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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초코

   재민은 고등학교 교복 얼마 못 입어보고 병원에 갇히게 된 제 동생을 보면서 마음이 쓰렸다. 작년까지는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학교에 매일 등교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나가서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형이랑 대화하던 평범한, 학생. 몸이 안 좋아서 개근 못한 것도 평범한 건가. 나 내일 친구들이랑 축구하기로 했거든. 이것만 버티면 내일 학교 가니까, 축구할 거니까 괜찮아. 항상 짓무른 얼굴로 병원을 나오곤 했던 지성은 학교 갈 생각에 웃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지성은 자신의 몸에 거의 딱 맞춰 산 도시고등학교 교복을 입어보며 제발 학교에서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마지막 빠른 년생 중 한 명이었다. 빠른 생일 덕분인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16살에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성이 평범하지 않은 이유를 반 정도 차지하고 있었다. 곧 입학할 학교에 그가 있을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1.

 

   사춘기가 거하게 온다는 중학교 2학년이 된 지성은 지성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소리는 머릿속, 오늘은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뭐했어? 혹은 귓속에서 울려 퍼졌다.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너 중2병이야? 사춘기 씨게 왔네,라는 말을 듣게 될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갑자기 생긴 능력 아닌 능력으로 인해 생긴 고민은 전부 지성 혼자만의 몫이 됐다. 차라리 단순한 소음이나 음악소리였다면,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심지어 그 목소리의 주인은 지성이라는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물론 그게 박지성은 아니었지만 운명처럼 느껴졌다.


 

   도시고등학교 교복 입어볼 수 있을까요? 지성이 중학교 3학년 되는 해에 그 목소리는 고등학교 교복을 맞췄다. 그 목소리는 대체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인지 몰라도 때마다 다르게 들려왔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능력이 몸 상태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같은 색깔 퍼즐을 없애는 게임하느라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던 지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지도 어플을 켰다. 도시.. 고등하꾜. 괜히 목소리를 따라 발음하며 톡. 토도독. 폰 화면을 두드린 지성은 세 건의 검색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지성이도 형 따라서 꼭 도시고로 와. 그 중에 지성의 집과 제일 가까운 곳은 버스 타고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성은 진학하고 싶은 고등학교를 정했다. 목소리 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와, 당장 학교 입학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떨려. 실제로 만나면 뭐라고 말하지? 가슴 속에서 뭔가 콩콩 뛰는 것 같았다. 





 

2.

 

   입학식 내내 앙 다문 입술로 입학을 축하하는 현수막에 적힌 글자와 담임 선생님을 번갈아 응시하던 지성은 도저히 이 학교에 박지성 말고 나지성 있냐고 질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괜히 2학년 선배들이 다니는 복도에서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과 동갑인 지성을 먼저 찾고 싶었다. 아 오바.. 이거 안 되겠는데. 일단 후퇴하자. 잠시 후퇴하고 존중하며 버티기로 한 지성은 오늘 ~초면이지만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동창~이라는 긴 수식어를 수여한 성찬과 함께 급식실로



 

“엇!”

 

“어, 미안! 괜찮아?”



 

   ... 향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힌 거다. 어깨 접촉 사고 가해자는 저 말만 남기고 지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고등학교는 원래 이런 곳인가? 이렇게, 이렇게 세게 다른 사람을 치고 지나가도 되는 거야? 지성은 왼쪽 어깨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괜찮아? 어깨 부러진 거 아냐? 성찬은 처음 만난 친구를 데리고 응급실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어색한 식사시간을 끝낸 지성과 성찬은 교실로 향했다. 이미 식사를 끝내고 돌아온 반 친구들이 칠판 앞에 붙은 종이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성과 성찬은 그 인파를 뚫고 지나가며 주목 받고 싶진 않아서 친구들이 자리를 뜰 때마다 조금씩 앞으로 이동했다. <도시고등학교 동아리 목록>에서 바른생활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교문 앞에 서있다 보면 언젠가 지성이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못 만나더라도 봉사시간 받을 수 있으니까 손해는 아닌 듯...?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평범한 지성이라면 절대 못 내릴 결정을 내렸다.





 

3.

 

   헐. 나지성? 지성이는 빠른 아니잖아! 그럼 내년에 입학한다는 건데? 망했다. 커다란 손을 가슴에 올려두고 크게 숨 한 번 쉰 지성은 면접장의 문을 열었다. 지성이를 찾는 계획은 망했어도 바른생활부 면접은 망하면 안됐다. 근데 그곳엔 어깨 접촉 사고 가해자가 앉아있었다. 금잔디였다면 너, 너...! 삿대질 했겠지만, 박지성은 두 눈을 도르륵도르륵 굴리다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핸드폰도 아닌데 덜덜 진동하던 지성을 바라보던 그 가해자는 왜 이렇게 긴장했냐며 떨지 말라고 했다.


 

   지성은 무슨 질문에 어떻게 답변했는지 전혀 기억 못했지만 저녁에 받은 합격 문자를 가족에게 자랑했다. 이 소식은 부산에 거주 중인 지성의 이모한테까지 전해졌다. 아니 우리 지성이가 글쎄~로 시작했던 통화는 나중에 부산 놀러 갈게, 어, 어~ 하며 끝났다. 내가 전교 회장이 된 것도 아니고, 반장이 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멀리까지 알려지는거야아아-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지성은 살살 방문을 닫고 딸깍, 스위치를 눌러 방을 어둡게 했다. 그리고 누가 말이라도 걸까 싶어서 서둘러 침대에 몸을 던졌다.



 



 

   처음으로 교문 앞에 서게 된 날, 지성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 누구보다도 일찍 도착해버렸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바른생활부실 문 앞에 허망하게 서있던 지성은 또 그 사람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오늘 지도하러 나가나봐?”



 

   어깨 부딪힌 걸 전혀 기억 못하는 그의 이름은 나재민이었다. 자물쇠 다이얼을 열심히 만지던 재민이 문을 열고 한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로 지성을 이끌었다. 어쩌다보니 자신의 어깨를 치고 간 사람과 대면하게 된 지성은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을 어떻게든 메꾸고 싶어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재민은 아무 생각 없었지만 누가 봐도 신입생인 그의 노력이 가상하다 싶어 성실히 답변했다. 꼬박꼬박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지성에게 그냥 편하게 형이라 부르라는 말도 했다.



 

“저는 형이 한 명 있거든요. 형은 형제 있어요?”

 

“나는 너랑 이름 똑같은 남동생 한 명 있어.”

 

“저랑 이름이 똑같으면..., 헙. 나지성?”

 

“우리 지성이 알아?”



 

   손으로 입을 막으며 격한 리액션을 뽐낸 지성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아아니요그냥어디서들어본적?있었던것같기도하고? 랩 실력을 뽐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 형일 수도 있겠다! 나씨 성이 흔하진 않잖아. 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앞으로 살면서 다신 못 느낄 것 같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와아아! 진짜 대박. 지성은 입으로 하트를 만들며 방긋방긋 웃었다. 진짜 애기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재민은 그저 애기, 아니 지성을 따라 웃었다.





 

4.

 

   재민과 지성은 빠르게 친해졌다. 교문 앞에 지도하러 나가는 날도 많이 겹쳤고, 성찬이 가입한 댄스부의 부장이 재민의 친구이기도 했다. 지성은 좁은 고등학교 내에서 계속 겹치는 우연에 그냥 모든 것이 신기해 보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목소리 형이 재민형인 이유>로 여러 사실을 끼워 맞추며 장문의 글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재민에게 지성은 진짜너무완전 귀여운 후배였지만, 지성에게 재민은 힘들게 찾은 소울메이트 같은 거였다. 비록 아직은 혼자만 통하고 있지만...



 



 

   지성이가 내 말 듣고 귀여운 반응을 해줘야 하는데, 오늘은 왜 이러지? 재민은 하던 말을 멈추고 떨떠름하게 웃는 지성을 가만히 바라봤다. 재민이 갑자기 입을 다물자 웅? 왜요? 말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긴 한데... 아 그래요?, 아 진짜요? 같은 멘트를 칠 때마다 이유 모를 서운함이 불쑥 찾아왔다. 아니, 나에 대해 궁금한 게 그렇게 없어?


 

   형이 왜 말을 하다 말지? 지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재민을 마주봤다. 형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답은 열심히 했는데?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지성은 어디선가 자꾸 티가 났다. 재민도 모르는 새에-모르는 게 당연하다-그가 하는 수많은 말을 들어왔으니 내적친밀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커피우유, 바나나우유, 딸기우유.. 으으! 그가 딸기와 우유를 싫어한다는 것, 오늘 기분은 제노네 집에 가야할 것 같은 기분이네~ 소꿉친구 이름이 이제노라는 것, 동생이 어렸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는 것. 음, 이건 너무 사적인? 내용이라 내가 알고 있다는 게 좀 미안한데... 그리고 또 학원. 재민이 다니는 영어 학원 이름이 무엇인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형보다 형을 더 잘 알 듯. 이건 좀 오바인가? 지성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형이 다니는 학원에 등록해 우연히 만난 척하는 거지. 어, 형! 여기서도 보네요! 그리고, 내가 사실 형 목소리를 들어요. 고백하는 거지. 하지만 고백 비용으로 학원비 37만원을 지출해야 했다. 엄마한테 정말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런 말을 믿어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 37만원이나 내고 재민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찍히고 싶진 않았다.


 

   요즘은 지성이 상태 좋은 것 같아. 다행이지. 진짜 솔직히,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내가 누구 목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도 몰랐는데 정말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나게 됐어. 그럼 솔직히 계속 보고 싶고 궁금한 거 아냐? 1학년에 우리 지성이랑 이름 똑같은 친구 있잖아. 누구라도 그럴 거야! 뭔지 알 것 같지만 쉽게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이 고개를 들 때마다 지성은 홀로 해명했다. 박지성이라고, 귀여운 애기 있어. 그 과정이 25번도 넘게 반복되는 동안 지성의 옷소매가 짧아졌다 다시 길어졌다. 재민과 사적인 이유로 학교가 아닌 밖에서 만나는 일이 많아지면서 해명타임도 끝났다. 





 

5.

 

“애기야 뭐 먹고 싶어?”

 

“에? 오늘은 형이 먹고 싶은 거 먹기로 했잖아요.”

 

“형이 오늘 새벽까지 생각을 해봤는데, 도무지 먹고 싶은 게 없더라구. 그래서 우리 지성이 먹고 싶은 거 먹으면 어떨까 싶었지.”



 

   지성이 잠시 부산에서 지냈었던 때를 제외하고 거의 토박이처럼 이곳에서 살았다지만 알고 있는 음식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집안에서 돌아다니는 것만큼 밖엘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성과 재민은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쌈밥 집의 문을 열었다. 언젠가 가족과 함께 방문한 적 있는 가게였다. 괜히 잘 모르는 데 갔다가 혹시라도 입맛에 안 맞으면 어떡해. 형이랑 그런 기억 만들고 싶지 않아. 식사를 끝낸 두 학생은 교복점으로 향했다.


 

   오늘 데이트(?)의 목적은 교복점 방문이었다. ‘너희 형은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더 안 컸거든. 일단 셔츠랑 바지 정도는 지금 사이즈에 맞는 거 사자.’라는 엄마의 말이 화근이었다. 형과는 다르게 쑥쑥 자라 발목과 손목을 훤히 노출하고 다니는 지성을 보며 재민은



 

“우리 지성이는 아직 애기라서 앞으로 좀 더 클 것 같은데~ 셔츠랑 바지는 새로 사야겠다. 형이랑 같이 사러 갈까?”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어디에 불이 났냐고? 바로 박지성의 마음에. 



 

“저 사실, 제 사이즈를 잘 몰라요. 형이 도와줄 수 있을까요...?”



 

   주말에 같이 가자는 엄마를 거절하며 재민이형이 봐준대요. 카페에서 같이 음료 사먹어도 돼요? 카드만 받아온 지성은 약 7개월 정도를 입은 자신의 교복 사이즈를 잘 모른다는 앙큼한 발언을 했다. 그리고 친절한 재민이 골라주는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과 탈의실 거울 앞을 왕복했다. 형은 이런 것도 잘 하네. 어떻게 나한테 맞는 걸 쏙쏙 찾아내지? 일찍 헤어지기 싫어서 모른다고 한 건데.. 힝구 얼굴을 하던 지성은 재빨리 선수 치기로 했다. 형, 저희 엄마가 저 도와줘서 고맙다고 음료 한 잔씩 먹고 천-천히 들어오래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핫초코 한 잔. 그리고 초코케이크와 레드벨벳케이크까지 알차게 주문한 지성은 카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삐 25번 손님- 주문하신 음료랑 케이크 나왔습니다- 외치는 직원분의 말에 재민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우리 애기는 앉아 있으세요~”



 

   둘은 바른생활부 이야기도 하고, 학교에서 생긴 여러 일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우리 학교 주변부터 돌아다녀보면서 맛집 한 번 찾아볼까?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말도 있었다. 지성이는 방탈출 해봤어? 형은 아직 안 해봤는데. 다음엔 방탈출카페 가보자. 역시 형이 말하는 걸 직접 듣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 그 중에서도 나한테 하는 말이 최고야. 지성이 재민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6.

 

   형이랑 같이 산 교복...! 괜히 셔츠 깃과 바지를 스윽 만져본 지성은 거울 앞에서 한 번 웃어보고 의자 위에 놓여있던 가방을 들었다. 박지성이 새로 구매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2학년 교실로 첫 등교하던 날, 나지성은 몇 명이나 거쳐 왔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환자복을 벗고 세탁이 끝난 것으로 갈아입었다. 생년월일을 물어보는 간호사 선생님께 공이일공일팔이요. 대답한 지성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가끔 병원에 방문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아무리 치료받기 위해서라고 해도 여기서 몇 달을 보내야한다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최근 들려오던 목소리를 통해 나지성의 건강악화를 예상한 박지성은 재민이 걱정됐다. 지성이 상태가 괜찮아지고 있다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네, 엄마. 지성이는요? 형은 당연히 슬프겠지?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형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 알겠어요. 제가 오늘 학교 끝나고 갈게요, 네. 식사 거르지 마세요. 형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어떤 말로 인사해야할지 작은 머리 통으로 계속 고민하던 지성은



 

“뭐해?”



 

   재민의 말에 그대로 정지했다. 아, 아. 형 안녕하세요. 정신 차리고 겨우 인사한 지성은 이어지는 재민의 말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새로 산 거 입었네? 이 형은 왜 이렇게까지 세심한 걸까, 우리 형은 내가 몇 반인지도 모르던데. 호적메이트가 몇 반인지 모르는 게 보통의 일이라는 생각까지는 못한 지성은 멍하니 형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지성이는 오늘도 귀엽네~”



 

   저 벙찐 얼굴 너무 귀엽다. 완전 뽀뽀하고 싶.. 엥? 재민도 말버릇처럼 귀엽다는 멘트를 날리고 정지했다. 너무너무 귀여운 후배를 보면서 뽀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일반적인가? 아무래도 지성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가봐. 입꼬리를 당겨 웃은 재민은 붉어진 귀를 누가 볼까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지성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잊지 않았다. 





 

7.

 

“나 지성이 만나보고 싶어. 형이 친구들 말고 다른 사람 이야기 이렇게 많이 한 거 처음이잖아. 너무 궁금해.”



 

   나지성이 생일선물로 뭘 갖고 싶냐는 재민의 질문에 대답했다. 반년 정도 입원해있다 생일을 앞두고 퇴원한 지성은 최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동생에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던 재민은 일단 웃어보였다. 뭐라 말을 해야 우리 지성이가 부담 느끼지 않고 흔쾌히 와줄까? 우리 지성이 소원은 꼭 들어주고 싶은데. 재민은 일단 그냥 질러보기로 했다.



 

“지성아. 우리 지성이 소개시켜줄까?”

 

 

 

   나한테 나를 소개해주겠다는 건가? 바보 같은 생각을 하던 지성은 재민의 동생을 떠올렸다. 나와 이름이 같은 형의 동생. 지성이 듣는 건 재민의 목소리가 전부였지만 그 중에는 나지성에 대한 것도 상당했기 때문에 어떤 애일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재민이형 동생이면 어떤 기분일까? 완전 자상할 것 같아. 모르는 사람과 보내는 어색하고 숨 막히는 시간을 싫어하는 지성은 평소였으면 거절할 이유부터 생각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고민도 없이 냅다 좋다고 대답했다. 재민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형의 동생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검은 벙거지 모자를 쓰고 나온 나지성은 반갑게 인사했다. 우리 동갑으로 알고 있는데 편하게 말할게! 적극적인 그의 말에 박지성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셋은 방탈출 카페에 입장했다. 막 귀신 나오고 무서운 거 아니예요? 지성은 바깥보다 어두운 카페로 들어가며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서운 거 아니야. 재민은 그 옆에서 함께 걸으며 지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친구 겁이 좀 많네~ 형이 지켜줄게. 지성은 지성의 어깨를 툭 쳤다. 하핳. 지성은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진짜 무서운 건 무섭다고 쓰여 있을 테니까 괜찮겠지?



 

“우리 애기는 나중에 형이랑 제일 쉬운 거 해보자.”

 

“으엑, 지성아. 형이 평소에도 이렇게 말해? 와- 나를 그렇게 부른 적은 없는데.”

 

“우리 애기랑 우리 지성이는 다르죠? 안대 착용하세요~”



 

   나지성은 허! 헛웃음을 짓다가 안대를 착용했다. 박지성은 자신의 손을 가누지 못하고 안대를 계속 놓쳤다. 형이 해줄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민이 지성의 손에서 살살, 안대를 빼냈다. 괜히 눈을 감은 지성은 형이 자신을 안아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8.

 

“아앙! 뭐야아...!”



 

   별 거 아닌 것에도 깜짝깜짝 놀라던 박지성을 바라보던 나지성은 쭈그려 앉아있는 지성의 등에 손을 얹었다. 밀지도 않았는데 얹은 손만으로도 깜짝 놀란 지성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우리 애기 놀랐어용?”

 

“와... 우리 형이 너 엄청 좋아하나봐.”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둘을 지켜보던 지성이 말했다. 어쩐지 맨날 지성이, 지성이 노래를 부르더라. 애기는 그냥 혼자만의 애칭 같은 건줄 알았는데, 이걸로 얘를 부르고 있을 줄이야. 제 형이 마냥 조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긴 했지만, 누군가를 애기라고 부르는 모습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박지성은 저보다 어려보이긴 했지만 애기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지성보다 키가 컸거든. 으, 형이 날 그렇게 불렀으면? 으윽. 귀를 씻고 싶을 것 같은데. 애기라고 부르는 형이나, 가만히 있는 얘나 둘 다 좀 이상해. 



 

“나도 형 좋아.”


 

  

   저런 말에 아무 말도 안하긴 좀 그랬다. 괜히 뜸 들였다가 내가 형 싫어하는 줄 알면 어떡해. 그런 건 좀 상처야. 그러니까 이건 고백 아니고 그냥 말한 거야. 정식 고백은 아니었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친한 사이에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지성은 괜히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재민의 눈치를 봤다.



 

“나도 우리 지성이 좋아.”

 

“어, 형이 저 좋아하는 거랑 제가 형 좋아하는 거랑 다를 걸요?”

 

“형이 지성이를 더 많이 좋아한다는 말이야? 흑...”



 

   재민은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훔쳤다. 지성은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떨어. 진짜 형 좋아해? 뭐 이런 말 안 나와서 다행이야. 그거 어떻게 수습해. 하마터면 분위기 싸해질 뻔. 형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해서 정말정말 다행인데, 다행인데... 마침 자물쇠 앞에 쭈그려 앉은 지성은 비밀번호를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충분했다. 아예 그런 쪽으로 생각 못할 만큼 연애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뜻 같아. 지성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9.

   

“죽어도 재수 안 할 거라며.”

 

“그렇게 됐어.”

 

“아~ 자기가 한 말도 못 지키고 말이야.”

 

“...자기가 뭐야, 자기가.”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었다. 2년 이상을 고생하는 것보다 바짝 당겨서 1년 죽었다 생각하려고 했다. 그래서 24시간뿐인 하루를 48시간처럼 쪼개며 살았다. 물론 그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끔은 소꿉친구와 자전거를 타러 나가고, 지성과 맛집을 찾아다니고, 방탈출카페도 다시 가보고, 또 지성과 공부를 핑계로 만나서 도서관 데이트를... 하긴 했어도 그만큼 더 노력했기 때문에 성적에 큰 타격을 입진 않았다. 다만 재민은 입시도 운빨이 상당하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재민이 지원한 학교는 유독 경쟁률이 높았고, 수능 날엔 갑자기 컨디션이 악화됐다. 



 

“혹시 나 때문이면 그러지마. 진짜 싫을 것 같아.”

 

“그런 거 아니야. 더 좋은 곳 가고 싶어서 그래.”

 

“올해 합격 못하면 욕 한 바가지 선물해주께.”

 

“심각하네.. 그래도 형 자주 볼 수 있는데 별로야?”



 

   합격한 학교가 없는 건 아니었다. 거기 입학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 전에, 사랑하는 부모님의 짐을 나눠들고 싶었다. 재수를 결심한 이유에 더 좋은 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지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동생은 병원에 있는데 나 혼자 어떻게 잘 지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 왔어요! 지성이 안녕~”



 

   나지성은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다행스럽게도 두 번째 입원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몸이 회복기를 거치느라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반복했다. 그래도 몸 상태가 예전보다는 나아진 것을 느끼며 잘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박지성은 무시무시한 고3이 됐다. 사실 고3은 무시무시하지만, 입으로 하트를 만들면서 병실의 문을 여는 지성은 썩 그래보이진 않았다. 그는 셋이서 만난 이후로 종종 병실에 찾아오곤 했다. 형 졸업해서 이제 얼굴 보기도 힘든데, 나 지성이랑 이 정도면 친하지 않나? 병문안 가면서 형 얼굴 좀 더 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아잇, 그렇다고 내가 형만 보러 가는 건 아니구. 



 

“올 때마다 뭘 자꾸 가져오는 거야, 애기는 그냥 와도 돼.”

 

“휴지 하나 가져왔을 때랑은 다르게 많이 발전했네.”

 

“그런 건 좀 잊어...!”



 

   지성이 첫 병문안 오던 날, 그는 커다란 대학 병원 건물을 올려다 보다가 자신의 품에 있는 가방을 다시 고쳐 안으며 입구로 향했다. 여기다, 팔백십삼호. 그리고 재민이 알려줬던 병실 앞에서 숨 한 번 크게 쉬고 문을 열었다. 바른생활부 면접 본 날만큼은 아니지만 부모님 없이 혼자는 처음이라 좀 떨렸다. 그리고 안고 들어온 가방을 뒤져 음료수 두 병과 두루마리 휴지를 꺼냈다. 그를 보며 두 형제는 꽤 시끄럽게 웃었다. 침대에 앉아있던 지성은 눈물까지 흘렸다.  


 

   너희 고삼이야, 고삼이 책상에 누워있는 게 말이 되니?, 애들아 정신 차려. 지성은 교실에 방문한 선생님들마다 한 소리씩 하는 걸 들으며 더 이상 이 학교에 없는 재민을 생각했다. 형도 학교에서 이런 말 들어가며 공부했겠지. 힘들었겠다. 공부에 집중할 때를 제외하고 꽤 많은 시간동안 재민을 생각했던 지성은 재민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10.

 

“야 나지성! 나지서엉!!”



 

   용기와 패기가 넘쳐흐르는 상태로 나지성에게 전화한 박지성은 이상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20학번 신입생 중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야, 축하해. 좋은 일인 건 알겠는데 진정해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박지성의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졌다. 재민이 형한테 연락해도 괜찮나? 형 공부하고 있을 텐데 방해될 것 같아. 나중에 형도 합격하면 그 때 알려줘야지. 하마터면 그냥 통화를 종료할 뻔한 지성은 축하 고마워 지성아. 곧 너 보러 갈게! 정신줄을 붙잡고 마지막 말을 꺼냈다.



 

[재민물장어]



 

   헉, 재민이 형. 지원한 모든 학교의 결과가 발표된 건 아니지만 첫 합격은 꽤나 큰 경사였기에, 그 기념으로 가족과 외식하던 지성은 핸드폰에 뜬 이름을 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옆에 앉아있던 그의 형은 지성 때문에 놀라 흠칫했다. 저 잠깐 전화 받고 올게요. 가게를 벗어나 조용한 옆 골목으로 빠진 지성은 꼭 상사와 통화하는 직장인이 된 것 마냥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를 받았다.



 

지성이 안녕. 뭐하고 있었어?

 

 “저 외식 중이었어요.”

 

아 정말? 그럼 이따 다시 연락할게. 집에 가서-

 

“어아니예요!거의다먹어서 괜찮으니까 안 끊어두 돼요.”

 

오구 그래요~? 애기야, 형한테 말해줄 건 없구?



 

   생각도 못한 질문을 받은 지성은 열심히 고민했다. 재민을 알고 나서는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나한테서 듣고 싶은 말이 있나? 나는 있는데. 악, 형이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닐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차라리 솔직해지기로 했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랬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게 부끄러운 거지.



 

“무슨 말이요?”

 

무슨 말이요오?! 정말 나한테 말할 거 없어?  

 

“저 형한테 뭐 잘못했어요..?”

 

합격했다며! 왜 지성이한테만 전화하고 나한텐 안 했어.

 

“형도 좋은 일 생길 테니까 그 때 같이 말하려고 했어요.”

 

애기한테는 나재민보다 나지성이었구나? 쫌 질투 나네.





 

11.

 

   형은 대학교 합격한 애기 봤어요? 아무리 형이 저를 부르는 애칭이라도 요즘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왜, 드라마에서 보면 연하남이 누나, 나도 남자야. 뭐 이런 말하잖아. 지성은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그럼 남자지... 여자는 아니잖아. 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의 심리가 이해될 것도 같았다. 거기다 질투 난다는 말은 왜 하는 거야. 나랑 같은 마음도 아니면서.



 

“저 애기 아닌데요.”

 

우리 지성이 애기가 아니면 뭐예요~?

 

“...”

 

지성아 내 말 들려~?



 

   나 애기 아니고요, 다 컸어요. 이딴 발언을 하게 될까봐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저런 말을 하면 틀림없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갈 게 뻔했다. 게다가 잊으면 안 되는 사실 하나, 지성은 아직 합격 뽕이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용기와 패기가 넘쳐흘렀다. 음주를 할 수 없는 나이인데도 취중진담 비슷한 걸 갈길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애기야. 애기야? 지성아~? 정적이 길어지자 재민이 지성을 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

 

밖에서 잠든 줄 알았잖아~ 밖에서 자면 입 돌아가용. 얼른 집에 들어가.

 

“형, 저...”

 

응. 왜?

 

“저어,”

 

네~ 말하세요.

 

“수능 끝나면 꼭 하고 싶은 말 있어요.”

 

형이 너무 좋아요. 이런 말인가?

 

“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죽는다고, 재민이 던진 말에 지성이 직격타를 맞았다. 형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항상 이렇게 말 해. 진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랑 같은 감정도 아니면서 왜 질투 난다는 말을 하고, 날 안고, 뽀뽀하려고 했는데요. 괜한 오기가 생겼다.



 

“맞다면요?”

 

지성이 왜 화난 목소리야~? 장난이었어어.

 

“...”

 

우리 지성이랑 오래 보고 싶어~ 이런 장난 안 할게.

 

“전 장난 아니란 말이예요...”

 

형은 장난이었으니까 너도 그런 걸루.

 

“...저 부모님이 불러서, 먼저 끊을게요.”



 

   통화 종료 버튼을 탭하는 동시에 용기와 패기, 체면 뭐 그냥 그 밖의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재민에게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이 목구멍을 막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왜 이런 장난을 치는 거야, 하나도 재미없는데. 상처 받은 지성만 덩그러니 썰렁한 골목에 놓여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형이 모르는 게 더 이상해. 그건 완곡한 거절이었다.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 아마 형도 나한테 그런 말하기 힘들었을 거야.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나봐.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삭히던 지성은 고개를 쳐들었다. 밤하늘이라도 보면 눈물이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서.





 

12.

 

[형 밥 잘 챙겨먹고 공부해요! 우리 내년에 같이 꼭 학교 가용..ㅎㅎ]



 

   당황했을 형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이 장난이라고 했으니까 나도 장난이어야지, 아까 내가 말한 것도 장난인거야. 그니까 나는 지금처럼 기분 나빠하면 안 돼. 화나지 않은 척하기에 가장 좋아 보이는 ㅎ 두 개를 맨 뒤에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민은 답지 않게 멘탈이 좀 흔들린 상태였다. 지성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통화하다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어. 못된 놈이 착한 애 마음 갖고 노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재민도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저울질 할 수는 없지만, 지성이 재민을 좋아하는 것만큼 재민도 지성을 좋아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뭐 그런 순간을 상상해본 적 없는 건 아니었다. 제 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져서 오래 이어지진 못했지만.

 

[우리 지성이도 무리하지 마]



 

   재민의 답장 옆에 적혀있던 1이 사라졌다. 



 



 

   박지성이 나지성에게 전화해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한 후로 둘에게서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우연인지 뭔지, 지성은 재민이 있을 만한 시간대를 피해 병실에 방문했다. 



 

“오늘도 지성이 왔었어. 이번엔 형이 좋아하는 거 사왔더라.”

 

“그랬어?”

 

“혹시 둘이 싸웠어? 요즘 왜 이래.”

 

“...”



 

   나지성은 나재민이 눈치를 보는 듯한 행동을 할 때마다 답답했다. 아니, 인생 한 번 사는 건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좀 하지. 형이 바보처럼 구는 게 꼭 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솔직히 너무 잘 지냈다면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약-간 서운할 것 같긴 했다. 그래도 티는 안 냈겠지. 근데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차라리 미친 듯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아파보면서 느낀 건데, 하고 싶은 건 해야 돼. 그렇게 자꾸 나중으로 미루면 다음도 없다?”

 

“...”

 

“다른 놈이 지성이 데려가는 거 보면서 후회하지나 마. 나는 분명 말했어,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나도 퇴원하면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야. 일단 학교 마저 다니게. 중학교는 뭔가 제대로 다닌 기분이 안 나. 검정고시도 생각해봤는데, 친구들이랑 북적북적~하게 3년 잘 지내보고, 형이랑 지성이처럼 졸업장 받을 거야. 나 한다면 하는 거 알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말은 지성과의 연애만을 일컫는 건 아니었다. 그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형의 뜻대로 하길 바랐다.



 

“치료도 거의 끝나가잖아.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 신경 좀 덜 써주라, 응?”





 

13.

 

   자신의 진료 기간 2019.03.04-2019.09.01을 바라보던 지성은 퇴원 진료비 계산서를 아무렇게나 접었다. 아무렴 어때. 이제 볼 일 없을 서류야. 그는 기적처럼 18살 생일이 오기도 전에 병원을 벗어나게 됐다. 형은요? 부모님과 함께 왔어야 할 재민이 보이지 않았다. 몸이 안 좋아보여서 집에 있으라고 했어. 지성아. 병실에 뭐 놓고 온 거 없는지 한 번만 더 확인해볼래? 놓고 온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지만, 지성은 괜히 바지 주머니와 후드집업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고, 들고 있던 가방을 살폈다.


 

   지성이 퇴원하는 좋은 날에 내 몸 상태는 왜 이래. 부모님을 따라 병원에 방문하려던 재민은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핑 도는 머리에 도로 누웠다. 많이 안 좋은 거면 같이 병원에 가자는 부모님의 말에 그 정도는 아니라며 대충 대답하고 잠들었던 것 같다. 눈을 뜨니 부모님은 이미 지성을 데리러 떠난 뒤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지성아 왜 그래, 왜 울어. 응? 형 좀 봐봐.”



 

   그리고 꿈속에서 박지성을 만났다. 고개 들지 못하고 엉엉 우는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지성은 재민의 시선이 잠시라도 닿는 게 불쾌한 사람처럼 굴었다. 끝내 고개를 들지 않고 재민의 팔을 내쳤다. 형 때문이잖아요. 형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형은 나쁜 사람이예요, 겁쟁이! 붉어진 눈으로 재민을 노려보며 소리친 지성은 그대로 재민을 지나쳐 달려갔다. 지성과 어깨를 부딪힌 재민은 저보다 그를 걱정하며 뒤를 쫓았다. 하지만 둘의 거리는 한없이 멀어지기만 할 뿐, 털 끝 하나 스칠 수 없었다. 



 

   형!



 

   재민은 그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형, 나 심심해. 꿈에 지성이가 나와서 그런가, 지성이 목소리가 들려.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뜨거운 눈이 감겼다. 다시 만난 지성은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대신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가진 얼굴로 웃었다. 재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옆에서.



 

   혀엉.



 

   눈을 떴다. 애기가 우리 집에 있을 리 없는데 왜 자꾸... 나 진짜 제대로 아픈가봐. 재민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형. 나 들어간다? 나지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프다며. 괜찮아?”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그림도 그려줘.

 

“...어, 응. 자고 일어나니까 좀 괜찮네.”

 

이건 무슨 캐릭터야? 형이 만든 거야?



 

   내 앞에 서있는 건 우리집 지성이인데, 왜 자꾸 애기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나 지성이 아프게 해서 벌 받나 봐.





 

14.

 

   나재민은 승부욕 한 톨 없는 사람이었다. 무기 들고 팀 먹고 싸우는 게임, 미친 듯이 운전하는 게임, 상품이 걸린 시합 등등. 그 중에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 얼마 없었다. 원체 승부욕이 없었기도 했고, 간혹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걸 억누르다 못해 포기했다. 이기는 거 좋지. 근데 지는 게 안 좋은 건 아니잖아. 이런 걸로 스트레스 받기 싫어. 그의 방어기재에서 비롯된 행동이자 버릇 같은 거였다.


 

   그런 재민에게 지성은 예외였다. 재민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억누르다 못해 포기했던 승부욕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 승부욕 따위가 아닌 것 같았다. 포기하는 건 당연히 안 됐고, 수십 번이나 울컥, 새어나왔다. 그런 거 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하려해도 자신이 키워낸 거라 없어지지도 않았다. 뭔지 알지만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고개를 들 때마다 애써 무시했다.


 

   되짚어보면 첫 만남부터였다. 아무리 내가 귀여운 걸 좋아한다고 해도 아무한테나 살갑게 말 거는 사람은 아닌데. 우리 지성이랑 이름이 똑같아서, 그래서 더 마음 쓰인 거 아닐까? 하지만 박지성과 나지성은 이름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달랐다. 같은 이름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건 그를 처음 만났던 2017년 봄에나 해당하는 것이었다. 되물어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결국 재민은 이 모든 게 박지성이라서 그랬던 거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성아. 나는 너를 향한 내 마음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똑같았던 거 알아. 근데 마냥 좋아할 수 없어서, 그래서 모른 척했어. 동생은 혼자 병원에 갇혀있는데, 혼자 잘 지낼 수가 없더라. 나 때문에 아픈 건 아니지만 항상 미안했어. 그래서 너를 비롯한 모든 걸 나중으로 미뤄버렸어. 지성이가 다 나은 후면 나도 좀 괜찮아질 것 같아서. 정말 이기적이지? 네가 날 기다리겠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말이야.





 

15.

 

   잠깐이라도 좋으니 자신만의 공간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지성에게 흔쾌히 자취방을 마련해준 부모님은 가끔씩은 집에도 오라는 말을 남기고 본가로 떠났다. 나만의 공간, 새로운 학교에서의 새로운 시작. 온갖 것이 새로웠는데 재민을 향한 마음만은 그대로였다.


 

   셋이서 만난 게 한 달 전이었다. 나지성의 고등학교 입학, 박지성과 나재민의 대학교 입학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마주치면 재민이 불편해 할 것 같아서 단 둘이 만날 일은 만들지 않았다. 길을 가다 마주치거나 다른 지인들이랑 같이 만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갈증 나 죽겠는데 꾸역꾸역 참았다. 마음은 정리가 안 되니 다른 것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야 지성아. 과팅 안 나갈래?”

   

“과팅? 나 그런 거 별루야.”

 

“그냥 다른 과 친구 만든다 생각하고 나가보자. 궁금하지 않아?”

 

“앟...”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된다, 어? 이따 같이 가는 거다?”



 

   어쩌다보니 온갖 만남의 장소인 학교 앞 호프집에 앉아있게 됐다. 그렇게 됐다. 과팅 궁금하긴 한데, 나도 바뀌고 싶은 거 맞는데... 이런 걸 하고 싶진 않았단 말이야! 왜 내 의견을 물어놓고 듣지도 않는 거야. 심지어 지성을 이 자리에 끌고 나온 동기는 주민등록증 확인하는 동안 화장실에 숨어있으라고 강요했다. 다행히도 상대 과의 씩씩한 2002년도 출생자가 지성을 구해준 덕분에, 둘이 테이블 구석에 나란히 앉아 식사만 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선호였다. 대화를 하다 보니 둘 다 과팅에 끌려 나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더라. 구석에서 02년생들의 조촐한 식사가 마무리되자 지성을 일으킨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애들아!!! 우리 둘 다 끌려와서 이게 뭐야. 우리한테 밥값 청구하면 안 된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귀가함.”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무르익는 분위기에 기분이 좋았던 건지. 지성과 선호의 동기들은 둘을 바라보며 알겠다고, 얼른 가보라고 했다. 언제부터 우리가 된 거냐~ 좋은 소식 기대할게! 뭐 이런 말 역시 빼놓지 않고. 지성과 선호가 호프집 문을 여는 순간,


 

쏴아아아아아-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헐, 지성아 혹시 우산 있어? 지성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너는?



 

“나도 없어. 근처에 편의점 있던데 하나씩 사서 쓸래? 내가 다녀올게.”

 

“아냐! 어차피 역 가려면 그 쪽으로 가야 될 텐데 같이 가자.”



 

   둘은 각자 입은 외투를 벗어 머리 위로 들고 편의점까지 뛰었다. 회색 구름이 꾸물꾸물 움직이는 게 잠깐 오고 멈출 소나기는 아닌 것 같았다. 우산 없는 사람들이 상당했는지, 몇 천원밖에 안하는 투명 우산은 이미 동이 난 상태였다. 집에 쌓인 투명 우산으로 장사하는 상상하던 지성은 차라리 비싼 우산을 사서 오래 쓰자. 투명 우산은 너무 많으니까... 비를 맞으며 집에 갈 순 없으니 더럽게 비싼 우산이라도 사서 쓰기로 했다.





 

16.

 

   집이 반대 방향인 지성과 선호는 역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역 안으로 향하는 계단을 열심히 밟던 지성은 눈을 의심했다. 계단 쪽으로 걸어오는 재민이 보였다. 바닥을 보며 멍 때리던 재민이 지성을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 지성에게 항상 보여줬던 그 미소였다. 지성은 지금 누가 봐도 놀란 상태였다. 갑자기 내 얼굴 봐서 놀랐구나. 가끔 속내를 다 보이는 그가 너무 순수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한참을 붙잡고 우리 햄쮜송. 완전 햄스터 같애. 여기저기 만지면서 맘껏 귀여워했을 텐데, 지성 옆의 다른 사람을 보고 당황해서 그런 행동할 새가 없었다.



 

“지성이 안녕.”



 

   무엇보다 지성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얼굴을 만들어낸 사람이 나라는 게 제일 싫어. 그래도 지성을 눈에 담는 건 잊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 지성이 형이랑 우연히 마주치는 건 어쩔 수 없지, 생각했다면 재민은 오히려 그 우연을 만들어내는 쪽이었다. 이번 만남은 그의 예상에 없었지만.


 

   선호는 재민이 지성에게 인사했던 순간부터 떠나는 그 순간까지 한참동안 재민을 바라봤다. 와, 나 저렇게 예쁘고 잘생기신 분 한국에서 처음 봐. 지성은 아무 말 없었다. 우리 방금 만났는데 상당히 실례인 거 알지만, 만나는 분 없으시면 소개.. 부탁해도 될까? 지성이 입을 열었다.



 

“저 형 결혼했어.”



 

   밖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던 재민은 귓속에서 울리는 지성의 목소리를 듣고 웃어버렸다.





 

17.

 

“꿀교양이라더니.. 갑자기 팀플? 완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



 

   지성이 겨우 잡았던 꿀 교양은 선호도 수강하는 과목이었다. 강의평가에 교수님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가득했으나, 그는 사실 OT 때 팀플의 ㅌ도 언급하지 않은 극악무도한 교수놈이었다. 정정기간도 이미 지나서 그 교양 수업에 나란히 발이 묶였다. 2인 3각 달리기가 가능할 것 같았다. 우리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내는 거 어때. 시간 괜찮으면 지금 카페라도 갈래? 다행히 둘 다 이번 수업이 끝이었다.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 지성은 선호와 함께 카페로 향했다.



 



 

   이건 누가 만들어낸 상황 아니고 진짜 우연. 재민은 제노와 만나고 헤어진 참이었다. 여기가 우리 지성이네 학교구나. 괜히 캠퍼스를 유유히 거닐며 산책 중이던 재민은 무심코 본 카페 창가에서 지성을 발견했다. 저번에 함께 있던 그 사람과 맥북을 사이에 두고 꽤 가까이 앉아있었다.


 

   내가 작년에 그냥 대학을 갔다면, 그랬다면 지성이 옆에 있는 사람이 나일 수도 있었을까? 지성이 다니고 있는 한국대학교는 재민이 현역 시절 합격했던 곳이었다. 그 때 그냥 욕심냈으면... 과거를 후회하는 건 재민의 특기가 아니었다. 이제부터라도 욕심 내보면 안 될까? 이기적이었던 만큼 너를 사랑하면 되지 않을까.


 

   카페에 앉아 기사를 읽어보고, 영상을 봐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성과 선호는 한참 벚꽃이 피고 있는 봄에 이런 걸 알아보고 있자니 좀 슬퍼져서 이만 마무리하기로 했다. 가방 정리를 하던 지성은 창밖의 재민과 눈 마주쳤다. 어? 재민이- 재민은 지성을 보고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형...? 나먼저가볼게연락해! 2초 만에 9음절을 발음한 지성은 카페 밖으로 급하게 나왔다.



 

“형! 재민이 형!!!”

 

“바빠 보여서 가려고 했는데, 왜 뛰어왔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어디 가던 길, 에?”



 

   아니 요즘 비가 왜 이렇게 와?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둘을 덮쳤다. 지성이 며칠 전에 구매했던 우산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펼치는 짧은 시간 동안 또 고민했다. 둘 다 비 피하려면 가까이 붙어야하는데, 너무 떨려서 더 앞으로는 못 가겠어. 어차피 형이 불편해 할 테니까 형 씌워줘야겠다. 지성은 우산을 앞쪽으로 기울였다. 재민은 우산을 빤히 바라보다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지성아. 형 위로해주라.”





 

18.

 

“혀엉, 저 여기 귀여운 게 났어요.”

 

“뭐야 지성아 너무 귀엽다~”



 

   지성이 속상해하거나 의기소침해할 때, 혹은 재민이 그럴 때. 재민은 위로를 핑계로 지성을 안거나, 그에게 안겼다.



 

“뭐라도 붙여야 할까요? 거울 볼 때마다 신경 쓰여요.”

 

“아니야 안 붙여도 돼. 형이 위로해줄게.”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지금처럼 지성의 얼굴에 귀여운 친구가 생겼을 때, 성적이 떨어졌을 때, 가족과 작은 다툼이 생겼을 때 등등.



 

“내가 맨날 만두 구워주는데 왜 이걸 못해줘.”

 

“무슨 맨날이예요, 오바.”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서로의 집에 자주 방문했던 둘은 줄곧 부부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했다. 지성이 재민의 요리를 맛보며 맛있다고 감탄하는 모습을, 재민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본다던가.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재민의 집에 아무도 없는 날이 더 많았기에 대부분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고, 가끔 지성의 집에도 갔다.


 

   어느 날, 오랜만에 지성이 생활하는 거실에 발을 내딛던 순간! 재민은 테이블에 펼쳐진 수많은 사진들을 봤다. 지성의 엄마가 전날 밤에 앨범 정리를 하겠다고 펼쳐둔 것들이었다. 



 

“왜 애기 지성이 사진을 못 보여주는데.”

 

“아, 너무 애기라 부끄러워요!”


 

 

   재민은 말벌 아저씨가 빙의한 것처럼 테이블 앞으로 달려가 앉았다. 왜 그러는지 연유를 몰랐던 지성은 수많은 사진을 발견하고 아앙! 소리 지르며 뒤따랐지만, 재민이 워낙 빨랐기 때문에 역부족이었다. 아니! 가끔 일부러 느긋한 척 하면서 답답하게 만들더니 이건 왜 이렇게 빨라! 결국 사진을 거실 바닥으로 다 밀어버린 지성은 허겁지겁 그것들을 주워 손에 쥐었다. 물론, 다 줍지는 못했다.



 

“형 진짜 너무 슬프다? 눈물 나려고 해.”

 

“왜 이런 걸로 눈물이 나요...”



 

   재민의 큰 눈에는 항상 주변의 빛이 담겨 있었다. 오늘따라 더욱 반짝이는 그 눈에서 정말 눈물이 떨어질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흥.”

 

“제가 어떻게 하면 형이 안 울어요?”

 

“애기 지성이 공개와 위로를 원해.”



 

   지성은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재민에게 넘겼다. 재민은 그것들을 받아들고 지성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 진짜 오바야. 지성은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입술 다쳐, 애기야. 입술 먹지 말고 형 위로부터 부탁해용. 재민은 상체를 기울여 지성과 가까이했다. 드디어 지성이가 해주는 포옹을 받아보는구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마음 같아선 사진을 펼쳐놓고 떠난 분께 전 재산을 드리고 싶었다. 진짜 그러진 않을 거지만.


 

   지성이 재민의 등에 양손을 올렸다. 애기가 많이 노력하는구만? 지성의 노력을 높게 산 재민은 그대로 지성의 품에 안겼다. 형 이제 안 울어용.



 

“...형 나빠요.”

 

“형은 지성이 좋아요.”





 

19.


 

“지성아. 형 위로해주라.”



 

   자신을 위로해달라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 저 비 맞았는데요.”

 

“괜찮아.”



 

   축축한 옷이 살에 붙는 그 찝찝한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너는 왜 이렇게까지 착해서 그 비를 다 맞아. 재민은 우산을 제게 기울인 지성을 안았다. 재민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지성은 그만 손에서 우산을 놓쳤다. 



 

“형! 우산 떨어졌어요, 잠깐만요!”



 

   이렇게 말하면 재민이 제 품에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세게 안아오니 떼어낼 수도 없었다. 애초에 재민을 상대로 힘써서 이긴 적이 없기도 했다. 우산을 줍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재민을 마주 안아주지도 못하고 애매한 자세로 멈춰있던 지성은 무슨 일 있어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라는 말만 반복했다. 



 

“형도 젖었으니까 이제 안아줄 수 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주인은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지성의 심장은 두근두근,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뜀박질했다. 어떡해. 내 심장소리 들리는 거 아니야?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근데 형이 위로가 필요하다는데... 나 팔도 아픈데. 그럼 형 몸에 손 올리는 거 괜찮지 않나?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욕심 부리면 안 되나..? 



 

“지성아 어떡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나야말로 어떡해요. 형이 나한테 위로받고 싶다는데 내 사심 채울 생각만 하고! 나 진짜 쓰레기인가 봐. 지성의 머리는 끊임없이 자책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성의 손이 재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힘을 빼고 좀 더 편히 기대오는 게 느껴졌다.



 

”미안해, 형이 잘못했어.“

 

“누구한테 잘못했는데요? 일단 어디 들어가거나 우산 쓰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형 감기 걸릴 것 같아요.”



 

   재민의 등을 토닥거리던 지성에게 근처 공원 팔각정이 눈에 띄었다. 잠시만요, 지성은 떨어진 우산을 주워들고 재민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딴엔 형의 손을 잡고 이끌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으나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재민이 그 손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지성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고해성사? 그거 한다 생각하고 저한테 말해요. 제가 조용히 들을게요.” 

 

“지성이 너한테 잘못한 것도 들어줘?”

 

“저한테요? 형이 저한테 무슨 잘못을...?”



 

   지성의 동그란 두 눈이 재민의 눈을 바라봤다. 재민은 그 눈을 마주봤다. 지성이 올곧은 눈으로 자신만을 바라볼 때면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구명조끼 하나 없이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 누워있는 기분. 근데 그게 두렵진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무섭게 만들지 않을 것을 아니까. 단 하나 불편한 게 있다면 가슴께부터 전신으로 퍼지는, 간질거리는 느낌이 그랬다. 재민에게 지성은 그런 존재였다. 이 바다는 재민을 맨몸으로 뛰어들고 싶게 만들었다.





 

20.

 

“거짓말했어.”

 

“...”

 

“그거 장난 아니었어.”

 

“네?”



 

   재민은 중요한 순간, 또는 특별한 순간을 제외하고 본인을 내보일 수 있는 패는 되도록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지성이 온 몸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표현했던 걸 떠올렸다. 네가 그렇게나 용기 내줬는데 이제 나도 그럴래. 21년 인생의 빅데이터를 통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음 기회는 없다. 아니, 다음이랑은 상관없이 지금을 놓치면 안 돼.



 

“나는 우리 지성이 너무 좋아.”

 

“...저도요.”

 

“형이 좋아하는 거랑, 지성이가 좋아하는 거랑 다를걸?”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방탈출 카페에서 내가 저런 식으로 말했었는데. 이번엔 형이... 하지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금 나한테 경고하는 건가? 약간 마지막 협상... 그런 건가? 장난한 게 아니었으니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말로 들렸다.


 

   아직도 형 좋아하는지 떠보는 건가봐. 우리가, 아니 형이 나랑 예전처럼 편하게 지내고 싶어 해. 그러니까, 다 잊었다고 해야 해. 형과 내 마음의 크기는 같아야 해. 내 마음을 다 보여주면 안 돼... 그냥 좋은 사람, 좋은 선후배. 그 정도에서 멈춰야 해. 지성은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입술을 움직였다.



 

“...같아요. 저는 형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제 나 안 좋아해?“



 

   지성의 마음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 받는 건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지구에 운석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얼마나 무서울지 상상해본 적이 있는데, 지금 그런 상황인 것 같았다. 잘 잠가두었다고 생각한 눈물샘이 다시 반응했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형이랑 모르는 사이되기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진짜 마지막으로 이것만 알려주세요. 그럼 저, 형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형이 무슨 답을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

 

“형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요, 나...”



 

   16살에 찾아온 첫사랑은 꽤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주먹을 쥐었지만 눈앞이 흐려져서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여기서 우는 모습을 보이면 정말 나한테 정 떨어질지도 몰라. 다 컸는데 어린 애처럼 행동하면 안 돼. 19살 지성은 거칠게 눈물을 닦아내며 자신을 추스르려 했다. 여기서 실수하면 예전만도 못한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나는 널 사랑하는 것 같아. 아니, 사랑해. 진짜 미친놈 같겠지만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지성아,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었어. 근데 내가 그 때, 너랑 같은 마음이라고 말을 못했어.“

 

“...”

 

“맘껏 미워해도 돼, 근데 나 잊지는 말아줘.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고개 들지도 못하고, 서러울 법 한데도 소리 안 내고 눈물만 닦던 지성이 윽, 막힌 소리를 내며 잘게 떨다 주저앉았다. 지성아. 애기 놀랄까봐 지성아! 외치지 않은 재민도 그 앞에 무릎 한 쪽 꿇었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 손을 마음대로 떼어내긴 싫었다. 지성이가 떼고 싶을 때 그러는 게 맞는 거니까. 또 맘껏 울게 두고 싶지만, 계속 울면 머리 아프고 코도 막히고... 불편할 걸 생각하니 그만 울었으면 좋겠고.


 

   결국 지성을 품에 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위로라는 명목이 없는 포옹이었다. 우리 애기, 물 조금이라도 먹으면 좋을 텐데 물이 없네. 형이 미안해. 너무 울면 머리 아프니까 차라리 나한테 욕을 해. 응?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을게. 사랑해. 사랑해, 지성아. 둘을 흠뻑 적신 것도 모자라 팔각정 주변의 소음까지 죄다 잡아먹은 소나기가 마법처럼 그쳤다.





 

21.

 

   지성은 넋이 나간 상태로 이끌려 자신의 자취방 현관에 섰다. 퍼붓던 소나기가 재민과 지성의 관계를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마법처럼 그쳤으나 둘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지성아, 수건 꺼내올게. 거기서 기다려. 재민은 딱 한 번 방문해본 이곳을 헤매지도 않고 수건을 꺼내 펼쳤다. 그리고 지성의 머리를 살포시 감쌌다. 동그란 머리통만 보고 있어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



 

   그런데 지성이 느끼기엔 재민이 저를 수건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수건으로 모자 만들 건가봐... 손길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대로 있으면 현관이 물바다가 될 것 같아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무언가 잡아버렸다. 집 안에 들어온 후로 지성만 바라보던 재민이 멈췄다. 당황한 지성도 같이 멈췄다. 몸은 찬데 겹쳐진 두 손은 뜨거웠다. 시계 초침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둘만 멈춰있었다. 분위기가 미묘했다.



 

“어, 어떻게, 그, 저 먼저 씻어도 될까요?!”



 

   지성은 재민의 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애기야! 너희 집인데 나한테 허락을 받으면 어떡해. 지성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재민의 웃음소리에 벌겋게 익어버렸다. 하, 씨이.. 그냥 내가 하겠다고 말할 걸, 수건만 받을 걸! 양 볼을 부풀리며 괴로워하던 지성은 양말부터 벗기 시작했다. 아, 진짜 귀여워. 환하게 웃는 재민의 귀도 붉었다.



 



 

“지성아, 머리 말리자.”



 

   우리 지성이 나오면 바로 머리부터 말려줘야지. 둘 다 샤워마친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머리가 젖어있었다. 재민은 더 젖은 머리를 하고 지성을 불렀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드라이기를 들고 있으니 지성이 쭈뼛쭈뼛 그 앞으로 걸어와 바닥에 앉았다. 집 안에 드라이기 소리만 가득했다. 재민은 지성의 귀와 목덜미를 유심히 봤다. 우리 지성이는 안 귀여운 데가 없네.



 

“좀 추운 것 같은데 라면 먹을까? 우리 지성이 라면 좋아하잖아.”



 

   누군가의 손길을 받고 있으니 눈이 감길 것 같았다. 저도 형 머리 말려줄게요, 말하려고 했지만 반쯤 몽롱한 상태라 모든 행동이 느렸다. 굳이 뭘 안 먹어도 괜찮은 상태였지만 으슬으슬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네에. 대답하고 말았다.


 

   배고프면 형이 뭐라도 더 해줄게. 재민은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에 냄비를 기울였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용. 그리고 그 그릇을 지성의 앞으로 옮겨주었다. 재민은 지성이 한 젓가락 뜨고 삼키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다른 그릇을 하나 더 꺼낼 수 있었다.





 

22.

 

   식사라기엔 좀 부족한 시간을 가진 둘은 TV 앞으로 향했다. 따뜻한 걸 먹으니 금방 노곤해져서 당장 설거지를 하긴 힘들 것 같았다. 지성이가 생각보다 더 어색해하네. 영화라도 틀어줘야겠다. 재민은 TV를 켜고 영화 탭에서 겨울왕국을 결제했다. 예전에 지성이 안나를 좋아했던 게 기억나서였다. 그 때 나랑 안나 중에 누가 더 좋냐고 물었었는데. 안나는 그냥 캐릭터잖아요. 아무래도 맛있는 거 사주는 형이 좀 더 좋죠? 지성 모르게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질투하던 재민의 눈에 반들반들한 입술이 들어왔다.



 

“결제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저 아무거나 괜찮아요, 영화 아니어도.”



 

   오구, 그랬어용? 형이 지성이랑 보고 싶어서 결제했어용. ...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자꾸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지성의 말이라면 자판기처럼 모두 응답했던 사람이 조용하니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한국인답게 쇼파를 등 받침대로 이용하고 있던 참이라 꽤 가까이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요? 무릎을 접고 그 위에 제 양손을 올려뒀던 지성이 갸우뚱했다. 똑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던 재민이 상체를 일으키며 팔을 뻗었다. 두툼한 손이 지성의 목 뒤에 닿았다. 


 

   지성은 재민이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혹시 또 위로타임인가?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라면 먹고 바로 화장실에 가서 얼굴 확인한 것도 잊고, 지금 이 공간에 위로 받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갸우뚱하는 게 애교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네, 얘가. 손에 힘이 들어가며 두 얼굴이 가까워졌다.


 

   에? 둘의 입술이 닿자 지성의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아마 주인공과 그 머릿속에 사는 세포들의 이야기를 그렸던 만화 속이었다면 온 몸의 세포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을 거다. 지성이 숨 쉬는 법을 잊고 굳어버렸다. 재민이 입술을 뗐다.



 

“숨은 쉬어야지, 바보야.”



 

   들이쉬었던 숨이 목구멍 끝에 멈춰있었다. 지성이 숨을 내쉬자 재민이 다시 손을 뻗어 지성의 오른쪽 뺨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동그란 귀마저 귀엽게 느껴졌다. 흡, 맨몸으로 잠수하는 사람처럼 자꾸 지성의 숨이 멈추자, 재민이 아랫입술을 물어왔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감촉에 놀란 입술이 열리며 숨이 터져 나왔다. TV 속의 안나가 사랑은 열린 문이라며 노래하는 동안, 재민은 지성에게 계속 숨을 불어넣었다.





 

23. 

 

“...안나가 더 좋아질 것 같아요.”



 

   누가 우리 찹쌀떡 같은 지성이를 녹인 거야! 지성은 붉어진 볼을 제 손으로 감쌌다. 굉장히 흐물흐물한 상태였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으악...! 안나 노래에 그거, 그걸 하다니... 사랑 노래잖아, 완전 신기해. 타이밍 대박이야 솔직히.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다듬어지지도 않고 더 도톰해진 입술로 출력됐다. 재민의 짙은 눈썹이 꿈틀댔다. 혹시 우리 애기... 안나랑 입술 맞댔니. 



 

“내가 유치해 보일까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지성아.”

 

“네?”



 

   재민은 지성을 숨 쉬듯이 귀여워했다. 지성 역시 재민만큼은 아니지만 가끔은 형이 귀여워보였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내면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 마냥 형을 달고 다니게 될까봐 말해본 적은 없다. 



 

“나야, 안나야. 하나만 골라. 안나는그냥캐릭터니까맛있는거사주는형이좋아요, 이런 말 안 돼.”



 

   귀여워! 근데 이렇게 대놓고 귀여운 건 처음이었다. 지성은 자기도 모르게 형 귀여워요 흐흫. 말해 버릴까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왜 웃어어. 너 형 놀릴 생각 하지 마. 내가 너보다 밥을 2년은 더 먹었다구. 재민은 지성의 허리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볼 말랑말랑.. 누르고 싶다. 어깨에 눌린 재민의 볼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만 열심히 귀여워했다. 그리고 애원하다시피 매달리는 재민의 팔에 손을 얹었다.



 

“안나가 좋아요.”

 

“그래애... 나는 우리 지성이 말 다 받아들일 수 있어.”

 

“...”

 

“그래도 나중엔 내가 더 좋다고 해줘.”

 

“...형은 사랑하구요.”



 

   재민은 심장을 붙잡은 채로 쓰러지고 싶었다. 입 맞추기 전 갸우뚱에 이어 2연타였다. 하지만 지성의 곁에서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몸에 힘을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도 우리 지성이 너무 좋아. 재민이 지성의 팔에 얼굴을 열심히 비비적거렸다. 형은 목이 길고 약간 예쁘게? 예쁘장하게 생겨서 사슴 같았는데, 오늘은 꼭 고양이 같아. 





 

24.

 

“저도 형한테 해주고 싶은 말 있어요.”

 

“뭔데?”



 

   재민이 고개를 들어 지성을 바라봤다. 재민이 귀여운 고백을 했으니 지성도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유치하다 생각할까봐 말 안하려고 했다는데, 속마음 말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야! 나를 사랑하는 형이 용기 냈으니, 형을 사랑하는 나도 용기내고 싶어. 내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다 사실 뿐인데, 안 믿어주면 어떡하지? 솔직히 걱정도 따랐다. 그래도 꼭 말하고 싶었다.



 

“저 진지하니까 말도 안 된다고 막 웃으면 안 돼요.”

 

“사랑한다는 거 말고 더 진지한 말이 남았어?”

 

“아잇. 이상한 사람도 아니니까 믿어줘야 돼요.”

 

“알았어, 지성아. 들을 준비 됐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근엄진지한 걸까. 가끔 지성은 재민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귀여우니까, 상상력이 풍부한 건 좋은 거니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밑밥을 까는 건 처음이었다.



 

“그... 사실 저, 형 따라서 도시고등학교 갔어요.”

 

“나? 나를 언제부터 알았는데?”

 

“열다섯 살? 그 때부터요.”

 

“정말~? 우리 학교도 달랐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형 목소리 듣고 형이 거기 갈 거란 걸 알았어요.”



 

   말하면 말할수록 자신감이 없어졌다. 분명 아까까지는 용기가 가득했는데 입을 열 때마다 조금씩 소모됐는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을 모르는 데도 형이 하는 말이 들렸어요, 내가 형 앞에 서있지 않은데도 그냥 귀에서. 안 믿기죠? 처음엔 내가 아픈 줄 알았어요. 이제 제일 중요한 말만 남은 상태였다. 어쩌면 우리가 만나게 된 이유, 우리의 운명. 근데 이런 말을 누가 믿어줄까? 그냥 길 가다 형을 봤다고 할까? 그래서 알게 됐다고 하면 되잖아. 장난이라고 하면 형도 그냥 웃어줄 것 같은데. 지성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자 재민이 입을 열었다.



 

“지성아, 계속 말해줘. 듣고 있어.”



 

   사실 그때부터 형 목소리를 들었어요. 형이 하는 말이 그냥 다 저한테 들렸어요. 완전 거짓말 같죠-라는 말하는 저를 상상해봤어요. 지성이 멋쩍게 웃었다. 재민은 지성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 웃음 지었다.



 

“상상 아니고 진짜 아냐? 나는 지성이가 하는 말 다 믿어.”



 

   형도 지성이 목소리 들을 수 있다면 안 믿을 거야? 우리 애기는 믿어줄 거잖아. 그러니까 나도 믿어. 왜냐하면, 나도 진심이니까. 지성이 퇴원하던 날, 몸이 안 좋아서 침대에 누워만 있었는데 네가 꿈에서 서럽게 울더라. 나중엔 다른 사람이랑 웃으면서 사라졌어. 그리고 눈을 떴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어. 처음엔 벌 받는 줄 알았는데 그냥 우리가 운명이라서 그랬나봐. 좀... 오글거려? 근데 형은 완전 진심이야.



 

“우리 애기, 형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고생했네에. 그럼 내가 평생 책임져야겠다. 그치?”

 

“정말요? 그럼 내가 한 말 중에 기억하는 거 있어요?”


 

   부끄러웠는지 평생 책임진다는 말은 못 들은 체 하고 질문하는 지성의 볼을 꼬집었다. 말랑말랑, 기분 좋아. 한 손으로는 부족해서 양손 가득 볼 살을 늘렸다.





 

25.

 

“선호? 그 친구한테 나 결혼했다고 말한 거...?”



 

   지성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볼을 괴롭히던 재민의 손은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떠있었다. 살면서 이 정도로 쪽팔렸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질투 때문에 한 말을 형이 들었다는 부끄러움과 쪽팔림에 온 몸이 뜨거웠다.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손에 꽉 막힌 코가 호흡하려다 킁, 소리를 냈다.



 

“애기야, 울어?”



 

   재민은 그 소리를 듣고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놀리고 싶은 마음에 그런 말을 한 건 맞지만 우는 것까진 생각 못했는데. 더 울면 우리 지성이 더 빵빵해지는데...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진 않았다.



 

“저 지금 너무 쪽팔려요...”



 

   목소리가 손바닥 안에서 흩어졌다. 재민은 다시 손을 뻗어 지성의 얼굴을 붙잡고 손톱부터 시작해 마디, 손등, 손목까지 입 맞췄다. 곧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게 느껴져 팔을 잡아 내리게 했다. 재민의 눈이 지성의 얼굴 곳곳을 훑었다. 지성은 재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알을 계속 굴리며 입술을 씹었다.



 

“왜 나를 제대로 못 봐.”



 

   다쳐. 재민이 이에 짓눌린 입술에 손을 올렸다.



 

“아 진짜 나재민...!!!”

 

“이게 어디서 형 이름을 막 불러어!”



 

   연하 애인이 내 이름 석자를 부른다? 형 대접(?)을 해주지 않은 것에 발끈한 재민은 궁디팡팡형을 내렸다. 맨날 그런 것도 아니고오! 가끔은 그럴 수 있죠! 혹시 꼰대예요? 둘이 하는 말만 들으면 형한테 대드는 동생과 그런 동생을 혼내는 형이었는데, 분위기는 영락없는 커플이었다. 재민은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지성을 붙잡고 입술이 닿을 수 있는 곳은 전부 찾아다녔다. 지성을 껴안은 팔은 풀지 않은 채였다. 평생 그렇게 생활할 기세였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스물둘 재민은 자취방을 얻었고, 스무 살 지성은 자취방을 뺏겼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고 말한 게 문제였던 것 같다. 1년이면 충분했지? 이제 집으로 와. 나중에 돈 벌면 그 때 독립해. 자취방에 있던 대부분의 시간을 재민과 함께 했던 지성은 본가에서 통학하기 시작했다.


 

   재민은 일찍 자겠다고 약속해놓고 늦게까지 핸드폰 게임하다 잔 제 애인을 보며 잔소리했다. 핸드폰 게임 일절 하지 않는 재민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자다 일어나 물 한 잔 마시는데 지성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진 않았는데, 요즘 유독 자기주장이 심하네... 근데 자기 할 말 다 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누운 건 열두 시에 누웠는데요, 잠이 안 와서 핸드폰을 만져버렸어요. 해명하는 거 다 들어줬다.



 

“저 늦게 자는 거 싫어요?”

 

“당연하죠?”



 

   불 다 꺼놓고 눈 아프게 게임하지 말고 차라리 형한테 전화를 해. 자는데 어떻게 전화해요, 나 때문에 깨잖아. 괜찮으니까 해. 형 목소리 들으면서 자. 둘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냥... 나 형 집에서 살면 안 되나? 그럼 형이 나 관리할 수 있잖아여.”



 

   통화 안 해도 되고, 그냥 형이랑 대화하면서 잘 수 있어요! 완전 좋죠? 진정한(!) 성인이 되고 부쩍 앙큼 지수가 높아진 지성이 초강수를 뒀다. 그냥 형이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 안될까요? 응? 나 지성인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아직 지성의 직진이 익숙하지 않은 재민이 입 찢어져라 웃었다. ...그럼 그럴래? 언제 들어올 수 있는데? 



 

“저기요? 여기 사람이 있답니다.”



 

   떫은 얼굴로 음료 잔에 꽂혀 있던 빨대를 괜히 휘적거리던 나지성이 참다못해 한 마디 던졌다. 재민은 이 공간에 단 둘이 존재하는 것처럼 박지성만 바라봤다. 앟, 지성아 미안. 슬쩍 눈치를 본 박지성이 사과했다. 옛날부터 느낀 거지만 역시 둘 다 이상해. 괜히 사귀는 게 아니라니까? 별 것도 아닌 이유로 형 자취방에서 살겠다는 박지성이나, 잔소리하다 말고 귀신 같이 웃는 나재민이나... 둘 다 이상해. 나지성은 그냥 못 볼 거 봤다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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