을 반복해서 생각했다. 키스…. 천러 앞에서. 하하. 이제 무슨 낯으로 걜 볼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같은 학과라 개학하면 싫어도 마주치게 되어 있는데, 과에 소문이라도 나면. 사회적 매장, 말소? 모르겠다. 의붓형제끼리 '사랑하다' 들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어 모르겠다. 철들기 전부터 그를 괴롭혔던 불안함만이 계속해서 정신을 소모시킬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는데. 그런데도 지성은 재민을 곧바로 떼어내지 못했다. 닿자마자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려버리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 순간 목덜미를 내달리는 짜릿한 감각을 참을 수 없었다. 스스로가 역겹다. 지성이 차창을 향해 고개를 고정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형이랑 내가… 이러고 있는 거."
"음…. 모르겠는데, 형은."
형은, 이란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하며 재민이 좌회전을 하기 위해 핸들을 틀었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여상한 말투로 답하는 태도가 오히려 시비 거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성은 불안스레 손거스러미를 잡아 뜯으면서 중얼거렸다.
"아까 왜 키스했어? 왜 자꾸 날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형이 참을성이 없어서…. 싫었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닌 줄을 알면서. 지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욕설은 입속으로만 삼켰다. 해탈 같기도 하고, 실성한 것 같기도 하다. 재민은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다 신호를 받아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이 근처 오신 김에 우리 집에 들르신대. 저녁은 같이 먹을 것 같아."
그 말에 지성은 하, 하고 작게 조소를 터트렸다.
"아하. 그래서 찾으러 온 거구나. 어쩐지."
"…왜, 뭐가 이상해?"
"저번에는 한 달 내도록 내버려 두더니 이번엔 너무 빨리 온 거 아닌가 해서."
줄곧 앞만 보고 운전하던 재민이 고개를 돌려 지성을 바라봤다. 핸들을 붙잡고 있던 손이 내려와 지성의 왼쪽 허벅지를 달래듯이 살살 쓸어내렸다.
"지성아, 형이 그동안 잘못했어. 너 화난 거 내가 다른 사람 만나고 다니는 줄 알고 그러는 거잖아. 이제 그런 일 없을 테니까… 응?"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은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는 걸까. 지성이 둘의 관계를 애증하며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다기에 시작했던 바깥 여정이었다. 헤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니 육체적인 관계라도 분리해 볼까 하고 시도했던 일이다.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만족도, 도움도 얻지 못하고 이렇게 지성에게 미움만 사게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속내를 털어놨다면 이리 틀어질 일은 없었겠지. 어쩌면 한편으로 이해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반드시 상대에게 납득시키고 잘못을 용서받아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사랑도 상처도 다 한때이고,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그의 인간성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밖으로 빼내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맡긴 지 오래니까. 모조 탯줄로 이어진 또 하나의 심장. 어디까지나 순결한 공범에게.
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는데도 차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말이 없나 싶던 지성은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 크고 나서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던 눈물에 놀라 재민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울어… 우리 애기."
재민이 급히 안전벨트를 풀고 지성의 몸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지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두 손 안에 숨겼다. 조금 전 반나체로 차까지 끌려오느라 뒷좌석에서 주운 져지를 대충 걸친 상태로 어깨를 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애처로워 보여 재민은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곤 동생의 귓가를 거듭 어루만졌다. 익숙한 손바닥 체온에 더 서러워진 지성이 이윽고 끅끅대기 시작했다.
"아, 진짜 미치겠어…. 이젠 뭘 해도 형 생각밖에 안 나서 힘들어요……."
"나도 그래. 처음부터 그랬어."
지성의 손을 잡아서 아래로 내리고, 드러난 맨얼굴에 수없이 입 맞추며 재민이 속삭였다. 지금껏 들어본 것 중 최고의 고백이었다. 따스한 충족감으로 가슴이 메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 재민은 어느 때보다도 약해지고 상냥해졌다. 그러나 지성에겐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말이었는지 눈물을 닦으며 올려다보는 눈초리가 의심 어린 원망을 담고 있었다.
"거짓말…."
"아니야, 잘 들어봐."
그가 붙잡고 있던 지성의 손목을 끌어와 자신의 가슴 위로 얹었다. 조심스럽게 주먹을 펴고 재민의 왼쪽 가슴 위로 손바닥을 밀착시킨 지성이 심장 박동을 찾아 숨죽였다. 콩닥콩닥, 전해지는 박자를 동화시키며 둘은 입술을 겹쳤다.
버진로드를 닮은 추락로는 한참 전부터 예비되어 있었다. 안심하고 떨어지길. 막다른 골목인 이쪽까지.
부모가 도착한 것은 6시 조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요리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재민을 대신해 지성이 문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엄마 아빠와 차례대로 따뜻한 포옹을 나누고, 엄마의 짐을 대신 받아들고, 차려둔 식탁 앞으로 모셔갔다. 단정하게 앞치마를 차려입은 재민이 오늘의 메인 요리를 내오면서 네 가족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치고 거하게 차려진 상에 재민이 골라뒀다는 레드 와인까지 더해지자 꽤 제대로 된 저녁 식사가 완성되었다. 무슨 수작인지 간파하겠다는 것처럼 부친의 미심쩍어하는 눈길이 재민에게 향하는 것까지가 한 세트였다.
"오늘 무슨 날이니? 평소에 굶고 살진 않겠다 싶어 다행이긴 하다마는."
"오바 좀 했죠 뭐. 아, 재민이 형이 해주는 스테이크 진짜 맛있어요. 아빠도 드셔보세요."
나쁘지 않은 요리,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사이좋게 지내는 듬직한 두 아들, 화목한 가족의 저녁. 그린 듯한 단란함이다.
"주말인데 그냥 주무시고 가시지 그러세요? 굳이 대리 불러 가실 것 없잖아요."
"그래? 방이 좀 부족하지 않아?"
"두 분이 제 방에서 주무세요. 전 지성이랑 같이 잘게요."
"아아… 어, 그렇게 해요 엄마."
불필요한 말을 꺼냈다는 뜻으로 테이블 밑에서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설프게 미소 짓는 지성에게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재민이 와인을 홀짝였다. 행복은 이다지도 씁쓰름한 맛이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