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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

익명D

재민은 좁은 골목을 걸으며 힐끗 눈을 치뜬다. 밤하늘에는 탐스러운 크림색 달이 높이 떠 있다. 드물게 이어진 가로등 불보다 환한 달이다. 동네의 곰팡이 같은 어둠까지 몰아내는. 그 손쉬운 탈환을 지켜보며 재민은 괜스레 머리 위를 털어본다. 정수리 위로 쏟아질 정화의 빛이 싫어서. 빠르게 발을 옮겨 밤을 걷는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비슷비슷하게 낮은 집들 사이 이질적으로 솟아오른 철탑이 보인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전부 나타날 때까지 재민은 시선을 들지 않는다. 익숙하게 이어지던 걸음은 대문 앞에서 멈춘다. 도무지 고요해지지 않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정적을 머금은 듯한 건물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창가에 타오르는 작은 촛불만이 존재감을 알린다. 재민은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벨을 울린다.

 

 

이내 문의 걸쇠가 달칵 열린다. 재민은 틈을 벌려 안으로 들어선다. 흰 달빛이 뒤따라 미끄러지듯 침입한다. 암흑이 샅샅이 밝혀지기 전에 그는 문을 굳게 닫는다. 싸늘한 시선이 텅 빈 교단에 닿는다. 건방을 떠는구나. 문틈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이 홀로 재민을 안내한다. 융숭한 대우를 바란 것은 아니나 이는 분명 그를 향한 오만이다. 기척이 부재한 공간은 그를 도둑같이 느끼게 한다. 귓가에 오롯한 발소리가 울린다. 일말의 남은 죄의식일 뿐일까?

 

 

재민은 교단 옆 낡은 나무문을 민다. 닳아빠진 경첩에서 새된 소리가 난다.

 

 

 

그곳에 누군가 있다.

 

 

 

옷장 아래 웅크린 작은 형체. 재민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어둠에 익숙한 눈을 깜박인다. 차라리 누군가 던져놓은 포대 자루같이 보이는 그 앞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앉는다.

 

 

 

그곳에 아이가 있다.

 

 

 

재민은 무릎에 고개를 처박고 굳어있는 형상을 바라본다. 마른 몸이 한껏 옹송그려 더욱 왜소하다. 종이뭉치처럼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몸. 생물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감출 수 없는 떨림뿐이다. 재민은 그 옆에 놓인 촛대를 집어 든다. 약하게 발산하는 불빛을 가까이 비춘다.

 

 

촛농이 지저분하게 흘러내릴 동안, 재민은 차분히 기다린다.

 

 

웅크린 몸이 곧 꿈틀한다. 무릎을 껴안고 있던 손이 발발 떨며 옷을 꽉 움켜쥔다. 뼈가 도드라진 목덜미로 엉킨 머리칼이 흘러내린다. 서서히 들어 올려진 고개에 비로소 빛이 닿는다. 텅 빈 눈이 그를 응시한다.

 

 

너무 어려.

 

 

재민은 혼잣말로 허공에 속삭인다. 먼지와 눈물로 뒤덮인 얼굴은 많이 쳐줘야 일고여덟 정도로 보이게 앳되다. 가엽고도 가엽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재민은 눈앞의 제물에게 측은함을 느낀다. 그는 손을 뻗어 솜털이 돋아 보드랍기만 한 동그란 뺨을 만져본다. 그 아래에서 힘겹게 팔딱이는 심장과 혈관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재민은 거기서 공포에 잠식되지 않은 무언가를 눈치챈다.

 

 

 

너 살고 싶구나.

 

 

 

어둠을 갉아먹는 촛불처럼 온몸이 녹아내릴지언정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 그곳에 있다는걸, 살아있다는 걸 알리는 의지. 살고자 웅크리고 몸을 숨긴 용기. 그는 잠자코 있다가 입꼬리를 올린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자.

 

 

 

재민은 아이의 눈앞에서 후, 초를 불어 끈다. 순식간에 둘 사이에 잿빛 장막이 펼쳐진다. 어둠을 삼키는 어둠.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연기가 느리게 가라앉고 나면, 그곳엔 아무도 없다.

 

 

 

 

 

 

 

 

 

킬링 디어

killing Dear

 

 

 

 

 

 

 

 

 

 

“형?”

 

 

 

 

지성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캄캄한 거실의 불을 밝힌다. 소파 위에 미동도 없이 앉아있던 재민이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오랜 시간 입을 열지 않아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추궁보다는 타이름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저녁에 동기들과 술자리가 있다며 집을 나선 지성은 예상된 시간을 넘기고도 한참 연락을 받지 않았다.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재민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일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 차치하고 문밖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할 일은 오직 그뿐인 듯이. 어차피 어둠과 기다림은 그에게 더없이 익숙했다.

 

 

 

지성은 재민의 무거운 분위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가볍게 그를 지나쳐 방 안으로 사라졌다.

 

 

“술자리가 좀 길어져서.”

 

 

짐을 내려놓는 소리와 서랍을 여닫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작은 소란 속에서 재민은 지성의 목소리를 기민하게 확보했다. 지성은 이것저것 정리하는 듯하더니 방에서 쏙 고개만 빼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재민을 바라봤다.

 

 

“항상 이렇게 안 기다려도 돼요. 나 어린애도 아니고 잘 들어올 수 있어.”

 

 

재민은 피곤한 눈자위를 누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지성의 모습이 영락없는 스무 살 같아서. 많이 컸지. 겉으로만 성장한 게 아니라 내적으로도 많이 성장했다. 재민은 가끔 지성에게 자신이 배제된 영역이 넓어진다는 걸 인지할 때마다 기분이 묘해졌다. 그 세상 속에서 지성은 영락없이 말쑥한 청년일 테다.

 

 

 

그래도 재민은 여전히 그에게서 어둠 속의 아이를 본다.

 

 

 

 

옷을 챙겨 나온 지성이 재민의 옆에 풀썩 앉는다. 멀어졌나 싶은 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좁혀 재민의 무릎 위로 쓰러졌다.

 

 

“누가 나 좀 씻겨줬으면 좋겠다.”

 

 

아까는 멀쩡한 듯 보였던 얼굴 위에 홍조가 피어있다. 배시시 새어 나온 웃음을 들여다보며 재민은 쏟아진 머리칼을 가만 쓰다듬었다. 굳어있던 온몸의 긴장이 그제야 풀어진다. 익숙한 향과 온도를 가진 몸. 익숙하게 미소짓고 익숙하게 어리광을 부리는 품 안의 아이를 확인하고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너 어릴 때는 내가 씻겨줬잖아.”

“기억나.”

“기억나?”

 

 

부드럽게 속삭이며 재민은 지성의 눈을 가린다. 그 이전은 기억하지 마. 전부 쓰레기니까. 지성은 곧 잠에 빠져들 것같이 편안하게 숨을 내쉰다. 응? 나지막하게 그가 재촉하자 눈을 찡긋하며 무심결에 주억인다. 재민은 작은 얼굴을 소중하게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의식처럼 고요하게, 입 맞췄다.

 

 

 

 

 

 

 

 

 

 

 

 

삶이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재민은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어둠을 먹고 사는 미물이 되기 전에도 그는 생에 별다른 미련이 없는 인물이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고, 또 움직이고. 나라가 혼란하고 사람들이 의기로 활활 타오르던 시절이었지만 모든 게 피곤하기만 했다. 나는 나일 뿐인데, 자신의 의지 없이 타고난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게. 어디에 머리를 숨겨봐도 그곳에는 이성이 반짝였다. 의무감으로 휘갈긴 글은 형편없었다. 온 마음을 쏟아붓는 절박함이나 회한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겉돌았다. 구석마다 고인 혁명이 거북해 작은 불꽃이라도 피해갔다. 하도 오래전 일이니 세월이 기억을 먼지처럼 뒤덮어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루하루가 똑같이 따분했다.

 

 

그날도 은밀히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비겁자, 박쥐, 뒤에서 그를 부르는 말들이 많았지만 마음 쓰이지 않았다. 그저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좁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낮이 짧아져 길은 이미 어둑했다. 옷을 여미고 걸음을 서둘리 했다. 혹여나 경찰에게 잡힐까, 조심했지만 대신 다른 것에 잡혔다. 어두운 골목에서 휙 튀어나온 것이 재민의 목덜미를 쥐어뜯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바닥에 나뒹굴면서도 한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쩌면, 드디어.

 

 

지금 생각해보면 반사 상태까지 재민을 몰아넣었던 그는 아주 절박했던 것 같다. 흐릿한 시야 속 올려다본 그 날 달은 아주 밝았다. 인적 드문 골목이었지만 지름길이기에 얼마든지 누군가 나타날 수 있었다. 하지만 물었고, 사냥에 성공했다. 이상하게도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흡혈이 그를 환각 상태에 이르게 한 것이다. 묘한 해방감을 느끼며 그는 몽롱하고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높이 솟아오르던 까만 핏줄기였다. 눈앞에서 그는 손목을 그었다. 왜?

 

 

 

그러지 않았어도 되는데.

 

 

 

 

시한부의 심장을 달고 사는 인간이란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 그런 감상은 나중에야 찾아왔다. 재민은 뛰지 않는 심장으로 깨어났다. 또다시, 삶이었다.

 

 

 

 

 

 

 

 

 

근 백 년을 넘게 홀로 살았다. 그사이에 스쳐 간 인연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누구든 오래 함께할 수는 없었다. 재민은 더는 늙지 않는 몸이었으니 일정 기간이 지나면 몸을 숨겨야 했다. 처음에는 꽤 재미있었다. 삶 속에서 버둥거리는 인간들 틈 반 불사의 존재로 산다는 게. 그때그때 되는대로 이름을 바꾸고 충동에 따라 살았다. 그 생이 지겨워지면 몸을 숨기고 목숨을 끊었다. 고통이 익숙해지면 일종의 놀이가 되었다. 높은 절벽에서, 다리에서, 건물에서 몸을 던지고 차 사이로 뛰어들었다.

 

 

흥미는 금세 동이 났다.

 

 

애초에 권태를 타고났으니 다시 태어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고, 또 움직이고. 삶은 튀어나온 용수철처럼 반복됐다.

 

 

 

 

나를 죽이는데 싫증이 나자 재민은 남을 죽이는데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재미를 위한 살인은 단연코 아니었다. 불사에는 대가가 있었다. 지속적인 흡혈만이 이 기이한 생을 이어가게 했다. 인간을 흉내 내어 음식을 취하든 아니든 간헐적으로 피어오르는 핏빛 갈증은 피할 수 없었다.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피부가 녹아내리고, 압력으로 폐가 터지고, 다른 고통은 전부 견딜 수 있었으나 아사 직전의 타들어 갈 듯한 괴로움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허기가 오래 지속되면 나태하게 풀어진 눈알에 이채가 들었다. 코끝에 달큼한 비린내가 치밀고 극도로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 시점에는 자신을 지나치는 모든 움직임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따끈하고 붉은 기운으로 가득한 도시 전체가 그를 시험했다.

 

 

야생동물 사냥이 자연스럽던 시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재민은 인적이 드문 산을 그림자처럼 떠돌며 그날 마주친 가장 큰 짐승을 취했다. 아주 간편하고 빠른 방식이었다. 죽은 동물은 생사를 묻는 가족도 없었고 귀찮게 그에게 살려달라 사정하지도 않았다. 일이 곤란해지기 시작한 건 무분별한 수렵이 제한을 받기 시작한 후부터였다. 산과 숲에 저마다 이름표를 붙인 인간들이 철저히 관리하는 마당에 감시를 뚫고 직접 사냥을 나가기도 힘들어졌다. 지금처럼 불법으로 야생동물을 수렵하고 관리하는 업장과 계약을 맺거나 할 수도 있었지만, 모든 일에는 충동적인 시작이 있었다.

 

 

 

재민은 오래 굶주려있었다. 어렵사리 뚫어온 거래처가 막혔고 수상쩍은 감시가 며칠씩 있었다. 공적인 눈이 따르는 것은 몹시 귀찮았기에 보름 넘게 은신처에 몸을 숨겼다.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아주 위험했다. 제 것이 아닌 심장 박동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방안을 빙빙 돌았다. 새까만 암흑 속에 자신을 간신히 가둬두고 욕구를 억누르려고 애썼다.

 

 

 

그때 꽉 닫아둔 창문 틈으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재민은 홀린 듯 암막 커튼을 천천히 걷어내고 유리에 이마를 박았다. 눈을 감고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거대한 하모니와 장엄한 활기가 둥둥 마음을 울렸다. 실실 미소지었다. 한 번도 내 머리 위에 존재하지 않으시고 이제 나를 시험하십니까.

 

 

 

그는 문고리를 틀어쥐었다. 철문을 밀어내고 노래를 쫓아 걸었다. 종잇장처럼 창백한 피부가 하얗게 빛이 나던 밤, 발소리도 내지 않고 골목을 돌아 귀퉁이에 몸을 숨겼다. 십자가가 있는 건물에서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쏟아져나오는 꼴을 지켜봤다. 저 중 딱 하나면 됐다. 위대하신 그대의 양 하나를 측은하기 짝이 없는 내가 탐하겠습니다. 보시고 구원을 내리시던지. 죽을 수 없는 저를 다시 죽이시던지. 재민은 형형한 눈빛으로 입술을 훑었다. 가장 마지막에 나올 놈을, 기다렸다.

 

 

 

 

 

그곳에서 박 씨를 만난 게 행운이었을까 혹은 실수였을까?

 

 

 

 

 

 

재민은 가장 늦게 나온 놈이 건장한 중년의 남자라는 것에 감사했지만 자신의 몸이 꽤나 쇠약해져 있던 것을 간과했다. 순식간에 목을 잡아채 어둠으로 끌고 오자 남자는 거세게 반항했다. 소리 지르지 마. 입을 틀어막고 겨우 가슴팍을 내리눌렀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새는 발음으로 그는 애원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재민이 입꼬리를 올리자 기이하게 길어진 송곳니가 드러났다.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잠시 숨이 막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릴 구원하러 오셨군요.”

 

 

 

누구든 죽음을 앞두면 미친놈이 되지. 무시하고 이를 박아넣으려 고개를 숙이자 남자가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발, 당신께 바칠 것이 많습니다‥ 절 살려만 주신다면‥ 계속 그대에게‥ 극심한 피로로 말이 뚝뚝 끊어져 들렸다. 사실상 살기 위한 발악에 불과했으나 재민은 오래 굶은 것치고 아주 참을성 있게 눈을 깜박였다. 마지막 남은 그의 이성이 전등처럼 깜박였다. 깊이 잠긴 목소리를 내며 재민이 오만하게 그를 내려다봤다. 널 어떻게 믿지?

 

 

 

 

둘은 계약을 맺었다. 제 발조차 보이지 않는 까만 밤에.

 

 

 

남자는 재민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종이라 칭했으나 그 유난스러운 호칭이 우스꽝스러워 성을 따 편의상 박 씨라고 불렸다. 그는 개신교의 탈을 쓴 사이비 종교의 자금을 굴리는 일종의 사업가였다. 목사 가운을 뒤집어쓰고 신실한 수장 노릇을 연기하며 추종자를 늘려가는. 사실상 깡패집단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가 재민에게 제안한 역할 또한 따지고 보면 망나니와 다름없었다. 박 씨는 세력을 불리는 데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매달 그에게 한 명씩 제물로 바쳤다. 꾸준히 신선한 피만 제공된다면 재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끔 영문도 모르고 결박된 채 교단에 올려진 인물을 볼 때면 유감이라고 생각했으나 별다른 감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이 바닥까지 끌려왔다면 그저 먼지처럼 흩어질 인생이었다. 재민은 박 씨가 자신을 경이롭게 바라보면서도 마음속 깊이 경멸하는 것을 투명하게 느꼈다. 그저 우스웠다. 이 금수들의 계약이 신성한 믿음 아래 이어진다는 게.

 

 

 

 

오랜 갈증 뒤의 피는 꿀보다 달았다.

 

 

 

 

 

 

 

 

 

 

 

 

 

“뭐 먹고 싶은데?”

 

 

밖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들린 마트였다. 코너를 돈 재민은 어깨에 핸드폰을 받쳐 들고선 진열대의 채소 가격을 확인했다. 물가가 부쩍 올랐네, 중얼거리면서. 이번 달은 식비가 예상보다 더 들 것 같았다. 그는 양배추 하나를 집어넣으려다가 내려놓고 잘린 반 통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지성이 집에서 식사하는 시간이 줄어 먹을 입이 많지도 않았다.

 

 

 

-떡볶이 시켜 먹으면 안 돼?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되지.”

-진짜 매운 거 먹고 싶은데, 형은 그렇게 안 하잖아.

“너 속 다쳐 지성아. 학교에서도 맨날 마라탕만 먹는다며.”

 

 

이것 봐, 뭐 시켜먹기나 하고. 재민이 보기에 요즘 지성의 식습관은 엉망이었다. 집에서도 간식만 야금야금 먹고 봐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끼니를 안 챙겼다. 재민이 타이르자 지성이 전화 너머에서도 입을 삐죽이는 게 보였다. 재민은 부풀어 오른 볼이나 뾰족한 입술을 상상하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러나저러나, 하루 중 그를 웃게 만드는 건 지성뿐이었다.

 

 

“형이 진짜 맛있게 해줄게.”

 

 

다정하게 말하면 결국 그의 말을 들어줄 걸 안다.

 

 

-‥알았어. 그럼 진짜 좀 맵게 해줘요. 나 오늘 스트레스받아서 매운 거 먹을래.

“그래. 언제쯤 도착해?”

-한 30분? 방금 버스 탔어.

“알았어, 천천히 와.”

-아 그리고!

 

 

응? 재민이 답하고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작은 숨소리만 몇 초간 이어졌다. 뭐라 되물으려는 찰나 지성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 먹을 것도 시켜요. 냉장고 비어있던데.

 

 

말을 마치고 전화는 바로 끊어졌다. 재민은 신호가 없는 핸드폰을 들고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통로를 막은 그의 곁을 누군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쳤다. 그는 천천히 팔을 내리고 핸드폰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하긴, 근래 정신이 지성에게만 쏠려있어 제 몸을 못 챙기긴 했다. 생각해보니 예민하기 그지없는 나날이었다. 그제는 집에서 일하는데 위층에서 말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 머리가 지끈거렸다. 올라가서 주의를 줄까 생각도 했다. 지난주에는 대청소를 한답시고 유난을 떨었다. 매주 하는 일이긴 하지만 낡은 화장실이 번쩍번쩍해질 일이 없는데도 한참 때를 불리고 솔질을 했다. 집에 나갔다 들어온 지성이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하며 학을 뗐다. 어디서 자꾸 비린내가 나. 하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재민은 잠자코 있다가 핸드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입매를 굳히고 액정을 두드렸다. 내 밥은 내 밥이고. 곧 화면에 ‘집에서 엽떡 만들기’ 영상이 시끄럽게 재생됐다.

 

 

 

 

 

 

 

 

 

 

 

“맛있어?”

 

 

지성이 먹는 걸 보고 있으면 꼭 묻게 된다. 잘 먹고 있다는 걸 눈앞에서 확인하면서도. 지성은 눈을 맞추고 고개를 힘차게 주억거리곤 볼을 움직였다. 요리하는 내내 재민에게 참견하더니 힘을 다 썼는지 말도 없이 잘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면 귀찮아도 뭘 안 해줄 수가 없었다. 애가 이렇게 길어진 데에는 내 책임도 있긴 하지.

 

 

“매워?”

 

 

턱을 괴고 지성을 유심히 지켜보던 재민이 일어섰다. 유리컵에 정수를 채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성은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쓰읍, 소리를 냈다. 도톰한 입술이 평소보다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입술을 손등에 뭉개고 지성은 잠시 숨을 헐떡였다. 눈가가 촉촉했다. 맵네‥ 약간 민망한 듯 웃으면서도 손에 쥔 젓가락은 놓지 않았다. 떡볶이 양념보다도 새빨간 입속으로 떡이 사라졌다. 재민은 그걸 가만 바라봤다.

 

 

 

 

재민은 지성이 먹는 것이 떡볶이가 아니라, 자신의 일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외로웠나? 글쎄.

 

 

 

재민은 왜 지성을 데려왔을까.

 

 

 

 

 

 

재민도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그 날은 어쩐지 달빛에 홀린 것 같았지. 십여 년의 세월을 거래한 박 씨와의 관계는 어느새 소원해져 있었다. 그는 어느새 몸집을 크게 불려 서울의 한자리를 꿰찬 사이비 집단의 수장이 되었다. 주름진 얼굴에 기름기가 흘러 눈알까지 미끄러졌는지, 겁을 잃고 재민의 위치를 슬슬 건드렸다. 앞에서는 눈도 못 마주치고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 뒤에서는 그의 존재감을 지워나갔다. 불쾌했지만 달리 주장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를 무시하든 무뢰한 취급을 하든 재민은 받아야 할 것을 받기만 하면 됐다. 어둠 속 맞이하는 이가 하나 없더라도.

 

 

 

그리곤 아주 어린애를 내놓은 것이다. 제물로.

 

 

 

 

화보다도 측은하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희생을 요구하며 그 대상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기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인을 했다. 이가 들어가면 고통은 잦아드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했다. 얼굴은커녕 성별조차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는데. 어둠 속의 아이를 바라보자니 욕구가 가시고 여러 의문만 피어올랐다. 어쩌다 이 더러운 거래에 얽히게 됐는지.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무슨 마음으로 교단에서 기어 내려와 여기에 몸을 숨겼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했다. 팔딱거리며 뛰는 작은 심장과 눈물로 젖은 얼굴. 별안간 이상한 결심이 섰다.

 

 

 

나와 함께 가자.

 

 

 

 

재민은 제단 위 사슴을 기꺼이 안아 들었다. 이조차 운명일까?

 

 

 

 

반쯤 의식을 잃은 아이는 너무 가벼웠다. 그리고 차가웠다. 재민은 아이를 바람처럼 들쳐 안고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빼내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단신이 아닌 몸으로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피를 갈구하는 육신을 무시하며 재민은 자신을 지켜보는 달 아래 걸음을 바삐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넝마 같은 옷을 벗기고 아이가 쓰러지지 않게 욕조 속에 앉혔다. 형편없이 마른 몸 위에 따뜻한 물을 끼얹어가며 손수 아이를 씻겼다. 어색하고 서툰 손길이 여린 살갗에 상처라도 낼까 조심하며. 이미 몸에 가득한 멍이나 흉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작고 거친 나이테를 확인했다. 가여웠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물기를 닦고 티셔츠 하나로 감싸지는 아이를 넓은 침대에 옮겼다. 낯선지 가물거리며 눈을 자꾸만 뜨는 아이를 재우겠답시고 옆에 같이 누웠다. 빙산처럼 차갑고 적막한 몸에 천천히 아이를 품었다. 뻣뻣하게 구부러진 팔로 어깨와 등을 감싸 안았다. 가슴팍에서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대로 굳어있던 재민은 아주 약하게 자신을 밀쳐내는 손에 힘을 풀었다. 추워요‥ 지성이 재민에게 한 최초의 말이었다. 재민은 그제야 아이에게 뜨거운 물주머니를 안겼다. 공포와 추위에 떨다 비로소 고요해진 얼굴. 지쳐 잠이든 아이의 이마를 한참 쓰다듬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지성은 재민의 아이였다. 죽음 대신 생명을 주겠다고 결심한 그 밤부터.

 

 

 

 

 

 

 

 

 

 

 

 

지성은 며칠간 입을 열지 않다가 재민의 다정한 물음에 이름을 말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왜 그 밤 건물 구석에 처박혀있었는지. 구원이 찾아온다고 했어요, 목사님이‥ 자세히 설명은 하지 못했지만, 재민은 대충 상황이 짐작됐다. 지성의 부모는 오늘도 그 앞에 손을 모으고 있을까? 박 씨는 무슨 말로 그들을 꾀어냈을까. 지긋지긋한 방구석의 불행이 전부 사라지고 새로운 미래가 찾아올 거라고 설득했을까? 이 작은 아이를 바치면? 시간이 주어지면 인간은 언제든 되풀이하듯 교만해지고‥ 또 비겁을 반복하고. 흐린 판단으로 서로를 파괴하고. 모든 게 어설프게 무너졌다.

 

 

 

이제부터 내가 지성이의 형이야. 내 이름은‥ 나재민이야.

 

 

 

아이 앞에서 이름 세 글자를 말하는데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마치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사람처럼 마음이 들떴다. 지성은 최대한 예쁘게 웃어 보이는 재민을 가만 쳐다보다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형.

 

 

작게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뱉은 그 한마디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자그마한 몸을 끌어안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지성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즐거웠다. 의젓하게 굴지만, 지성은 늘 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서는 마음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어리숙함이 재민을 항상 웃게 했다. 어두운 시간을 겪었으면서도 구김살 없이 환했고 마음을 연 순간부터 재민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자신이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재민의 일상이 누군가로 벅차게 채워졌다. 그는 자신이 줄 수 있는 전부를 지성에게 내주었다. 그러기 위해 노력한 게 아니라 절로 그렇게 됐다. 그러면 지성은 빈 도화지처럼 모든 걸 흡수했다. 버릇처럼 떼쓰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것을 다.

 

 

 

그러니까 지성은‥ 재민을 삼켰다. 순진한 눈을 하고 좁은 입속으로 재민의 모든 걸 먹어치웠다. 재민은 기꺼이 자신을 그에게 다 내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배를 불리고 자라나게 할 수만 있다면. 한편으론 그가 목격하지 못한 시기의 지성이 못내 아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일찍 너를 알았을 텐데. 너의 시작부터 함께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말 너의 전부가 될 수 있었다면‥

 

 

 

만약 네가 나에게 아빠, 라고 불렀다면 어땠을까.

 

 

 

재민은 등골이 오싹하도록 밀려오는 쾌감을 억눌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혀로 훑으며 애써 어떤 욕망을 숨겼다. 이로 어느 살갗을 꿰뚫었을 때보다 생생한 흥분이 느껴졌다.

 

 

 

 

사랑이란 이런 건가?

 

 

사랑이란 원래 이런 건가?

 

 

 

 

 

 

 

 

 

 

 

 

 

 

 

지성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들춰 매고 걷다가 진동 소리에 잠시 멈춰섰다. 중간고사가 끝이 난 날이라 머리는 피곤해도 몸은 가뿐했다. 여기저기서 술 약속을 잡으려고 난리였다. 지성은 친한 무리가 있으면 빼지는 않았지만 큰 과 행사는 열심히 피해 다녔다. 사실 동기와의 술자리도 매주 있는 건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집에 가서 재민과 한잔하고 말지. 술을 싫어하는 재민은 지성이 맥주를 두 캔이라도 깔라치면 여기까지만, 하고 유치원 선생님처럼 외치면서 자리를 치웠다. 그 모습이 웃겨서 집에서는 좀 오바하는 것도 있었다.

 

 

형은 아직도 내가 애인 것처럼 굴지.

 

 

 

볼을 살짝 뾰로통하게 부풀리고 지성은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번호가 떠 있었다. 약간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성아.

 

 

 

지성이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핸드폰을 든 팔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 기억하니?

 

 

 

 

어떤 목소리는 영원히 잊히지가 않는다. 전부 지워낸 것 같은데도 마주하게 되면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갔다.

 

 

-오래전에 네게 닿을 방법을 찾았지만, 성인이 되는 해를 기다렸단다. 그래야 네가 그‥ 괴물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모든 게 얼기설기 얽혀있던 시절. 손바닥으로 세게 문지른 것처럼 흐릿해진 기억은 어쩌면 고통을 잊기 위한 그의 발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너를 언젠가 죽이고 말 거다. 그게 그의 존재 이유니까.

 

 

그는 구원이 아니야.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 우리에게 돌아와라.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던 재민은 멀리서 울리는 벨 소리를 듣는다. 선선해진 날씨에 옷가지가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는 탁자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집어 들고 노을이 진 바깥을 바라본다. 발신자는 언제나 한 사람. 시험이 다 끝났으려나? 울상을 짓고 집을 나서던 지성의 얼굴을 떠올리며 재민은 살포시 미소지었다. 전화를 받는다.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손에 쥔 수건을 내팽개치고 현관으로 달려나간다.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가 큰소리를 내며 닫혔다.

 

 

 

 

 

 

 

 

 

 

 

 

 

 

재민은 좁은 골목을 달리며 눈을 치뜬다. 밤하늘에는 탐스러운 크림색 달이 높이 떠 있다. 드물게 이어진 가로등 불보다 환한 달이다. 동네의 곰팡이 같은 어둠까지 몰아내는. 그 손쉬운 탈환을 지켜보며 재민은 눈을 질끈 감는다. 정수리 위로 쏟아질 정화의 빛이 싫어서. 빠르게 발을 옮겨 밤을 달린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비슷비슷하게 낮은 집들 사이 이질적으로 솟아오른 철탑이 보인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전부 나타날 때까지 재민은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 대문 앞에서야 급하게 멈춰선다. 도무지 고요해지지 않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정적을 머금은 듯한 건물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활짝 열린 대문만이 존재감을 알린다. 재민은 입술을 짓이기며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안으로 들어서면 흰 달빛이 뒤따라 미끄러지듯 침입한다. 불안한 시선이 텅 빈 교단에 닿는다.

 

 

오래된 나무 계단을 밟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위층으로 향한다. 철탑의 다락이 존재하는 곳. 기척이 부재한 공간은 그를 도둑같이 느끼게 한다. 귓가에 오롯한 발소리가 울린다. 일말의 남은 죄의식일 뿐일까?

 

 

 

 

 

 

 

그곳에 지성이 있다.

 

 

 

 

 

아, 바람이 분다.

 

 

 

활짝 열린 창문 앞에 선 익숙한 몸. 달을 등지고 선 몸에 옷이 붙어 낭창한 실루엣이 드러난다. 까만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날린다. 손에는 은빛 단도를 쥐고. 더는 몸을 웅크리지도 숨기지도 않은 채로.

 

 

 

“형, 나를 잡아먹을 거예요?”

 

 

 

지성의 처음 보는 무표정한 얼굴이 재민을 응시한다. 재민은 순간 숨이 멎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에겐 더는 뛰는 심장이 없는데도.

 

 

 

 

 

 

“그게 형이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해요.”

 

 

 

 

 

 

그럴 수밖에. 재민의 심장은 곧 지성이니까. 나를 삼켜요. 지성의 속삭임이 재민의 귓가에 사뿐히 닿는다. 재민의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뒤엉켜간다.

 

 

 

 

 

 

 

 

 

지성이는 정말 이상해.

 

 

내가 하는 행위를 모두 용인하고, 투명한 눈동자로 전부 담아내고, 새 부리 같은 입술로 집어삼키면서. 하나의 의문도 갖지 않아. 아니 묻지 않아. 날 온통 집어삼키면서 또 너를 내어주겠다고 말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무슨 생각으로 널 데려왔는지,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그냥. 널 내게 주겠다고. 이상하지 않아? 우리 좀 이상하지 않아? 정상적이지 않지 않아? 그러면 넌. 어쩌면 너 역시 나를‥

 

 

 

 

저들끼리 마구 뒤엉켜 새끼를 치며 뭉개지던 생각들이 파괴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온몸에 전율이 오도록 퍼지는 정신적 오르가슴.

 

 

 

 

 

 

재민이 홀린 듯 지성에게 다가가자 지성이 평온하게 두 눈을 감는다. 실크 커튼이 바람에 요동치며 두 사람을 감싸 안는다. 달빛에 요요하게 빛나는 목덜미에 재민이 입술을 내리고 부드럽게 입 맞추면 지성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떨리는 숨을 뱉는다.

 

 

 

 

재민은 깨끗한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다. 새까만 속눈썹이 감싼 붉은 눈동자로 지성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사랑해.”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널 사랑했어.

 

 

 

 

 

지성의 손에서 단도를 빼앗아 든다. 손목을 세게 긋는다. 검은 핏줄기가 꽃처럼 피어오르면 지성이 눈을 커다랗게 뜬다. 그가 놀라 뭐라고 말을 뱉기도 전에 입술에 손목을 묻고 피를 한 모금 머금는다. 그대로 지성에게 입 맞춘다. 붉은 혀가 서로 얽히고 입가가 진홍빛으로 물든다.

 

 

 

 

 

 

 

 

 

 

그래.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서로를 구원해. 내가 널 살아나게 했고, 그렇게 자라난 너의 삶이 다시 날 구원하듯이. 뒤엉킨 생은 요동치며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런 삶도 있는 거야. 세상에는 그런 사랑도 있는 거야‥

 

 

서로를 잡아먹는 사랑도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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