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들려
고사리
지성은 평소처럼 평상 위에 앉아 양손을 뒤로하고는 상체를 지탱한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로 된 평상 위에는 노란 장판이 깔려 있고 장판의 가장자리에는 못이 몇 개 박혀 있었다. 못을 만진 손에서는 쇠 냄새가 풍기지만, 일부러 만지지 않고서는 우연히 몇 번 스칠 뿐이었다. 지성은 하필 오늘 손에 우연히 스친 못 냄새는 뒤로하고 매일같이 귓가를 때리는 바닷소리에 집중했다. 매일 들어도 매일 다른 소리는 지성이 바다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비가 오면, 커다랗고 두툼한 바다에 작은 빗방울들이 제 운명도 모른 채로 떨어지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귀를 기울여야 잔잔한 파도의 일렁임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은 적당히 바람이 불고, 햇볕이 강렬한 날이었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파도의 움직임이 귀를 타고 들어왔다. 지성은 파도가 방파제를 때릴 때마다 귓가에 푸르고도 하얀 파도가 밀려 들어오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걸린 색색의 빨래들이 바람의 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더운 바람이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지만, 그래도 잘 마르겠네. 햇볕이 쨍쨍해서. 염전 아저씨 일 나가시려나. 지성은 괜한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지성은 외진 바닷가 마을의 보기 드문 이십 대였다. 그것도 이십 대 초반. 지성은 어릴 적부터 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부모님은 지성이 아주 어릴 때. 겨우 문장을 구사하기 시작했을 때쯤, 사업을 위해 불가피하게 해외로 거취를 옮겼다. 자리를 잡고 지성을 데려오려 했으나, 지성이 한사코 거절했다. 난 할머니가 좋고, 이 바다가 좋아. 바닷가 마을에서 자라면서도 비린내에 약해 해산물은 잘 먹지도 못했으나, 지성은 이 마을이 좋았다. 그곳에 지성의 어린 시절이 전부 녹아있었다. 지성이 잠이 오지 않아 칭얼대면, 지성을 업고 바닷소리를 반주 삼아 섬 집 아기를 불러주시던 할머니도, 바다 바퀴를 무서워하는 지성을 놀리던 염전 아저씨도, 지성이 버스를 탈 때마다 알아보고 웃으며 인사해주시던 버스 기사 아저씨도, 가끔은 먹을 것들 해서 지성에게 가져다주시던 뒷집 할머니도 다 지성을 이루는 요소들이었다. 지성은 늘 생각했다. 자신이 바다라면, 마을과 마을 사람들은 소금이라고. 바다에 소금이 없으면 바다가 아니듯이, 이 마을과 이 사람들이 없으면 난 바다가 아닐 거라고.
왕복 한 시간 반 거리의 학교에 다니던 지성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마을을 사랑하지만, 이 마을은 너무 작다고. 평생을 이곳에서만 살 수는 없다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꽤 열심히 공부했다. 야자랄 것도 없는 학교라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부모님에게 메일을 보내 받은 용돈으로 노트북을 사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지성을 응원했다. ‘드디어 촌마을에서 슨상님 하나 나는 거여?’ 자신을 마주칠 때마다 흐뭇한 눈으로 물어오는 어른들에 지성은 애써 웃으며 '아니에요.'라고 대답했다. 전 이 마을과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두고 떠나야 할 텐데요. 다음 말은 차마 뱉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하루는 무작정 베개를 들고 할머니의 방을 찾아가 할머니 옆에 몸을 누인 채 말했다. '할머니는 내가 서울에 가도 괜찮아?' 그러자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지성의 얼굴을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모, 젊은 사람은 큰물에 가서 놀아야제. 성아, 우리 똥강아지. 우리 아가는 더 큰물에 몸 한 번 담가봤으면 좋겠다.' 지성은 뺨으로 할머니의 얇은 피부와 그 아래의 푸른 핏줄이 느껴질 때마다 울컥하는 눈가를 다스려야 했다.
결국, 지성은 서울에서도 꽤 이름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물론 다닌 지 일 년 만에 휴학을 신청하고는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지성은 호의를 의심으로 받아들이고, 배신으로 되돌리는 몇몇 도시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지성은 소박하지만, 정으로 충만한 세상을 겪어왔으나, 도심의 실상은 전혀 달랐다. '각박하다'라는 말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우정을, 배려를 값으로 환산하는 계산법이 있는 줄도 몰랐다. 문제는 지성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계산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는 현실이었다.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나, 지성은 이리저리 부딪히다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패배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내는 승천하지 못하는 이무기나, 강물을 거스르지 못한 채 도태되는 연어가 바로 자신이 아닐까 생각하며 매일 밤 자책했다. 그래도 불행한 승리자보다는 행복한 패배자가 낫다고도 생각했다. 적어도 고향에서는 지칠 때 바닷소리를 들을 수라도 있으니까. 그즈음 지성은 할머니의 민박집 일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오너고 나는 호텔리어야.
-오너? 호텔리어? 그게 뭐고.
-그런 게 있어. 사장이랑 직원 같은 거야.
무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를, 지성은 말갛게 웃으며 바라봤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지금 난 행복해. 자신에게 되뇌면서.
지금쯤 대학은 여름방학 시즌이었다. 7월 초니 계절학기를 듣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방학을 즐기고 있을 시점이었다. 누군가는 취직이니 뭐니 바쁘겠지만, 무엇이 되었건 대학생의 생활은 지성과 적어도 당장은 별 접점이 없었다. 지성의 할머니는 간만에 전화로 민박집 예약을 받았다. 지성은 가끔 낚시한다며 오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민박에 손님이 없는 터라 이번에도 낚시하러 오시나, 해서 1박 2일이냐 2박 3일이냐 여쭸더니 무려 이 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뭐하러 이 주를 계신대? 낚시로 뭘 낚으시려고? 노인과 바다 뭐 그런 거야? 할머니는 동그래진 지성의 눈이 귀여웠는지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이 주를 있겠다 하던데? 사진 찍으러 온단다. 뭘 찍는 진 내도 모른다. 뭐 또 한 서너 일 있다 가겠지.' 지성이 의문을 품은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진작가인가. 이 작은 동네에 찍을 게 뭐가 있다고 온다는 거지. 물을 사람은 없고, 답할 사람은 더더욱 없어 지성은 의문을 삼켜버렸다. 오면, 답이 나오겠지.
다음 날, 지성은 홀로 민박집을 지키고 있었다. 지성은 그저 매일 그러듯 평상 위에 앉아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볕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지평선이 일순 흐릿해졌다.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시원한 축에 속했다. 아, 오늘은 좀 덜 덥네. 바람도 좀 시원하고. 파도 소리가 철썩철썩 경쾌했다. 지성은 파도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고래가 되는 상상을 하며 평상 위에 몸을 누이고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 알면, 스물한 살이 아직도 그런 망상을 하냐며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지성은 자신만 이렇게 상상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 강하게 믿고 있었다. 판타지에 환호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지성도 모르는 사이 지성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예쁘게 말려 올라간 지성의 입과 그 밑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점이 태양에 반사되어 빛나는 듯했다.
-저기요.
갑자기 가까이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지성이 눈을 번쩍 떴다. 지성의 시야에 웬 젊은 남성의 얼굴이 들어찼다. 태양을 완전히 가려 그늘진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에 지성은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악! 누구세요?
-민박집 예약한 사람인데요.
-아.
그새 깜빡했다. 오늘 손님 온다 그랬지. 막상 찾아온 손님은 지성이 짐작했던 모습과는 아주 달랐다. 지성이 머릿속에 그렸던 손님은 삼각대와 각종 사진 장비를 가득 채운 가방을 든 중년의 남성이었다. 주황 등산복을 입고 수염도 좀 난. 삼각대를 설치해서 일출과 일몰을 찍고, 가끔가다 날아다니는 새도 찍는, 말하자면 포근한 인상의 아저씨랄까. 그런데 눈앞의 손님은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듯한 하얀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검은 카메라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하나 메고 캐리어를 끈, 아주 젊은 남성이었다. 많게 봐도 지성보다 겨우 서너 살쯤 많을까. 게다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해야만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외모가 아주 수려했다. 큰 눈에, 무엇보다 미소가 예뻤다. 매끄럽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시선을 집중시켰다. 여러모로 당황스러운 손님에 지성은 '아'소리를 내며 평상에서 황급히 일어나 놓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사장님이세요?
-아, 아뇨. 전 손자예요.
-아, 손자분이시구나. 전 나재민이에요.
자신을 '나재민'이라고 소개한 손님은 이내 악수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보통 손님과 민박집 직원이 통성명을 하나. 지금껏 이런 적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웃으며 악수하자는 사람의 손을 내칠 이유는 또 없는지라 지성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전 박지성이에요.
-몇 살이에요? 전 스물둘인데.
-전 스물하나예요.
-저보다 동생이네요. 편하게 재민이 형이라고 불러요.
-아, 넵.
-짐은 어디에 풀면 될까요?
-아, 저한테 주세요!
지성이 짐을 달라며 어설프게 손을 뻗자 재민은 괜찮다며 웃으며 손을 저었다. 지성은 재민을 자신이 사는 방 바로 옆 방으로 안내하며 재민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대학생인가. 원래 저렇게 웃음이 많나. 인기 많겠네. 몇몇 의문과 감탄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으나 초면에 말하기에는 서로 거북한 것이라 대신 민박에 관한 몇 마디 설명을 건넸다.
-여기서 생활하시면 되고, 화장실은 바로 옆방이에요. 그, 불편한 거 있으시면 바로 옆 방이 제 방이니까 찾아와서 말씀해주시면 돼요. 아마도 쭉 집에 있을 테지만? 제가 방에 없으면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하시면 돼요. 음, 밥은 저희랑 드셔도 되고, 외식하셔도 되는데 외식하기 마땅한 곳이 별로 없어요. 중국집 하나랑 고깃집 하나, 그리고 횟집 한 두어 개가 전부라서.
-지성 씨랑 먹을게요.
-아, 네. 저랑 할머니랑 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만약 외식하시면 따로 말씀해주세요.
-넹.
-그럼 편히 쉬세요.
지성은 재민을 향해 대충 고개를 끄덕인 후 재민이 묵을 방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이 말하는 모습을 뚫어질 듯 쳐다보는 재민에 중간에 말실수를 몇 번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지성 씨랑 먹을게요'라는 말이 돌연 귀에 맴돌았다. 지성은 괜히 놀라 굳이 할머니 이야기를 덧붙이며 셋이라고 정정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왜 그랬지? 그분도 나랑 단둘이 드실 생각은 아니셨을 텐데. 재민이 형이라고 했던가, 그분은 왜 '넹'이라고 대답하셨을까. '네'도 아니고, '넵'도 아니고. 지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민의 행동과 말 한마디 한마디를 다시 곱씹었다. 지성의 마음에 파도를 일렁일 작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성의 할머니는 다섯 시를 조금 넘겨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할미 왔다'하는 목소리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문을 연 지성은 자신보다도 먼저 마중을 나간 재민을 발견했다. 아까 봤던 싱글 생글 웃는 얼굴로, '할머니, 저 여기 잠깐 머물다 가려고 왔어요'라고 인사하는 재민이 이제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할머니'보다는 '할무닝'에 가깝게 들리긴 했다. '할머니, 저는 재민이에요. 나재민. 지성 씨보다 한 살 많아요.' 마치 지성의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애교를 피우며 자신을 소개하는 재민을 흐뭇하게 보던 지성의 할머니는 '응, 응. 더운데 들어가 있어.'라며 대답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을 먹을 땐 더했다. 지성은 비려서 잘 먹지도 못하는 다시마 쌈을 게 눈 감추는 해치우는 것은 물론, 쌈을 싸 할머니의 입에 넣어주는 재민의 모습을 보고는 지성은 자신이 손님이고, 재민이 손자인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했다. 다른 의미의 주객전도였다.
살가운 재민 덕인지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여름이라 일곱 시 지나도록 지지 않는 해에, 더위는 낮보다 사그라들었으나 하늘은 아직 푸르렀다. 저녁을 먹고 이를 닦자, 할머니가 자신의 방에서 지성을 불렀다.
-강생아, 저그 형아 동네 구경 좀 시켜줘라.
-우리 동네 볼 것도 없는데?
-암만 그래도 이 주를 있을 거라는데 동네 좀 알아두면 안 좋나?
지성은 굳이 이 작은 동네에 머물며 탐색이랄 게 필요할까 싶었지만, 얼른 재민을 데리고 산책이라도 다녀오라며 지성의 등을 두드리며 재촉하는 할머니에 쭈뼛쭈뼛 재민의 방문 앞에 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네'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문이 벌컥 열리고 재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지성 씨네요.
-네. 그, 혹시 동네 구경이라도 하실래요?
-지성 씨도 같이 가 줄 거예요?
-네? 네, 뭐. 아무래도 길을 모르시...
-갈래요. 잠시만요, 저 카메라 좀 챙기고요.
-근데 진짜 별 것 없는데.
-전 처음 와 보니까요. 저한텐 다 새로워요. 걱정 마요.
재민은 지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간다는 확답을 전했다. 별거 없다는 지성의 말에도 재민은 어느새 주섬주섬 카메라 가방을 챙기더니 지퍼를 닫고 있었다. 되게 가고 싶었나 보네. 더 말리는 것도 소용이 없을 듯해 지성은 그저 딱 닫힌 지퍼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겐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이란 재민의 말은 진심이었는지, 재민은 산책 중 카메라 셔터를 꽤 여러 번 눌렀다. 마침 해가 지고 있던 터라 바다 너머로 보이는 석양을 가장 먼저 카메라에 담았다. 지성도 재민이 사진을 찍는 덕에 잠시 멈춰 석양을 바라보았다. 큰 원에서 퍼져 나가는 주황빛과 그 아래의 바다. 지성은 주황색과 바다색이 보색인 것은 참 기묘하다 여겼다. 어쩜 정반대의 색이 자연에서 맞닿아 있을까. 지성은 그사이의 촘촘한 색의 변화를 좋아했다. 매일 보는 석양이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석양을 보고 있노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누군가에게 석양 같은 존재였으면. 매일 보아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런 사람이었으면 바라기도 했다. 재민은 길가에 난 하얀 들꽃, 그 옆을 지나다니던 순칠이-사람 손을 탄 치즈냥이다.-, 그리고 붉은 바다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이토록 동네를 구석구석 뜯어보는 것은 지성도 오랜만이라 자신도 모르게 이 산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성은 몰랐겠지만, 재민은 사진을 찍는 척하며 그 둥그런 뒤통수를 쳐다보고 미소짓기도 했다. 나보다 훨씬 신나 보이는데.
그렇게 첫날의 산책 겸 동네 구경은 둘 다 동네 구경에 집중해서인지 별다른 대화 없이 끝났다. 잘 자라는 작별인사를 간단히 건네고 방에 들어와 지성은 간만에 '여름밤에 듣는 노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이유는 몰랐다. 손님을 맞이해서 그런 걸까, 이제야 여름이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성이 낮에 시내에 나가 친구를 잠시 만나고, 필요한 물건을 사 오는 동안 재민은 별일 없이 민박집에서 문을 열어놓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빈둥거렸다. 아, 날씨 좋네. 오길 잘했네. 재민은 귓가에 스며드는 바닷소리에, 지난 저녁 석양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커다랗고 작은 소년을 떠올렸다. 덥지도 않은지 챙겨입었던 붉은 체크무늬 아우터가 아른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길 잘했네. 재민의 얼굴에 또다시 은은한 미소가 피었다. 지성은 저녁 시간쯤 돌아와 전날과 다름없이 할머니, 그리고 재민과 함께 식사했다. 저녁은 갈치조림이었다. 가리는 음식이 딱히 없는지 재민은 갈치조림도 뚝딱뚝딱 맛있게 해치웠다. 곰살맞은 말투로 할머니에게 애교를 피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성도 갈치조림은 좋아하는지라 야무지게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식사를 끝내고 대충 정리한 뒤 지성이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재민은 '어어'소리를 내며 지성의 팔 한쪽을 붙잡았다.
-오늘도 산책하러 같이 가면 안 돼요?
-네?
-길 잃을까 봐 무서워서요.
지성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재민의 얼굴에는 오히려 즐거움이 가득했다. 입 동굴이 깊게 파여 재민의 해사한 얼굴이 두드러졌다. 길 잃을까 무서운 사람치고는 너무 해맑으신데. 굳이 필요한 말은 아닌 것 같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건 마을에 온 지 이제 겨우 이틀째인 건 사실이니까. 마을에 또래가 없는 지성은 아닌 척해도 재민의 제안이 썩 반가웠다. 지성은 못 이기는 척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 일도 없는데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지성은 자신도 모르게 재민을 따라나서는 자신을 합리화했다. 재민은 오늘도 사진을 찍겠다며 카메라를 챙기러 방으로 향했다. 잠시 기다려 달라는 재민의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지성은 신발 앞코를 회색빛 바닥에 툭툭 치며 재민을 기다렸다. 오늘은 무슨 사진을 찍으시려나. 어제 본 게 우리 마을의 전부일 텐데. 잠시 후 재민은 전날처럼 검은 카메라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는, 바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지성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작게 두어 번 툭툭 쳤다.
-지성 씨, 가요.
지성은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재민의 입가에 띄워진 호선이 파도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래 사이 깊숙이 스며드는 파도. 재민은 천천히 걸으며 카메라에 동네를 담았지만, 전날보다는 현저히 그 빈도가 줄었다. 대신 지성과 대화를 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지 지성에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지성 씨는 언제부터 여기 살았어요?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한 두세 살쯤이요. 부모님이 일 때문에 저를 할머니께 맡기셨어요.
-주변에 학교가 없던데.
-시내 쪽에 나가야 있어요. 왕복 한 시간 반쯤?
-고생했겠네요.
-아침엔 좀 힘들긴 했는데, 적응되니 나름 괜찮았어요.
재민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카메라를 손에 잡았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바다가 해를 삼키고 있었다. 재민은 전날처럼 석양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찍힌 사진을 확인하던 재민이 고개를 들더니 지성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지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주 작게 한 발짝 다가섰다. 지성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가득 찼다.
-더 가까이 와요. 사진 확인 안 해볼래요?
-아.
지성은 그제야 재민의 의도를 깨닫고 재민의 옆에 바싹 붙었다. 지성의 바보 같은 감탄사에 재민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었다. 반소매를 입은 둘의 살갗이 맞닿았다. 지성은 비벼지는 팔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재민에, 괜히 부끄러워져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와, 예쁘다. 재민은 신기한 듯 카메라에 시선을 떼지 않는 지성을 힐끗 쳐다보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좀 잘 찍은 것 같아요?
-네, 완전요. 사진 되게 잘 찍으시네요. 혹시 사진과세요?
-아니요, 유아교육과요.
-헐, 되게 잘 어울려요.
-진짜요?
-네. 어제부터 되게 음, 미소가 예쁘다? 웃음이 많으신 것 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아기들이 되게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런가. 고마워요. 지성 씨는 대학 다니고 있어요?
-아, 저 휴학생이에요.
-그래요? 무슨 과예요?
-음, 경영이요. 안 어울리죠?
-왜요, 괜찮은데?
재민이 다시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 바람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지성은 쪼그려 앉아 카메라로 아스팔트 사이의 들꽃을 담아내는 재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흰 들꽃 위에 석양이 번져 옅은 주황빛을 띠고 있었다. 형은 작은 키가 아닌데, 저 작은 것을 바라보려 몸을 수그릴 줄 아는 사람이구나. 거리에 가득한 함빡 피어난 꽃은 찍지 않고, 아스팔트 사이나 돌 틈에서 억세게 자라난 꽃들을 카메라에 담는 이유가 뭘까. 지성은 물어보고 싶다가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난 돌 틈 사이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사람이니까. 억세지 못해서, 사람이 물러서 남들은 다 멀쩡히 살아가는 그곳에서 등을 돌린 채 도망쳐 온 사람이니까. 혹시나 재민이 그런 자신을 밉게 볼까 봐, 지성은 애초에 묻지 않았다. 재민이 왜 들꽃을 담는지.
한동안은 말없이 그냥 걸었다. 재민도, 지성도 그저 걸었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대충 정리하기도 하고,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기도 하고, 혀를 내어 마르는 입술을 축이기도 했지만, 말을 섞지는 않았다. 재민은 사색을 즐기는지, 고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미간에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긴 지성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공기 위로 쌓이는 정적이 버거웠는지 동네 고양이 순칠이가 지성을 보고는 냐앙-소리를 내며 다가와 배를 까 보였다. 지성은 순식간에 얼굴 가득 미소를 피운 채로 순칠이의 배를 비벼대며 쓰다듬었다.
-우리 순칠이, 형아 보러 왔어?
-고양이 이름이 순칠이에요?
-아, 네. 귀엽죠.
-왜 순칠이에요?
-어쩔 땐 순하고, 어쩔 땐 까칠해서요.
재민은 순칠이 이름의 뜻을 설명하며 쪼그려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는 지성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되게 크네. 손가락이 가지런하고 길게 뻗었네. 손이 참 예쁘다. 저 길쭉한 가락들 사이에 내 손이 얽혀 들어간다면. 무의식적으로 멀리 닿는 생각에 스스로 놀란 재민은 괜히 자신도 지성의 옆에 쪼그려 앉아 순칠이를 바라보았다. 순칠아, 형이 지성이 형이랑 잘 되고 싶으면, 욕심인 걸까? 재민이 마음속으로 읊은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순칠이는 냐앙-소리를 내며 재민의 다리에 몸을 비벼 왔다. 재민은 손을 뻗어 순칠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순칠이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둘은 민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새, 해는 사라지고 어둑한 하늘이 드리웠다. 남빛 하늘에 구름이 번진 듯 경계가 흐렸다. 곧 있으면 하늘이 완전히 검어질 것이 분명했다. 완전한 어둠은 산책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재민은 산책이 끝나는 것이 아무래도 아쉬웠다. 이젠 길을 잃겠다는 핑계로 지성을 산책에 끌어들이는 것도 무리일 듯싶었다. 재민이 봐도 작은 동네이긴 했으니까. 이젠 어떻게 이 사람을 꾀어내야 할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럴듯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고민하는 동안 두 사람의 발걸음이 그새 민박집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지성이 먼저 대문의 문턱을 넘고, 재민이 뒤따라 넘었다. 넓지 않은 마당에 오롯이 둘만 서 있었다. 지성이 인사를 하려 재민이 서 있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쉬세요.
-내일도 같이 가 줄래요?
-네?
-그다음 날도, 같이 걸어줄래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핑계는 없었다. 그냥 너와 찰나라도 더 공유하고 싶다고. 이 주든 한 달이든, 1년이든 함께 이 작은 동네를 거닐고 싶다고. 쏟아지는 진심을 애써 거르고 걸러 나온 말이 '내일도, 그다음 날도 같이 가 달라'는 것이었다. 쉬라는 말에는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말을 뱉어버렸다. 지성은 재민의 손을 보지 못했지만, 재민의 손은 한시도 가만있지를 못했다.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제발, 제발. 재민은 그저 지성이 고개를 끄덕여 달라고 빌었다.
지성은 재민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왜 나와 함께 산책하고 싶어 하는 걸까. 그저 산책을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산책을 함께 할 내가 필요한 걸까. 고작 만난 지 이틀째인 이 사람을 두고 난 왜 이렇게 복잡한 생각만 떠오르는 걸까. 머릿속에서 이것저것이 잔뜩 엉켜버렸다. 이럴 때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하지? 고작 함께 걷자는 재민의 말에 지성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였다. 순간 지성의 머릿속에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면, 일단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그래, 머릿속에 얽힌 것들의 뒤로 한 가지 명백한 건, 내가 이 사람과 아무런 사이가 아닌 게 싫다는 거겠지. 어떤 사이가 되고 싶은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
-네. 좋아요. 내일도, 모레도 같이 가요.
지성은 침을 크게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대답했다. 재민은 무언가 결심한 듯 목소리가 커진 지성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아, 너무 귀엽다. 지성은 미소짓는 재민에게 다시 한번 쉬라는 말을 남기고는 발을 바삐 해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홀로 마당에 남겨진 재민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고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틀어막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새 푸른빛을 지우고는 검은빛으로 둔갑했다. 그래도 재민은 아쉽지 않았다. 내일도 함께할 거니까. 지성은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한쪽 벽에 몸을 기대고는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쿵,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온몸을 울렸다. 손을 타고 전해진 진동이 팔을 타고 올라가 머리를 흔드는 기분이었다. 나, 어쩌면 벌써 재민이 형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지성은 훌쩍 다가온 첫사랑을 어찌할 줄 몰랐다.
지성과 재민은 약속한 것처럼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함께 산책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약속했던 이틀이 지나고도 둘은 여전히 저녁을 먹고 난 뒤면 자연스레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책은 이제 명목만 남아있었다. 둘의 시야에는 서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며칠간 산책하며 나눈 대화에서 지성과 재민은 서로를 하나둘씩 알아가고 있었다.
재민이 형은 유아교육과구나. 아메리카노를 좋아하고, 사진 찍는 건 오랜 취미구나. 카메라에는 사랑하는 것만 담는구나. 그럼 재민이 형은 자연을 사랑하는구나. 낮의 하늘, 석양, 바다, 고양이, 들꽃. 형의 카메라에 사람이 담긴 적도 있었을까. 재민이 형이 사랑하는 사람이 담긴 적도 있었을까. 지성은 궁금했다. 그의 사랑이. 어떤 사랑을 했을까,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을까.
지성이는 경영학과구나. 커피는 못 마시고, 취미는 노래 듣는 걸 좋아하는구나. 매정하고 차가운 도시에 지쳐 이곳에 머무르는구나. 지성이는 이곳을 사랑하는구나. 낮의 하늘, 석양, 바다, 고양이, 들꽃. 지성이가 나를 무정하다 여기면 어떡하지. 도시에서 온 내가, 그곳의 생리에 빠삭한 내가 낯설다 느끼면 어떡하지. 재민은 무서웠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 아이가 날 떠나지 않을 수 있을까. 금방 떠날 이는 자신이었음에도.
하루는 석양을 뒤로하고 재민과 발을 맞춰 걷던 지성이 입안에서만 맴도는 말을 꾸역꾸역 삼켜내고 있었다. 형은 여자친구가 있어요? 없어요? 없었으면 좋겠어요. 날 좋아하면 좋겠어요. 지성은 재민의 연애사에 신경이 쏠려 재민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물어보자고. 지성은 그에게 연인이 있고, 그가 뷰파인더에 담고 싶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라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는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형, 형은 여자친구 있어요?
재민의 눈이 잠깐 커지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가 둥실 떠올랐다.
-궁금해?
-아, 네. 근데 그게…. 별 뜻은 없고요, 그냥 있는지 궁금해서.
재민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능글거리다 못해 장난기가 뚝뚝 흘러넘치는 재민의 시선에 지성은 큰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사심이 없음을 표했다. 거짓말, 누구보다 사심으로 가득하면서. 지성은 모순적인 자신이 조금 미워지려 했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재민이 이미 그 사심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여자친구 없어. 나 남자 좋아해. 남자친구도 지금은 없고.
-아, 네.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지성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또 심장이 제멋대로 박자를 잃고 빠르게 뛰었다.
-근데, 아쉽다.
-네?
-별 뜻 없어서.
씨익 웃으며 아쉽다고 말하는 재민에 지성은 입을 꾹 닫아버렸다. 지금 입을 열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심장이 튀어 나가면 어떡해? 어쩌면 좋아한다고 소리를 질러버릴지도. 지성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석양과 비슷한 색으로 물든 지성의 귀는 산책이 끝날 때까지 하얘지지 않았다. 재민은 문득 벅차올랐다. 이 아이도 내게 호감 이상의 감정이 있구나. 어쩌면, 이 주로 끝이 아닐 수 있구나. 네가 날 바다만큼 사랑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겠구나. 지성도, 재민도 넘실대는 바다처럼 울렁대며 다가오는 감정이 버거웠고, 또 반가웠다.
-널 찍고 싶어.
-저를요?
-응, 너.
지성과 발을 맞추어 걷던 재민은 문득 카메라에 지성을 담아보고 싶었다. 네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너도 알아야 해. 지성이 혹시나 부담을 품을까,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재민은 지성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담아내어 지성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난 널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지성은 자신을 찍어보고 싶다는 재민을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재민은 적당한 배경을 찾아 지성을 세운 뒤, 지성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지성은 카메라와 재민의 몸이 자신을 향해 있는 상황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울어도 좋고, 웃어도 좋고, 뒷모습도 좋아. 앉아도 상관없고.
재민은 감을 잡지 못한 채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는 지성을 향해 한 문장을 던졌다.
-날 생각하면 어때, 지성아?
지성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재민이 형을 생각하면 어떻지. 내 마음이,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더라. 잠시 뒤, 지성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시원해요. 바람이 부는 기분이에요. 코로, 입으로 귀로 바람이 마구 들어와서 심장으로 가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심장이 풍선처럼 커지고, 커져서 어쩌면 나보다도 더 커질 것 같은 느낌이에요.
-지성아, 그대로 날 봐.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지성의 귓가를 메웠다.
-좋다, 지성아. 네가 바다보다 훨씬 예뻐. 한번 볼래?
지성은 재민이 보여주는 카메라 화면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숨이 턱 막혔다. 내가 형을 바라볼 때 이런 표정이구나. 애정에 가득 잠식당한 얼굴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의 넌 이런 얼굴이란다. 재민이 알려주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확신이 성큼 다가왔다. 아, 난 재민이 형을 좋아하는구나. 날 볼 때, 재민이 형의 표정은 어떻지? 지성은 문득 고개를 돌려 재민을 바라보았다. 재민은 화면 속의 자신과 별다를 것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지성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형도 날 좋아하는 걸까요? 아직 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은 재민 몰래 어떠한 비애도 모르는 사람처럼 환하게 미소지었다.
미묘한 기분을 가득 안고 돌아와 잠자리에 누운 지성은 눈을 감고 양을 세어도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며칠 전에 들었던 재민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난 내가 좋아하는 것만 카메라에 담아. 하늘, 바다, 산, 다람쥐, 나무, 도심, 엄마, 아빠, 그리고 어쩌면 공백까지도.
그렇게 말했던 재민이 카메라에 자신을 담았다. 카메라에 담긴 자신은, 여태껏 본 자신의 모습 중 가장 낯설고도 행복해 보였다. 생기있게 달아오른 얼굴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그런 자신을 닮았던 재민. 형도 날 좋아하는 걸까요? 아니, 형도 날 좋아하는 거겠죠? 지성은 애써 다시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귀를 기울이면 밤바다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가 귀를 울렸다. 형도 이 소리를 듣고 있나요. 지성은 재민의 생각으로 가득한 밤을 지새우다 새벽이 오고서야 바닷소리를 자장가 삼아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내일은 형에게 바닷소리를 들려줘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음 날은 늘 가던 길에서 벗어나 해변이라고 이름 짓기에도 민망한 작은 해변에 닿았다. 재민에게 바닷소리를 들려주겠다던 지난 밤의 다짐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바닷가에 고작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간질었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파도가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지성과 재민은 손에 샌들을 들고 모래사장 위에 맨 발자국을 하나둘 만들어내며 해변을 걸었다. 지성이가 오늘 신나 보이던 이유가 이거였나. 바다 보여주려고.
-바닷소리 좋죠?
아, 바다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들려주려는 거였나. 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에 오면 물에 발을 적시며 놀거나, 바라보기만 했지 파도 소리를 집중해 들은 건 처음이었다. 바닷소리, 좋네. 지성아, 넌 늘 새로워. 그리고 내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줘. 재민은 지성에게 닿지 않을 칭찬을 쏟아부었다. 지성은 재민과 발을 맞춰 걷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발걸음을 서둘러 재민을 앞서더니,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주웠다. 속이 빈 소라였다. 지성은 손으로 대충 모래를 툭툭 털고는 소라를 든 손을 물속에 집어넣고 흔들며 소라에 묻은 모래를 헹궜다. 이윽고 소라에 묻은 물을 털어 내고 바지춤에 쓱쓱 닦더니 재민에게 한 발짝씩 가까워졌다.
-형, 소라껍데기를 귀에 가져다 대면 바닷소리 들리는 거 알아요?
-아니? 바닷소리가 들려?
모를 리가. 누구나 알고 있을 상식이었으나, 재민은 그저 모른다고 답했다. 지성이 들려주는 바닷소리가 듣고 싶어서. 모른다고 하지 뭐. 좀 바보 같아 보이면 어때. 다행히 지성은 재민이 모른다는 사실에 더 기분이 들뜬 듯했다. 소라껍데기에서 바닷소리가 들리냐는 재민의 물음에 지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라를 잡고 있던 손을 올려 재민의 귀에 가져다 댔다. 반대쪽 손은 재민의 어깨에 올린 채로. 재민의 귓가에 까슬 거리는 소라의 감촉이 느껴졌다. 재민은 예상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온 지성에 남모르게 긴장한 채로 몸이 굳었다.
-형, 바닷소리 들려요?
-음, 아니, 안 들려.
바닷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재민의 말에 지성은 꽤 당황한 듯했다. 어, 그럴 리가 없는데. 데구루루 굴러다니는 지성의 눈동자를 보고, 재민은 자신의 귀 옆에 소라를 대고 있는 지성의 손을 겹쳐 잡았다. 며칠 전 재민의 상상처럼 지성의 손가락 사이 사이에 재민의 손가락이 조금씩 얽혀 들어갔다. 재민은 겹쳐 잡은 두 손을 옮겨 지성의 귓가에 대고, 다른 손을 지성의 등 뒤에 올려 지성의 몸을 살포시 끌어당겼다. 두 몸이 겹쳐져 안은 꼴이 되었다. 스르륵 당겨지는 지성의 몸은 잔뜩 얼어 있었다.
-내 심장 소리가 더 커서 네 말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안 들려.
지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재민도 다를 것은 없었다. 지성은 늘 형 같아 보이던 그가, 지금은 그저 자신과 같이 사랑을 처음 맛본 소년처럼 보였다. 지성의 등 뒤에 닿아있는 재민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지성은 꼿꼿이 세운 허리 뒤쪽으로 그 떨림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지성의 귓가에도 소라의 까슬한 감촉이 느껴졌으나, 심장 소리 때문인지 바닷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쿵, 쿵, 쿵, 쿵 다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이 울렸다.
-지성이 넌, 바닷소리가 들려?
이렇게 묻는데, 어떻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어요.
-...안 들려요.
지성과 재민의 귓가에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울릴 뿐이었다. 어느새 소라는 모래사장 사이에 파묻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지성과 재민은 서로를 끌어안고 심장박동을 느끼고 있었다. 심장에서 심장으로, 귀로, 손으로, 다시 심장으로. 포개어진 두 인영 사이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밤의 시작인가 봐요, 우리의 시작인가 봐요. 지성은 떨리는 숨을 머금은 채로 재민의 한쪽 어깨로 고개를 파묻었다. 재민의 한쪽 어깨에 지성의 떨리는 호흡이 담겼다.
-좋아해요. 제가, 많이 좋아해요.
-나도 많이 좋아해.
재민이 오른손을 올려 지성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순간만 영원했으면 좋겠어. 지성아, 나는 너만 사랑하고 싶어.
민박으로 돌아가는 길, 지성과 재민의 손은 퍼즐 조각처럼 빈틈없이 맞추어져 서로를 부여잡고 있었다. 땀이 배어 나와도 손가락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지성은 욱신거리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고는 재민의 손가락 사이를 더욱 파고들었다. 곧 재민이 말했던 이 주가 끝나가고 있었다.
하루하루 깊어져 가는 관계와 끝이 보이는 이주에 지성은 양발을 온탕과 냉탕에 집어넣고 물장구는 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에서 발을 빼 버릴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다짜고짜 재민을 따라 서울로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여름 밤의 꿈으로 치부하기에는 재민을 너무 좋아해서, 평생을 후회할까 봐 차마 관계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롱디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지성은 지성이 두고 온 도시를 떠올렸다. 차갑고, 복잡하고, 피곤한 잿빛 도시. 자동차 경적과 사람들의 불만으로 가득한 그곳의 한복판에 서면, 지성은 늘 바닷소리가 간절해졌다. 내게 위로이자 칭찬이었던 그 소리도 없이 형은 어쩜 그리도 강인하게 살아남은 걸까. 아니, 내가 너무 연약한 것은 아니었을까. 또다시 자책이었다. 툭, 투둑, 투두둑, 그리고 쏴아아- 지성의 기분과도 같은 빗소리가 바닷소리와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나 물난리가 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원래라면 저녁을 먹기 전 낮 동안은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구경했어야 할 재민도, 땅을 두들기는 비의 기세에 짜두었던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지성의 할머니는 딸, 그러니까 지성의 고모가 늦둥이를 해산하게 되어 며칠간 민박을 비웠다. 지성과 재민만 존재하는 작은 집 위로 푸른 하늘과 붉은 하늘이 자취를 감추고, 잿빛과 칠흑 같은 어둠만이 하늘을 물들였다. 지성과 재민은 마루에 기대어 앉아 비를 구경했다. 하늘이 마를 새가 없네. 하늘 천장에 구멍이라도 났나. 지성이 마루 바깥으로 길게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쏟아지는 비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재민은 그런 지성을 한참 바라만 보더니 이내 빗물로 흥건한 지성의 팔목을 잡고 약하게 당겨 옆에 있던 수건으로 지성의 손을 꼼꼼히 닦았다.
-감기 걸릴라.
-에이, 이 정도로 무슨 감기예요.
-그래도 혹시 몰라.
-형도 참 유난이에요. 형도 알죠?
-울 지성이 아픈 거보다는 형이 유난 떠는 게 백배 천배 낫지.
언제 봐도 사르륵 녹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재민에 지성도 그저 재민의 말을 따랐다. 그래, 어차피 닦아야 했을 손이니까. 재민은 지성의 손에 물기가 거의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손과 지성의 손을 겹쳤다.
-따뜻해지라고 잡은 거야.
-지금 여름인데요?
-손발은 계절 안 가리고 따뜻해야 해.
-그건 그래요.
지성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주제도, 맥락도 없는 이 대화가 재미있을 수 있는 건 아마 형이 좋아서겠지. 곧이어 재민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지성은 동그래진 눈으로 재민을 올려다보았다.
-어디 가려고요?
-어디 안 가. 방에서 사진 보정 좀 하려고.
-오, 저도 봐도 돼요?
-당연하지.
재민이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고개를 숙여 문턱을 넘었다. 지성도 잡은 재민의 손이 이끄는 대로 문턱을 넘어 방 안으로 몸을 들였다. 재민은 방 한쪽에 붙은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열고 의자를 뒤로 끌고는 궁둥이를 붙였다. 재민이 마우스와 키보드를 이리저리 만지자 사진의 색감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우와, 좀 더 실물 같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 그러려고 보정하는 거야.
마을에 와서 찍은 사진이 꽤 되는지라 쓸만한 사진을 선별하는 시간이 꽤 길었다. 처음에는 집중해 지켜보던 지성이 삼십 분쯤 지나자 흥미를 잃고 자신의 방에서 일기장과 샤프 한 자루를 꺼내왔다. 지성은 방바닥에 엎드린 채 일기장을 넘기며 쓸만한 페이지를 찾았다. 재민은 슥슥 넘어가는 책장 소리에 고개를 돌려 지성을 바라보았다.
-어, 뭐야?
-일기장이요.
-나 봐도 돼?
-음…. 아니요.
-궁금한데.
-글씨도 안 예쁘고 내용도 별로예요. 그냥 진짜 저만 보려고 쓰는 거라.
-너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줘. 안 보여줘도 상관없고.
빙그레 미소를 지은 재민이 다시 몸을 돌려 마우스에 손을 얹었다. 지성은 샤프를 턱에 톡톡 부딪치며 쓸 내용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이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무언가 써 내렸다. 일기를 쓴 후, 음악도 듣고, 재민과 이야기도 하며 이리저리 시간을 보내던 지성은 몰려오는 졸음에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날이 넘어가 1을 가리키는 시침에 지성은 여태 펼쳐두었던 일기장을 덮고는 몸을 일으켰다. 형, 저 자러 가요. 내일 봐요. 응, 지성이 잘 자. 형도요. 기지개를 켜는 재민을 바라보던 지성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서 씻은 뒤 물기를 닦고 옷을 챙겨입은 지성은 머리를 털며 재민의 방을 바라보았다. 형, 자려나. 지성은 살금살금 다가가 재민의 방문에 귀를 대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안 나네, 자나 보다. 형이랑 같이 자고 싶다. 같은 이불 밑에 누워서 더 깊은 새벽이 올 때까지 도란도란 얘기하고 싶다. 아무래도 형은 부담스럽겠지. 지성이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재민의 방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빠르게 열렸다.
-지성이 너 여기서 뭐 해?
-방금 씻고 나왔는데...
-뭐 필요해?
-아뇨? 그냥.
-뭐야, 형이랑 같이 자고 싶어서 그래?
-...네.
전에 본 능글맞은 얼굴을 하며 지성을 놀리려던 재민의 귀가 삽시간에 붉어졌다. 거기서 '네'라고 답할 줄은 몰랐는데.
-형, 오늘 같이 자면 안 돼요?
이럴 줄은 진짜 몰랐는데.
씻으러 가려던 재민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지? 재민에게는 지성의 제안을 거절할 만한 깜냥이 없었다. 혀로 입술을 축이며 눈을 굴리던 재민과 지성의 시선이 맞닿았다. 지성은 투명한 눈으로 입에 꾹꾹 힘을 주며 재민을 쳐다보았다.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느냐고 묻는 것처럼.
-형 씻고 올 동안 베개 들고 올까요? 저 할머니 말고 누구랑 자는 거 진짜 오랜만이에요!
아, 지성이는 그런 뜻이 아니구나. 정말 잠이 자고 싶은 거구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민망해지는 기분에 재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지성은 아싸-소리를 내며 자신의 방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야, 나재민 니 변태냐? 재민은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호칭을 쏟아부으며 괜스레 자책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생각을. 심지어 지성이는 아직 연애해본 적이 없다던데. 후, 정신 차리자. 그새 베개를 한 손에 들고 온 지성이 크게 한숨을 몰아쉬던 재민을 이상한 듯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 씻으러 안 들어갔어요?
-으응, 이제 들어가려고. 졸리면 먼저 자.
-흐흥, 싫은데용.
-형 얼른 씻고 나올게.
-깨끗하게 씻어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뭘 또 깨끗하게 씻으래. 재민은 왼손을 들어 머리를 거칠게 털고는 욕실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재민이 씻고 나오자 지성은 재민의 책상 앞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이부자리 위에 몸을 뉘었다. 기분이 좋다는 듯 광대가 올라가고 도톰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재민도 그런 지성을 보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재민이 드라이어로 머리를 대충 말리고 이불을 걷어 내 지성의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지성은 재민과의 수다를 기대했으나, 막상 같은 이불을 덮고 누우니 기분이 묘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타닥타닥 비 오는 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바닷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작은 부스럭거림조차 방안을 울리는 큰 소음 같았다. 작은 랜턴만 켜놓은 방 안이 어스름했다. 재민은 뒤척이며 은근히 닿아오는 지성의 살갗에 입술을 감쳐 물었다. 작게 스치는 숨결에는 한쪽 손을 올려 이마 위에 올렸다. 재민이 지성은 알지 못하게 조용히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이대로 두다간 사고라도 칠 것 같았다. 재민은 입을 열고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지성아, 너 못 자고 있지.
-네,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자는 숨소리가 아닌 것 같아서.
지성의 목소리가 재민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미치겠네, 진짜. 재민이 크게 한숨을 뱉었다. 지성은 그 한숨에 재민이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가 저 때문인지를 잠시 고민했다. 내가 부스럭대서 그런 건가.
-지성아, 아무래도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나 봐.
-네?
-네가 옆에 있으면 잠이 더 잘 올 것 같았는데, 아니었어.
역시 나 때문이었나. 나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거면 미안하잖아. 지성의 마음 한쪽에 미안함이 검게 번졌다.
-저 때문에 못 자는 거면 제가 건너가서,
-내가 널, 생각보다도 더 좋아하나 봐.
방안 가득한 그림자 사이로 누운 재민과 지성의 눈이 마주쳤다. 지성은 돌연 무서워졌다. 사람을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이 울렁거림에도 내가 괜찮은 건가. 작은 빛 사이로 들리는 재민의 목소리는 한참을 밀려갔다 다시 금방 밀려오는 파도처럼 지성의 귓가를 웅웅 울렸다. 재민은 하늘을 향하도록 누웠던 몸을 조금 일으켜 지성을 향하도록 하고는 한쪽 팔로 머리를 괴었다. 그리고는 이불을 약하게 쥐고 있던 지성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얽었다. 재민의 얼굴이 서서히 지성에게 가까워졌다. 지성이 눈을 차분히 내리깔았다. 재민은 그림자 진 지성의 속눈썹을 바라보다 지성의 코에 자신의 코를 맞대었다.
-이제 네가 내 바다고, 하늘이야.
밤바다처럼 낮게 울리는 재민의 목소리에 지성이 눈을 올려 재민과 눈을 맞췄다. 언젠가 봤던 별자리보다도 뇌리에 선명히 박힐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세상이라니. 재민이 형의 바다고, 하늘이라니. 가슴 속 깊은 어딘가로부터 차오르는 벅참에 지성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얼굴 위로 옅게 깔리는 재민의 숨결에 지성이 참지 못하고 재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기다렸다는 듯 깊이 들어오는 재민에 지성은 밀려드는 바다를 떠올렸다. 형도 내 바다고, 하늘이에요. 재민은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움찔거림에 고개를 들어 입을 떼고는 지성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눈이 잔뜩 풀려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재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멈추어야 할 시점이었다. 재민은 다시 입을 맞추는 대신, 천천히 오른손을 올려 지성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잘자.
지성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잠들고 싶다 아우성쳤으나, 지성이 잠이 든 건 눈을 감고 호흡을 정리하고도 한참 후였다. 누구도 쉬이 잠들지 못할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눈을 감은 지성의 이마 위로 재민의 다정한 손길이 몇 번 스쳤다. 재민은 곱게 눈을 감은 지성을 한동안 바라보며 단전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애써 삼켰다. 내가 바다라면, 널 매일 볼 수 있으려나. 재민은 이틀 뒤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다행히도 다음 날은 하늘이 둘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인지, 비를 내린 것을 시치미라도 떼듯 맑았다. 더위와 습기는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거센 비가 바닥을 내리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성에게는 꽤 위안이 되었다. 재민이 떠나기 전날이라 해서 무어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민과 지성 모두 특별한 하루보다는 그저 평소와 같은 하루가 고팠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이를 배웅하듯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설사 내일이 실로 둘의 마지막 만남이고, 내일을 기점으로 서서히 멀어져 닿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를지라도, 그것은 그때의 문제일 것이라 치부하고 싶었다.
둘 다 잠을 꽤 설쳤기 때문에 해가 중천에 뜨고도 몇 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먼저 눈을 뜬 지성이 아직 잠이 든 재민을 보고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잘 때는 나보다도 훨씬 동생 같네. 볼살도 말랑해 보이고. 옆으로 누운 지성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고이 잠든 재민을 한참 바라보았다. 잘생겼네, 우리 형. 괜히 손가락으로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코끝을 한 번 건드려 보고는, 재민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살금살금 밖으로 걸어 나갈 참이었다.
-지성아, 어디 가.
-와, 형 목소리 대박 낮아요.
-어때, 섹시해?
-웃긴데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눈썹을 들썩이며 장난스레 말하는 재민에 지성은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재민의 얼굴은 아침이라 살짝 부어 있었다. 지성은 나가려던 몸을 돌려 재민의 옆에 다시 눕고는 재민의 볼을 이리저리 만져댔다.
-형 지금 완전 만두 같아요.
-칭찬이야?
-흐흥, 귀엽단 소리예요.
재민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볼을 잡아 주무르는 지성의 손에 쪽,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지성의 볼을 간지럽혔다. 재민은 그런 지성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견디지 못할 듯싶었다. 이 아이를 두고 어떻게 떠나지. 지금 떠나면 꽤 오랫동안 못 볼 게 뻔한데. 재민의 마음 같아서는 지성에게 당장 다음 학기에 복학하라며, 집이고 뭐고 내가 다 준비해두겠다며 큰소리를 치고 싶었으나, 문제는 지성의 마음이었다. 도시가 두려워 도망친 아이에게, 나만 바라보고 험난한 불구덩이에 뛰어들라니. 만약 이 아이가 더 큰 상처를 입는다면, 이 아이가, 그리고 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잠깐 사이 재민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귀신같이 알아챈 지성은 손가락으로 다시 한번 재민의 코끝을 툭 쳤다. 지성의 웃음 아래에도 미묘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둘 다 그런 서로를 애써 모른 척할 뿐이었다. 끝을 아는 이들의 사랑이란 원래 그랬다.
재민과 지성은 오랜만에 카메라를 챙겨 들고 산책에 나섰다. 맑은 날이었지만, 비가 온 며칠의 여파로 땅이 아직은 젖어 있었다. 살짝씩 코끝을 스치는 비 냄새에 지성은 쓴 미소를 지었다. 비가 아니었다면, 재민이 형과 이 동네를 몇 바퀴 더 돌 수 있었을 텐데. 지성은 같은 장소를 같은 사람과 매일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임을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순칠이가 지성을 보고 다가오더니 야옹-하는 소리를 내며 지성의 다리에 몸을 이리저리 비볐다. 지성은 여느 때처럼 큰 손으로 순칠이를 몇 번 쓰다듬었다. 비도 많이 왔는데, 감기 안 걸렸어? 지성이 잔잔한 목소리로 묻는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순칠이는 지성의 손가락을 몇 번 툭툭 치며 장난을 걸어 왔다. 몇 분을 그러고 있었을까, 그새 흥미가 떨어진 순칠이가 몸을 돌려 어디론가 떠났다. 지성은 그제야 숙였던 몸을 일으켜 재민과 눈을 맞췄다. 찰칵-. 카메라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가를 울렸다.
지성은 순간 궁금해졌다. 형의 카메라에 형이 담긴 적이 있었을까. 형이 사랑하는 것을 카메라에 담는다면, 응당 그의 모습도 담겨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지성은 재민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재민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단 자신의 손을 올려 지성의 손과 겹쳐 잡았다.
-카메라 한 번만 줘볼래요?
-찍고 싶은 거 있어?
-네, 완전.
재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숙여 목에 걸었던 카메라 줄을 천천히 빼고는 지성의 목에 걸어주었다.
-어떻게 찍는지는 알지?
-형이 지난번에 설명해줬잖아요.
-그치. 자, 너 찍고 싶은 거 한 번 찍어 봐.
지성이 원하는 피사체가 자신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재민은 카메라를 이리저리 만지는 지성의 등을 보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순간 지성이 몸을 홱 돌려 재민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큰 재민의 눈이 잔뜩 커졌다. 재민은 검지를 자신의 몸쪽으로 뻗고는 ‘나?’ 하는 입 모양으로 지성이 원하는 피사체가 자신인지 물었다.
-형은 형 사랑하죠?
-아마?
-사랑해야 해요. 형이 형을 사랑해야, 제가 주는 사랑을 잘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감동인데.
-그러니까, 내가 형을 찍어줄게요.
재민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성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네가 나더러 날 사랑하라 한다면 기꺼이 사랑할게. 재민은 자신을 향하는 카메라 렌즈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뭐야, 형 사진 많이 안 찍혀 봤어요?
-찍은 적은 많은데, 찍힌 적은 많이 없어.
-음, 형.
-응?
-절 생각하면 어때요?
데자뷔였다. 상황이 역전된. 이 질문은, 꽤 어려운 질문이었구나. 지성이 너를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될까. 아아, 그래, 지성이 너를 생각하면 네 낮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함께 맞던 빗소리가, 소라고둥 소리를 덮어버린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 너를 생각하면 난
-바다가 들려.
찰칵-.
두 눈이 마주쳤다.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두 사람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흩어지는 바람 사이, 두 사람의 마음이 닿았다. 정말 재민과 지성의 귓가에 바다가 들렸다. 철썩, 쏴아아- 철썩, 쏴아아-. 푸른 소리 위로 심장이 뛰었다. 뛰는 심장과는 반대로,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아 차분해졌다. 이젠 두렵지 않아.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어디에 있든. 난 바다를 들으며 네 생각을 하고, 널 들으며, 바다를 떠올릴 테니. 설사 바다가 들리지 않아도, 널 듣지 못해도 괜찮아. 이미 너로 물든 내 마음이 바다이니까.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결국, 새로운 해가 떴다. 배웅에 특별할 것은 없었다. 지성은 재민과 함께 손을 잡고 정류장까지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른 흙이 신발 바닥을 스쳐 작은 모래 먼지가 이리저리 날렸다. 그것을 핑계로 잠시 멈춰가기도 했다. 지성은 버스에 올라타는 재민을 보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마을버스라 그리 크지 않은 버스의 뒤꽁무니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저 바라보았다. 재민의 손에는 찢긴 지성의 일기장 속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내가 찾아갈게요.‘
덜컹거리는 버스에 올라탄 재민의 입가에 미소가 둥둥 떠올랐다. 지성의 가슴에도 슬픔보다는 설렘이 잔뜩 부풀었다. 재민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성은 허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노트북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윽고 빠른 손놀림으로 대학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휴/복학 신청‘ 항목을 클릭했다. 지성은 큰 숨을 내뱉었다. 형이 있을 테니, 괜찮아. 매정함도, 차가움도 두렵지 않아. 그 도시가 무서웠던 건, 어쩌면, 모든 것이 존재하는 그곳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실패해도 괜찮아. 이제 내가 형을 만나러 가는 거야. 내 바다에, 내가 가는 거야.
바다를 들려주러 가는 거야.
바다가 들려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