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운명 트라이얼
시샨
그는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운명은 변하는가. 변한다면 그 변화까지도 운명적인가. 운명이 대체 뭐길래 나는 지금 이렇게 괴로운가.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고 행동이 있기에 상황이 있다. 지성이 피곤한 이유는 어제 밤을 새웠기 때문이고 밤을 새운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에서 비롯됐으니 즉 지금 지성이 죽도록 피곤한 것은 따지고 보면 다 그가 자초한 현상이다. 인과응보. 즉 인과율. 혹은 카르마. 다른 말로 업보. 죽도록 피곤한 업보 보이 지성은 반쯤 졸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학교 가면 책상에 앉자마자 바로 고개 처박고 4교시까지 풀수면이다.
그는 졸린 눈을 비비느라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섬유유연제 향기가 훅 느껴진다 싶더니 누군가 지성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찌송아♡"
다가온 거리감이 가깝다.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니 재민이 씩 웃었다. 그의 얼굴은 아침에도 반짝반짝 빛이 나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울 찌송이 어제 또 잠 못 잤어?"
"아니요.“
"아니기는 눈이 더 작아졌는데 지금."
지성은 거울을 봤다. 어제랑 똑같은 것 같은데. 스으으읍 맥이나. 재민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뭐 하느라? 응? 뭐 하느라 못 잤는데?"
"아 아니라고요오"
붙지마아아악. 재민이 양손으로 지성의 뺨을 잡으며 엄지손가락으로 눈 아래를 문질문질거렸다. 다크써클이 한층 짙어지는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지성이 뜬금없이 물었다.
"형. 형은 운명이 뭐라고 생각해요?"
음? 재민이 가볍게 되물었다.
"운명? 갑자기?"
"네. 운명."
"운명이 뭐...운명이지?"
전 요즘...운명이란 정말 무서운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정해진 미래가 있다는 게 좀 소름이잖아요. 물론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지만 그게 어려우니까...그리고 바꿀 수 있다면 그게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지성이 중얼중얼거렸다. 재민의 동공에 힘이 풀리면서 초점이 점차 흐릿해졌다. 저런 고민을 하느라 밤을 새우는 건가...? 심각한데...? 비록 영혼은 없을지언정 그래도 성실하게 리액션 해줬다. 그치~ 느낌 알아~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울 지성이 요즘 힘든가 보네. 하긴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니까 입시 스트레스로 돌아버릴 법도 하지. 재민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성이 요새 학원 다녀? 딱히요. 논술 준비해? 그것도 딱히. 뭐 하는 것도 없으면서 맨날 바쁘고 학교에서 조는 이유는 대체 뭐야.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재민은 이번에도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재민은 지성에게 딱 붙어 있었다. 지성은 재민에게 볼이 잡힌 채 멀거니 엘리베이터 내 광고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오늘의 날씨와 온도, 습도, 미세먼지 농도, 그리고...
지난밤 ㅇㅇ구 ㅇㅇ동 ㅇㅇ사거리 악마 출현으로 현재 복구 중. 주민들의 주의 바랍니다.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 같은 제보영상이 모니터 귀퉁이에 나왔다. 새까만 그림자 같은 악마가 꿈틀거리며 전봇대며 신호등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그 악마를 상대로 싸우는 마법소년의 모습도 적나라하다. 화질도 안좋고 허술한 가면을 쓰고 있어서 마법소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가깝네. 조심해야겠다. 재민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리자 지성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 도착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재민은 지성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애기 어르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지성의 교실 앞에서 헤어지면서도 애 다루듯이 말했다.
"수업시간에 졸지 말구용."
"형도 눈 뜨고 조는 거 다 알아요. 동혁이 형한테 다 들었어요."
재민은 한 번 더 지성의 엉덩이를 강한 악력으로 꾹 쥐더니 3학년 교실로 가버렸다. 자신의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위로 엎어진 지성은 팔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 한숨 푹. 각성한 지 꽤 됐고 그동안 퇴마한 자잘한 악마의 수도 꽤 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소년 라이프는 쉽지 않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악마와 그에 따른 자동반사적 변신과 아무리 생각해도 과한 변신복장과 초상권이고 뭐고 유튜브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자신의 활약영상과 댓글....마법소년이 된 그 순간부터 아이러니하게도 지성의 목표는 마법소년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는 것. 마법소년에겐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고 그걸 해명하면 마법소년이란 의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는 동시에 그가 매일 밤 고민하느라 날밤 꼴딱 까고 있는 원흉이다. 시히히바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나재민 때문인데. 지성은 책상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마법소년 박지성, 그의 사명은 앞으로 한 달 후 사상 최강-최악의 대마왕이 되어 지구를 위협할 나재민을 없애는 것이다.
절대운명 트라이얼
난세였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전 세계 정상들이 난세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악마와 악마에 대항하는 마법소년이라는 존재가 공공연해진 지 그만큼 오래됐다는 뜻이고 말세니 종말이니 호들갑 떠는 시기가 애초에 지나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발단은 남극의 가장 큰 빙산대륙이 두 개로 쪼개지면서 두꺼운 눈과 얼음에 가려져 있던 뼈들이 드러난 어느 날이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그 어떤 공룡도 인간도 아닌 기이한 동물들의 뼈였다. 아니, 동물은 맞는 걸까? 이건...빙하기 이전의 뼈입니다. 얼마나 전이요? 측정범위초과. 곧장 대규모 발굴단 조직되어 거대한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회사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도 그들은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밤이 되었을 때도 그들은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당연히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정말 괜찮을까요? 예를 들면 고대의 바이러스라던가. 에에 괜찮습니다 모든 발굴은 완전히 멸균소독된 방역을 거쳐 진행되고 있으며...뭐 괜찮으려나. 사과 파먹는 애벌레처럼 끝도 없이 파 내려가던 인부들은 무언가에 도달했다.
멸균은 해도 멸악은 하지 못했다. 차원과 차원 사이 한랭이란 결계에 구속되어 있던 지옥의 악이 깨어난 것이다. 애초에 미친 듯이 구덩이를 파 내려갔던 것부터가 이미 홀렸던 것인지 모른다.
다른 차원에서 흘러들어온 기운에 의해 지구는 난세에 접어들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악의 기운에 물든 사람들이 악마로 각성했으며 그 악마들이 다루는 사역마, 즉 괴수들의 출현했다. 이들은 다른 차원의 인과율에 따르는 존재였기 때문에 이 세계의 물리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악마의 출현은 곧 대항마의 출현이기도 했다. 악마로 인해 어그러진 인과율을 복구하기 위해 그들에 반하는 존재들, 즉 마법소년이었다. 난세기 초반엔 물론 혼란스러웠다. 물리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재난을 일으키는 악마와 신비한 힘을 사용하는 마법소년이라니. 상식의 전복이고 보편성이란 개념이 재정의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난세 27년, 사람들은 적응했다. 이제 악마는 교통사고 수준의 재난으로, 마법소년은 훌륭한 퇴마사이자 각 행정구역 마스코트 정도 되는 존재로 여겨졌다.
열여덟 살 박지성은 얼마 전 마법소년으로 각성했다. 정확히는 간택 당했다. 예고 없이 그의 앞에 나타난 앙증맞은 지팡이처럼 생긴 존재가 지성이 마법소년으로 선택되었다고 말했다.
"아니...왜 제가?"
일단 감사합니다....근데 왜 제가?? 지성은 엉겁결에 고개 꾸벅 숙여 인사를 하면서도 의아한 눈초리를 치켜떴다. 혹시 당신들은 신이냐는 지성의 질문에 지팡이는 보이지 않는 고개를 저었다. 우린 인과율의 조정자들이야. 신은 아냐. 엄밀히 말하면 우린 존재하지 않아. 우린 일종의 현상이고 법칙이고 에너지라고 볼 수 있어. 그들은 다차원에 존재하는 세계의 인과율이 모종의 이유로 일그러지기 시작하면 간섭을 시작했다. 인과율의 조정자라는 포지션 상 악마들에게 직접적으로 손댈 수는 없었고 대신 마법소년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했다. 실체 있는 인간에게 힘을 부여해 마법소년으로 각성시킨다. 악마로 인해 일그러진 인과율을 마법소년을 통해 조정한다. 지성은 다 이해하진 못했다. 뭐 아무튼 신은 아닌데 신이랑 비슷한 일을 한다 이거잖아.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다.
"그래서...왜 제가?"
지성이 거듭 물었다. 네가 마법소년으로 각성한 건 너만이 해결할 수 있는 위기가 닥쳐오기 때문이야. 지팡이가 말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어. 다 이유가 있어.
"만약 제가 하기 싫다면요? 그거 위험하잖아요."
"그래. 그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줄게."
의외로 지팡이는 흔쾌히 대답했다. 지성은 이미 마법소년의 자질을 부여받은 상태라 되돌릴 순 없지만 활동을 할지 안 할지는 스스로 선택하라고 했다. 지성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놓고 거절하면 미안하니까 그냥 시간 좀 끌다 보면 지팡이 쪽도 지쳐서 걍 하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지성은 하루 만에 지팡이를 찾으며 꺽꺽 울어야 했다. 마법소년의 자질을 부여받았다는 말의 뜻은-주변에 악마가 나타나면 그냥 자동변신이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하교 버스 안에서 갑자기 마법소년으로 변신한 지성은 버스가 정차하자마자 소리 지르면서 뛰어나왔다.
"이런 옷이라고 미리 말 해줬어야죠!"
아닌 게 아니라 복장이 민망했다. 위아래 짧은 세라복, 근데 통은 커서 헐렁한 바람에 속이 다 보였다. 겨울에는 여기에 어그부츠와 복슬복슬 팔토시가 추가된다고 한다. 어째서 이런 복장을 해야만 하냐는 질문에 지팡이는 전부 다 깊은 뜻이 있다고 했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니까.
"마법소년이 갖는 힘의 근원은 기본적으로 사랑이거든. 악마와 대척점에 있는 거지."
"근데 그거랑 이런 옷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이상성욕도 사랑은 사랑이야."
"그니까 뭔소리냐고요."
지성은 가뜩이나 꼰대 같은 마법지팡이를 더욱 자극했고 지팡이는 극대노하여 보이지 않는 침을 튀기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인과율에 의해 현 세계에 가장 적절한 전투복장으로 설계된 거니까 토달지 말라고 빡빡 우겼다. 개구라 같았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민망한 복장을 입은 애가 될 건지 마법소년이 될 건지 선택해야 했다. 이게 선택이야??? 이걸 선택이라고 하나??? 지성은 그렇게 마법소년 라이프를 강매당했다. 차라리 변신해서 악마를 무찌르면 변신해제라도 가능하지 무찌르지 않으면 그냥 계속 그 상태로 돌아다녀야 했다.
최악과 차악 중의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현재, 낮에는 평범한 고등학생 밤에는 대한민국을(좀 과장이고 정확히는 강남구 정도) 지키는 민망복장 마법소년?! 이 지금 지성의 상태였다. 지성이 뭔가 질문할 때마다 지팡이는 인과율이 어쩌고 하면서 정확한 대답을 회피했다. 그냥 설명하기 어려우면 인과율을 들먹이는 것 같았다. 지성이 투덜거릴 때마다 지팡이는 역정을 냈다. 어떤 평행세계의 마법소년들은 성스러운 뒷**으로 악마의 간악한 자*에 깃든 사악한 정*을 뽑아내는 정화섹*로 퇴마해야 하는 세계도 있다고 들었을 때 지성은 그냥 이정도에 감사하기로 했다. 마법소년이 주변에 정체를 숨겨야 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복장이 씹민망해서 차마 본인임을 밝힐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지팡이가 말한 그만이 해결할 수 있는 위기, 일명 '지구멸망 시나리오 927260번'. 그걸 해결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마법소년이 된 후 지성은 자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위기는 언제 닥치는 걸까. 빨리 왔으면 좋겠당. 지구멸망이라니까 무섭기도 한데 그래도 그것만 해결하면 끝인 거잖아. 내 역할은 끝.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희망에 의지해 지성은 입으론 싫다고 하면서도 몸으론 착실하게 마법소년 활동을 해왔다.
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지구멸망 시나리오 927260번의 주체가 다름 아닌 나재민이며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재민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
나재민. 지성보다 한 살이 많은 열아홉 살이고 현재 지성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이며 옆집 이웃사촌이기도 하다. 클래식의 정점을 달리는 순정만화 같은 외모에 능글맞고 여유로운 태도. 솔직하기 짝이 없는 언행. 편한 사람들 앞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돌발 행동을 하는 또라이적 기질. 또...또....박지성만 보면 눈이 돌아가서 지쏭아아♡를 외치며 달려오는 집착맨이다. 지성의 일이라면 부모님보다도 더 유난스럽게 굴어댔는데 이젠 주변에서도 전부 그러려니 포기한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설정 과다. 세상에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할 때 그 '이런 인간'을 맡고 있다.
재민과 지성은 지성이 기억도 잘 못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이웃사촌이었다. 지성은 가물가물하지만 그가 유치원생일 때부터 재민이 지성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물고 빨았다고 한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 죽죽 빨아서 겨울만 되면 지성의 뺨이 발갛게 텄다. 옛날 사진을 보면 자두처럼 통통하고 새빨간 뺨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관계는 재민이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서로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잠깐 정체기에 놓였다.
그들은 지성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쯤 재결합했다. 재결합이란 단어가 좀 웃기기도 한데 가장 적절한 표현 같다. 지성의 집이 전세계약이 끝나면서 이사를 했는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재민의 옆집이었던 것이다. 형이랑 지성이는 운명인가봐용. 지성이 재민과 같은 학교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지성의 손을 꼬옥 쥔 재민이 했던 말이다. 중학교 시절 동안 거의 만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은 재민이 하나도 변하질 않아서 신기했다. 그 시간들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재민은 지성에게 더더욱 찰떡처럼 붙어다녔다.
지성이 그와 친하다고 하면 다들 한번쯤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겉으로 보기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지성은 자신만큼 재민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거라고 자부했다. 재민이 형? 그 형은 내가 잘 알지. 그 형 원래 이상한 형이야. 근데 사람은 착해. 응응.
때문에 마법지팡이가 알려준 지구멸망 시나리오 927260번을 들었을 때 기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나리오의 내용은 이랬다 :
평범한 고등학생 나재민은 약 한달 후 우연한 계기로 악의 기운에게 몸을 빼앗기고 숙주가 되어 악마로 각성한다. 그는 사상 최강, 최악의 대마왕 나나로 성장하여 수천 마리의 사역마를 풀어 세계를 지배하고 거대한 나나왕국을 건설, 향후 천이백년 간 인간들을 노예로 부리며 절대독재를....
재민이 형이?!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지팡이는 너무도 단호했다. 지구의 미래가 달린 절체절명의 위기치고 개연성도 설득력도 없지 않냐는 지성의 땡깡에도 지팡이는 멸망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했다. 지성의 사명은 이 시나리오의 실현을 막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재민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내 손으로 재민이 형을? 그게 지구의 위기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지소이, 무슨 생각해?"
재민이 지성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쉬는 시간이 되어 겨우 눈을 뜬 지성이 책상에 얼굴을 붙이고 멍 때리고 있을 때였다. 지성은 흠칫 놀라 자기도 모르게 품 속의 마법지팡이를 꺼낼 뻔했다. 지성은 그냥 가슴께에 손을 올려 목덜미를 긁는 척 했다. 형 퇴마하는 생각...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재민이 선수를 쳤다.
"내 생각하고 있었구나? 내가 지송이 생각하는 것처럼?? 형은 감동이야...."
"어떻게 알았어요?! 귀신이네."
재민이 생각없이 던진 말에 지성이 놀랐다. 진짜 찔려서 그렇게 대답한 건데 대각선 자리에 앉아있는 애가 그걸 듣고 으ㅡㅡ 하고 표정을 구겼다. 드디어 박지성도 나재민한테 옮았구나. 재민이 지성을 보며 눈을 빛냈다. 뭔가 불길함을 느낀 지성이 화장실을 핑계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재민이 옆자리에 꼭 붙어 앉아버리는 바람에 도주로가 차단되었다. 재민이 지성에게 물었다.
"형 오늘은 학원 안 가는데, 집에서 같이 밥 먹을까? 부모님 늦게 오시는 날이지?"
형이 맛있는 거 해줄게. 너 좋아하는 만두 구워줄까? 재민이 소유*에게 냉면 비벼주는 백종*처럼 말했다. 우리 애기 젓가락 준비^^ 만두 집을 준비^^
지성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아....근데 저 오늘은 바빠요."
"왜애? 무슨 일 있어?"
"요새 좀 바쁜 일이 있어요."
지성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구체적인 대답을 피했다. 지구를 지키느라 바쁘다. 재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지성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집요하다 집요해. 종이 울리기 직전에서야 자기 교실로 돌아갔고 지성은 한숨을 쉬었다.
*
"다녀오겠습니다-"
독서실 가는 척하면서 가방에 마법지팡이를 챙겨 나온 지성은 오늘도 강남구의 치안을 위해 힘썼다. 지팡이가 탐지한 악의 기운을 따라가면 악마로 변한 인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성은 악마들을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인해 마법지팡이를 칼처럼 휘두르며 악마를 무찔렀다. 퇴마가 뭔진 잘 모르겠고 일단 패고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이 방법이 다행히 잘 들어맞았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는 건 피해를 늘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이런 복장을 하고 있는 꼴을 들키기 싫어서였다. 어둠 속의 히어로가 된다는 건 이런 뜻이구나...얼굴 없는 히어로란 차마 얼굴을 깔 수 없는 히어로였구나....
다리 스무 개 달린 벌레처럼 생긴 악마를 퇴치하면서 너무 힘을 쓴 지성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강한 산성액을 내뿜는 벌레였던 탓에 전투복장이 너덜너덜 녹아버렸다. 사실 이런 악마들은 전부 꽤 강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진 않았다. 인과율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자질구레한 존재들이었다. 지성의 힘을 100퍼센트 쓸 필요도 없었다. 지성이 사명을 이루기 전 주변을 깨끗이 하는 청소 작업 정도. 지팡이는 악마를 무찌른 지성을 보며 신나게 떠들었다.
"제법 실력이 늘었는데?"
"늘 수 밖에 없잖아요. 살려면."
"처음엔 겁도 많고 움직이는 것도 어설퍼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역시 넌 강한 마법소년이 될 거야. 나재민이 악마로 각성하고 나서도 무리없이 퇴마할 수 있겠어!"
지성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그 방법 밖에 없는 건가요?"
당연하지.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게 너의 사명이자 나재민의 운명이라고. 지팡이가 시나리오를 알려준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일주일이나 흐른 것이다. 운명의 그날까지 약 3주가 남았다. 지성이 사명을 이루면 지구는 안전하고 나나왕국은 건설되지 않으며 지성은 다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 자유를...
진짜 그러면 된 거야?
그게 인과율의 조정자들이 내린 가장 이상적인 결론?
재민이 형은 좋은 사람인데. 악마가 되는 인간들은 오로지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 사람이 악하다거나, 나쁜 짓을 했다거나, 그럴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악마가 되는 게 아니었다. 뒤틀린 운명 속에서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었다. 지성은 방금 퇴마한 악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악의 기운이 소멸하자 본체인 인간이 다시 드러났다. 그는 쇼크 상태로 덜덜 떨고 있었다. 퇴마 당한 인간은 혼이 쏙 빠져나가 극도로 쇠약한 상태가 되었다. 자기가 누군지, 무슨 짓을 한 건지 기억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심한 경우엔 혼수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일단 악마가 되고 나면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만들 순 없다. 인과율의 기본 원칙 중 하나다. 이미 발생한 일은 다음 사건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지성은 지팡이가 들려준 지구멸망 시나리오 927260번을 곱씹었다. 하루에도 수십번 씩 곱씹는다.
그게 재민의 운명이라면, 운명을 바꿀 순 없는 걸까?
지팡이는 지성의 질문에 곧장 대답했다.
"물론 운명은 가변적이야.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삶의 전환점이 되어 운명을 완전히 바꾸기도 해."
인과율의 조정자들은 '거의 실현될 것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미래'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한 카운터로 마법소년을 이용하는 거고. 그렇다는 건 재민의 운명 역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아주 어렵고 바뀔 확률이 적은 것뿐.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 누군가, 이 경우엔 지성이, 재민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지팡이는 경고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네 행동이 미래를 바꿀 수도 있지만 더 악화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어."
"에이...설마 더 나쁜 일이 생길까요?"
재민이 형이 대마왕이 되어 전인류가 재민이 형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며 떠받드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생기겠냐고요??? 생각해보니 재민이 형이랑 엄청 잘 어울리는 미래이긴 하네. 어쩐지 재민이 마왕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었다. 지성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래. 난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볼 거야. 남은 시간 동안 재민이 형의 운명을 내 손으로 바꿔보겠어.
굳은 결심을 한 지성은 변신복장을 벗기 시작했다. 이것도 마법소년의 애로사항 중 하나다. 변신은 자동인데 탈의는 수동이었던 것이다. 악마를 퇴치하고 시간이 지나면 변신복장이 저절로 사라져서 알몸이 되어버렸다. 골목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 지성은 이제 이 정도로는 딱히 현타도 느끼지 않는 자신의 성장..?이 자랑스러웠다....
*
쉬는시간이 되자마자 3학년 교실로 달려갔는데 재민은 그새 자리에 없었다. 재민이 형 못 봤냐는 지성의 질문에 제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몰라. 어디갔지? 지성은 대충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복도를 성큼성큼 걸으며 재민을 찾기 시작했다.
지성의 ☆나재민 운명 개조 프로젝트☆ 착수 3일째. 인간이 악마가 되는 이유는 악의 기운에 지나치게 노출되기 때문이었다. 악의 기운은 보이지 않는 독극물처럼 사방 구석구석에 퍼져있었다. 농도가 짙은 곳도 있고 낮은 곳도 있다. 자아를 가진 독안개처럼 스멀스멀 움직이며 먹잇감을 노렸다. 인간이 격렬하고 부정적인 감정의 동요를 겪으면 영혼에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이때 짙은 농도의 악의 기운에 노출되면 악마로 변했다. 즉 재민이 악의 기운에게 몸을 빼앗긴다는 건 그가 강렬하고 부정적인 동요를 느낄만한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즉 근미래의 재민에게 큰 영향을 줄만한 사건이 생기는 게 분명하다. 그게 뭔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예방도 가능할 거고. 지성은 하루종일 재민을 따라다니며 주시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재민의 자연스러운 일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몰래 미행했다.
사실 고3 인생이 즐거울 리는 없다. 당연히 진로 고민이 가장 큰 화두다. 그러나 지성이 알기로 재민은 그런 문제에서 스트레스 받는 타입이 아니었다. 재민의 집안은 사정이 꽤 넉넉했고 부모님도 재민이 뭘 하든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부담 주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거 하라는 게 가훈이었다. 공부는 그냥 구색 맞출 정도로만. 성적에 연연하지도 않았으며 진로를 당장 정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다. 이 학교 전체를 통틀어 대학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학생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우관계 문제? 재민이 형처럼 완벽한 사람에게 인간관계로 고민할 일이 과연 있을까?
...이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지성은 근본적인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재민이 크게 동요할만한 일이 생긴다는 것부터가 잘 믿기지 않을 정도다.
열심히 재민을 찾으며 학교를 돌아다니던 지성의 눈에 마침내 재민이 들어왔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지성이 재민에게 다가가려는데 복도 맞은편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이동혁이었다.
앗. 위험해. 지성의 주의리스트 최상단에 위치하는 인간이었다. 재민과 같은 반인 동혁은 착하고, 솔직하고, 열정적이고, 뭐 아무튼 장점이 많은 친구였지만 재민과는 영 상극이어서 지성이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한 인물이었다. 혹시 아는가, 동혁이 좋지 못한 타이밍에 재민의 심기를 자극한 나머지 재민이 참지 못하고 악마로 변해버린 걸지도. 아닌게 아니라 복도 저편에서 동혁이 나타나자 재민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걸 본 동혁은 어쩐지 양팔을 벌리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반발심리..뭐 그런거...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이게 누구야아? 재만이 아니야???"
재민의 미간에 아주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헉! 안돼안돼! 변한다! 악마로 변해버린다! 기겁한 지성은 동혁이 재민과 도킹하기 직전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덕분에 동혁은 재민이 아니라 지성을 품에 쏙 안아버리고 말았다.
"어엉?? 지성이가 어쩐 일이야???"
"아니..형 너무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가지구."
"우리 어제도 봤는데."
"하루만이잖아요. 오랜만이죠."
뭐야아아 감동. 동혁이 지성의 목덜미를 감싸고 매달리며 뽀뽀를 갈기려고 했다. 지성은 있는 힘껏 고개를 뒤로 젖히며 동혁의 입술을 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재민의 표정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여, 역시 동혁은 위험인물인게 틀림없다. 대마왕이 된 재민의 발밑에서 갹갹 구르고 있는 동혁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지성은 안간힘을 써서 동혁을 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재민은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성은 나중에 동혁을 만나 개인적으로 협박했다.
"앞으로 재민이 형 반경 2미터 내로는 접근하지 말아주세요."
"아앙?? 내가 왜 그래야 되지??"
“재민이 형이랑 형 모두를 위해서예요.”
“이 도라이는 뭐야...너 나재민 좋아해? 나와 나재민 사이를 질투하는 거야? 아님 혹시 나를???”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지만.
미행만 한 건 아니다. 재민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마음속에 담아둔 고민이 있다면 그걸 대화로 풀어내면서 응어리가 사라질지도! 지성은 점심을 후다닥 먹고 남은 시간 동안 재민에게 같이 매점에 가자고 했다. 네가 웬일이야?? 지성이 그동안 자신을 스토킹하느라 안 보였다는 걸 모르는 재민은 놀라워했다. 지성은 재민과 운동장을 걸으면서 음료수를 빨았다. 역시 고민상담에 가장 적절한 장소는 운동장 가장자리지.
"형 요즘 고민 같은 건 없어요?"
물론 고민이 없는 것 같지만...아니 없을리 없지만...어쩔 수 없는 진로 고민이라던가...뭐 애정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자아찾기....집안은 화목한가요? 어이없는 질문을 던져댄다.
"우리 쥐쏭이가 형 고민이 궁금했구나. 그만큼 형한테 관심이 많다는 뜻이겠쥐용?"
"그쵸 뭐...."
"음...요새 형의 고민은..."
"응응. 뭐든 말해봐요."
재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쓰레기가 진짜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응? 고개를 끄덕이던 지성은 살짝 멈칫했다. 그러든 말든 재민이 여전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분리수거를 해도 끝이 없어. 형 그래서 요즘 배달 잘 안 시켜먹어.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 냄비 들고 가서 픽업 하는 거 해봤어? 다들 그렇게 해야 좀 쓰레기가 덜 나오지 않을까."
크윽...! 예상 밖의 에코 프렌들리한 고민...! 어제도 배떡 시켜먹은 지성은 괜히 찔렸다. 마법소년인 지성보다 더 지구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구를 더럽히는 인간 다 죽어버려, 그런 전개? 그럴듯하긴 하네. 애꿎은 운동장 모래만 신발코로 팍팍 파헤치는 지성에 재민이 물었다.
"너는? 넌 고민 있어?"
"저요? 저는 뭐..."
"남한테 고민을 묻는다는 건, 본인한테도 뭔가 고민이 있기 때문 아니야?"
예상 외로 예리한 질문에 지성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고민 있으면 형한테 말해 봐. 목소리에 우려가 가득하다. 제 고민은 형이에요, 라는 소리가 턱끝까지 올라왔다. 지성은 간신히 참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민 같은 거 없어요. 저 인생 완전 행복한데용."
재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지성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음료수를 쪽쪽 끝까지 마저 비웠다. 어쩐지 나올 때보다 돌아가는 그의 모습이 조금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재회했을 당시, 지성은 재민에 대한 기억이 살짝 흐릿해져 있었다. 뽀뽀 받는 것도 좋아하고 하는 것도 좋아하는(좀...집착 수준이긴 했는데) 애교 많고 살짝 이상한 형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만났을 땐 그래도 그때보다 조금 철이 들었나 싶었다. 간만에 봐서 훌쩍 자라고 선도 날카로워졌다. 기억 속보다 훨씬 미남. 게다가 학생회까지. 평범해진 걸까나.
그러나 재민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지이의 입학과 동시에 그를 학생회에 집어넣으려고 눈이 돌아갔던 것이다. 재민이 형과 학생회는 어울리지 않았는데 재민을 눈여겨 본 선배가 강제로 스카웃하다시피 해서 어찌저찌 몸 담고 있었다나. 그는 학기 첫날부터 지성에게 종용했다. 학생회 들어와, 지성아.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지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학생회라니? 학생회는 생각도 안 해봤는데.
학생회에 들어와.
아, 근데 저는 동아리 활동을 꼭 해보고 싶었어요.
학생회에 들어와.
여기 학교 온 것도, 자율 동아리가 활성화 됐다구 해서.
학생회에 들어와.
무섭다^^; 지성은 딴에 열심히 의견을 피력했다. 제가 좀 남들 앞에서 말도 잘 못 하고 그래서, 부모님이 활동적인 동아리 들어가 보라고 했거든요. 웅변학원에 소심한 애들만 모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재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어떤 동아리?
연극부라던가.
그해 동아리 모집 기간에 연극부는 동아리 정원 축소로 1학년 신규 인원을 받지 않겠다는 공지가 걸렸다.
밴드부라던가.
그 다음날 학교 게시판에 밴드부 전격 해체 공지문이 걸렸다. 사유는 교내 풍기문란. 밤에 동아리 연습실에서 몰래 술을 먹다 걸렸다고 한다. 출처는 익명의 제보자. 지성은 동아리 드는 것을 포기했다.
재민은 지성이 학생회에 들어가지 않은 것엔 실망했지만 동아리 활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충 만족했었다. 지성은 재민이 다음해에 학생회를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덜컥 학생회장이 되었다. 지성은 또 다시 똑같은 실랑이를 반복했고 학생회 모집 기간이 지나고 나서야 포기했다. 지성은 재민이 자신을 꼬실 때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지 궁금했다. 내가 들어간다고 해서 딱히 학생회에게 이득이 아니지 않나? 그건 다른 학생회 임원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재민이 지성에게 학생회에 들어오라고 할 때마다 부회장 이제노가 멀리서 팔을 교차해 X 표시를 그리고 절 대 안 돼 라고 말하곤 했던 것이다.
형, 근데 저한테 왜 그래요? 제가 왜 학생회에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내가 꼭 필요한 건 아니면서. 지성이 물으면 재민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형이 다- 좋아해서 그러는 거지이 지성아. 지성은 어깨를 으쓱했었다. 둘다 이제 많이 컸는데도 아직도 재민이 자신을 귀여워해주는 이유는 어렸을 때 이미지가 강렬해서 아직도 애기 같아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관성적으로 좋아하는 그런 느낌? 역시 변하질 않았다. 주변에서 나재민 대체 왜 저러냐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는 해했다. 아아, 원래 그런 형이야. 재민이 형은 내가 제일 잘 알지.
내가 제일 잘 알아.
*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지성은 그 뒤로도 수시로 애정 넘치는 동혁이나 괜히 트집 잡는 선생님, 누군가 길에 뱉은 침, 우연히 떨어지는 새똥, 시비 거는 취객 등등으로부터 남몰래 재민을 보호했으며 그때마다 마법지팡이에게 혹시 시나리오에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지팡이의 대답은 매번 NO였다. 여전히 재민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지구는 재민의 손에 멸망할 것이다. 아니, 미래는 오히려 더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대마왕 나나의 흉악한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진다 이거다. 시발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지성은 머리를 쥐어짜내 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성은 인터넷에 인생을 바꾸는 법을 쳐보았다. 이 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다들 이렇게 쉽게 인생을 바꿔버리는데 재민이 형만 이렇게 어렵냐고.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는 사소한 사건을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진짜, 어떡하지....앞으로 남은 시간은 약 일주일.
지성은 나름 의무적으로 행하던 마법소년 활동에도 의욕이 사라져서 대충대충했다. 재민을 따라다니다 보면 지성이 너무도 익숙한 현재 재민의 모습 위로 미래 재민에게 생길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고 그러면 그까지 너무 우울해졌다.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렸다. 보다 못한 마법지팡이가 퇴마활동에 너무 소홀해진 게 아니냐고 한 마디 할 정도였다.
"어차피 일반적인 악마들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면서요."
"하지만 그중엔 간혹 꽤 강한 악마가 섞여있을 수도 있어.
그래그래 시민의 안전- 그거 중요하지. 근데 지구가 망하면 어차피 다 무슨 소용이야. 재민이 형이 악마가 되어버리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지성은 툴툴거렸다.
그동안 지성이 공익을 위해 재민을 스토킹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하나. 형은 내 생각보다 더 조용한 사람이다. 항상 학교에서 지성을 향해 해석 불가능한 방언을 뱉으며 귀여워하는 모습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재민은 그렇게 활발할 때보다 조용한 때가 더 많은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상황들에서 말수가 적고 신중한 편. 생각보다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또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얌전한 모범생 타입도 아니다. 지성은 수업시간에 몰래 화장실에 가는 척 나와 재민이 수업 듣는 모습을 훔쳐봤는데, 수업에 별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앉아있긴 하지만 딴 생각에 잠겨있는 표정이었다.
둘. 형은 내 생각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 지성이 알고 있는 재민은 잘생기고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서,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관심의 중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지성의 판타지였다. 학교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재민은 혼자 자리에 앉아있거나 혼자 복도를 걷거나, 아무튼 혼자였다. 가까운 친구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화도 잘 하지 않았다. 대화할 때도 말하기보단 듣는 편. 학생회장으로서 보여주는 대외적인 모습은 그야말로 대외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셋. 형은 내 생각보다 적이 많다. 가끔 재민이 하는 말들은 직설적이라 공격력이 높았다. 재민이 그걸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그런 재민을 아니꼽게 여기는 애들이 몇몇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이들이 재민이 악마로 변하는 계기가 아닐까 했지만 재민 본인은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어서 지성이 개입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이런 사실들을 알고 나자 뒤늦게 이해되는 것들이 있었다. 학생회에 들어오라고 우겼던 거, 이유 없는 충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필요해서 그랬나, 싶었다.
학생회 안에서도 정말로 편한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지성이 같이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 해서.
그리하여 도출된 결론. 난 내 생각보다 형을 잘 모른다.
지성은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재민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에 하나일 거라고 확신하며 살았다. 누구보다 재민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가족만큼 오래 보았고 재민은 꽤 일관적이고 한결 같은 사람이라서.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고 보기보다 단순한 사람이며 생각보다 더 또라이이고 등등. 그런데 사실 난 아는 게 없다면.
그날 종례를 마치고 나서 지성은 가장 먼저 교실을 나와 재민의 교실로 갔다. 아직 어수선한 분위기의 교실 한가운데에 앉아 가만히 앞을 바라보는 재민의 옆모습을 보았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 같다.
형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난 형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형을 모르겠어. 형은 어떤 사람일까.
*
"지성아. 나 너한테 물어볼게 있어."
어제도 밤새 고민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등교한 지성에게 같은 반 준호가 대뜸 말했다. 지성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준호는 지성을 계단과 복도 사이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내가 그동안 계속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는데...불길한 서두로 입을 뗀 준호에 지성은 소름부터 돋았다. 내가 마법소년이란 걸 알아챈 건가? 변신장면을 들켰나? 일단 기절시킬까? 지팡이한테 기억조작 능력은 없는 것 같던데.
"솔직하게 말해주라. 너...
"아닌데?"
"아직 아무것도 안 물어봤는데."
"아....미안...."
준호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표정으로 주먹 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너 진짜 ㅁㅁ동 ㅁㅁ스터디 다니는 거야? 최서준이랑 같이 다니냐? 그래서 계속 바쁘다고 하고 학교에선 잠만 자는 거지? 배신자 새끼들 지들끼리만 학원 옮기고 나한텐 학원 안 다닌다고 하고 거기 족보 지들만"
다행히 그냥 엄청난 오해였다. 지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한다고 하면 준호가 계속 꼬투리 잡고 오해할 것 같았다. 너 따돌리고 학원 다니는 게 아니라 사실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구라쳤다(완전 구라도 아니다). 지성의 내신 성적도 모의고사 성적도 대충 아는 준호는 갑자기 좀 안쓰러워하는 표정이 됐다.
준호를 달래고 교실로 돌아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주변인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감은 마법소년활동이 고된 이유 중 하나였다. 일단 부모님. 지성에게 정 많고 관심도 많지만 다행히 맞벌이셔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 친형. 가까운 사이지만 지금은 뉴질랜드에 사는 이모네 집에서 유학 중이다. 친구들.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인간들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마법소년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케이팝의 수명은 난세 2년에 벌써 끝났다. 아는 아이돌 이름 하나만 대보자. 아무도 없다. 당연히 마법소년의 인기는 케이팝 아이돌의 그것을 월등히 뛰어넘는다. 구국 히어로에 캐릭터도 확실하고 비주얼적으로도 개성있으니 애초에 비교불가 상위호환이었다. 아무튼 지성이 마법소년인 걸 알게 되면 친구들부터 난리가 날 것이다. 진짜 절대 들키지 않도록 조심.
비밀을 간직하는 게 힘들다면 그냥 털어놓을 수도 있지, 솔직한 게 좋으니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사 오르골이다. Life Is Still Going On이란 뜻이다. 악마를 퇴치하고 나서도 지성의 인생은 계속 이어진다. 언젠가 지구멸망 시나리오를 막고 나면 평범한 민간인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그런 과거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고백은 잠깐이지만 민망복장 입은 본인의 모습은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변신도, 복장도, 악마도 다 지긋지긋하다. 이 강요나 다름없는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하루 빨리 마법소년을 그만두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선 재민이 형이라는 난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런데 답은 보이지 않고. 지성은 막다른 길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준호의 오해에 얼버무리느라 잔뜩 진땀 빼고 다시 교실로 돌아오는데 뒷문에 재민이 기대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지성이 다가오는 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기에 그냥 뿌리내린 사람 같았다. 지성은 어색하게 웃고는 고개를 내려 꿰뚫을 것 같은 시선을 피했다. 그대로 재민을 지나쳐 자리로 갔다. 그는 재민이 준호를 붙잡고 복도에서 얘기 나누는 걸 보지 못했다.
"박지성이랑요? 별 얘기 안 했는데요. 뭐 무슨 봉사활동 다닌다는 얘기 하던데. 아, 남들한텐 말하지 말아달랬는데."
남들? 재민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체육시간이었지만 지성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았다. 그는 책상에 엎드렸다. 차갑던 책상표면이 그의 뺨에서 나오는 열기로 금방 따끈하게 데워졌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지성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재민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이었다. 재민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지성도 덩달아 들떠서 물었다. 형, 오늘 기분 좋아 보여요! 재민이 눈을 접으며 미소지었다.
내가? 아닌데.
네?
하나도 기분 좋지 않아.
넌 날 몰라. 아무도 날 몰라. 그렇게 말하는 재민의 표정에 점점 그림자가 졌다. 그의 이목구비가 어둠 속으로 하나씩 하나씩 사라졌다. 결국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재민의 얼굴이 있던 자리엔 새카만 어둠만 남았다. 보이지 않는 재민의 입술이 움직이며 말했다. 난 누구에게서도 이해 받지 못해. 재민이 점점 커지더니 거대한 산처럼 변했다. 지성은 딱딱하게 굳어서 시커먼 괴물이 된 재민을 올려다보았다. 손에 무언가가 쥐어져 있다. 마법지팡이. 어느새 자신은 마법소년으로 변신한 채였다. 재민을 퇴치해야 한다. 그것이 지성의 사명이다.
갑자기 따뜻하고 단호한 감각이 지성의 머리를 감쌌다. 지성의 의식은 여전히 꿈속이었지만 현실의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지성의 책상 맞은편에 앉아있다는 걸 보지 않고도 감각만으로 느꼈다. 그가 양손으로 지성의 손을 감쌌다. 차갑게 식어있던 손이 따스한 손바닥에 덮였다. 손길이 조심스럽게 마른 손목을 타고 올라가 손가락으로 맥박을 짚는 것처럼 혈관을 어루만졌다. 상대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지성의 손등에 뺨을 대고 가볍게 누웠다. 눈을 감고 속삭였다. 시원하다.
감각이 예민한 손에 닿는 모든 부위가 전부 뜨끈뜨끈했다. 체온만으로도 형인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봐, 나는 형의 체온까지 다 알고 있는데, 사실은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니. 형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니. 서글펐다.
지성은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 흐릿한 시야 속에 재민의 얼굴이 순간 시커먼 구멍으로 보였다. 지성은 놀라서 발작적으로 의자를 뒤로 밀며 재민에게서 떨어졌다. 허공에 망연히 남겨진 재민의 손이 민망했다. 아, 미안, 지미은 입을 열다 재민이 미소 짓길래 놀랐다. 씁쓸하게 웃던 재민이 물었다.
"지성아."
"... ..."
"왜 그렇게 날 피해?"
재민은 이런 질문을 결국 입 밖에 내버리는 자신을 조소 중이었다.
재민과 지성의 공통점은 둘 다 자신이 상대방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성이 할 말, 보일 반응, 지어낼 표정까지 언제나 재민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귀여운 거니까. 지성도 한결 같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떨떠름하고 더럽게 말 안 듣는 동생. 내가 이렇게 애정을 퍼붓는데도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 다 괜찮았다. 그런 게 박지성이지. 지성이가 어느 날 갑자기 말을 잘 듣게 되면 박지성 어디 갔냐고 소리 지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지성이 최근 변했다. 남들이 보면 지성은 평소처럼 재민을 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재민은 예민한 사람이다. 지성의 심경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성은 자신을 불편해하고 있다. 자신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더 먼 곳에 있는 무언가.
"한번도 네가 날 불편해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요새 넌 내가 불편해 보여."
"형,"
지성이 불렀지만 재민은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내가 불편해? 내가 싫어?"
지성의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일단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하지만 아니라는 말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게 과연 재민이 형에게 대답이 될까.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웅웅 울리는 것도 같았다. 실제로 명치께가 점점 뜨거워져서 고통스러울 지경이라 지성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짚었다. 아니, 달아오른 것은 품에 넣어둔 지팡이였다. 지팡이가 경고하고 있었다.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비늘에 뒤덮인 거대한 손이 창문을 와장창 깨고 들어오더니 재민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재민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창문 밖으로 끌려가더니 위로 쑥 사라졌다.
*
다급한 안내 방송이 울렸다. 현재 교사 옥상에 악마 출현, 교사 및 학생들은 전원 대피...비상구 계단이 전부 자동 개방되었고 교실과 운동장에 있던 학생들 전부 교문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딱 한 사람, 지성만은 사람들과 반대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는 어느새 변신한 채였다. 다행히 다들 혼비백산해서 지성이 변신하는 걸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지성이 계단을 오르는데 지팡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성, 준비해, 나재민은 오늘 마왕으로 변할 거야!"
지성은 스텝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지팡이를 코앞까지 바싹 당기고 되물었다.
"뭐라구요?! 아직 며칠 남았잖아요!"
"시나리오의 실현이 앞당겨졌어!"
예정에 없던 일들이 일어나면서 운명이 조금 꼬인 것이다. 결과는 변하지 않았지만 과정이 바뀌었다. 나재민은 바로 오늘 악마로 변해버린다. 여전히 뛰고 있었지만 지성은 다리에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애초에 이만한 힘을 가진 악마가 나타나서 나재민을 납치한 것부터가 이상해, 전부 예정에 없던 일들이야."
계단을 네다섯 개씩 성큼성큼 날듯이 오른 지성은 잠긴 문을 지팡이로 박살냈다.
낡은 책상과 의자가 널려있는 옥상에서 새까맣고 껍질이 반들거리고 거대한 악마가 쿵쿵 발을 구르고 있었다. 지성은 절망스러운 와중에도 악마가 왠진 모르겠지만 익숙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스쿼트 열심히 할 것처럼 생겼달까. 닌텐* 링피* 보스몹과 흡사하게 생긴 악마가 한 손에 재민을 움켜쥐고 지성을 향해 사악하게 웃었다. 기절한 재민이 악마의 손아귀에서 축 늘어졌다.
"저 근육..! 꽤 오랫동안 힘을 단련해온 게 분명해."
지팡이가 혀를 찼다. 저놈이 하필 재민이 형을..! 지성이 악마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악마가 괴성을 내지르며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지능은 낮지만 힘은 매우 센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 악마 중에선 가장 강했다. 지성이 가까스로 피하는 동안 지팡이는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다행히 내겐 모든 걸 날려버릴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파괴광선이 내장되어 있어. 너무 위험해서 딱 한번만 쓸 수 있지만 말야."
그그런 기능도 있었어?? 너무 갑자기 생긴 설정 아닌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팡이를 꼭 쥔 지성이 말했다.
"그전에 우선 형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해요. 너무 위험하잖아요."
"아니, 그럼 너무 늦어."
"늦어요? 뭐가?"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예정된 미래가 예측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실현되고 있어. 다음번에 재민이 눈을 떴을 땐 이미 마왕으로 변한 후일 거야."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마왕으로 변한 후엔 너무 늦는단 건...결국 지금이 기회라는 거 아닌가? 뭐?! 지팡이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지성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비명은 악마를 더욱 자극했고 화가 난 악마가 지성을 쫓아오며 울부짖었다. 지성은 옥상을 달리며 지팡이에게 화를 냈다.
"형까지 같이 없애라고?? 돌았어요??? 이거 완전 살인 지팡이네!! 형은 아직 인간이에요!!"
"각성 전 가장 약할 때를 노리는 게 당연하잖아. 기회는 지금 뿐이라고."
악마가 한 손으로 계속 주변의 의자니 책상이니 따위를 지성에게 던져댔다. 지성은 이리저리 구르며 피하는 와중에도 지팡이가 한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재민이 형의 마음에 균열이 생기는 건 악마한테 납치됐단 공포감 때문일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 그 때문에 마왕이 되는 거라면 형을 구하면 되는 거잖아. 그럼 형은 마왕이 되지 않을거야. 지성은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지팡이는 지성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냉정하게 말했다.
"저 악마는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야. 나재민은 저 악마가 나타나기 전에도 이미 크게 동요한 상태였어. 쌓이고 쌓인 감정 때문에. 그게 결정적인 요인이야."
지성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축제 때 무대용으로 쓰고 애물단지가 되어 대충 옥상 구석에 버려둔 꽃나무 모양 구조물 뒤에 숨어 숨을 골랐다.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일련의 깨달음이 속삭이는 목소리처럼 지성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지구의 운명과 사명을 알고 나서 재민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 그가 노력하면 할수록 어두워지던 재민의 표정. 어쩔 수 없이 생긴 거리감. 형을 생각한답시고 했던 행동들. 재민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지성이 새로 깨달은 사실들. 형은 사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밝지 않고, 오히려 생각이 많고 차분하고 적이 많고 또...외롭고. 너무너무 외로운 사람이고. 그런데 내가 형을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동안 지성이 재민에게 한번도 느끼게 만든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 낯선 외로움 때문에 재민은 마왕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재민의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행동들이 결국은 운명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재민은 결국 마왕이 될 것이다. 애초에 지성의 이런 노력조차 모두 운명의 지배력 하에 있었을 수도. 인간은 운명이란 거대한 흐름에 끌려갈 수 밖에 없는 건가. 난 왜 이렇게 무력하지? 마법소년은 결국 운명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나?
악의 기운이 스며들기 쉬울 정도로 형의 마음이 약해진 이유. 외로워서.
정확히는 내가 형을 외롭게 만들어서. 다른 사람도 아닌 박지성이라서.
지성은 꽃나무 구조물을 밀었다. 마법소년이기에 가능한 파워 덕에 거대한 구조물이 악마를 향해 스르륵 넘어갔다. 느린 속도였고, 악마는 어렵지 않게 구조물을 피했다. 하지만 악마가 구조물에 한눈 판 사이 뛰쳐나온 지성은 난간 위로 올라 가느다란 철봉 위를 전속력으로 달렸다.
"재민이 형을 놔줘!"
평균대를 달리는 무용수처럼 난간을 가로지르며 악마를 향해 똑바로 달렸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꽃나무가 쓰러지면서 피어오른 먼지 때문에 눈을 비비던 악마가 뒤늦게 지성의 행방을 찾느라 바보처럼 두리번거렸다. 지팡이가 물었다. 꼭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지성은 악마를 응시한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은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거잖아."
재민의 감긴 눈꺼풀이 꿈틀 움직였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것도 같았다. 지성은 보지 못했다.
"형이랑 평범한 미래를 같이 살고 싶어."
스스로에게 기합 넣듯 외친 지성은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지팡이를 칼처럼 휘둘러 악마의 관절을 노렸다. 악마의 팔 일부분이 깊게 패이듯 날아가면서 힘줄이 끊어졌다. 악마의 손아귀에서 떨어진 재민이 데굴데굴 굴러 옥상 구석진 곳에 늘어졌다. 일단 악마와 재민이 서로 떨어지자 마음이 놓였다. 부상 입은 악마는 울부짖으며 다른쪽 팔로 지성을 후려쳤다. 훅 날아간 지성은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피부가 갈리며 죽 미끄러졌다.
바닥과 충돌하면서 입 안쪽을 깨문 지성은 혀밑에 고이는 피를 퉤 뱉어냈다. 기침이 자꾸 나왔다. 언제 지팡이를 놓친 거지. 정신없이 지팡이를 찾았다. 몇 미터 옆에 떨어진 지팡이가 지성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안돼. 지성은 지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배를 끌고 기어가는데 성큼성큼 다가오는 악마의 발소리가 들렸다. 지성은 좀 더 빨리 기었다. 영화 속에서 살인마에게 쫓기는 사람들이 잔뜩 다쳐도 기어서라도 도망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겠다. 희망이 없지만 그것조차 포기하면 그땐 전부 끝장인 거라서....주마등처럼 재민과 함께 보낼 수도 있었던 평범한 미래가 떠올랐다. 그 미래에서 지성은 먼저 재민을 향해 달려갔다.
악마가 완벽한 데드리프트 자세로 무거운 콘크리트 조각을 들어올렸다. 그대로 머리 위로 들어올리더니 지성의 위로 내리치려고 준비 자세를 잡았다.
"형?"
지성은 눈쌀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악마의 옆구리에 날카로운 꼬챙이가 박혔다. 낡은 책상다리에서 뽑아낸 쇠파이프였다. 양손으로 쇠파이프를 힘껏 악마의 몸에 찔러넣은 재민이 본인도 놀랐는지 토끼눈을 뜨고 악마를 바라보았다.
아....재민은 화들짝 몸을 떨며 파이프를 놓더니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르르르륵. 악마가 침을 튀기며 신음했다. 여전히 악마의 몸에 박힌 파이프가 바르르 떨렸다. 파이프의 굵기나 상처의 깊이나 전부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악마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다.
지성은 지팡이를 쥐었다.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모든 게 섬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
붉은 하늘. 눈을 뜬 지성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빨간 하늘이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구름과 석양이 한데 엉켜 하늘이 지성의 머릿속처럼 어지러웠다.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킨 그는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여전히 옥상이었다. 낮은 숨소리가 들려서 내려다보니 재민도 바로 옆에 쓰러져 눈을 감은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형이 악마를 찔렀다. 물리공격이 어느 정도 통하는 악마여서 다행이었다. 파괴광선이 지나간 자리엔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악마 뒤에 있던 옥상 난간까지 사라져서 그 자리엔 구멍이 뻥 뚫렸다. 문제 하나는 해결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 재민은 마왕이 되었는가? 지팡이의 말대로라면 재민은 여전히...지성은 기절한 재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다. 변한 건지 아닌지. 지성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이 세계와 재민이 형과 나를 위한....정말 답이 없다면, 이렇게 된 이상 재민이 형을 껴안고 지팡이의 자폭버튼(그런 거 없다)을 눌러서 서글프고 아름다운 마지막을.......
이럴 수가! 지팡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지성은 퍼뜩 망상에서 깨어났다.
"나재민의 운명이 바뀌었어!"
"에?"
지성은 지팡이에게 거의 뽀뽀할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짜? 정말로? 그 짧은 순간에? 대체 어떻게?
"운명은 아주 사소한 사건이나 사소한 대화로도 바뀌어. 뭔가 재민의 운명을 바꿀만한 일이 벌어진 거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지성은 기적이라도 본 것 같았다. 지팡이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확실히 우연한 사건으로 인간의 운명이 바뀌기도 하지. 하지만 이 경우엔 우연이라고만 보기엔 힘들고...우연에 힘 입은 필연 같은 걸. 자세히 설명은 못하겠지만.
지성은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찰랑거리는 세라복이 손끝에서 사르륵 미끄러졌다. 정말 잘됐다. 재민이 형의 운명이 바뀌어서 다행이고 악마도 퇴마해서 다행이고 다 좋은데...음...근데....
"근데 난 왜 아직도 마법소년인 거죠....?"
변신 복장도 그대로. 느껴지는 이 마법적인 힘도 그대로. 지구멸망 시나리오만 해결하면 탈-마법소년 할 수 있다고 지팡이가 호언장담했는데?! 마법지팡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성이 대답하라며 붙잡고 앞뒤로 짤짤 흔드는 동안 지팡이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속사포로 중얼중얼거렸다. 다른 차원에 접속된 것 같았다. 그러더니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나재민의 운명이 바뀌었지만, 지구멸망 시나리오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라는군."
"그게 먼 소리에요. 재민이의 형은 결국 마왕이 될 거라는 뜻?"
"그건 아냐."
"그럼 안 될 거라는 뜻...?"
"그것도 아니야."
나나마왕이 세계를 지배하는 미래가 지구멸망 시나리오 927260번(최종)이었다면 현재는 지구멸망 시나리오 927260번(수정중) 상태. 재민의 운명이여 무수한 가능성으로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나재민은 지구를 멸망시키는 마왕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마왕이면서 동시에 마왕이 아닌 상태. 슈뢰딩거의 나재민 같은 상태라 이거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지성의 마법소년으로서의 가능성도 닫히지 않은 것이다. 네가 아예 마법소년을 그만두고 싶다면 미래를 고정시켜야 해. 가장 확실한 건 재민을 없애는 건데 그러고 싶진 않겠지? 지성이 믿기 싫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그냥 기다려야 한다는 뜻? 이대로 재민이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는 운명이 고정되어 지구멸망 시나리오 927260번(최최종)이 될 때까지? 무작정?
"그렇지."
~잠시 화면조정 시간~
이런 게 어딨어~~~! 이런 게 어딨냐고~~~~! 지성은 바닥에 엎드려 땅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눈물콧물 쏟고 데굴데굴 구르고 징징거리고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하고 우울하다가 수용의 단계로 진입했다.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했지만 여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고 그는 결국 퉁퉁 부은 눈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재민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지성은 사뭇 차분한 모습과 그렇지 못한 복장으로 재민의 옆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형, 정신이 좀 들어요?
재민은 벌떡 일어나 지성을 와락 껴안았다. 지성아, 이거 꿈이야? 황망히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재민은 몇 번이나 지성의 어깨와 팔을 쓸어내리며 그가 멀쩡한지, 또 자신이 멀쩡한지 살폈다. 근데 꿈이 아니라면 네가 왜 내 꿈속 같은 옷을 입고 있지...? 재민이 아직 정신을 덜 차렸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성의 눈썹이 꿈틀꿈틀 춤을 췄다. 대체 무슨 꿈을 꾸시는 거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재민은 서서히 악마가 나타났었단 사실과 그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그의 손에 아직도 쇠파이프 자국이 빨갛게 남아있었다. 지성은 재민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저 형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재민의 눈이 이상하게 빛났다. 의아함과 기묘한 기대감. 지성은 뜸을 들이다 한숨을 푹 쉬었다. 왠진 모르겠지만 약간 눈물이 나려고 해서 목이 메였다. 큼큼 가다듬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 재민도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 마법소년이에요."
"사실형도지성이너를네가여섯살때부터."
"그래서...엥? 뭐라고요??"
"아 내가 예상한 내용이 아니구나. 아냐 계속해봐."
방금 뭔가 엄청난 사실이 드러난 것 같은데 재민의 표정이 너무 차분해서 지성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애써 무시하고 다시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그동안 형을 피했어요. 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재민의 운명이니 사명이니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는다.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건 자신이 혼자 감당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재민의 오해를 풀어주는 게 먼저였다. 재민은 지성의 손을 꼬옥 잡고 엄지로 손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먼지투성이고 바닥에 긁혀서 생채기가 난 손이었다. 울 애기가 그런 막중한 비밀을..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게다가...재민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얼굴을 들어 지성과 눈을 맞추었다. 지성은 재민의 눈이 여전히 기이하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이젠 알아."
너무도 흔쾌히 이해한다. 이렇게 쉽게 다 괜찮다고 하다니. 지성이 울컥해서 고맙다고 하려는데 재민이 문장을 끝까지 마쳤다.
"우리 지성이가 날 사랑한다는 걸."
으응??? 지성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재민의 얼굴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던 것은 지성이 마법소년이라고 고백해서가 아니었다. 재민은 지성이 사랑을 고백했다고 믿고 있었다.
"너 악마랑 싸울 때, 형이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했잖아."
난 태어나서 너한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 이거 정말 꿈 아니지? 지성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건...그건 이 세계의 미래가 형한테 달려 있으니까 당연하지...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그와중에도 재민은 쉬지 않고 말하는 중이었다.
"또, 형이랑 평범한 미래를 함께 하고 싶다고도 했고. 형은 그 말에 정말 감동 받았다니까."
지성은 여전히 할 말이 많았다. 아 당연하지! 난 평범한 미래를 살고 싶으니까! 원래 정해진 대로라면 미래의 형은 정신 나간 싸이코 독재자라고! 지성의 포인트는 '평범한 미래'에 있었지만 재민은 이미 '형이랑' 이라는 표현에 완전히 꽂힌 것 같았다. 정정해주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는데 지성은 그럴 수 없다. 진퇴양난. 선 채로 반쯤 기절한 지성을 재민이 꼭 껴안았다. 지성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는 깊게 들이마셨다. 그의 체향이 상쾌한 피톤치드라도 되는 것처럼 흡족한 숨을 내쉬었다. 재민이 볼 수 없는 지성의 표정은 빨개졌다 파래졌다 급기야 하얗게 질리면서 파들파들 말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형의 운명이 바뀌었구나. 사소한 말 한 마디로도 바뀌는 게 운명. 듣는 사람한텐 전혀 사소하지 않아서. 재민의 운명은 지성의 사랑고백(?)을 듣는 순간 바뀐 것이다. 사랑은 악마의 대척점에 있는 힘이랬던가. 마법지팡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성은 퍼뜩 뭔가를 깨달았다.
...그럼 혹시 내가 사실 그런 게 아니라고 하면, 형은 다시 마왕이 되나? 정신 바짝 차려 박지성. 지금 정말 중요한 순간일지도 몰라.
"지성아 네가 날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줄 몰랐어. 형도 지성일 사랑해."
"그, 그동안 내가 형을 오해하게 만들었는데도요?"
"오해는 풀어가면 돼. 형이잖아. 형은 지성이를 키웠잖아."
에바 우리 엄마아빠가 멀쩡히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하지만 지성은 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또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게 진짜 환멸났다. 어떻게 살아온 걸까나...마법지팡이는 좋다고 지성만 들을 수 있는 주파수로 떠들고 있었다. 지성! 임무야! 나재민이 마왕이 되지 않도록 그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마! 나재민이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그날까지, 어쩌면 평생을?
지성은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내 노력이 운명을 바꾼 걸까? 우연인가? 우연도 운명에 포함되나? 아님 형의 운명이 변한 것도 전부 다 계획되어 있던 일일까? 뭐가 뭔지 모르겠다. 자신을 꼭 껴안은 재민의 팔이 꼭 단단한 계약 같았다. 결국 그는 재민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고 축 늘어지며 한숨을 푹 내쉰다. 망할 지구멸망 시나리오 927260번이 완전히 소멸해서 일어날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지는 그날까지 나는 계속 마법소년이고, 재민이 형과 연인이 될 수 밖에 없고.
근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저도 좋아해요, 형."
아니, 오히려 좋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