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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기억

하초

 

지성은 종종 모르는 사람이 본인을 보고 반갑다는 듯 인사하는 경험을 하곤 했다. 사람들이 아주 가끔 느낀다는 데자뷔를 지성은 매 순간 느꼈다. 지성은 모종의 이유로 3년 간의 기억을 잃었다. 그니까 갓 성인이 되고 난 후의 3년을 통째로 날린 거다. 고등학생 때까지의 기억은 그대로인데 딱 한 가지 누군가와 관련된 것들만 기억을 못한다. 딱 하나, 이름은 안다. 나재민. 근데 사실 그것도 지성이 기억해 낸 게 아니고 친구들에게 전해 들은 거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지성만 빼고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았다. 지성이 친구들에게 그게 누구야? 라고 물었을 때 친구들은 지성에게 제정신이냐고 되물었다. 그니까 지성은 얼굴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계속 얘기하냐면. 나재민,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지금 지성의 앞에 있기 때문이다.

쌤들 커피 한잔하세요. 어휴, 뭐 이런 걸 다. 고마워요, 재민 쌤. 재민은 모든 자리를 다니며 커피를 돌렸다. 이 교무실 분들만 생각나서 드리는 거니까 다른 쌤들한테는 비밀이에요. 익살스럽게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민은 교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커피를 다 돌리고도 자기 책상에 앉아 있는 지성에게는 주지 않았다. 나는? 내 커피는? 왜 나는 안 줘? 지성은 잘 마시지도 않는 커피인데도 속으로 언제 주지 하며 기다렸다. 지성이 속으로 기다리는 걸 알았는지 재민이 말을 걸었다. 지성 쌤, 수업 가실까요? 커피를 못 받아 그런지 첫 수업이라 그런지 어색하게 걸어 도착한 건 급식소 뒤쪽에 있는 자판기 앞이었다. 지성 쌤은 커피 말고 다른 거 드리려고요. 아메리카노 별로니까. 내가 커피 안 마시는 걸 아시는 건가? 내가 말한 적이 있나? 재민이 뽑아 건넨 건 지성이 고등학생 시절 꾸준히 마신 알로에 음료였다. 고등학생 때 되게 많이 먹었던 것 같은데... 감사해요. 자판기 음료가 이상할 정도로 차가웠다. 아 맞아, 우리 학교 자판기 음료 진짜 시원했지. 지성은 기억하지 못했던 고등학교 추억을 하나 되찾았다.

지성 쌤 첫사랑 얘기 해 주세요!!! 1교시는 담임 시간이라 재민과 함께 교실에 있었다. 애들은 선생님들의 첫사랑이 왜 그리도 궁금할까. 지성은 첫사랑이 없어. 라고 말하기 쪽팔려 비밀이라고 둘러댔다. 첫사랑을 묻는 아이들이 얄밉게 느껴졌다. 뒤에서 재민이 왜요, 쌤. 저희 할 것도 없는데 말해 주셔요. 하고 말을 덧붙이자 조용해졌던 애들이 다시 지성을 조르기 시작했다. 지성은 그런 거 말고 무서운 얘기나 하자며 분위기를 바꿨다. 한 시간 내내 애들한테 기가 잔뜩 빨린 지성은 쉬는 시간 교실에서 나오자마자 재민에게 물었다. 애들한테 첫사랑 얘기 막 하고 그래도 돼요? 재민은 지성이 귀엽다는 듯 웃더니 저는 다 말해 줬어요. 라고 답했다. 쌤은 첫사랑이 되게 좋은 추억이신가 봐요. 그런가? 사실 끝이 저한테는 비극이었을지 모르지만 전 나름 좋은 추억이에요. 지성 쌤은 안 좋아서 안 말해 주는 거예요? 아… 사실 첫사랑이라고 할 만한 게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말을 못했어요. 지성은 재민 앞에서 왜인지 모르게 솔직하게 말하게 된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선생님 앞이라 정직해지는 건가.

 

지성은 솔직히 말해 첫사랑이나 고등학교 추억 혹은 기억에 남는 선생님 같은 추억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조금은 답답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 버린 기억, 남아 있는 고등학교 기억마저 누구인지 모를 대상 하나 때문에 툭툭 끊겨 버려서. 첫사랑이 있는데 기억을 못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매일 밤 잠들기 전 지성은 온갖 생각을 했다. 내가 정말 선생님이 된다면 학생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까 같은 생각부터 달에 가면 꼭 태극기 옆에서 사진을 꼭 찍어야지, 핸드폰이 작동하려나? 같은 실없는 상상까지 했다. 그리고 최근 하는 생각의 주제는 '과거'였다. 그렇게 과거에 대해 한 주를 꼬박 생각하다 보니 무엇인지 생각이 날 것 같으면서도 나지 않았다. 지성은 결국 과거에 대한 궁금증을 접고 다른 주제를 꺼냈다.

 

지성 쌤, 이번 주부터는 애들 자습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시험 기간이 다가왔다. 체육은 시험이 없어 그저 아이들의 체력을 응원하며 공부할 시간만 줬다. 원래였으면 같이 수업 들어가야 하는 선생님은 지성 쌤, 제가 어제 좀 달리는 바람에... 맡길게요, 미안~ 하고 가셨다. 지성은 한숨을 푹 내쉬며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엔 키다리 책상에 서 있는데도 꾸벅꾸벅 조는 학생과 창가 벽에 기대 잠을 자는 학생, 복도에서 공부하는 학생, 교실 뒤에 담요 깔고 자는 학생 등 제각각의 아이들이 있었다. 시험 기간의 고충을 알아 더 재우고 싶은 마음을 정리하고 교탁을 세게 한 번 쳐서 애들을 깨웠다. 아이들은 그런 지성을 보며 지성 쌤 귀여워~ 라며 놀렸다. 지성은 민망해 붉어지는 얼굴을 가리고 출석을 불렀다.

 

수업 들어간 교실은 재민의 반이었다. 그 탓인지 곳곳에는 재민의 흔적이 가득했다. 아이들이 자습하는 내내 지성은 교실 곳곳을 구경하며 재민의 흔적을 쫓았다. 교훈에 크게 적혀 있는 '심각하네'와 아이들이 칠판 구석에 적어 둔 'S.E.X.Y~한 재민 쌤♡', '나나가 보고 있다’ 같은 것들이 지성의 기억에 박혔다. 이 쌤 유쾌하시네. 아니다, 나 쌤이라고 불러야지. 이름 진짜 특이하시네, 나재민. 나재민, 나재민, 나재민? 그 우리 학교 선배 중에도 있었다는데 설마 그 사람인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생각하다 보니 수업 시간이 끝났다. 이미 절반이 넘게 잠든 아이들을 위해 교실 불도 센스 있게 꺼 주고 나왔다. 십 분이라도 푹 자. 복도를 지나가던 재민이 지성을 불렀다. 쟤네 수업은 잘 들어요? 지성 쌤 어떻게 저희 반이 걸려서. ㅋㅋㅋ 생각보다 애들 수업하는 건 괜찮은 것 같아요. 아 근데 재민 쌤, 고등학교 어디 나오셨어요? 갑자기요? 저 여기 나왔어요. 첫 발령지라 모교로. 아아... 왜요 저 아세요? 아, 그게 아니고 저희 선배 중에 이름이 같은 분이 있다고 들들어서... 아… 지성 씨랑 저는 나이도 비슷하니까 후배일 수도 있겠네요. 나중에 졸업사진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겠다.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니 쉬는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다른 교생 쌤들과 다르게 지성은 담임인 재민과 유난히 잘 지냈다. 재민과 급식도 같이 먹고 4교시 수업이 없는 날은 재민이 교생 일지 쓰는 지성을 돕기도 했다. 체육은 별거 없는데, 별것 없어서 더 힘드네요. 아, 저 학생 때 썼던 거 있는데 조금 참고하실래요? 머리를 짜내며 지내다 보니 삼 주가 훌쩍 지나 있었다. 지성이 떠나는 주가 되자 아이들은 온갖 이벤트를 준비했다. 물론 자기들의 놀이를 위한 거지만. 칠판 가득 지성에게 편지를 썼고, 자기 가방에 챙겨 다니는 간식들도 건넸다. '지성 쌤 멋지십니다!', '쌤 저 성인 되면 저랑 사궈 ㅋㅋ', '땅끄부부 말고 햄쮜송!' 그리고 '나나가 보고 있다' 옆에 적힌 '햄쮜송이 보고 있다'까지 지성은 칠판에 쓰인 문구를 하나하나 읽고 감동받아 울먹이자 아이들은 쌤 울어요? 하며 지성에게 집중했다. 민망해진 지성은 아니라 둘러대고 급하게 눈물을 닦았다.

 

재민은 지성과의 한 달이 너무 소중했다. 지성은 모르는 이야기인데, 둘의 학창 시절은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지성의 끊어진 기억은 모두 재민의 탓이었다. 사실 둘은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났다. 지성은 체육 교육과를 지망하던 재민과 함께 공부했고 그런 재민을 따라 지성도 체육 교육과를 지망했다. 지성은 모르지만 기억을 잃기 전 재민 때문에 체육 교육과를 희망하게 된 거다. 체육 교육과가 나름 적성에 잘 맞아 기억을 잃고 난 후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성이 성인이 되고 3년 동안 그 둘은 사랑을 했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생 때부터 5년이지만 연애라 칭할 수 있는 기간은 3년이었다. 둘의 만남은 단조로웠다. 서로의 온기를 공유하고 감정을 나누고 그런 것들 말이다. 근데 지성은 그런 사랑이 싫었다. 편견이 두려워 숨어 하는 사랑에 지쳤다. 단조롭다는 말 뒤에 숨어야만 하는 연애가 미웠다. 결국 지성의 뜻대로 둘은 헤어졌다. 그리고 그런 지성의 기억을 재민이 지웠다.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 라는 문구를 보고 연락했던 건 지성과 헤어지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지성은 재민과 헤어지고 나서 우울에 빠졌다. 본인의 의지였지만 타인의 시선 때문이었으니 이별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고. 재민은 그런 지성을 견디기 힘들었다. 문구를 보고 연락하게 된 것도 의심에 가득 찬 상태였다. 그곳의 직원이 ‘두 분 기억 모두 지우는 건가요?’라고 물어 왔을 때 재민은 한참을 고민하다 지성의 기억만 지워 달라고 했다. 자기는 도저히 지성을 놓고 살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지성은 기억을 잃었고 다음날 멀쩡한 상태로 학교를 다녔다. 애들이 ‘쟤 미친 거 아니야?’하며 재민에게 연락했을 때 자기 얘기는 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건넸다.

“이렇게 기억을 지웠다고 해도 그 분이 기억을 찾게 될 수 있어요. 본인의 의지든 그냥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든. 지운 기억의 일부를 찾게 되면 아예 다 돌아올 수도 있고요.”

재민에게 그런 경고는 중요치 않았다. 재민의 머릿속은 지성의 평범한 삶과 안정만이 1순위였다.

 

기억을 지우고 돌아온 재민은 혼자 지성의 흔적을 정리했다. 유난히 촉각에 예민해 부드러운 이불을 찾고 찾아 덮었던 아기 이불, 화장실에 남아 있는 지성이 칫솔, 지성이 두고 간 양말. 한참 동안 울음과 정리를 반복했다. 방을 다 정리하고 난 후엔 향초를 켰다. 향에 예민한 지성 때문에 둘은 향초 같은 것으로 분위기를 내 본 적이 없었는데. 재민은 켰던 향초의 초가 녹아 촛농이 생기기도 전에 초를 껐다. 향을 잘 안 맡아서 그런지 머리가 띵했다. 지성에게 없는 기억들을 재민은 모두 온전히 다 갖고 있었다. 잊을 것 같으면 다시 꺼내 상기시켰다. 재민은 솔직히 지성이 기억을 찾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다 운명처럼 재민의 학교에 교생으로 지성이 왔다. 하긴, 첫 발령이라고 모교로 왔는데 지성도 이곳이 모교니까. 일부러 같이 마시던 알로에 음료와 첫사랑이라는 소재를 던져도 지성은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다. 조금은 답답했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지성이에겐 우리의 사랑이 고통이었을 테니까.

 

재민 쌤? 제 손을 왜... 네? 아, 죄송해요. 재민은 생각에 잠겨 멍 때리다가 무의식적으로 지성의 손등을 만지고 있었다. 재민의 습관이었다. 지성의 손등 위로 옅게 보이는 흉터를 어루만지는 것. 흉터 어쩌다 생겼어요?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재민에게 지성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사실 흉터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당연하겠지. 재민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하던 문서 작업이나 마무리하자고 했다.

 

지성의 흉터는 지성이 수능을 끝난 직후 재민의 집에서 저녁을 먹다 생긴 흉터였다. 맛있는 거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진짜 라면 먹어? 맛있는 걸 사 주겠다는 재민의 말도 무시하고 지성은 라면을 고집했다. 수능 이야기를 하며 지성은 라면을 먹다가 냄비에 데였다. 상처에 얼음을 얹고 마사지를 해 주는 재민을 보며 지성은 말했다. 형, 상처가 뜨거운데 되게 차가워요. 이상하지 않아요? 하며 해맑게 얘기했다. 다쳤으면서 그런 걸 뭐 그렇게 맑게 얘기해. 하자 지성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생긋 웃더니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는 재민의 손등 위로 뽀뽀했다. 오밀조밀 말랑한 입술이 손등에 닿았을 때는 당황 반 설렘 반이었다. 뜨거운데 차갑다는 걸 재민도 순간 느꼈다. 지성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가 뜨거우면서 차가웠다.

 

재민이 지성의 손을 만진 뒤로 지성은 '뜨거운데 차갑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슨 노래 가사처럼 자꾸 머릿속을 채웠다. 지성은 잠들기 전 흉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진짜 왜 생긴 거지? 어쩌다? 내일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 지성은 본인도 모르는 옅은 흉터를 재민이 눈치챈 게 이상하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저렸다. 재민 쌤 손 되게 따뜻했는데... 엥? 자연스럽게 흐르는 생각 끝에는 재민이 있었다. 지성은 생각을 털고 잠이나 자자, 하며 눈을 감았다.

 

학교에서 만난 재민은 여전히 친절했다. 자판기에서 뽑은 차가운 알로에 음료수 그리고 재민은 얼음이 반인 아메리카노. 재민 쌤은 커피 좋아하시나 봐요. 아... 그쵸 뭐. 그래도 줄인 건데 제가 좀 많이 마셨나요? 매일 드셔서... 커피 많이 드시면 안 좋아요, 카페인. 알겠어요, 저도 내일부터 알로에 마실게요. 여전하네, 박지성. 지성은 재민이 커피 마시는 것을 안 좋아했다. 재민은 지성이 콜라만 주구장창 달고 다니는 걸 싫어했고. 결국 둘은 합의를 보자며 자판기 앞에서 약속했다. 우리는 무조건 알로에 마시자. 콜라 대신, 커피 대신. 그때의 기억이 선명한 재민은 헤어진 이후로 알로에를 마시지 않았다. 지성의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결국 다시 커피를 달고 살았다. 그런 기억이 없는 지성은 알로에만 마셨다. 나는 콜라보다 알로에가 더 나은 것 같아. 입맛이 자기도 모르는 순간 바뀐 거였다.

 

지성이 떠나는 금요일마저 끝이 났다. 마지막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재민, 지성은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결국 종례를 하다가 지성은 눈물을 흘렸다. 몇몇은 같이 눈물을 흘렸고 몇몇은 우는 애들을 놀리면서도 지성에게 가 쌤 진짜 잘생기셨는데 같이 사진 좀 찍어 주세요. 하며 장난을 쳤다. 재민은 그런 광경을 보고 묘하다고 생각했다. 총체적 난국인 반 아이들 사이 서 있는 자신의 첫사랑이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아서.

 

수업을 마치고 지성과 다른 교생 쌤들은 교무실마다 인사를 드렸다. 교단에서 다시 만나요. 공부 파이팅 하시고 나중에 또 만나요. 울 지성 쌤! 다음에 재민 쌤이랑 셋이 함 만나요. 체육부 모임 만들어요. 짧은 시간 나눈 정에 한참을 인사 나누고 운동장에 나와 다른 교생 쌤들과 사진도 찍었다. 다들 교단에서 봬요. 지성은 정문을 나서며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나 교생 실습 이제 완전 끝났어. 응, 재미있었어. 아, 근데 나 손등에 있는 흉터 언제 생긴 거야? ‘그거 네가 수능 끝나고 어떤 형 만난다고 나갔다가 데여서 난 거잖아. 그 나 누구였는데 너랑 친한 형 중에 나 씨 있잖아.’ ... 미안. 엄마 잠깐 끊을게. 이따 다시 걸게. 지성은 순간 다리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잠깐 주저앉았다. 나 씨? 우리 학교에 있던 거 나재민밖에 없잖아. 그 사람이 왜? 그 쌤이 나랑 친했다고?

 

뜨겁고 차가워요. 데인 상처 위에 얹었던 차가운 얼음이, 이불이 따갑다고 하면 이불 대신 따뜻하게 안아 주던 재민이, 향초 대신 분위기 내겠다며 켜 봤던 무드등 빛이 머릿속에서 얽혔다. 아, 알로에. 커피 말고, 콜라 말고, 우리는 알로에. 지성은 다시 일어나 학교로 달려갔다. 재민 쌤 퇴근하셨어요? 어쩌지 방금 가신 것 같은데, 주차장에 아직 계실 수도 있겠다 가 볼래? 주차장으로 뛰어 내려가니 아직 재민이 있었다. 재민 쌤. 아니, 재민이 형. 지성은 예전처럼 재민을 형이라고 불렀다. 재민이 지성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성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지성아. 재민도 지성의 이름을 불렀다. 지성은 주차장의 답답한 공기를 뚫고 재민의 품에 안겼다. 형은 날 기억해요? ... 당연하지. 재민은 그저 조용히 지성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차장의 답답한 공기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냥 우리의 포옹이 뜨겁고도 차가워. 아니, 차갑고도 뜨거워. 아, 다 아니다. 그냥 우리는 뜨겁고 또 뜨거워. 꽉 껴안은 틈으로 심장의 울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참 뛰어온 탓인지, 서로의 온기 때문인지, 주체할 수 없는 설렘 때문인지.

 

언제부터 알게 됐어? 그 전에, 형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요? 나는... 기억을 그대로 뒀어. 너도 기억났겠지. 우리가 헤어졌잖아. 네가 너무 힘들어해서, 그래서 내가 네 기억을 지웠어. 그 사람이 내 기억까지 지워 버리겠냐 물었는데, 나는 널 잊기 싫더라. 나는 네가 없으면 모든 게 사라져서. 나 너무 이기적이지. 진짜 미안. 재민은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다. 지성이 교생으로 왔을 때 하늘이 우리를 운명으로 만들었구나 생각했다고, 지성과 알로에 음료를 마실 때에는 꼭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고, 지성의 첫사랑 이야기를 일부러 들으려 했다고, 지성의 사라진 기억 틈에서 첫사랑이 바뀌었을까 봐 조금은 두려웠다고.

 

재민은 둘의 추억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리고 교생 실습의 한 달도, 둘의 추억 으로 자리 잡았다. 솔직히 지성은 자신의 기억을 지워 버렸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 기억을 어떻게 일부만 지워. 근데 그냥 재민의 말을 믿었다. 사랑하는 사람이고, 지금은 다 기억이 났으니까. 사랑은 느낄 수 없는 감정을, 감각을, 기분을 느끼게 했다. 알 수 없는 사실도 믿게 됐고 무한한 그리움은 어쩌면 불가능일지도 모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재민의 의도였을지 지성의 기도였을지 모르게 기억이 다시 다 돌아왔으니 그걸로 됐다고.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한 거니까. 지성은 재민의 손을 맞잡았다. 남들보다 조금 따뜻한 재민의 손과 조금 찬 지성의 손이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우리는 차갑고도 뜨거워.

 

재민은 솔직히 지성의 두려움이 두려웠다. 시선에, 편견에 쉽게 상처받는 지성이 또 자신과의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을까 봐, 과거의 아픔에 또 다시 잠식될까 봐. 근데 지성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재민을 향해 웃어 보였다. 저는 형이 웃어 줄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그리고, 형. 저는 기억이 통째로 없어졌는데도 형을 다시 사랑하게 됐어요. 어제는 잠들기 전에 형 생각도 났어요. 그래서 기억이 돌아왔고요. 근데 사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어도 나는 형을 사랑하고 있었을 거예요. 어제 형 생각을 한 것처럼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그런 시선에 지지 않을래요.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어요. 전처럼 맑게 웃어 보이는 지성을 보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재민은 맑게 웃어 보이는 지성을 보며 말했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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