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발명
말
사랑은
누구에게나 같은 눈높이로
가벼이 즐겨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으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면이 있었다.
사랑의 발명
앞으로 세시간 반 뒤면 알람이 울린다. 지성은 한껏 숨을 끌어모아 길게 내뱉었다. 엎드린 몸은 아무렇게나 뒤엉킨 이불 밑에서 주욱 펴지며 가라앉았다.
양 손발을 끝까지 침대 밖으로 뻗어 힘껏 스트레칭했지만 영 개운하지가 않다. 열아홉 박지성, 겨울. 지성은 양 손바닥을 쫙 펼쳤다가 쥐었다. 바야흐로 내벗겨진 짝사랑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박지성은 나재민을 좋아한다.
이것은 굳이 유심히 관찰하지 않아도 이제 그의 주변인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였다. 이제는 나재민 본인도 포함.
인준과 지성은 초등학교 미술부에서 처음 만났다. 미술 활동이 있는 날이면 늘 제 앞자리에서 의자까지 돌리고 앉아 눈이 마주치면 활짝 웃는 그 형을, 그림을 그리던 도화지에 얼굴을 박고 눈만 굴려 슬쩍슬쩍 쳐다본 지 딱 삼 주 쯤 되었을 때 지성은 드디어 그 조건 없는 호감에 안정감을 느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내가 그림을 잘 그리나?(이건 그 형 앞에 놓인 도화지를 보고 금방 종식되었다.) 아니면 내가 아기일 때... 나랑 만난 적이 있는 형인가? 시덥잖은 모든 가설들이 전부 가능성을 잃자, 지성은 태어나서 처음 본 어미인 것처럼 인준 곁에 졸졸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발이 넓은 인준이 차례로 소개시켜 준 동혁, 제노, 천러, 그 모든 형들이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을 때, 지성은 인준의 뒤에서 말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너를 적응하고 있는 거야. 인준은 언제나 지성 대신 그 행동을 설명했다. 어린이 박지성은 언제나 두유를 맹물에 탄 듯 밍숭한 얼굴로 형들을 봤다. 형들은 그걸 조금 어색해 하는 듯 하다가, 인준 친구 다운 적응력으로 곧 지성을 엄청 귀여워했다. 다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성을 챙기고 아꼈다. 지성은 종종 인준조차 방해 못 할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듯 보이긴 했지만 동혁의 농담에 까르르 웃었고 제노에게 다가가 시덥잖은 이야길 조곤조곤 늘어놓았으며, 천러와는 이따금 인준 없이 둘이서 방과 후에 떡볶이를 사 먹으러 가기도 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음침하다는 평을 듣곤 하지만, 제 나름대로의 세계를 천천히 쌓아올리고 있던 지성은 어느덧 중학교에 진학했다. 다니던 초등학교 학생 중 거진 팔 할이 입학하는 인준의 중학교에 지망해 붙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였지만 지성은 기쁘고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불쑥, 새로 등장한 얼굴이 나재민이었다. 3학년이 된 인준이 학기 초부터 사귀어 온 친구다.
“아기 안녕, 너가 지성이구나?”
“...”
아직 재민보다 조금 작은 지성은 말가니 그를 올려다봤다. 새까만 속눈썹과 앞머리에서 내려온 그늘이 얼굴에 잔잔히 드리워져 있었고 뺨과 코끝은 푸르게 빛났다. 볕이 유난히 쨍한 한낮이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지성은 자신을 둘러싼 우주가 그그극. 소리를 내며 비틀려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관찰, 끝없이 은밀한 시선,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언뜻 스토커 같은 어설픈 몸 숨김!
...
지성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재민을 따라다녔다.
지성을 아는 형들은 야 나재민, 지성이가 너 무지 마음에 드나 보다. 하고 낄낄 웃었지만 지성은 재민과 눈이 마주쳐도 전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피하거나 살짝 귀를 붉혔다. 재민은 희미하게 웃을 뿐이다. 그리고 가끔 갖고 있던 간식을 지성의 손에 꼬옥 쥐어주었다. 재민이 그걸 까서 먹는 모습은, 적어도 지성은 단 한 번도 관찰하지 못했으므로 아마 지성에게 주려고 챙겨 두는 것 같았다. 진짜 어려운 형이야. 지성은 간식들의 포장지를 손끝으로 쥐고, 굴리고, 읽고, 바스락대는 소리를 다 들을 때까지 그걸 먹지도 못했다.
1.
지성은 생각이 많다.
혹자는 이 한줄평을 듣고는 생각이 아니라 잡념. 이라고 정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지성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에 대해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다. 상념의 땅굴을 캐내고 또 캐내면 알아내지 못할 것은 없을 거라 믿었다. 그건, 생각하기에 직접 부딪히고, 경계를 깨고, 미지의 타인에게 나를 뿌리내리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누구는 포장을 뜯자마자 쓰레기통에 처넣을 사용설명서를 정독하여 상대를 파악하고 자신에 대한 완전한 호감을 확신한 채 걸어들어가면, 인준과 그의 친구들에게서 그랬듯 반가운 안도감이 지성을 완연히 감쌌다. 지성에게 가장 수월한 일이였다.
첫 만남부터 지성에게 이상한 예감을 줬던 그 미지의 나재민은, 과연 박지성의 조그만 세계를 잔뜩 뒤흔들었다.
그 형에게서는 읽히는 게 없었다. 읽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학교는 점심 시간이 한창이였다. 아이들은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운동장을 주저 없이 박차고 달린다. 매점 바깥 쪽 출입구로 걸어나오던 재민은 늘 그렇듯 건물 모서리 뒤편 즈음에서 조용히 저를 보고 있는 지성을 눈 하나 깜빡 않고 끌어내었다.
“지성아, 더운데 왜 밖에 서 있어. 초코 우유 마실래?”
완전 차갑지는 않은데. 그래도 이 날씨엔 시원해. 약간 느릿한 말투. 재민의 반팔 체육복 소매가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나도 형 따라 방금 나온 거라 하나도 덥지 않은데... 받아든 우유의 표면은 물기가 말라 있었지만 정말로 아직 시원했다. 여름 볕은 금새 몸을 덥히고 큰 손바닥 안이 기분 좋게 서늘해진다. 지성은 재민을 바라봤다. 그 숱이 많은 앞머리도 덩달아 바람에 날린다. 이렇게 똑바로 시선이 마주치면, 몰래 훔쳐볼 때보다 더 많이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지성은 이내 고개를 푹 숙여 버린다.
끌려나온 건 지성이 아니라 지성 안의 세계였다. 형이 좋아. 지성은 아직 읽어내지도 못한 사람에게 속수무책으로 붙잡혔다. 그날 밤엔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관찰 대상이 없는 좁은 방 안에선 벼락치기도 소용이 없었다. 무섭고 생경한 느낌에 지성은 이불에 얼굴을 묻고 조금 울었지만 안 그런 척 눈가를 꾹 눌렀다. 자연스레 두 눈이 감기면 지성은 그가 혼자 쓰는 방의 넓은 침대에서 웅크린 동물처럼 고요히 파묻혀 있을 것을 상상했다. 지금 어느 방에 누워 있는 건지, 지성의 방인지 재민의 방인지 모를 정도로 몸이 나른하다. 그런 새벽에 겨우 잠이 든다.
조그만 머리로 생각이 뭐 그리 많냐?
천러가 그를 친히 ‘왕머리 패밀리’에 끼워 줄 만큼 이제 키도 머리도 자랐지만, 지성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성은 이제 재민보다 반 뼘은 컸다.
2.
재민은 변화에 둔하다.
그래서 지성이 둥그런 바가지 머리에 온갖 생각을 다 담고 하며 자신을 따라붙는 것도 잘 몰랐다. 야... 지성이 언제까지 저러고 있대? 동혁이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주변에 묻다 못해 달려가 그 머리통을 통, 하고 쳤을 때도 재민은 그냥 웃으며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울 지성이. 나중에 이거 톡으로 보내 줄 테니까 동혁이 형 고소해서 맛있는 거 사먹자?
그러곤 자기는 지성의 뺨을 부비고 머릴 헝클어 놨다.
귓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약간 습한 손은 두툼하고 미지근했다.
고등학생이 된 재민은 이른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 지성은 재민의 자취방에 온 적이 있다. 집에 가는 길에 인준 형의 심부름으로, 인준의 가방에 잘못 들어간 에어팟을 돌려 주러 오겠다고 했다. 재민은 습관적으로 과자를 좀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언젠가 지성일 주려고 산 햄버거 모양 젤리 같은 것들이다.
휴대폰으로 지성의 전화가 몇 초 걸려오더니 끊긴다. 그리고 곧 벨이 울렸다. 재민은 급하지 않게 걸어가 문을 열어 준다. 지성은 답지 않게 양 손에 가방끈을 꼭 쥐고 현관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두 사람은 가까운 거리에서 훅 마주쳤다.
“괜히 여기 들르느라 수고했지? 들어와용.”
지성은 잠깐 망설이다가, 재민을 피해 슬쩍 현관을 넘는다. 재민은 망설임 없이 지성을 침대에 앉히고 아까 올려둔 간식 따위를 두 손 가득 들려주었다. 바로 인준이 부탁한 물건부터 꺼내려던 지성은 얼떨결에 그것들을 손에 꼭 쥔 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침대 옆의 책상에 홈웨어를 입은 재민이 앉아 지성을 보고 있고, 자취방 안은 그럭저럭 정돈되어 있다. 재민은 책상 위의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던 카메라를 뽑아 온다. 지성아. 형 늘 찍던 사진 있지? 간만에 정리하고 있었는데 지성이 사진 되게 많앙. 지성을 일으켜 컴퓨터 화면을 보여 줬어도 됐을 텐데, 집에서 가장 푹신한 곳에 앉혀 놓은 지성을 그대로 두고 싶어서 카메라 화면을 넘기며 사진을 보여 주고 있다. 멀리서 재민을 보는 지성이 사진, 언제 찍었는지 모를 하굣길의 뒷모습 사진, 인준과 웃고 있는 지성이 사진, 학교 정문 앞에 늘어선 키 큰 나무들 사진, 양 손으로 브이 하고 있는 여자친구 사진. 지성이 일어났다. 형, 저 이제 그만 집에 갈게요.
“벌써 가? 이거 까까 챙겨서 가야지. 지성이 가방에 자리가 없나? 형이 봉투에 담아 줄게. 잠시만 기다려 줘어.”
지성은 가방 앞 포켓에서 재민의 에어팟을 꺼내고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재민의 침대를 잠시 바라본다. 두 면이 벽으로 막혀 있는 침대엔 이제 제법 포근한 이불이 깔려 있다. 지성은 조용히 에어팟을 그 위에 올려두었다.
“이거 들고 갈 수 있어? 많이 무겁진 않은데. 가끔 편의점 들르면 지성이 잘 먹는 게 왜 이렇게 잘 보이나 몰라. 많이 먹고 쑥쑥 자라야지 애기?”
아차 하고 냉장고를 열더니 작은 오렌지 주스까지 한 통 넣어 준다. 재민은 유난스레 엉덩이를 두드리며 지성을 배웅했다. 지성아, 학교에서 봐? 형은 다음에도 지성이 또 놀러 왔음 좋겠어. 지성은 꾸벅 인사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재민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문이 닫힌 뒤에도 꽤 오래간 사라지지 않는다.
재민의 바람과는 달리 그 날 이후로 지성이 재민의 집에 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재민은 뭔가 더... 극성맞아졌다. 쟤 과해졌어. 심각하네. 지성이 다니는 중학교 바로 옆 고등학교에서 지성을 보고 싶다며 덩달아 꼽껴 온 동혁이 인준과 함께 수군댔다. 지성이 체육 시간에 강당 마룻바락에 살짝 손가락을 긁혀 온 걸 눈치 까고는 얼른 형 집에 가서 약 바르자며 성화다. 지성이 고개를 도리도리, 학원 가야 돼요. 하고 거절하자 재민은 어디선가 밴드를 하나 꺼내 손가락에 꼼꼼히 감아 주었다.
“야. 누가 보면 니 동생인 줄 알겠다? 걔 황지성인 거 몰라? 거리 유지 해라.”
“지성이만 보면 챙겨줄 게 자꾸 보이는데 어떡해. 귀여워서 그런가?”
저 새낀 희한하게 요즘 들어 더 정줄을 놨다며 인준이 혀를 끌끌 찬다. 지성은 손에 감긴 캐릭터 밴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요즘은 재민을 보러 학교에 찾아간다거나, 관찰하려 뚫어지게 바라보지 않았다. 반대로 재민이 지성을 자꾸 보러 와서 만나는 일이 잦기는 했지만. 지성은 인준과 같은 방향으로 영어 학원에 가고, 재민은 신나게 빠이빠이하더니 반대편으로 돌아서 간다. 아마도 여자친구를 만나러 갈 것이다.
인준이 보기에, 요즘의 지성은 전과 비교해서 생각이 좀 덜 많다. 대신에 묘하게 활력도 같이 잃은 느낌이라 걱정이 되었다. 지성이 나재민을 좋아하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조그맣고 치밀한 지성의 세계는 사실 아주 개인적이고 단순해서 주변 사람에게 의외로 읽히기 쉽다는 걸 지성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바쁘게 돌아가는 지성의 머리는 인준을 내려다본지 꽤 오래였다. 인준은 지성이 귀엽고 기특하고도 또 안쓰러웠다. 언젠가는 박지성이 그를 둘러싼 다른 세계에 겁을 덜 먹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손을 위로 뻗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지성이 힘주어 관찰해야 할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재민을 만난 봄이, 아주 더웠지만 생각보다 견딜 만 했던 그 해 여름이, 겨울이, 그리고 다시 한 해 건너 제법 쌀쌀한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능날이 다가오고 있다. 퍽 극적이지도 못하고, 아주 재미없이 시간이 흐른다.
재민은 수시로 대학에 붙었다고 했다. 수능 막바지를 준비 중인 인준과 다른 친구들을 대신해 재민은 지성을 살갑게 챙겼다. 여자친구는 안 만나러 가요? 순전히 궁금해서, 턱 밑까지 맺혔던 물음은 결국 꺼내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속눈썹을 내리깔고 기분 좋게 웃는 재민이 아주 약간, 약 올랐다. 지성은 재민과 주말에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 등하교를 거의 늘 함께했고, 맛있는 걸 사준다며 집 앞까지 찾아온 재민을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서기도 했다. 그쯤 시간을 보냈을 때 지성은 재민이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걸 알았다. 집요했던 관찰을 포기하니 예전만큼 피로하지 않았다. 이따금 그 예쁜 얼굴을 불쑥 들이밀 땐 가슴이 두근대기는 했지만.
새해가 밝았다. 지성은 올해 딱히 빌 소원이 없어서 카운트다운을 그냥 멍하니 보낼 참이였다. 인준에게 문자를 보내 봤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하필 엄마도 중요한 일로 집을 비웠다. 형들은 나만 두고 이제 어른이 될 것이다. 어른 행세도 하고, 어른이 할 법한 일은 죄다 하고 싶어 할 거다. 지성은 기분이 별로였다.
그 때, 재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가로로 눕힌 휴대폰에서 재생되던 카운트다운 라이브 중계 화면이 꺼지고 전화 수신 화면이 가득 찼다. 재미니횽. 그 형 본인이 직접 눌러 건네 준 이름이다. 뒤에 붙었던 반짝반짝 하트는 지성이 민망해서 지워 버렸다.
“지성아아~ 우리 지성이는 소원 빌구 있어?”
“니 땜에 못 빌었겠지. 지금 카운트다운 끝났는데. 진짜 등신이야? 지성아! 지금 빨랑 소원 빌어!”
“형은 소원... 지성이 보고 싶다. 형 보러 나올래?”
취했다. 방금 1월 1일이 막 되었는데 어디서 술을 구한 건지 목소리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지성은 짜증이 났다. 당장에 외투를 꿰어 입는 자신에게도 그랬고, 그 외에도 뭔가 알 수 없이 화가 치미는 이유들이 분명 있었다.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여튼 그랬다. 화가 잘 나는 편은 아닌데, 한 번 열이 받으니 슬리퍼만 대충 신고 현관문을 나설 때도, 겨울 밤거리를 쿵쿵대며 걸을 때도,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성이 재민의 자취방에 들어왔을 땐 그 모든 형아들이 방바닥에 퍼질러져 있었다. 문을 열어준 제노는 지성이 왔다고 가오리처럼 씨익 웃더니 다시 현관 앞 제 자리에 덜썩 누웠다. 지성은 그 꼴을 둘러보곤 잠깐 들뜬 속이 가라앉아 방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교롭게도 재민 옆이였다.
“지성이 왔오. 지성이. 아기는 아직 술 마시는 거 아니쥐. 떡볶이 줄까?”
그러고서 떡볶이는 주지도 않고 꽁꽁 언 지성의 손을 그러모아 쥐고 열심히 녹인다. 지성은 얼척이 없었다.
그냥, 그랬다. 그 날은 짜증이 터질 날이였다. 그 날의 모든 요소가 지성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지성은 입술을 꾹, 눌러 물고 재민을 봤다. 재민은 자기가 본 중에 제일 험악한 표정을 하고 있을 지성을 보고도 속없이 웃었다. 스무 살이 되어 기쁜 건 재민이고 술에 취한 것도 재민이다. 하지만 참을 대로 참았단 표정을 한 건 이상하게도 그 앞의 지성이여서.
지성은 재민에게 입을 맞췄다.
키스를 당한 사람은 정신이 붙었는지 나갔는지도 모르겠고, 같은 방 안에 널려 있는 형들은 아마도 거의 잠들어 있었다.
까먹지 마요. 지성이 붙은 입술을 떼고 단단히 말했다.
잊어버리라고, 꼭 까먹으라고 할 걸.
지성이 집에 가서 뒤늦게 후회해봤자 소용없었다. 뭐라고 말했건 앞으로의 상황이 달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짝사랑은 공개되었다. 지성은 잠이 든 재민을 두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재민이 방금 일을 기억할 것임을 직감했다.
침대에 누워 지성은 생각했다.
재민은 정말로 둔할까?
괴롭도록 궁금한 형의 영역을 내가 얼마나 알고 싶어했는지, 형이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얼마나 아팠는지, 마침내 그 탐나는 세계를 포기하기로 했을 때 내가 얼만큼이나 자랐는지, 형은 정말 몰랐을까?
이제는 정말로 소용 없는 생각이다. 지성은 그 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밤을 수긍하면 아침은 금새 온다.
그 날 이후 재민은 지성에게 더 이상 다정을 쏟아붓지 않았다.
대신에 지성이 원하기만 하면 다 줄 것처럼 행동했다.
원래 주던 다정도, 껍데기도, 그 안의 그의 향취를 가진 모든 것도 지성이 원해요. 라고 말하면 모두 넘겨 줄 터였다.
신정 오후쯤 기묘하게 돌아간 자세로 제 자취방 바닥에서 눈을 떴을 때, 동혁이 끓이는 해장 김치찌개 냄새가 방 안에 그렇게 진동을 했음에도 재민이 본능적으로 떠올린 건 지성의 입술 감촉이였다. 재민은 앉은뱅이 식탁 앞에 불려와 앉아서도 멍하니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뭔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성이가 그렇게 다가와서, 입술을 세게 맞대고. 살짝 물러나 아랫입술을 빨고...
몰랐나?
곧바로 연이어 떠오른 그 질문엔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다. 지성이 나를 좋아했을 거라곤, 분명 몰랐던 게 맞는데. 술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건지, 이제 와선 잘 모르겠다.
재민은 천성이 다정했다. 그러니 지성을 측은하게 여길 수밖엔 없었다. 지성과의 관계에 분명 변화가 생겼고, 모른 체 보낸 메시지엔 답장이 오질 않는다. 그걸 견디기가 힘들었다. 연락은 되지 않았지만 지성을 만날 일은 많이 있었다. 재민은 그 일이 있기 전과 똑같이 행동하려 마음먹었지만, 지성에게 풀어 놓던 자신의 다정이 싹 걷혔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재민의 다정은 어느새 조건부가 되어, 지성의 한 마디를 외롭게 기다렸다.
지성아. 나를 사랑한다니 가여워.
그러니 너는 술도 한 방울 마시지 않은 그 날 밤을 기억한다고, 기억하냐고 말해 줘.
그래야 내가 사랑을 줄 수가 있어.
지성은 미지의 세계에서 사랑을 서둘러 발명해내기엔 아직도 너무 어렸다.
제 앞가림을 고민하기에도 너무 바쁜 열아홉이다. 지성은 이제 재민이 원하는 바를 알았다.
치솟은 취기 같은, 터무니없는 꿈결 같은 그날의 일은 지성에게 달콤하기보단 후련했다. 이제는 화가 더 이상 화가 나지도, 화가 날 일도 없었다.
그간 관찰해 온 재민 겉 표면의 시료들을 분석하고 이름 붙여 본다. 아마도 재민 한 가운데 그 무른 속내는 지성의 시선을 무서워하고, 모른 척하고, 오로지 먼저 선을 밟아 주기만을 기다린다. 재민 형은 겁쟁이구나. 재민 만큼이나 겁쟁이인 지성은 솔직히, 굳이 그걸 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 밤 고민에 앓던 마음은 신기하리만치 편안하고 생각을 멈추어 허전한 머릿속도 이제는 다른 주제들로 꽉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싫어요. 안 할래요. 필요하지 않아요. 이러면 그만이구나. 형과 나는.
시간이 자꾸만 흐른다.
가여운 내 애기. 왜 더 서럽게 굴지 않아?
치졸한 재민의 시간은 꾸물대는 더딘 폭포처럼 흐른다.
지성의 시간은 쏜살같이 빨라서 세기 힘들다.
만약 내가 이랬다면. 하는 아쉬운 선택지는 이제 염두에 두지 않는다.
말랑한 입술을 빨던 감촉만 되짚어 더듬었다.
그러니까 지성은, 포기로 뒤덮인 평화로운 세계에서 어떠한 위기감도 없이 지냈다.
그래서 지금 앞에 선 재민이 무척 당황스럽다.
날씨는 아직도 풀리기엔 한참이나 멀었다. 길 한복판엔 염화칼슘이 빠작빠작 밟히고 골목 여기저기 질퍽한 회색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제노 형이 저런 눈 진짜 싫댔는데. 지성은 소리나는 길을 빠자작. 골라 밟으며 양 손을 주머니에 넣고 웅크려 걸었다.
그런데 집 앞에 형이 서 있었다. 복슬복슬 까만 앞머리가 표면이 젖어들어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다. 겨울에 쌓인 푸른 눈에 대비되는 따뜻한 빛 한 줄기가 얼굴을 타고 지나간다. 그리고 빛을 받아 반짝이는 젖은 속눈썹. 무겁게 물이 맺혀 가라앉은 그 기다란 속눈썹. 재민은 지성을 똑바로 마주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있었다. 형은 정말 예쁘다. 그래서 늘 곁을 맴돌았나 봐. 재민의 눈엔 여전히 끝을 모르는 깊이가 있다. 지성은 이끌리듯 그 앞에 다가가 선다.
가여운, 건, 나야. 지성아. 형을 좀 가여워해 줘.
헐떡이며 말하는 형은 커다란 패딩을 입고 있다. 코트를 입은 지성은 여리고 부피가 큰 몸에 푹 파묻혔다. 재민은 지성을 놓칠까 봐 힘주어 끌어안고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알아요, 좋아해요, 지성은 기력을 다 소진한 채 통곡하는 자신의 사랑 앞에 있다. 가여운 두 사람은 사랑을 발명하지 않곤 견딜 수가 없다. 온통 젖은 얼굴에 입술을 맞대면 짠 맛이 났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