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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이돗지

누구에게나 준비하지 못한 시련은 가혹하다. 박지성에게 그해 겨울은 유달리 혹독했다. 나름 기대를 받던 유망한 학생에서 무기한 취업준비생으로 떨어진 지위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 직업이 생길 지 모르는 지망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박지성은 최악의 3대 지망생 중 하나라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별 하나에 엄마, 별 하나에 교수님, 별 하나에 학과장님, 별 하나에...

 

 

 

문창과 박지성, 분명 학생 시절엔 감성이 남아돌다 못해 넘쳐서 자기 글에 취해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적도 있었다. 엉엉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내 글 너무 초라하다. 때론 글이 너무 잘 써져서 형 나 어떡해? 이렇게 영감이 넘쳐도 되는 거야? 라는 말을 달고 살 때도 있었다(물론 그 말을 듣고 있던 선배 황인준은 그닥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박지성의 졸업작품을 읽은 교수님들은 얘 조만간 신인 작가 타이틀 달고 오겠구나, 했다. 물론 박지성이 졸업한 지 이제야 2년 정도가 흐른 것을 생각하면 아직 교수님들의 예측이 틀렸다고 볼 순 없다. 그런데 교수님, 작가 되기도 전에 슬럼프가 오는 건 왜 예상 못하셨어요. 박지성은 요즘 한 줄은 개뿔, 한 자도 못 건드리고 있었다.

 

 

 

아직 본인 글이 꼴 보기 싫은 지경까지 오진 않았지만, 여기서 섣불리 건드렸다간 겨우 쓴 글마저도 와르르멘션 될 게 눈에 보였다. 너무 답답해서 주변 지인들 몇 명에게 글을 보여주면 나쁘지 않네, 근데 뭔가 생생하지가 않다, 이런 얘기만 되돌아왔다. 지성의 글을 예전부터 자주 봐왔던 인준도 이번 작품이 유달리 생동감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갈아엎기엔 박지성은 이 글에 굉장히 애착을 갖고 있었다. 무려 대학 신입생 때부터 구상한 글이었다. 박지성은 꼭 이런 데서 쓸데없는 똥고집이 있었다. 인준은 그런 지성에 익숙했기에 별 말은 안 했다. 혼자서 또 몇 번 울고불고 하면 알아서 극복하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지성은 지금 뭐라도 탓할 것이 필요했다. 한때 동기들 사이에서 작업장소를 한 번씩 바꿔줘야 한다는 말이 민간신앙처럼 유행했던 게 생각났다. 지성은 처음으로 글이라는 걸 쓸 때부터 줄곧 제 방에서 쓰는 걸 고집했다. 그래서 원래도 집돌인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 일주일간 집 밖에 안 나가는 건 예사도 아니었다.

 

그런 지성이 과감하게 n년간 유지했던 작업장소를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집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글 하나도 못 쓰는 건 어차피 똑같으니까. 다른 글 쓰는 이들이 선호하는 작업장소인 카페를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카페라는 것이, 아무 데나 간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어느 곳은 사람이 너무 많고(지성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커피를 마시러 오는 줄 처음 알았다), 어느 곳은 커피가 정말 입에 안 맞고(지성은 아직 아기 입맛이다), 어느 곳은 너무 비싸고(한낱 지망생은 가난하다). 적당한 카페 하나 찾는 게 쉬운 게 아니었어... 그렇게 차가운 세상 앞에서 지성은 한 번 좌절했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야... 매일 하는 다짐을 하며 지성은 노트북을 옆에 끼고 집을 나섰다.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매서운 겨울바람이 지성의 볼을 마구 때렸다. 어떻게 자연마저 이러는 거야... 지성은 살짝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지금 울면 볼에 눈물이 얼어붙을 것 같아서 울지도 못했다. 그렇게 처량하게 노트북을 낑낑 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지성이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즈음,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이게 무슨 냄새지..."

 

 

 

헨젤과 그레텔마냥 홀린 듯 향의 근원지를 따라가다 보니 골목 안쪽에 카페가 하나 있었다. 도착해서야 지성은 깨달았다. 아, 이거 커피 향이구나. 그런데 커피 향이 이렇게 좋다고? 어쨌든 조금이라도 더 밖에 서 있다가는 지독한 독감에 걸릴 예감이어서 지성은 급하게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페 안은 우드 톤의 디자인으로 호그와트 도서관 뺨치는 드는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그렇다고 너무 고리타분하지도 않고 적당히 세련됐는데 사람도 없네. 우선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은 지성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독특한 점은 카운터 쪽은 바(bar) 형태여서 혼자 온 손님들도 술을 마시듯 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구성은 처음 보네... 지성이 감탄하면서 앞에 놓인 메뉴판을 확인했다.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또 에티오피아... 브라질... 케냐...

 

 

 

익숙하지 않은 (그러나 대충 커피의 원산지인건 알겠는) 나라들이 줄줄이 적혀있는 목록을 보면서 지성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람... 한참 메뉴판을 지성이 노려보자 카페 주인으로 추정되는 분이 빙긋 웃고 계시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커피 좋아하세요? 지성은 잠시 고민했다. 커피에 굉장히 자부심이 있어 보이시는데....

 

그러나 지성은 거짓말을 잘 못 했다. 아뇨... 조그맣게 말하고는 지성은 어쩐지 양심이 아려왔다. 뭔가 죄송하네... 그러나 그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으시고 능숙하게 핫초코를 추천하셨다. 놀랍게도 초딩 입맛인 지성의 마음에 쏙 드는 탁월한 메뉴 추천이었다. 여기 맘에 든다. 지성이 생각했다.

 

 

 

핫초코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온 지성은 충전기를 꽂은 후 노트북을 열었다. 카페 분위기도 괜찮고, 사람도 없고, 가격도 괜찮고, 조용하고... 여러모로 지성이 원하던 장소에 부합했다. 그래, 다시 심기일전 하는 거야! 핫초코를 한 입 홀짝 하고 당 충전을 한 지성이 애물단지 같은 자신의 원고를 천천히 퇴고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분명 처음 카페에 들어왔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는데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이제는 다 식어빠져버린 핫초코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있었는데도 아직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이젠 다 고쳤다고 생각했던 손톱 물어뜯는 습관이 다시 튀어나왔다. 미치겠네... 한 번도 피워본 적 없는 담배가 생각나기까지 했다.

 

심란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데, 딸랑 소리와 함께 카페의 문이 열렸다. 지성 다음으로 카페의 첫 손님이었다.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캡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 날씨에 코트를 입고 있었음에도 별로 추워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얼죽코, 뭐 그런 건가? 아무튼 얼죽코 수장같아 보이는 그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파워 인싸들이나 앉을법한 카운터 앞 바 자리에 앉아 익숙하게 커피를 주문했다. 아마 단골이나 지인 정도려나. 바에 팔을 올려놓자 코트가 조금 밀려 올라가 자연스레 팔목의 시계가 드러났다. 우와, 번쩍거리네. 시계를 잠시 바라보던 지성이 다시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까는 모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는데 꽤 훤칠한 미모다. 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런 얼굴이 익숙할 리 없는데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다. 기시감에 머리를 굴리지만 딱히 생각나진 않는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던 사이 어느새 남자의 커피가 나왔다. 먼저 향을 음미하고는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그를 보고 있자 하니, 웬걸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분위기가 있는 사람은 오랜만이다. 간만에 신비로워 보이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지성의 창작욕구가 샘솟았다. 가만히만 있어도 영감이 새록새록... 이게 몇 년 만이야! 지성이 급하게 새 문서를 열고 글을 써 내려갔다.

 

 

 

'방금 한 사건을 처리하고 온 형사. 나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함. 그는 사건을 하나 마치면 평소 단골인 커피집에서 매번 시키는 메뉴를 마심. ....'

 

 

 

형사? 형사보다는 무슨 느낌일까....

 

 

 

간만에 캐릭터를 만드는 작업에 신나서 몰두하고 있던 지성 앞에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들어보니, 어라 내가 글 쓰는 주인공이 여기 와 계시네.

 

 

 

"아... 안녕하세요.."

 

 

 

지성은 당황했지만 나름 티 내지 않고 인사를 했다. 뭐지? 갑자기 왜 여기로 온 거지...? 그런 지성에게 남자는 아주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아까부터 저 보고 계시던데."

 

"아."

 

 

 

어떡해... 망했다....

 

 

 

"기분 나쁘셨죠. 죄송해요..."

 

"...."

 

"제가 글 쓰는 사람인데, 너무 분위기가 있으셔서... 갑자기 막 소재가 떠올라서 써보고 있었어요. 싫으시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이렇게 글이 술술 써지는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저도 모르게..."

 

 

 

말하면서도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싶었지만 어쨌든 지성은 횡설수설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지성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말했다.

 

 

 

"봐도 돼요?"

 

"네?"

 

"제가 읽어봐도 돼요?"

 

"아... 네, 그럼요."

 

 

 

지성이 후다닥 노트북을 남자 쪽으로 돌려주자 남자가 아예 지성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천천히 글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에게서는 미약한 담배향기와 이를 덮어버릴 정도의 강한 커피 향이 났다.

 

어쩐지 어린 시절 일기장을 검사받던 기분과도 비슷해 좀 쑥스러워진 지성이 괜히 몸을 배배 꼬았다. 그래도 저 사람 보고 쓴 글이니까... 안 보여줄 수는 없잖아... 마치 교수님께 자신의 첫 습작을 보여드리던 그때 그 기분으로 지성이 조금은 긴장한 채 남자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영 읽기 어려운 포커페이스에 지성은 축 처졌다가, 다시 부끄러워졌다가, 아냐 나쁘지 않았어, 혼자 야단법석을 치고 있었다.

 

 

 

"좋네요. 제가 뮤즈인 거죠?"

 

"아... 그런 셈이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서야 지성은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우와 잘생겼네... 근데 진짜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허락해줄게요. 지우지 마세요. 마음에 들었어요."

 

"앗 넵..."

 

 

 

다행이당. 이거 맘에 들었는데. 지성은 맨들맨들한 광대를 뽕싯 올리고는 흡족하게 ctrl+s를 눌렀다. 언젠가 차기작에 써먹어야지.

 

 

 

"그런데 글을 쓰신다고요? 어떤 장르 쓰세요?"

 

"음... 소설을 써요. 지금 구상하는 건 방송계 얘기인데, 막막하네요. 아는 게 없어서 그런가. 자료조사를 해도 번번이 리얼리티가 없다고 까이고 있어요. 하하."

 

 

 

지성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리얼리티 얘기가 나올 때 즈음에는 이미 눈이 반쯤 텅 비어있었다. 상사에게 잔뜩 털리고 온 직장인의 바이브를 내뿜고 있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주제가 흥미로웠는지 눈을 반짝 빛냈다.

 

 

 

"오. 저한테 얘기해줄 수 있어요? 말해줘도 되나요?"

 

"뭐... 어디가서 말만 안 하시면요."

 

 

 

어차피 글도 잘 안 써졌기에 다시 새롭게 글을 대한다는 마음으로 지성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자가 지성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신이 난 지성은 앞의 남자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것도 잊고 몰두해서 스토리를 설명했다.

 

 

 

"...그래서 여기가 끝이에요."

 

"오..."

 

"어때요...?"

 

 

 

평소 글을 봐주던 지인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평을 듣는 건 처음인지라 지성이 괜히 긴장되는 마음으로 볼에 바람을 넣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는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재미있긴 한데, 확실히 좀 리얼리티가 부족하네요."

 

"아... 역시 그런가요..."

 

 

 

예상했던 대로 똑같은 부분을 지적받자 지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장 분위기 내는 게 참 어렵네요... 축 처진 지성이 힘이 다 빠진 채로 의자에 늘어졌다. 그런 지성을 바라보던 남자가 아랫입술을 한 번 꾹 물더니 지성에게 물었다.

 

 

 

"그럼 제가 얘기해드릴까요? 좀 리얼리티가 살 수 있도록요."

 

"네? 아... 그럼 감사하죠. 방송 쪽 일 하시나요?"

 

 

 

지성이 늘어졌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지성은 도와준다길래 별 생각 없이 했던 질문인데 남자는 굉장히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저 모르세요?"

 

"넹?"

 

"저 알고 아까부터 쳐다보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어..."

 

 

 

사고회로가 잠시 멈춘 지성이 남자의 얼굴을 다시금 찬찬히 뜯어보았다. 잘생기셨네. 눈이 아주 반짝거리시고. 좀 토끼 같은 느낌... 어 잠시만,

 

 

 

"나재민씨....??!"

 

 

 

뜨악 놀라는 지성을 보면서 재민이 허촴... 하고 단단히 삐졌다는 표정을 했다. 이거이거 안 되겠네. 방송 쪽 글 쓰신다는 분이 저도 못 알아보시면 어떡해요?

 

 

 

"아니... 헐... 대박... 저 완전 몰랐어요. 어쩐지 어디서 본 거 같더라...."

 

 

 

가지런히 손을 모아 입을 막고는 우와... 하는 감탄사만 연발하는 지성에게 재민이 어떻게 저를 몰라요 무려 9살 때 스크린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한 작품이 스무개가 넘고 씨에프가 열 개가 넘는 데다 관객수 쌍천만을 찍은 국민배우 나재민을! 이라며 숨도 안 쉬고 항의했지만 딱히 지성이 듣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티비나 영화관에서나 보던 사람이 내 앞에 있다는 것에 많이 놀랐을 뿐.

 

 

 

"와 연예인 처음 봐요... 저 싸인받아도 돼요?"

 

"싫어요 안 해줄 거예요"

 

"우왕 신기하다..."

 

"...펜이나 주세요."

 

 

 

옆에 있던 노트 한 장을 펼치고는 재민이 멋들어지게 싸인을 했다. 지성은 아직도 계속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배우라서... 그렇게 아우라가 있으셨던 거구나... 역시 배우 하는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나 봐요.

 

재민은 삐진 티를 팍팍 내면서도 착실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제가 아우라가 있었어요? 그렇죠 저는 배우죠. 아우라가 있어서 배우라기보단 연기를 잘해서 그렇겠지만요. 저 알아보지도 못하셨으면서...

 

 

 

"어쨌든. 작가 지망생씨는 이름이 뭐예요?"

 

"아, 저는 박지성이요."

 

"지성씨구나. 지망생이면 대학은 졸업했어요?"

 

"네... 졸업했죠."

 

"그럼 나이가?"

 

"스물 여섯살이요."

 

"아하. 제가 형이네요. 편하게 불러요."

 

"네... 그럼 형도 편하게 하세요."

 

"그래 지성아."

 

 

 

진짜로 편하게 말 까는 재민에 속으로 지성이 나도 그냥 반말할걸... 하고 잠시 투덜거렸다.

 

그런 지성의 속은 모른 채 재민은 지성의 이름을 몇 번 되뇌면서 싸인 옆에 To. 지성이♡ 까지 야무지게 적었다. 연예인 싸인 처음받아요... 신기해. 지성이 소중하게 노트를 접는 걸 보며 재민이 흐뭇하게 웃었다. 싸인받은게 그렇게 좋아? 백장도 해줄 수 있는데. 어우 그렇게 하면 손목 나가요. 지성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럼 글은 이시간에 매일 쓰는 거야?"

 

"사실 카페 오늘 처음 왔는데... 마음에 들어서요. 내일도 올 것 같아요."

 

"처음 온 것 같더라. 내가 여기 매일 오거든."

 

"헛... 그럼 이 카페 형 거예요?"

 

"내 건 아닌데, 커피가 마음에 들어서 자주 와."

 

 

 

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여기 단골이신 것 같더라구요.

 

 

 

"그럼 내일도 여기서 이 시간에 볼까? 내가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좋아요. 감사합니다, 형."

 

 

 

지성이 말갛게 웃었다. 재민이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야 한다며 돌아가고 난 뒤 한시름 놓게 된 지성도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꿈인 것만 같던 연예인 재민과의 만남을 다시 곱씹어보면서 지성이 생각했다. 재민이형 친절했지... 나쁜 사람은 아닐 거 같아... 커피 향 나던 와인색 코트를 입었던 재민을 생각하며 지성이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에 들었다.

 

 

 

 

 

 

 

*

 

 

 

 

 

재민은 지성만큼이나 자주 카페에 왔다. 매일 카페에 출근도장 찍는 재민을 보며 지성이 형은 이제 일 안 하냐며 잠깐 걱정까지 했을 정도였다. 원래 커피라고는 향 맡을 일도 없던 지성이 문지방 닳도록 카페에 오는 덕분에 지성은 이제 커피 향만 맡으면 자동반사적으로 재민이 생각나게 되었다. 한 번은 나름 카페 다녀봤답시고 집에서 인스턴트 커피인 카x를 타서 마셔볼 때에도 아 이거 재민이 형 냄새... 했다가 깜짝 놀랐던 적도 있었다.

 

재민은 맡은 역할에 착실하게 지성의 글에 현장감을 부여해주었다. 덕분에 글은 전면 수정을 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더 생동감이 넘치는 글이 되어 지성이 보기에도 만족스러운 글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에이~ 감독님들 중에 싸가지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한테 막 나재민씨. 감정이 부족해요. 이러시는 분도 있어."

 

"그렇게 막 얘기해도 돼요...?"

 

"그리고 이 대사는 더 싸가지없게 써야 해. 누가 봐도 기분 나쁘게."

 

 

 

실없는 소리도 나누면서 만남을 거듭하다 보니 지성의 글은 점차 완성 형태에 다다르고 있었다. 때마침 등단을 할 수 있는 큰 공모전의 공고가 떠서 지성은 글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다시 작업 장소를 집으로 옮겼고, 재민은 자연스럽게 지성의 집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지성아... 나 그냥 오늘은 자고 가면 안될까? 나 넘 피곤행."

 

"아 형 어제도 잤잖아요! 오늘은 형 집에 가요."

 

"잉 지성아... 그치만 운전하기가 너무 귀찮아..."

 

"형 차도 좋은 거 타잖아요... 대리운전 불러줄까요?"

 

"넌 형 맘을 왜 이렇게 몰라!"

 

"..."

 

 

 

결국 공모전 제출기한 막바지에 다다라서는 재민이 거의 지성의 집에서 숙박을 했다. 그러면서 재민이 뭘 했냐? 잠도 안자고 밥도 제대로 안 챙겨먹는 지성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중간중간 글 수정도 도와주고 지성이 자신감 안 떨어지게 응원도 해주고. 그러다 밥 먹을 때 틀어놓은 티비에서는 재민이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하는 커피 광고가 나왔고 지성은 저 사람이 여기 있는 이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나... 하는 의심도 가끔 했더랬다.

 

날마다 지성의 집에 있으면서도 재민이 꼭 빼놓지 않는 것은 카페에 가서 음료를 사 오는 것이었다. 내 꺼는 커피 지성이는 아이스초코. 그래서 지성의 집에는 커피 향이 나지 않을 새가 없었다. 재민이 틈만 나면 커피를 마셨기 때문이다. 형 카페인 중독 아니에요? 아닌데? 그 정도면 중독이에요.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재민이 카페도 나가지 않더니 커피의 ㅋ 자도 가까이 하지 않던 지성의 집에 커피가 점차 쌓이기 시작했다. 이건 맥x, 카x... 결국 마지막엔 재민이 원두와 그라이닝 머신을 들고 왔다. 지성아 형은 이제 인스턴트는 못 마시겠어. 형이 만들어서 마실 거야. 그냥 사서 마시면 안될까요? 이제 카페 갈 시간도 아까워. 지성이 케어해야지. 나보다 형이 더 바쁜 것 같네요...

 

 

 

지성이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한 날은 오히려 본인이 후련하다며 재민이 지성을 데리고 아주 비싼 고깃집에 갔다. 무려 메뉴판에 가격이 없는 곳. 형 나 쫌 부자 된 기분이에요. 반딱거리는 광대가 뾱 튀어나오도록 실실 웃고 있던 지성은 음식이 나오자 열심히 고기를 흡입했고 재민은 그저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울 지성이 많이 먹어용. 흡사 모이를 먹이는 어미 새와 받아먹는 아기새의 모습이었다. 형은 안 먹어요? 지성이 중간에 예의상 물어보면 아냐 형도 먹고 있어 하면서 몇 입 먹고는 다시 지성에게 집중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유사육아의 현장이었다.

 

 

 

지성이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하고 난 뒤로는 딱히 지성의 집에 눌러앉아있을 이유가 없어진 재민은 반강제로 지성의 집에서 나오게 되었다. 형 작품 들어왔다면서요! 사실 일도 들어오긴 했다. 들어온 정도가 아니라 쌓여있었다. 그렇지만 계속 여기 있고 싶은걸 어떡해...

 

어느새 집에 재민의 물건이 한가득이라 일일이 치우는 것도 일이었다. 결국 지성은 치우기를 포기하고 재민의 물건들과 공존하면서 살아가기로 했다. 내 집은 25평인데 형 물건만 15평은 차지한 거 같네요... 그렇게 지성의 집은 재민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버렸다. 특히나 지성은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허파로 가득 들어오는 커피 향이 가장 새로웠다. 형이 없어서 가끔 허전할 때에도 커피 향을 맡으면 재민이 형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커피는 안 마셔도 커피 원두는 갈아서 여기저기에 방향제로 뿌려놨다. 웃기기도 했다. 커피는 안 마시면서 커피 향만 좋아한다는 게.

 

 

 

 

커피 향을 맡으면 재민이 생각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연락을 했다. 형 뭐 하고 있어요. 울 지성이 심심해? 형이 갈까? 재민은 답이 늦는 법이 없었다. 아직 촬영에 들어가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대부분 칼답이었고 아무리 늦어도 한 시간 내로는 답장이 왔다. 이제 형이 답장 빨리 안 하면 무슨 일 생긴 것 같아요, 라고 말하며 지성이 웃을 때 재민은 사랑해 마지않는 지성의 말랑한 볼따구를 만지작거렸다. 너한테는 항상 빨리 답장하고 싶어. 늦게 답하면 안될 것 같아.

 

 

 

그러다 공모전 발표일이 다가왔다. 지성은 공모전에 글을 내본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떨리지 않았는데, 오히려 재민이 난리였다. 전날 밤부터 전화해서는 잠이 안 온다며 계속 같이 통화하자고 하는 바람에 결국 새벽 5시에 잠들어버렸다. 그래서 발표가 오전 10시인데 거나하게 늦잠을 자버린 지성은 오후 2시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눈에 잔뜩 졸음을 달고는 비척비척 컴퓨터로 다가가 공모전 사이트에 접속했다.

 

 

 

[공지] 제 25회 한마음문학상 수상자 발표

 

 

 

원래라면 떨려서 공지를 누르지도 못하고 한 시간은 달달 떨고 있어야 했는데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창을 본 지라 지성은 별로 떨지도 않고 공지를 눌렀다. 화려한 그림으로 수상자를 발표한다는 공지가 뜨고 스크롤을 쭉 쭉 내리는데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지성은 거침없이 내리던 스크롤을 다시 위로 올렸다.

 

 

 

대상... 박지성..?

 

엉...?

 

 

 

지성이 눈을 비볐다. 나 지금 아직 자고 있나? 다시 화면을 노려봐도 대상 옆에 적혀있는 '박지성' 이름 세글자는 여전했다. 게다가 작품 이름이 '유리인간'이었다. 이거 내 글 맞는데.

 

마침 옆에 놓여있던 핸드폰이 드드득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화면에 떠 있는 '재민형'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지성이 빠르게 화면을 옆으로 밀었다.

 

 

 

"여보세요?"

 

"어, 지성아. 일어났어?"

 

"네. 근데 형 저... 상 탄 것 같아요."

 

"지성아."

 

"네?"

 

"대상 축하해!!!!!"

 

 

 

갑자기 재민이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지성이 깜짝 놀라 귀를 뗐지만 입은 활짝 웃고 있었다. 아 형 뭐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라고 작게 타박했지만 지성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런 김에 나 지금 너희 집 앞인데 문 좀 열어줄래?"

 

"네??"

 

 

 

지성이 급하게 잠옷을 입은 채로 현관으로 뛰어가 문을 여니 시상식에나 입고 갈 법한 검은색 정장을 쫙 빼입고 머리까지 넘긴 재민이 거대한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서 있었다. 지성이 문을 열자마자 재민은 꽃과 함께 지성을 얼싸안았다. 울 지성이 해낼 줄 알았어! 축하해 지성아.

 

양팔을 다 써야 겨우 안기는 꽃다발을 품에 안으며 지성이 환하게 웃었다. 형 진짜 고마워요. 이거 다 형 덕분인 거 알죠? 와 진짜 대박.

 

 

 

그렇게 성공적으로 등단을 한 지성은 금방 다음 작품을 쓰겠다며 신나서 노트북을 잡았다. 이번엔 무슨 장르 쓸 거야? 추리요. 꼭 써보고 싶었어요. 울 지성이 장르물도 도전하는 거야? 멋있다. 확실히 지성은 등단하고 난 뒤로는 많이 신나있었다. 평소에 재민이 대본집을 들고 와도 우와 대본이구나. 하고 말았을 텐데 요즘 들어서는 직접 상대역도 해주겠다고 나섰다.

 

 

 

"우와, 형. 이거 로맨스 코미디였어요?"

 

"응. 내가 말했었는데 지성아."

 

"아~... 그때 형이 해준 맛있는 밥 먹느라 잘 못들었나봐영."

 

 

 

그렇게 지성이 얼렁뚱땅 애교로 무마하고 둘은 대본집을 보면서 몇 번 대사를 주고받았다. 어머 정민선배 여기는 무슨 일...? 이세요. 은하구나. 안녕. 정민선배도 여기서 수... 업이 있으... 신가요?

 

형이 배우인 이유가 있네요. 대단하다. 얼마 하지도 않고 지성이 지쳐 K.O.를 선언했다. 역시 로맨스는 어렵네. 저 다른 장르는 좀 잘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데 형 로맨스 코미디는 엄청 오랜만인 거 아니에요? 매번 정극이나 영화만 찍었잖아요."

 

"맞아. 원래 나랑 좀 안 맞는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작품은 좀 해보고 싶더라고."

 

"그렇구나..."

 

 

 

매스컴에서도 재민의 작품 선택은 화젯거리였다. 경력이 오래되었고 그만큼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다뤄봤기에 드라마를 찍더라도 정극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재민의 횡보는 의외였다. 그만큼 재민의 작품은 대중들에게도 기대작이었다. 덕분에 지성은 촬영 때문에 바빠져서 만나기 힘들어진 재민을 연예 뉴스에서 줄기차게 보게 되었다.

 

방영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던 재민의 작품은 첫방부터 압도적인 시청률을 자랑했다. 지성도 드라마를 안 본 지 몇 년은 된 게으른 시청자였지만 간만에 본방사수를 하고자 제 시간에 맞춰 티비 앞에 앉았더랬다.

 

 

 

[재민이형] 지성아 보고있어???

 

[재민이형] 이제 곧 나온다ㅏㅏㅏㅏ

 

[재민이형] 드라마 오랜만이라서 떨려ㅠㅠㅠ

 

[나] 형 떨지마요ㅋㅋㅋ 저도 본방사수하려고 지금 티비 앞!

 

[나] (사진)

 

[나] 와 재민이형 티비나온다

 

[재민이형] 지성이 본방사수하는거야??? 감동이야ㅜㅜㅜㅜㅜ

 

 

 

처음 드라마가 시작하고 5분 정도는 으악 오글거려! 몇 번 말했지만 진행될수록 드라마 속의 재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결국 한 회가 끝날 즈음에는 지성도 손을 모으고 시청자의 입장으로 완전히 몰입한 채였다.

 

 

 

[나] 형 완전 대박이예요ㅠㅠㅠㅠ

 

[나] 짱 재밌어요 저 드라마 오랜만에 보는데

 

[나] 형꺼라서 그런게 아니라 진짜 재밌어요!!!

 

 

 

흥분해서 카톡을 날리자 곧바로 재민에게 전화가 와 한참을 통화하며 재민을 추켜세워줬다. 역시 국민배우 나재민! 연말을 같이 보내고 싶은 남자 1위 나재민! 20대 여성을 사로잡은 남자 1위 나재민! 전 국민 인지도 1위 배우 나재민! ...또 뭐가 있더라...

 

그러곤 평소 습관처럼 새벽 감성에 기대어 밤을 새고 아침에 잠들었다. 그렇게 지성이 오전엔 잠을 자고 저녁쯤에 일어나 재민의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쓰고 다시 아침이 다 되어 잠드는 생활을 계속하자 아무래도 재민과 연락 주기가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재민이 어느 날부터는 카톡 대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지성아. 뭐 하고 있었어?"

 

"음... 자고 있었어요...."

 

"지성아 밤낮 바뀌면 몸에 안 좋다니까. 나가서 햇빛도 보고 그래야지."

 

"응... 알겠어요..."

 

"지성아 사무직인 사람들에게 제일 부족한 게 뭔지 알아? 비타민 디래. 근데 그건 햇빛을 봐야지만 자연 섭취가 가능하단 말이지. 물론 약으로 먹어서 해결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무래도 인공적으로 만든 음식보다는 그냥 햇빛을 보는 편이 훨씬 좋고 면역력 약하면 각종 병에 걸리기 십상이라는데 비타민 디가 없으면 면역력이 바로 떨어진대. 지성이 너 형이 비타민 씨랑 홍삼이랑 마그네슘 챙겨 먹으라고 식탁에 둔 것도 아직 안 먹었지? 챙겨 먹는 거 많으면 귀찮아서 안 먹으니까 밖에 나가서 십 분만 햇볕을 쬐란 말이야. 엉?"

 

"...네..."

 

"그리고 지성아. 해가 있는 이유가 뭐겠어. 아침엔 일어나서 활동을 하고 밤에는 어두컴컴하니 잠을 자라는 거잖아. 사람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살아야...."

 

 

 

재민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잔소리에 지성이 몰래 눈감고 반쯤 졸면서 듣고 있다가 누군가 재민씨~ 라고 부르면 얼른 재민형~ 이제 가 봐요~ 형 촬영해야죠~ 하며 겨우 끊고는 다시 지성이 잠드는 생활은 일상이 되었다.

 

재민도 촬영하다가 쉬는 시간에 틈틈이 연락하는걸 아는지라 지성도 연락하지 말라고 할 생각도 없었고 밖에도 나가지 않는 편인지라 이렇게 재민과 전화할 때가 사람 사는 느낌이 들어 좋기도 했다. 그렇게 날이 거듭할수록 재민과의 불시 통화는 익숙해졌고 그때마다 잠결이던 지성은 저도 모르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도 횡설수설 내뱉곤 했다.

 

 

 

"나는 지성이 보고 싶을 땐 지성이 책 읽어."

 

"오... 그래요?"

 

"응. 이게 너의 글들이잖아. 뭔가 읽을 때마다 신기해."

 

"으응... 형이 나랑 아는 사이니까 신기한 건가?"

 

"그렇지. 지성이가 무슨 생각하는지 궁금할 때는 지성이가 쓴 책을 읽으면 되니까."

 

"아무래도 저는 말주변이 별로 없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제 글을 읽는 건 좋아요. 하고 싶은 말을 제가 오랫동안 고민했던 단어와 문장들로 표현한 거니까... 옛날에 작가들은 책으로 고백했다잖아요. 말로 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나?"

 

"아무래도 작가들이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런 거 보면 제가 작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축복받은 거 같아요. 나는 글로 말할 수 있으니까. 마음을 표현하는 건 중요해요... 내가 말은 좀 못해도... 글로는... 그래도 자신 있거든요... ..."

 

"지성아. 자?"

 

"..."

 

"잠들었네."

 

"..."

 

"잘 자, 지성아."

 

 

 

 

 

*

 

 

 

 

 

매일 전화로만 안부를 이어가던 중 정말 오랜만에 재민이 지성의 집에 찾아왔다. 지성이 편집장에게 원고를 제출했는데 반응이 별로였다고 말하니 제가 먼저 읽어도 괜찮으면 집에 오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저야 당연히 괜찮죠. 형 근데 촬영 중인 거 아니었어요? 아냐 형 분량은 다 끝났어. 재민이 바쁜 와중에 겨우 온 걸 모르지 않았기에 지성은 재민이 즐겨 마시던 커피도 사다 놨다. 음 재민이형 향이네.

 

 

 

"지성아 이 커피 지성이가 산 거야...?"

 

 

 

감동 백만번쯤 먹은 재민의 얼굴을 보면서 지성은 뿌듯함을 느꼈다. 형 요즘 드라마 찍느라 피곤하니까 제가 쏘는 거예요. 생색도 한 번 내주고. 재민은 도착하자마자 집안에서 나는 커피 향이 너무 좋다고 좁은 집안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킁킁거렸다. 언제 한 거냐며 활짝 웃는 재민에게 사실 처음에 하게 된 이유는 형한테서 나는 향 같아서 이렇게 해놨다고는 부끄러워서 절대 말 못했다.

 

 

 

"형 진짜 우리 집 오랜만에 오나 봐요. 이거 한 지 좀 된 건데."

 

"그래? 형이 더 자주 와야겠다. 지성이 너무 오랫동안 못 봐서 형이 지성이가 쓴 책들만 읽고 있잖아~ 이젠 볼 게 없어서 예전에 지성이가 낸 단편도 읽었어."

 

"그렇구나... 네?!?!"

 

 

 

지성이 전기라도 맞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거 졸업작품인데...?

 

지성은 자신이 완성한 글에는 항상 자신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하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작품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교수님들도 피해갈 수 없다는 흑역사인 졸업작품.

 

 

 

"근데 지성아 왜 본명으로 안 하고 이니셜로 썼어. 찾기 힘들었잖아."

 

"아니... 형 그거 어떻게 찾았어요?!"

 

"문창과는 졸업작품 무조건 써야 한다며. 네가 그랬잖아. 그래서 한국대학교 21학번 졸작 찾아봤지. 그냥 뭐~ 울 지성이는 어떤 감성을 가지고 있었을까~ 궁금해서~"

 

"와... 진짜..."

 

"이니셜로 적혀있어서 좀 찾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찾아서 읽어봤어. 너어무 귀엽드라. 거기 주인공이 글로 고백하던데... 혹시 그거 지성이?"

 

"아 진짜 쫌! 자꾸 그러면 저도 형 데뷔작 찾아볼 거예요."

 

 

 

소심하게 복수한답시고 재민의 데뷔작을 들먹였지만 안타깝게도 재민에게 전혀 타격은 없었다.

 

 

 

"아직도 안 봤어? 형 진짜 서운하다. 얼른 봐. 그거 아직도 세기의 명연기로 회자되잖아. 9살이 그렇게 아련하게 울 수 있을 거 같아?"

 

"하 진짜..."

 

 

 

지성은 묻어뒀던 자신의 흑역사가 떠올라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재민은 굉장히 즐거워하며 웃고 있었다. 감히 문창과 앞에서 졸업작품을 언급하다니. 사악하다 나재민... 지성은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지성아, 우리 이니셜 똑같더라. 나는 재민이니까 jm이고 너는 지성이니까 js."

 

"다른 거 아니에요?"

 

"쉿. 앞 글자가 같잖아."

 

"..."

 

 

 

사심을 담아 지성이 재민을 흘겨봤다. 진짜 노잼이었어요... 지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앞 글자로만 이니셜을 쓰면 겹치긴 하겠네요. 그럼 만약에 j한테 편지를 쓰면 그건 누구한테 쓴 걸까요?"

 

"글쎄? 네가 썼다면 나한테 쓴 거겠지?"

 

"그런가..."

 

"그래서 헷갈리니까 이니셜로 쓰면 안 된다는거야."

 

"감성이 있잖아요, 감성."

 

 

 

한참 실랑이하던 졸업작품 대란이 끝나고는 재민이 지성이의 미완성 원고를 읽으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다. 여기서 범인 잡히는 과정이 좀 더 드라마틱해야 할 거 같아. 지금은 범인이 잡힐 때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랄까. 원래 이 부분이 가장 클라이맥스잖아?

 

그런 재민의 조언을 지성이 받아적으면서 바로바로 수정을 하는 과정을 거치자 제법 글이 마음에 들게 바뀌었다. 형 정말 고마워요. 웃으며 재민을 배웅하고는 지성이 착잡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형한테 많이 안 기대려고 했는데..."

 

 

 

데뷔작에서 이미 재민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지라 이번에는 정말 간단한 후기만 들어보려고 했는데 재민과 이야기하다 보면 항상 후기를 넘어 어느새 글을 전부 고치고 있었다. 형이 문제점을 풀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싫은 건 절대 아니지만 재민이라는 치트키로 너무 쉽게 고비를 넘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지성이었다. 나 이래도 되나...

 

속이 복잡해진 지성이 그 이후로도 며칠간 밤새 글을 붙잡고 있었지만 아무리 새로 수정을 해 봐도 재민과 이야기하면서 적었던 글이 제일 좋은 것 같아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편집장에게 메일을 보내고 지성이 꾸벅 잠에 들었다.

 

 

 

 

 

*

 

 

 

 

 

'지성씨. 감 돌아왔나봐? 그전에 답답했던 부분들이 싹 바꼈네.

 

수고했어.

 

 

 

김 편집장.'

 

 

 

잠에서 막 깬 지성이 멍하니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편집장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수정 전에 보여드렸을 때는 까였었는데... 옆에 놓여있던 핸드폰이 지잉 울었다. 재민이었다.

 

 

 

[재민이형] 지성아, 뭐해~? 일어났어?

 

 

 

 

 

나... 형 아이디어 훔치는 거 아닐까, 이거?

 

간신히 눌러놓았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작가로서 이래도 되나? 작가라고만 안 했지 안 붙였지 형이 아이디어 다 빌려준 거 아니야?

 

재민에게서 온 연락창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던 지성이 천천히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나] 이번엔 오케이 받았어요.

 

[재민이형] 다행이네!!! 고생 많았어 지성아ㅎㅎ

 

[나] 고마워요. 형 덕분이에요. 그런데 괜찮으면 오늘 만날 수 있을까요?

 

 

 

 

 

*

 

 

 

 

 

아침에 지성에게 오늘 저녁 만날 수 있냐는 연락을 받고 재민은 결심했다. 절대 엔지내면 안된다. 물론 촬영장에 가면 모든 게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지만, 오늘은 정말 간절했다. 지성이가 먼저 보자고 한 거 처음이란 말이야!

 

재민의 바람이 통한 건지, 촬영이 순조롭게 끝나 재민은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찍 나올 수 있었다. 재민씨 좋은 일 있어요? 얼굴이 폈네. 이 말을 오늘만 해도 수십번은 들은 재민이었다. 평소보다 텐션이 올라간 상태로 기분 좋게 퇴근해서는 지성의 집에 도착하자 지성이 미리 소주와 맥주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는 비장하게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지성아. 오늘 먹고 죽자 이거야? 그래도 과음은 몸에 안 좋아~"

 

"그 정도는 아닌데... 오늘 할 말 있어서 그래요."

 

"그래? 우리 지성이가 형한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며칠 만에 다시 지성을 만나서 기분이 굉장히 좋은 재민은 샐샐 삐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재민이 맥주잔 하나를 까자 팍 하는 경쾌한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형 형, 오늘은 그 감성 아니고. 약간 쫌 진지해요."

 

 

 

지성이 컴다운 하라며 손짓했다. 그럼 나도 맞춰줘야지. 재민도 덩달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성이가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술잔까지 준비했을까. 잘 마시지도 못하는 애가.

 

 

 

"우선 마시고... 얘기할게요."

 

 

 

소주를 까더니 큰 잔에 꼴꼴꼴 따라서는 벌컥벌컥 들이키는 지성. 재민이 오우... 하고 놀라서 바라봤지만 지성은 굴하지 않고 마셨다. 술이 들어가야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이쯤 되니 재민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지성이가... 선수 치려는 건가...?

 

 

 

 

절대 아닌 거 알지만 재민이 아주 약간의 일말의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지금 이 상황이 그게 아니면 뭐야. 이렇게 분위기 잡아놓고 맨정신에 못하겠으니까 술 먹고 하겠다는 말이 그거밖에 더 있어? 재민은 평생 해 본 적 없는 긴장이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일평생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이 이렇게 갑작스레 눈앞에 닥쳐오다니? 생각보다 진도가 빠르잖아...?

 

 

 

"저 말할게요."

 

"그래 지성아."

 

 

 

재민이 잔뜩 긴장한 채로 침을 삼켰다. 지성이가 말하면 난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지성아 기다리고 있었어. 나도 사실 널...

 

 

 

"고백할 게 있어요."

 

"응. 말해봐."

 

"제가... 형 생각을 도둑질 한 것 같아요."

 

"그래, 나도... ...응?"

 

 

 

재민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그제서야 푹 숙이고 있던 지성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성의 눈에는 작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제가 형 아이디어 훔친 것 같다구요..."

 

 

 

지성이 울먹거리자 당황한 재민이 우선 급하게 달래기를 시전했다. 지성아 울지마. 왜 울어. 너가 뭘 훔쳐? 지성이 잘못한 거 없어. 자 여기 휴지. 눈물 닦자.

 

 

 

"이번에 수정해서 제출한 글 오케이 받았다고 했잖아요."

 

"응 그랬지."

 

"근데 형이 고쳐준 부분들이 맘에 든대요."

 

"그래? 그랬다면 다행이네."

 

"그럼 그건 형 글 아니에요?"

 

"그게 왜 내 글이야. 내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난 그렇게 못 써. 아이디어는 나한테서 나와도 그걸 글로 만들어준 건 지성이니까. 지성이 글이지."

 

"..."

 

"그리고 내가 고쳤다고 하면 안되지. 나는 이런 건 어떻냐고 얘기만 했는데 거기서 영감을 얻고 스토리를 이어가면서 글로 풀어낸 건 지성이였잖아."

 

 

 

지성이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눈물은 그쳤지만 아직 축 쳐져 있는 지성의 옆으로 재민이 다가가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것 때문에 우울한 거였어?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내가 아니라는데 왜 그래."

 

 

 

재민은 지성의 발상이 잘 이해가 되진 않았으나 지성이 울었으니 위로하려고 애를 썼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작가의 고충이겠지. 지성도 재민이 그렇게까지 아니라고 말하자 딱히 더 언급하진 않았다. 그래도 재민은 지성이 웃어야만 안심될 것 같아 울 것도 아니었네~ 라며 장난치듯 말했고 지성이 겨우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지성이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꽤 놀랐던 재민은 집을 떠나기 전까지도 과도하게 죄책감 가지지 말라며 지성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결국 지성은 푸스스 웃으면서 알겠으니까 얼른 가라고 재민을 타박했다. 그래도 마음에 걸렸는지 재민이 집을 나서기 전 지성을 꼭 껴안았다. 아, 재민이 형 냄새. 지성이 재민의 품에 폭 안긴 채 재민에게서 나는 커피 향을 듬뿍 마셨다.

 

 

 

"안 되겠다. 드라이브라도 잠깐 할까?"

 

"형은 술 안 마셨어요?"

 

"응 난 안 마셨지. 네가 소주 원샷하고 울어가지고 마실 틈이 없었어."

 

"아 그랬지... 부끄럽네여..."

 

 

 

아직 술기운이 남았는지 몸이 뜨끈뜨끈해져 얼굴에 홍조가 오른 지성을 데리고 재민이 자신의 차로 갔다. 우와 좋은 차. 전에도 타봤잖아 지성아. 와 외제차~~ 울 지성이 진짜 취했구나.

 

술 취한 사람은 무겁다더니. 평소보다 좀 더 무거워진 듯한 지성을 조수석에 겨우 앉히고 재민이 운전석에 앉아 잠깐 고민했다. 취한 사람 데리고 드라이브 가는 게 맞는 선택인 걸까?

 

 

 

"가자~~ 가요~~~"

 

 

 

그러나 지성이 옆에서 아주 해맑게 가자고 몇 번이나 신나서 외치는 바람에 재민은 잡다한 생각들을 싹 다 지워버렸다. 지성이가 가자니까 가야지.

 

그렇게 술기운에 웃음이 아주 헤퍼진 지성을 데리고 올림픽대로를 건너 뚝섬까지 한강 드라이브 코스를 쫙 돌았다. 드라이브 내내 지성은 웃는 얼굴이었다. 가끔은 술이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 재민이 술에 대한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마냥 헤실헤실 꺄르륵 웃기만 하던 지성이 목이 마르다며 칭얼거렸다. 그래 술 마신 사람이 물 찾는 거, 필수 코스지... 재민은 어쩔 수 없이 잠시 길가에 주차를 하고는 편의점에 들러 물을 사 왔다.

 

 

 

"목마르다면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은 마른데 야경은 이쁘다며 불빛을 눈에 가득 담고 있던 있던 지성이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버렸다. 쫑알거리는 목소리 하나가 줄으니 차 안에는 어느새 적막이 내려앉았다. 앞에는 빛나는 한강 야경이 펼쳐져 있고, 귀엽기만 한 유일한 동승자는 조용히 자고 있으니 세상 평화롭기가 그지없었다.

 

재민이 물을 따고는 자신이 벌컥벌컥 마셨다. 사람 속도 모르고 아주 잘 자요, 하여튼. 답답해진 재민이 자신의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고는 바깥의 야경을 조명삼아 느긋하게 지성을 구경했다. 코는 정말 오똑하네. 입은 병아리 부리같고. 눈은... 쪼그매서 귀여워. 잘 때도 어쩜 이렇게 아기같이 자는 거지. 피부가 좋구나. 타고난 건가.

 

잠든 지성을 보면서 재민이 눈으로 감상을 하다 천천히 손을 지성의 얼굴로 가져갔다. 검지손가락을 살짝 들어 지성의 코 가장 위쪽부터 시작해 콧대를 따라 스윽 내려와서는 입술에 콕 종착점을 찍었다. 한 번 꾸욱 지성의 입술을 눌러도 지성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색색 잘만 잤다.

 

재민이 고개를 숙여 점점 지성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지성에게서는 커피 향과 약간의 아기냄새가 났다. 커피 향이라니, 의외네. 집에서 커피 향이 나서 그런 건가? 요즘 빠진 거 같긴 하던데. 지성의 집에서 왜 커피 향이 나는 건지 전혀 모르는 재민은 그냥 그렇게 지레짐작했다.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근접하자 재민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지성의 앞머리를 살살 매만지고는 이마가 드러나자 재민이 잠시 멈칫하더니 살짝 몸을 움직여 지성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몇 초간 입술을 꾹 누르다 떼자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났다. 지성은 여전히 움직이지도 않고 자는 중이었다. 누가 키스를 해도 모르겠네. 괜히 심통이 난 재민이 한숨을 한 번 푹 쉬었다.

 

 

 

...진짜 모르려나?

 

 

 

재민이 혀로 입술을 한 번 훑었다. 속으로 잔뜩 고민하던 재민이 지성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저 말랑해 보이는 촉촉한 입술... 홀린 듯 지성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츕 소리와 함께 체감상 1초도 안되는 정말 짧은 시간 키스한 재민이 황급히 입술을 떼었다.

 

 

 

미쳤다....

 

 

 

혀로 입술을 살짝살짝 햝으며 입술 끝에 남아있는 감촉을 맛보았다. 점점 얼굴에 열이 올라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미치겠네.

 

 

 

그렇게 재민은 운전대에 고개를 처박고는 애국가를 몇 번 부르고 나서야 지성의 집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

 

 

 

 

 

얼마 뒤 지성의 책이 출판되었다. 지성의 두 번째 책은 첫 작품보다도 반응이 더욱 뜨거웠다. 우선 신인 작가는 대개 비슷한 장르를 고수하기 마련인데 지성은 반응이 좋았던 데뷔작과 아예 다른 장르로 책을 냈다. 게다가 추리소설이라니. 지성의 등단 작품이 방송계의 두 얼굴을 낱낱이 드러내면서 비리를 꼬집는 사회 비판적 감성이 담긴 글이었던 것을 아는 독자와 전문가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르는 독자들에게도 지성의 소설은 흥미로웠다. 내용만으로도 일반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지성의 책은 불티난 듯 팔렸다. 소수의 평론가들은 '한 작가에게서 나올 수 있는 장르적 지평인가?'라며 예리하게 짚어냈다. 그들은 칭찬과 기대를 담아서 적은 문장이었겠지만 이는 은근한 죄책감에 잠겨 있었던 지성의 마음을 후벼팠다. 두 번째 작품까지 재민이 형의 도움을 받아서 냈고 심지어 히트작이 되다니. 나는 거짓 작가인 걸까?

 

재민은 지성의 책이 대박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지성에게 전화를 걸어 잔뜩 축하를 해 주었다. 지성은 약간은 심란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재민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지금 바로 갈까? 형이 같이 축하해 줘야지."

 

 

 

뒤에서 재민을 부르는 목소리가 한둘이 아닌데 재민이 당장 오겠단다. 그런 재민에게 보고 싶다고 하면 진짜로 촬영 펑크내고 달려올까 봐 조금 무서웠던 지성이 재민을 달랬다. 에이 형 촬영해야죠. 조금 널널해지면 그때 봐요. 재민은 굉장히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지성이 어른스럽게 재민을 달랬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지만 막상 재민이 진짜로 오지 않으니 약간은 서운하기도 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뭐지...

 

 

 

 

 

*

 

 

 

 

 

"이게 얼마 만이야 박지성!"

 

"와, 형 오랜만이야."

 

"스타작가 박지성씨~"

 

 

 

정말 오랜만에 과에서 가장 친했던 선배 인준을 만났다. 사실 요근래 재민과 출판사 관련 사람들 이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기억 자체가 까마득했다.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인준이 웃으며 말했다.

 

 

 

제대로 얼굴 보고 만난 지 대략 1년이 지났다. 그만큼 할 말도 많이 쌓였던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 종알종알 떠들었다. 인준은 입에 풀칠은 하고 살고 싶다며 학과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취직을 했다. 그래도 예술 감성은 어디 안 갔는지 요즘은 미술을 취미로 하는 중이었다. 인준의 집에 잔뜩 걸려있는 인준의 작품들을 보면서 지성은 감탄했다. 와, 형은 미술 전공했어도 진짜 잘했을 거야. 그렇게 인준의 직장상사 험담도 열심히 하고, 미술학원에서 만났다는 재밌는 친구 얘기도 듣고, 요즘의 연애사까지 다 듣자 시간은 어느덧 12시가 넘었다.

 

 

 

"야야, 내 얘기만 하면 안되지. 이제 네 얘기 좀 해봐."

 

"나?"

 

"그래. 매번 연락할 때마다 누구랑 있어서 바쁘다며. 그 누구가 누구야 도대체?"

 

"아..."

 

 

 

마침 감정이 혼란스러웠던 지성이었다. 이런 깊은 얘기를 해도 되나, 지성이 잠시 머뭇거리다 재민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물론 그 상대가 남자에다 배우 나재민이라는 얘기는 쏙 빼놓고. 방송하는 사람이라고? 내가 알 수도 있겠네. 어... 그렇지. 대충 얼버무리자 인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성이 인준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서 요지는... 원래 친한 사람한테 이런 기분이 드는 거야? 못 온다고 하면 서운하고, 아쉽고, 아주 조금은 밉기도 하고...?"

 

"지성아. 내 생각엔 너는 답을 너무 잘 알고 있어."

 

"응?"

 

"우리 학교 다닐 때 생각해 봐. 너 내가 만나자고 한 뒤에 사정 생겨서 못 간다고 하면 뭐라고 했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대신 나중에 밥 사라고 하고."

 

"봐봐."

 

 

 

그런 건가...? 그럼 나한테 재민이 형은 뭐야?

 

 

 

"지성아, 잘 생각해 봐. 너 글 쓰는 사람이잖아. 우리 같은 사람은 감정을 아주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어. 다만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 하는 것 뿐이지."

 

"..."

 

"그리고 솔직히 네가 얘기한 것들. 너한테 엄청 다정하게 구는 거. 아무리 천성이 다정한 사람이어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아. 다정에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거든."

 

"..."

 

"사실 지성이도 알고 있잖아? 그 분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재민의 다정과 친절에 젖어갈수록, 재민과 떨어져 있는 시간은 그의 부재를 더더욱 실감하게 만들었다. 재민이 보고 싶어 집안에 커피 원두를 갈아가면서까지 재민의 향이 진동하게 만들어놨다. 홀로 글을 쓰고 있자 하면 가끔은 글에서 외로움이 묻어났다. 쓰는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더욱 어려운 것은 자꾸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재민이 저에게 보여주는 표정과 행동들이 지성이 묻어뒀던 한 줄기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인준이 새벽 세 시가 넘어서 술기운에 먼저 뻗었을 때도 지성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인준이 형 말대로 답을 알 것 같지만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감정을 인정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떤 관계가 되는 걸까? 뭐라고 정의내리게 될까?

 

 

 

 

 

*

 

 

 

 

 

인준과 만난 뒤로 지성은 마음이 뒤죽박죽이었다. 매 순간이 고민의 연속이었다. 정말 쉬지 않고 재민과 연락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착각할 만하지 않아? 이성은 합리화라고 외쳤지만 감정은 제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지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전날 밤 암막커튼을 제대로 닫지 않았는지 아침 햇살이 눈을 간질여서 평소보다 눈이 일찍 떠졌고, 아침부터 심란하지도 않았으며, 일어난 김에 청소나 해볼까 하면서 커피 원두를 새로 갈았고, 고요한 중에 혼자 그러고 있자니 심심한 것 같아 티비를 틀었다.

 

지성은 평소에도 시끌벅적한 예능프로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서 티비를 틀자마자 흘러나오는 것은 뉴스였다. 워낙 인터넷과 같은 문명세계와는 동떨어져 사는 지성이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뉴스 듣겠나 싶어 채널을 고정했다. 작은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자 집안에 퍼지는 고소한 커피 원두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 재민이형 냄새. 형은 뭐하고 있으려나. 오늘도 촬영이겠지?

 

드라마 촬영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이제 몇 회를 남겨놓지 않은 상황이라 밤샘촬영이 많다고 했었다. 밤새면서 하는 촬영이라니 너무 힘들겠다... 지성이 생각했다.

 

 

 

'...속보입니다.'

 

 

 

자주 듣는 단어지만 어쩐지 그날따라 그 단어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배우 나재민 씨과 현재 드라마를 촬영 중인 배우 xxx양의 열애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응?

 

 

 

'한 기사에 따르면, 나재민 씨와 xxx양이 자동차에서 데이트를 하는 정황이 포착되었고...'

 

 

 

열애설?

 

 

 

'... 각 소속사는 확인 중이라며 정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방영하고 있는 로맨스코미디 드라마의 메인 커플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대중들은...'

 

 

 

자료화면으로 뉴스에 사진이 뜨자 심장 한구석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재민이 형인데. 형이 왜 저기 있어?

 

아니, 있을 수 있... 지.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히면서 답답해지는 기분에 지성이 리모콘을 찾아 채널을 돌렸다. 그러나 어느 뉴스를 틀어도 재민의 열애설이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티비 속에서 그저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는 저 얼굴을 계속 마주 보고 싶지 않아 그냥 티비를 꺼버렸다.

 

유일하게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집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침울해진 채 조용히 소파에 앉아 온몸을 웅크리고 있던 지성이 뭔가가 얼굴에 흐르자 손으로 닦아냈다. 눈물이네. 갑자기 새어 나오는 눈물에 지성이 당황했다.

 

뭐야, 나 왜 울어. 형이 연애할 수도 있지.

 

...그럴 수 있지.

 

그럼 나한테 잘해주면 안되는 거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어디까지 생각했는데. 아직 내가 무슨 마음인지 말도 못 꺼내 봤는데. 이렇게 끝난 거야?

 

평소에는 잘만 울어대던 핸드폰을 노려봤다. 틈만 나면 '재민형'으로 도배되던 화면이 아무 연락도 없이 잠잠했다.

 

형도 지금 핸드폰에 불 났겠지. 주변에서 다 연락할 거 아니야. 흐르는 눈물을 닦고는 널뛰는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지성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아직 연락이 안 온 거야. 기다려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소파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지성이 그만 깜빡 잠에 들었다. 잠을 얕게 들었는지 지성은 꿈을 꾸고 있었다. 멀리서 재민이형이 드라마를 같이 찍는다던 여자주인공과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성아! 재민이 지성을 불렀다. 별로 가고 싶진 않았지만 부르는데 모르는 채 할 수도 없어 지성이 쭈뼛쭈뼛 다가갔다. 아, 내가 아끼는 동생이야. 재민이 상대에게 지성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지성이 어색하게 말했다. 지성아, 여긴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안녕하세요, 지성씨. 여자가 웃으며 지성에게 인사했다. 사랑하는 사람? 그 말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지성이었다. 갑자기 저 둘이 붙잡고 있는 손을 갈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지성이 재민을 쳐다보자 거짓말처럼 여자가 사라지고 재민이 지성을 쳐다봤다. 지성아. 왜 네가 화내는 거야. 네? 지성이 되묻자 재민이 물었다. 화낼 이유가 있어?

 

그 질문에 지성이 말문이 턱 막힌 채 아무 말 못 하자 재민이 처음 보는 차가운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형, 가지 마요. 지성이 조그만 목소리로 겨우겨우 내뱉었다. 그래도 재민은 지성에게 등을 돌린 채 멀어져만 갔다. 형, 제발요. 가지 마요. 네? 따라가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바닥에 딱 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 발을 움찔거리며 애타게 재민을 부르기만 하다 지성이 번뜩 잠에서 깼다. 눈에서는 눈물이 잔뜩 흐른 채였다.

 

나만 좋아했어, 나만... 지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요 속에서 지성이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다. 그래도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주륵주륵 새어 나왔다. 나 어떡해.

 

장밋빛 미래가 나락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재민은 부산스럽게 쳇바퀴 돌듯 거실을 걸어 다녔다. 몇 바퀴인지 셀 수도 없었다. 이미 버석해진 얼굴과 퀭한 눈이 지금 그가 얼마나 예민한지 말해주고 있었다. 재민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널찍한 집에 재민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있었다. 핸드폰은 연락이 너무 많이 와서 먹통이 된 지 오래였다. 소속사 또한 물 밀듯 밀려오는 연락들에 전화선을 끊어버렸다고 했다. 재민아, 어디 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라. 지금 너희 집 앞에 기자들 쫙 깔렸어. 소속사 사장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이었다. 그건 커튼 너머 창문을 흘끔 내려다보기만 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전국민에게 주소 다 털렸네. 이사를 가던가 해야지... 재민이 입안으로 욕을 씹어댔다.

 

열애설 기사가 나자마자 혹시나 해서 만들어놨던 투폰으로 지성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어...' 지성에게 전화를 걸면 종종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지성은 핸드폰 충전하는 걸 까먹고 잘 안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게 하필 지금이라니.

 

초조해진 재민이 입술을 씹었다. 다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들리는 내용은 똑같았다.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일인데 어쩐지 기분이 싸했다. 지성이 원래 핸드폰 잘 안 보니까, 아직 모를 거야. 이 시간이면 자고 있을 수도 있고.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조금이나마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때 틀어만 놓고 있던 뉴스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나재민 씨와 xxx 양의 각 소속사가 열애설을 인정했습니다. 양측은 진지한 만남을 가진 지는 오래되지 않았으며 아직 조심스럽게 서로 알아가는 단계라고...'

 

 

 

뭐?

 

 

 

재민이 곧바로 소속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는 알고 있었다는 듯 금방 전화를 받았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아요? 인정?"

 

"재민아. 어쩔 수 없었어."

 

"왜죠? 지금 그 사진도 주작인 거 저도 대표님도 그쪽도 다 알잖아요."

 

"...그쪽에서 사진을 하나 보냈어. 너 요즘 만나고 다니는 작가 한 명 있지?"

 

"...걔가 왜요."

 

 

 

불현듯 재민은 한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기분 나쁜 예감.

 

 

 

"너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네?"

 

"네가 걔한테 키스하는 게 찍혔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씨발... 재민의 입에서 육성으로 욕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지금 그 사진으로 저한테 협박을 하는 건가요?"

 

"그거 터뜨리면 너 배우생활 더 못할 수도 있어. 그쪽에서도 인지도 높이고 이미지도 좋게 만들 겸 머리 쓴 거겠지. 대중들에게 너랑 비슷한 급이라고 인식시킬 수 있으니까. 그래도 사진 원본은 받아놨고, 이번만 잘 넘기면 된다."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누굴 건드려?"

 

 

 

재민이 숨을 한 번 내쉬었다. 피가 차갑게 식으면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장은 우리가 가진 게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재민아."

 

 

 

사장의 변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일은 터졌으니까. 재민은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민 상태였다. 끊었던 담배가 오랜만에 땡겼다. 이 상도덕없는 새끼들을 어떻게 족치지?

 

 

 

"우선 사진 원본파일 지금 보냈으니까 봐. 얼굴이 누가 봐도 너라서 나가는 거 막을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그냥 인정하기로 합의보고 사진만 빼 왔다."

 

 

 

재민의 냉랭한 분위기는 전화상으로도 느껴졌다. 그 와중에 재민의 목소리에서는 여유가 있었다. 역시, 이놈은 거물이야. 적으로 두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런데요, 사장님."

 

 

 

재민이 웃음기를 띠곤 말했다. 당장 재민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사장은 눈에 훤히 보였다. 정말 빡쳤을 때 재민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 사장은 순간 오금이 저려왔지만 그나마 재민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걸 결정하실 때는 당사자와 논의를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정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어차피 별다른 방도도 없잖아."

 

"..."

 

 

 

변명은 궁금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얘기가 길어지기 전에 재민은 전화를 끊었다. 더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재민은 열애설이 나는 건 상관없었다. 이용당했다면 그만큼 몇 배로 돌려주면 되니까. 걱정되는 쪽이라고 하면 지성이었다. 지성은 마음이 여리고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

 

 

 

그래봤자 나랑 지성이 사이는 달라질 게 없다. 재민의 결론이었다. 어차피 이게 가짜인 거 나도 지성이도 알고 있으니까. 당분간 좆같은 인형놀이 대강 맞춰주는 척 해야겠군.

 

굉장히 불쾌하긴 해도 당장은 한 수를 내어주게 되었다. 빛이 사라진 눈으로 재민이 생각에 잠겼다.

 

 

 

 

 

*

 

 

 

 

 

지성은 혼자서 울다 지쳐 잠들고 다시 깨고 하는 걸 해가 질 때까지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는 남아있던 햇빛마저 사라지고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자꾸 얕게 잠드는 걸 반복하다 이번은 그나마 푹 잠들었던 지성이 멍하니 티비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검은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 별생각 없이 옆에 있던 리모콘의 전원 버튼을 눌러 티비를 틀었다.

 

아까가 꿈이었던 건지 별 영양가 없는 내용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바탕 난리 치던 시간이 지나간 건가... 지성이 채널을 몇 번 돌리자 한 채널에서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그리고 자막에 보이는 열애설 '인정'.

 

 

 

인정...?

 

 

 

지성이 급하게 볼륨을 높였다. 앵커는 양 측이 열애설을 인정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짧게 전했다. 인정했구나... 그럼 진짜 사귀는 거 맞나보네. 뉴스를 처음 들었을 때는 충격적이긴 했지만 사실 마음 한 구석에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비록 열애설만으로도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지만 만약 열애설을 부정하면 진심으로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정했다니. 지성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잔뜩 울어 눈이 부었고 많이 울어서 피곤했다. 표정은 반쯤 넋이 나가 공허했다. 지성이 아무도 듣지 않는 텅 빈 거실에서 화면에 대고 기계적으로 말했다. 잘 어울린다. 축하해요, 형.

 

 

 

 

 

*

 

 

 

 

 

하여튼 끈질긴 새끼들... 재민이 중얼거리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 열애설이 터지고 난 뒤 대략 40시간 후 재민은 몰래 차를 타고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던 차가 있어 그걸 몰았다. 시간은 새벽 두 시쯤. 날짜상으론 열애설이 터진 지 이틀이 지난 뒤인지라 첫날보다는 집 앞이 비교적 한산해졌다. 그래봤자 '비교적'이지만. 어쨌든 무사히 집을 빠져나온 재민은 곧바로 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눈치 까고 따라붙는 놈들이 몇 있어 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집 밖에 나오지 않고 일주일은 박혀 있는 게 건수 안 주고 제일 좋았지만, 지성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첫날에는 그래도 아직 핸드폰을 충전 안 했나보다, 하고 행복회로를 돌렸지만 이틀째부터는 불안해졌다. 지금까지도 뉴스를 보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결국 삼 일째가 되는 날 탈출을 감행해 지성의 집으로 왔다.

 

초인종을 누르고는 혹시 자기인 걸 모를까 봐 지성을 불렀다. 지성아. 지성아?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집 안에서 나오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점점 초조해지는 재민이 입술을 뜯었다. 아, 지성이가 하지 말랬는데. 문 앞에서 기다리는 그 잠깐의 시간이 영겁같이 느껴졌다. 결국 손톱만큼 남아있던 여유가 사라진 재민이 지성이 일전에 줬던 복사키로 문을 땄다. 그냥 내가 열어버려서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지성이 벌써 자고 있을까?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인 거실은 텅 비어있었다. 놓여있던 가구들이 다 사라져 온 집안이 휑했다.

 

 

 

지성아?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재민이 지성을 불렀다. 대답이 없을 걸 아는데도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성아. 지성아? 지성아!

 

 

 

미친놈처럼 지성의 이름만 불러대면서 고작 하나밖에 없는 방도 들어가 봤다.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싹 사라져있었다. 이게 뭐지? 입술을 비집고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성아. 재민이 다시 불렀다. 실체가 있는 건 다 없어졌는데 지성이 매번 달고 다니던 커피 향만 은은하게 남아 지성이 이곳에 있었다는 걸 알렸다. 무섭도록 현실적이었다. 황망하게 주위를 돌아보니 재민은 텅 빈 거실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릿속이 온통 하얬다.

 

 

 

 

 

*

 

 

 

 

 

"고생하셨습니다!"

 

 

 

스텝들이 꾸벅 인사를 하자 재민도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어요.

 

 

 

"삼 년 만에 하시는 작품활동인데도 전혀 공백기가 보이지 않으시네요. 오히려 감정의 농도가 더 깊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런가요."

 

 

 

재민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독은 계속해서 재민에게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감사합니다. 재민이 가볍게 목례하고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오랜만의 촬영이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첫 촬영을 할 때는 정말 간만에 신인의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다행히 같이 하는 사람들 모두 괜찮아 보였다. 정신없이 지냈더니 벌써 내일이면 제작발표회였다.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시던데요. 커피 여깄습니다."

 

 

 

새로 들어온 매니저는 재민의 눈치를 꽤 보는 편이었다. 사실 재민의 연차 정도면 그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 더 드물었지만, 유독 눈치를 보면서도 또 빠릿빠릿하게 일을 해내는 편이어서 재민은 만족하고 있었다. 촬영장에 오는 것도 어색할 정도로 일을 쉬었는데 매니저가 제 할 일을 다 제대로 해서 재민이 편안하게 임할 수 있었다.

 

 

 

"매니저님이 보시기에도 그랬나요?"

 

"네. 어제 일찍 주무셨나봐요."

 

"그렇진 않았는데. 하하."

 

 

 

삼 년 전 그 일 이후 재민은 주변 사람을 고르는 데 더욱 까다로워졌다. 비록 열애설은 오보로 마무리되었고 상대는 재민이 손 쓴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티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재민에게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버린 관계가 있었다. 지성이 없으니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겠지만, 재민은 그런 일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푹 쉬세요. 내일 제작발표회 있으니까요, 아침에 오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주차장에서 내린 재민이 아파트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사생활을 중시하는 그를 아는지라 매니저는 재빠르게 차를 몰아 주차장을 벗어났다. 재민은 이사를 한 뒤 매니저를 비롯해 소속사 측에도 정확하게 본인이 어디에 사는지 알리지 않았다. 애초에 이러한 조건들을 미리 다 내세운 뒤 재계약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재민이 아무리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해도 그를 데려오고 싶어 하는 소속사는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사장도 재민도 알고 있었다.

 

역시 열애설 때 미운털 박힌 게 분명해... 사장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은 재민의 열애설 인정 기사를 내보낸 것이었다. 재민은 확실히 그때 이후로 많이 달라졌다. 나사 빠진 채 뭘 잃은 사람처럼 굴었다. 웃는 일도 거의 없었고 다정이 줄었으며 세상에 흥미를 잃은 사람 같았다. 작품활동 할 마음 없다는 소리를 삼 년이나 했다. 이러다 우리 회사 상장폐지되겠어, 재민아! 네가 회사 기둥인데 우리 다 굶어죽게 생겼다. 사장이 눈물바람으로 호소하자 재민이 그제서야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알겠다고 했다.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지만 사장은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 작가 양반 때문인 게 확실해... 하루가 멀다하고 연락하고 만나던 그 양반을 열애설 이후로 한 번도 만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재민 몰래 지성의 소식을 찾아봤지만 지성은 자취를 꽁꽁 감춰버렸다. 그 이후로 사장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은 워렌 버핏이 아니라 그 작가양반이 되었다. 만나면 무릎 꿇을 생각까지도 했다. 우리 나재민이 좀 살려주이소. 그러나 지성이 어디서 지내는지 알 도리가 없었고 사장도 점차 체념한 채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

 

 

 

 

 

간만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스케줄을 진행했더니 역시 평소보다 조금 피곤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작발표회가 끝나고 다른 배우들과 스텝들에게 먼저 인사를 한 재민이 서둘러 빠져나왔다. 매니저도 그를 따라 잽싸게 나와서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고생하셨어요. 이렇게 좀 피곤한 날이면 재민이 커피와 함께 아이스초코를 찾는 것을 매니저는 알고 있었다.

 

 

 

"옆에 아이스초코 있습니다."

 

"아, 고마워요."

 

 

 

재민이 약간은 지친 기색이 묻어나는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입 마시자 아주 달달한 초코가 목으로 넘어왔다. 사실 재민은 이런 때에 단 걸 찾기보단 아메리카노에 샷을 더 추가해 먹는 편이었지만, 꼭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그냥 아이스초코를 마시는 걸로 외로움을 달랬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재민이 고개를 들어 백미러로 저를 바라보는 매니저와 눈을 맞췄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작가님... 오늘 신간이 나왔더라고요."

 

"신간이요?"

 

"네. 전혀 소문이 없었던 걸로 봐서는 비밀리에 작업한 것 같습니다."

 

"...그럼 먼저 서점으로 좀 가줄래요?"

 

 

 

 

 

책을 사서 집에 돌아올 때 까지도 서점에서 보았던 책 소개 문구가 잊히질 않았다. '자전적 이야기처럼 생생한 박지성 작가의 첫 순정소설.' 그리고 눈을 의심했던 책 제목을 다시 확인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J에게.

 

 

 

우선 사 오긴 했지만 책을 펼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재민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결국 미루고 미루다 담배를 찾아 피웠다. 세 개비가 남아있던 것을 다 피워버려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었다. 재민은 그제서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던 책에 다가갔다.

 

 

 

"하아...."

 

 

 

재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호흡을 하고는 의자에 앉아 책장을 펼쳤다.

 

 

 

나의 처음, 나의 나락,

 

J에게.

 

 

 

첫 소개글부터 재민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지성아.

 

오랫동안 금기어처럼 묻어뒀던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1부는 비교적 행복한 이야기였다. 주인공이 J를 만나고, J에게 사랑을 배우며, 또 작가 지망생으로서 글을 쓰면서 J에게 많은 도움을 얻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주인공과 J, 둘의 성별은 나와 있지 않았다. 1부에서 둘은 참으로 풋풋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설레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2부는 1부와는 절단된 듯 전혀 다른 분위기로 이별한 뒤의 상황을 다루고 있었다. 재민은 1부를 읽는 동안에도 계속 울었는데, 2부부터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우느라 읽는 게 힘들 지경이 되어버렸다. 자꾸 눈물이 시야를 가렸지만 재민은 휴지 한 통을 다 써가면서도 2부를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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